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8 천계(天界) =========================================================================
백련교 본단에 복귀하자 교주 대신에 원로원의 고수 중 한 명이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동(小童)의 모습이었는데 외견상의 나이는 현재의 내 육체와 그리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로(一老)요. 교주의 명을 호법사자께 전달하러 왔소."
삼로와 이름이 연관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의형제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반로환동한 고수, 일로는 말을 이었다.
"우선 명을 전하기 전에 토벌경과를 듣고 싶소."
"그러지요."
나는 일로에게 이족 토벌을 가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일로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임무를 성공했다니 다행이오."
"운이 좋았소."
"그럼 교주의 명을 전달하겠소. 호법사자는 당분간 호출할 때까지 자율수련을 하라는 명이시오."
"......"
"그리고 임무를 성공하였으니 숙소에 은상이 제공될 것이오. 수고하셨소."
또냐!
또 자율수련이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은상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의 명령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교... 교주께선 왜 그런 명을 내리신 거지?"
"폐관수련 중이시라 그렇소."
"폐관수련?"
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원로원은 교주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소. 다만 그대가 교주의 제자이기에 언질을 드리는 것이오. 부디 기밀을 누설치 마시오."
"알겠소."
나는 물러나와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자 수십 명의 하인들이 몇 대의 마차를 끌고 와서 내 숙소의 한켠에 짐을 쌓기 시작했다. 그 물건들을 자세히 보니, 호화스러운 내장설비는 물론이고 금은보화와 귀한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부호의 뺨을 때릴 정도의 부귀스러운 물품이 다 쌓이기까지는 약 한 시진이 걸렸다.
나는 보물들을 쳐다보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 대체 이게 무슨 바보짓인가.'
교주가 내게 포상을 주면서 자율수련을 명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장삼봉의 칠대절학을 아직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폐관수련을 하기 위해서이다. 장삼봉의 칠대절학이 천하일절급의 절세무공이란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소청은 한 달만에 웬만큼 소화를 하고는 삼보절기를 재창조했으며, 검마도 대략 한 달 정도면 절학을 알아서 수련할 정도로 응용단계에 접어들곤 했다. 교주는 반면에 내가 일조일석으로 구결을 알려주면서 해석도 몇 번이나 반복해 주기를 무려 두세 달이나 했는데 아직도 흡수에 골몰하는 것이다.
내가 내심 실망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했다.
[ 쉽게 생각해라. 백련교주의 재능이 진소청에 미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심지어 검마에 비해서 떨어질지도 모르지.]
[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그는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인데, 최고의 재능이 아닌데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거냐.]
[ 내게 따지지 마라. 실제로 그렇잖냐. 그리고 진소청과 검마의 재능은 전 중원을 통틀어서 최고의 수준이라는 것도 감안해라.]
[ ......]
[ 나라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거다.]
[ 다른 관점?]
제갈사는 킬킬 웃더니 말했다.
[ 아무튼 잘 됐군. 너는 자율수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교 밖으로 나가버려라. 교주 본인이 폐관수련인 상태에서는 감시의 이목도 약해질테니 그 틈에 돌아다니면 그만이다.]
[ 그래야겠군.]
나는 그 날 편하게 쉬면서 몸의 피로를 푼 후, 다음 날 새벽에 사불상을 불러서 빠르게 교를 벗어났다. 내가 사불상을 타고 제일 먼저 도착한 장소는 진랑곡이었는데 망량이라면 내 상황에 대해서 조언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랑곡에 도착해서 망량의 오두막에 올라가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모든 짐이 정리되어서 사라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진랑곡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망량이 어느 날 홀연히 떠나버렸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 망량이 사라졌어?'
내가 당황해서 서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 현이는 삼황내문을 받은데다 수기공양의 축복도 받아서 수련을 하기 딱 좋은 시기지. 내가 현이라도 섣불리 너를 찾기보다는 우선 몸을 숨기고 자신의 역량부터 키울거다.]
[ 몸을 숨겨? 왜?]
[ 얼마 전 교주가 장령곡주가 되어서 각지의 무림세력을 흡수했잖냐. 당연히 진랑곡도 표적이 되었을 테고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잠적했을 거다.]
[ 아... 그렇겠군.]
