00369 천계(天界) =========================================================================
마왕.
그것이 바로 제갈사에게서 들었던 벽지상의 진실이었다. 벽지상은 내 말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나를 응시했는데, 나는 그 시선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저 눈빛에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이 한없이 거세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백련교주보다도 감정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으며 그저 눈 앞의 현상을 관조할 뿐이라는 게 느껴졌다.
절대자의 시선!
'벽지상'이라고 불리던 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魂)이 공존하는 상태는 보기 불편하군. 임시육체를 마련해 주지."
"뭐?"
벽지상이 손가락으로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쿠르릉
그 순간, 내 내면에서 새하얀 영기가 빠져나갔고 바닥에서 질척거리는 진흙이 솟아올랐다. 진흙은 이윽고 인형(人形)을 이루었고, 천천히 조감되면서 구체적인 외형을 만들었다. 그 조형이 다 끝났을 때는 제갈사 생전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고, 진흙이 후두둑 떨어지며 놀랍게도 살갗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윽고 제갈사는 임시육체에서 눈을 떴다. 진흙에서 단번에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육체 그 자체였는데, 지금은 바닥의 진흙이 모여서 인간형상을 만든 게 아닌가?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술법이었다. 제갈사는 씩 웃으며 벽지상에게 말했다.
"이렇게 힘을 써도 되나? 아까울텐데."
"너희 상태는 처음 보는 기이한 것. 이 정도쯤이야..."
벽지상은 가볍게 대꾸하곤 내게 말했다.
"그렇다. 내가 배화교의 초대 교주이다."
"으음."
"마왕이라... 그 표현도 마음에 드는군."
벽지상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졌다.
제갈사의 말로는 - 도왕 벽지상이라는 건 그저 겉으로 사용하는 인간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 정체는 배화교의 초대 교주로서, 제갈사에게 사법(邪法)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또한 머나먼 고대에 거대한 공양의식을 이용해서 승천(昇天)하여 하위마신인 마왕(魔王)이 된 인외(人外)의 존재가 바로 그라는 것이다.
서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특히 마도계열에서 그의 본명은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으로 보고도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제갈사의 영혼을 가볍게 빼내고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낸 건 엄청난 술법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눈 앞에 있는 게 무려 2천년 이상 살아오며 문명의 초창기부터 존재해 왔던 괴물이라는 걸 믿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벽지상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너희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나와의 계약을 이어나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계약!
그 말이 나오자 제갈사가 대꾸했다.
"어떤 형식인지가 중요하지. 이 임시육체를 영구지속시켜줄 수 있다면 기존의 방식으로 하는 게 좋겠지만, 그건 아닐테지."
"그렇다. 그 육체는 길어도 하루면 사라진다. 그 후엔 원래대로 혼이 공유되겠지."
제갈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크크... 당신의 권능이면 영구지속도 가능할텐데 수전노같군."
"제물을 바쳐라."
담담하게 대꾸하는 벽지상의 말에서 나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 제물을 바쳐라. 그게 기본이다.]
망량선사를 비롯해서 온갖 신들이 요구했던 기본사항. 그것은 바로 제물(祭物)을 공양하는 것! 신들에게서 가호나 축복을 얻을 때 가장 근본이 되는 절차였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신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눈 앞의 벽지상이 신적인 존재이거나 거기에 가깝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제물은 됐어. 어차피 대체할 육체는 만들 수 있다. 그보다 계약을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현 배교 교주 자리는 이 백웅에게 주는 걸로."
"어?"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놀라서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네놈이 배교교주로서 사후에 벽지상의 부하가 된다는 계약 아니었어? 왜 그걸 나한테 줘?"
그랬다. 제갈사 왈, 자신이 벽지상과 맺은 계약은 바로 죽은 후에 벽지상 휘하로 들어가서 그를 위해서 일한다는 계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계약의 확립은 바로 다음 정초까지 제갈사가 확답을 주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변황까지 오지 않는다면 계약의 유실로 간주하고 벽지상이 나를 죽이러 오는 전개가 된다. 왜냐하면 계약을 이행할 의지가 없을 경우 벽지상이 배교교주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불어넣은 권능을 회수해 가야하기 때문이다.