망량이라면 들려오는 소문에 따라서 장령곡주가 사실은 백련교주이거나 절세의 초고수일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 알아채고 일단 잠적한 셈이었다. 그리고 망량이 마음먹고 숨었다면 지금 내가 찾아내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 불가능하진 않지만 백련교의 이목이 곳곳에 퍼져 있어. 더 파고들면 의심을 사겠지...'
망량과 즉시 합류하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지금은 망량이 알아서 잘 해주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제갈사. 정말로 신강에 가야하는 거냐?"
[ 물론. 안 가면 넌 죽어. 죽느니만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쳇... 그럼 지금 기회에 갈 수밖에."
파앗!
나는 사불상을 타고 신강 근처의 감숙성 산야까지 갔다. 그리고 사불상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부탁이 있는데 신강까지 좀 가 주면 안되겠냐?"
지금까지는 사불상의 순간이동 능력만 사용했을 뿐, 직접 달려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불상이 영수이기에 콧대가 높아서 화낼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슬며시 내가 제안하자 사불상이 대꾸했다.
[ 물론이다.]
"어... 해 주는 거냐?"
[ 수기공양의 축복으로 인해 너와 나의 단말이 연결되었으니 당연한 일! 정확한 목적지를 말하라.]
"그러면 토번(吐蕃)에 있는 청장고원(?藏高原)의 장북(藏北)으로 가야하는데 혹시 알겠냐?"
[ 물론이다!]
파아아아 -
이윽고 사불상의 몸이 무지개빛에 휩싸였고, 내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색찬란한 빛이 눈 앞을 가득 메운 후 사불상의 몸뚱이가 빛으로 변하며 웬 통로로 뛰어들어갔다. 그 통로는 마치 공간을 구부리는 듯 기묘한 환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대략 일 각을 뛰었을까? 빛이 사라지고, 사불상은 나를 태운 채 웬 고원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 도착했다.]
휘이잉 -
도착한 장소는 거대한 산맥이 보이는 평야 같으나, 고도 때문에 공기가 적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황량한 고원에서는 더없이 이국적인 정취가 흘렀고 먼 곳에 양떼가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신기해서 사불상에게 물었다.
"여기를 원래 알고 있었던 거냐? 어떻게 말하자 마자..."
[ 천계의 시선은 온 세상에 미치고 있으니, 나는 그 정보에서 네가 말하는 장소를 포착했을 뿐이다. 이는 영수라면 누구든지 지니고 있는 능력!]
"호오..."
그 말대로라면 굳이 중원이 아니라고 해도 어디든지 말만 하면 갈 수 있단 말인가?
한 번 가본 장소만 갈 수 있는 비등과는 차별되는 장점이었다.
[ 그럼 돌아가겠다.]
사불상은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사라졌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이 청장고원의 풍광을 쳐다보았다.
토번은 엄밀히 말하자면 중원이 아니었고 변황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토번에는 토번인들이 만들었다는 왕국이 따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몽골은 물론이고 온갖 오지를 돌아다녔던 나지만 이렇게까지 서쪽으로 와본 것은 처음인 것이다.
나는 흙바람 냄새를 느끼며 제갈사에게 물었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가는 거지?"
[ 원래라면 지저귀(地底鬼)를 소환해서 약속된 장소로 가게끔 되어 있었는데.]
"지저귀가 뭔데?"
[ 이족(異族)인데, 땅 밑에서 사는 거대한 오징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대꾸한 제갈사가 말했다.
[ 네놈은 중마(衆魔)를 다루는 능력같은 건 없으니 천신경의 술법을 써서 배화교인의 영혼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겠다.]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냐...? 천신경의 술법에 소환될 정도면 생전에 뛰어난 호걸이었어야 하는데."
[ 그걸 설명 안했구만. 지금부터 네가 갈 곳은 역대 배교 교주가 죽어서 묻힌 성지(聖地)다. 배교 교주의 영혼이 있는 곳이 바로 목적지겠지.]
성지!
내가 그 말에 흠칫하자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지형으로 봐서 그리 멀진 않을테니 넉넉잡아 하루면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은... 역대 배교 교주는 여기에 와서 죽었다는 거냐?"
[ 뭐 그런 셈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제갈사가 나를 재촉했다.
[ 잡담할 필요 있냐? 얼른 성지를 찾아가기나 해. 이런 일은 빨리 해치울수록 좋으니까.]
"알았다고."
나는 투덜거린 후 십지에서 천신경의 술법을 끌어냈다.