덤터기때문에 죽기 싫어서 억지로 변황까지 고생하며 왔건만 이제와서 제갈사가 배교교주 자리를 내게 넘긴다니? 나는 눈 앞의 제갈사가 내 뒷통수를 쳤나 싶어서 머리가 띵해졌지만 제갈사가 내게 핀잔을 줬다.
"멍청한 놈. 떠먹여줘도 지랄인가?"
"뭐?"
"배교 교주가 되어야 네놈이 교주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로 이혼대법을 빨리 수련할 수 있을 거 아니냐. 정말로 이혼대법을 네놈 재능으로 수련하려고 했던 거냐...?"
"......"
속에서 욱하는 게 치솟아 올랐지만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특혜라고?"
제갈사가 갑자기 벽지상에게 존댓말을 썼다.
"계약이행자가 바뀌었으니 백웅에게 계약을 설명해 주시지요."
"진심인가 보군."
벽지상은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백웅.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기 배교 교주는 내 권능과 마력을 사역할 수 있으며 마도(魔道)와 술법의 재능을 향상받는다. 또한 배교교주에게만 전해지는 술수를 사용가능하다. 대신 배교교주의 사후, 그 영혼은 내게 귀속되어 나를 위해 일하게 된다."
"윽..."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생에 강력한 힘과 권능을 부여하는 대신, 사후에는 사신(邪神)의 노예가 되는 고약한 계약이 아닌가? 내가 뭐라고 외치려고 할 때 제갈사가 말했다.
"그 계약을 약간 바꾸지요. 귀속되는 건 백웅의 영혼이 아니라 내 것으로."
"그래도 괜찮나?"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물론입니다. 어차피 당신의 목적은 상위 [옛 지배자]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만의 만신전(萬神殿)을 만드는 거잖습니까? 저런 멍청이보다는 제가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
둘이서 나를 바보취급했지만 나는 뭐라고 끼어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제갈사는 좋은 조건을 내게만 넘겨주고 자신이 사후에 사신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제갈사. 무슨 생각이냐?"
"무슨 생각이냐니?"
"네놈은 절대 나 좋을 일만 해줄 놈이 아니야. 무슨 속셈인지 말해!"
내가 버럭 소리 지르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생사에 미련은 없었다. 그리고 네놈의 기억을 읽은 후 이 생에 더더욱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 그렇다면 네놈에게 마음의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착각하지 마라."
나는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빚이라... 내가 그걸 무시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자 제갈사는 킬킬 웃었다.
"네놈이 그렇게 약은 놈이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진작에 어딘가의 패주가 되어서 삼처사첩에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을까? 받은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같잖은 행동양식이 네놈의 정체성이란 걸 알고 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이야..."
"......"
"선택은 네 몫이다. 어떻게 할테냐 백웅?"
나는 고민했다. 벽지상과 제갈사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대로는 계약을 진행할 수 없어!"
벽지상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내게 닿였다.
"무슨 뜻이지?"
"나는 벽지상 당신이 마왕이라고 불릴 존재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정말로 그만한 존재라면 당신의 힘이 어떤 것인지 내게 보여줘! 그래야 믿을 수가 있다."
내 말에 벽지상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렵지 않다. 뭘 어떻게 보여줄까?"
"그건..."
내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제갈사가 급히 내게 전음을 보냈다.
[ 멍청한 자식! 집어쳐!]
[ 뭐?]
[ 저 존재가 천계의 대라신선처럼 인간에게 호의적인 줄 아느냐? 방황하는 유대인조차 두려워했던, 타락한 영지주의의 수장이? 이단의 왕으로서 수백만 명을 학살했던 괴물이?]
제갈사가 거세게 의지를 표했다.
[ 인간이 마도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른 게 눈 앞의 존재다. 네놈의 일거수일투족과 한마디 한마디가 모조리 참혹한 대가를 필요로 한다! 어설픈 개소리를 할거면 집어치워! 정말로 영겁토록 노예가 되는수가 있으니까!!]
"......"
[ 지금 넌 인과율을 발동시켰어!]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벽지상의 본질은 무시무시한 악신(惡神)인 듯 했다. 잘못 얘기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확률이 큰 것이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아니 됐소."
인과율이라는 단어가 겁이 났다.
"그럼 계약을 진행할까?"
"그랬으면 좋겠소."
나는 일단 제갈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쩐지 휘둘리는 느낌도 들었지만, 왠지 눈 앞의 벽지상을 잘못 대하면 큰일날 거라는 안좋은 예감이 더 큰 것이다. 제갈사를 소악(小惡)이라고 하면 벽지상은 형용할 수 없는 거악(巨惡)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벽지상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믿지 못하는 것도 꽤 불쾌한 일이지. 정 원한다면 내가 나라는 증거를 보여주겠다."
제갈사가 황급히 외쳤다.
"됐소! 그만두십시오!"
쿠르르르...
"헉!"
갑자기 벽지상의 형태가 흩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인간은 없었던 것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몸뚱이를 이루고 있던 시꺼먼 입자가 서서히 강물처럼 흘러서 제단으로 향했다.
불경한 어둠의 주문이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그게 인간이 발음할 수 없는 언어라는 걸 직감했고, 도리어 이족(異族)의 언어에 가깝다는 걸 알아챘다.
서서히 어둠이 짙어지며, 농도 깊은 마기(魔氣)가 공간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그 어둠 속에서 '벽지상'으로 불렸던 어둠의 존재가 뇌까리는 게 들렸다.
[ 기천의 자손을 거느린 숲의 검은 암컷 염소시여... 들어주시옵소서...]
불길한 암송이 이어졌다.
그건 분명한 이족의 주문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똑바로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 다산과 풍요의 힘을 이 땅에 내리소서.]
파아앗 -
거대한 어둠의 빛이 회오리치며 신전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 그 어둠은 잦아들었고, 나는 난데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공유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는 신적인 힘이었다.
오오오오오
변황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대지가 원야(元夜)에 먹히기 시작하는 게 높은 천공에서 보였다. 황량한 고원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거기에는 시꺼먼 어둠이 돋아났다. 마(魔)의 씨앗이 움트면서 괴생물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것들 하나하나는 탐욕스럽게 대지의 기운을 먹어치웠다.
세계가 어두워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암천(暗天) 속에서 불경한 저주가 흘러나왔다.
쿠구궁
지진과 함께 지각변동이 온 변황 일대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수천 리에 이르는 광대한 대지가 마(魔)의 권역이 되며 울부짖고 있었다. 심지어 어둠의 권속들이 저절로 움트면서 생장하는 것조차 느껴졌다.
이 곳은 이미 인간의 땅이 아니다. 대자연은 그 힘을 상실하고 위대한 존재의 일부로 흡수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사가 나에게 짜증을 내듯 외쳤다.
"빌어먹을 새끼! 눈에 보이는 걸 전부라 생각하나? 외신(外神)의 주문을 영창할 수 있는 게 어떻게 인간이야?! 저게 바로 마도의 극에 달한 존재, 마왕이야!"
제갈사가 갑자기 말했다.
"@&$^&@여! 산양의 주문을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심연의 군주를 부르겠다!!"
제갈사가 벽지상을 지칭하는 호칭은 이상한 단어였다. 아마도 저 어둠의 진명(眞名)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협박은 먹혀들었는지, 시야공유가 풀리면서 거대한 어둠이 되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변황의 수천 리 대지를 먹어치우고 있던 원야가 풀리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으...
어느 새 눈 앞에는 다시 벽지상의 인간 모습이 서 있었다. 원래처럼 표정 없는 냉미녀였지만, 나는 더 이상 눈 앞에 있는 걸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인간 모습을 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유희삼아서 인간의 몸뚱이를 만들었을 뿐, 저 본질은 이미 [옛 지배자]에 한없이 다가가 있는 마도의 왕인 것이다. 백련교주나 십이율주조차도 눈 앞의 괴물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벽지상이 억양없이 말했다.