우웅 -
천신경의 술법을 자주 써서 그런지 숙련도가 늘어나서 감지영역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원래 이십 리 이내의 영혼만 탐색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삼십 리까지 늘어난 것이다. 나는 한참을 집중해서 영혼의 색깔을 살펴보던 중 유난히 큰 영혼을 발견하고는 이 쪽으로 소환했다.
그 영혼은 나를 발견하자 말했다.
[ 나는 카란 라마라고 하오. 무슨 일로 나를 찾았소?]
"라마? 그게 뭐요?"
[ 승려라는 뜻이오.]
아무래도 서장밀교의 중진까지 갔던 고승(高僧)인 모양이었다. 생전에 상당한 법력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카란 라마에게 말했다.
"나는 배화교의 성지를 찾아서 청장고원까지 왔소. 혹시 그런 장소를 알고 있소?"
[ 음... 그대가 말하는 장소는 주르반의 유적인 듯 하구려. 그 장소라면 알고 있소.]
"주르반?"
[ 배화교에서 섬기는 선신 아후라마즈다와 악신 앙그라마이뉴를 낳은 최초의 신격이자 창조주를 주르반이라 하오. 배화교의 교인들이 이 일대에 와서 주르반을 섬기는 유적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소.]
"몸을 넘길테니 안내해 주시오."
[ 그럼...]
후웅!
카란 라마의 영혼이 내 몸에 깃들었다. 천신경의 술법을 통해서 강신한 카란 라마는 잠시 내 몸의 상태를 짚어보더니 감탄했다.
"아아! 엄청난 힘이구나..."
그리고는 생전 처음보는 경공을 써서 내 내공을 써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상당히 빨랐기에 카란 라마도 생전에 무공을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고원을 달리던 카란 라마는 약 반 시진 후 특이한 협애 지형 근처로 들어와 있었다.
카란 라마는 깎아지른 듯한 산줄기를 쳐다보며 내게 말했다.
"저 산 중턱에 보이는 하얀 사원이 바로 주르반의 유적이오. 그럼 이제 몸을 돌려주겠소."
아니 왜?
기왕 갈 거면 끝까지 가 주지?
내가 의문을 표시하자 카란 라마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고 싶어도 저기는 타 종교의 유적. 함부로 침범할 수 없소."
이윽고 강신술이 풀리고 카란 라마가 떠났다. 나는 내심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 죽었으면 끝이지 죽어서도 종교의 율법에 매여있단 말인가?'
카란 라마가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한들 이제 와서 누가 제지하겠는가. 내가 카란 라마를 한심하게 여기자 제갈사가 말했다.
[ 꼭 그런 건 아니지. 이 세계에서 종교란 후천적인 구원이니까...]
"난 가끔 네가 뭔 소리 하는지 못 알아먹겠어."
[ 슬슬 그를 마주치게 되겠군. 긴장해라.]
나는 멸혼보를 끌어올려서 사원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협애의 중턱에 있다고는 해도 지금의 내 경공으로 오르지 못할 지형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사원의 내부로 진입하자 밖에서 볼 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화염술을 시전했다.
화륵
사원 내부로 더 걸어들어가자 독수리의 날개에 사람의 얼굴을 한 신상(神像)과 제단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의 공간에서 익숙한 느낌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 닮았군.'
수요의 유적과 비슷하게 장식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인신공양을 위해서 마련된 듯한 특이한 제단도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 때였다.
"제갈사는 죽었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흠칫하며 검을 빼들고 경계했다. 그리고 제단 뒤편에서 서서히 걸어나오는 인영을 보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벽지상..."
제갈사의 말대로 도왕 벽지상이 이 사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초절정고수인 내 감각을 완벽하게 피하고 있었던 데다가 내가 언제 도착할지 어떻게 알고 준비한단 말인가?
마치 이 사원에 누군가가 발을 들이는 순간 출현한 듯한 기괴함이 느껴졌다. 벽지상은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혼대법으로 영혼을 공유하고 있군. 그 말은 영혼의 강탈이나 흡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 기이한 현상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말대로요. 그리고 당신을 찾아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해서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거요."
"......"
벽지상은 침묵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왠지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오. 벽지상."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나는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당신이 정말로 배교의 초대 교주이자 [옛 지배자]와 계약을 맺어 마왕(魔王)이 된 존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