"겁도 없군. 감히 내 앞에서 고대 신을 언급하다니."
제갈사는 어느 새 자신의 손 위에 핏물로 고대신의 표식, 오망성을 그려놓은 상태였다. 아마도 벽지상은 그 오망성을 느끼고 주문의 전개를 멈춘 듯 했다. 제갈사는 전에없이 긴장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겁이 없군. 다른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역을 침범한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외신(外神) 검은 산양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존재는 거의 없다. 너처럼 건방지게 고대신을 운운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크크크! 환염의 정령신을 모시는 척 하다가 줄을 바꿔타다니 참..."
벽지상은 제갈사의 조소에 반응하지 않고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 거지? 계약을 하겠나?"
"하겠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아챘다.
' 거절하면 죽어.'
계약을 하지 않는 순간, 나와 제갈사는 마왕 벽지상에게 쓸모없는 인간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행사를 방해한 댓가로 무시무시한 저주와 마술을 퍼부어서 고통을 줄 것이다.
내가 칠요를 다 모으지 않는 한, 외신의 힘까지 다룰 수 있는 하위 [옛 지배자]를 상대로 어떻게 저항해볼 방법은 없다. 처참하게 죽고싶지 않으면 일단 그와 상호보완 관계를 쌓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후 벽지상은 계약을 성사시킨 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보자."
휘익!
벽지상은 아까처럼 검은 가루로 흩날려서 사라졌다. 저런 건 결코 신법이나 경공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이족의 힘인 마법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 나중에... 라는 건 죽은 후를 말하는 거겠지.'
여러 모로 찝찝한 이별이다. 벽지상이 사라진 후 제갈사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곧 이 육체도 사라지겠군. 그 전에 교주의 권능을 제대로 받았는지나 알아볼까."
"축복을 받았다지만 실감이 안 나는데."
그러자 제갈사가 자신의 이마를 들이대며 말했다.
"백(魄)을 빼내 봐라."
나는 그의 말대로 백을 빼내는 수법을 시전해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버벅대던 것과는 달리, 한번에 쫙 하고 백의 동력이 느껴지며 손쉽게 뽑혀 나왔다. 굉장히 나아진 운용인지라 내가 내심 놀라고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배교의 역대교주는 모두 저 존재에게 이용당하는 처지였지. 그래서 빨리 강해져서 신도를 모으고 제물을 모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재능을 향상받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군."
약간 이해가 간다. 벽지상은 태초시절부터 존재하는 마도사로서 사이비종교인 배화교를 창설했고, 그럴듯한 교리를 만들어서 전파시킨 것이다.
' 극악 그자체군.'
그리고 배교 교주들이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얻어오면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옛 지배자]에게 공물을 바쳐서 자신의 힘을 축적시켰으리라. 그렇게 수천 년이나 힘을 모은 결과 결국 외신과 계약하여 인간을 버리고 악신의 반열에 오른 게 분명하다. 벽지상이야말로 이름없는 거악 그 자체였다.
"이제 네놈의 병신같은 재능도 조금은 나아졌겠지."
나는 대꾸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저 벽지상은 인간으로서 마신이 된 거잖아? 그러면 봉선의식으로 암천향에 건너간 진시황이나 측천무후와 동급인 건가?"
"그런 셈이지. 차이가 있다면 계약을 한 [옛 지배자]의 격이지만."
후두둑
제갈사의 몸뚱이가 서서히 생기를 잃고 진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제갈사의 몸이 흩어지며 그의 영혼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서 공존하기 시작했다.
[ 이걸로 이혼대법 수련에 이백 년 걸릴 게 삼십 년 정도로 줄어들었군. 공양의식에서 제물을 바치면 십 년까지 줄일 수도 있겠어.]
"......"
놀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짜증을 내기도 전에 제갈사가 말했다.
[ 뭐하냐? 시간낭비할 거 없어. 당장 사불상을 불러서 칠살마을로 가라고.]
"뭐?"
이어진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어졌다.
[ 이청운을 되살려야 할 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