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2 천계(天界) =========================================================================
그 때였다.
휘청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 들더니, 내 머릿속 한켠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자리잡은 기분이 들었다. 뇌수의 그림자에 조그마한 종양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역한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잠시 비틀거리자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 뭐... 뭐지?'
그 느낌은 한동안 계속되더니 머릿속을 출렁이게 만들었다. 마치 나비가 뇌 속을 헤집는 듯한 기묘한 울렁임 때문에 아찔해져서 비틀거리자 용중일이 물었다.
"왜 그러나?"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음습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이런 망할 처지가 되다니.]
조야하고 음습한 그 목소리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놀라서 눈을 흡뜨자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 멍청한 놈아! 당연히 알려야지. 지금 칠요를 숨겨서 대체 뭣에 쓰겠다는 거냐?]
내가 뭐라고 반문할 틈도 없이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뇌리를 스쳤다.
[ 닥치고 십이율주에게 칠요의 존재를 말해! 네놈이 잘못되면 나 또한 멀쩡하지 못하니 일단 내 말대로 해라.]
[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소?]
나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 제갈사 당신을 어떻게 믿냔 말이오!]
그랬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혼의 덩어리가 말을 건다는 것 - 그것은 제갈사의 영혼과 목소리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나는 평소에 광기 넘치고 음흉하던 제갈사의 성정을 알고 있어서, 그의 조언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어째서 내 머릿속에 있는지는 둘째치고라도 뜬금없는 그의 말에 곧이곧대로 따르다가 어떤 꼴이 될지 몰랐다.
그러자 제갈사가 답답한듯 말했다.
[ 내장을 튀겨먹을 새끼! 그놈의 빡대가리는 19번 뒈져야 좀 나아질거 같냐? 참 징하다 아오 개같은 놈아!]
[ 뭣...]
저 놈이 어떻게 그걸?!
내가 놀라자 제갈사가 혼자 열받아서 외쳤다.
[ 천령단 얻어야 된다며!! 지금 혼자서 봉선의식도 못하는 주제에 수요에 집착할 거냐? 어차피 뒈져도 되살아나서 전생을 하는거면 천령단에만 집중해!! 되지도 않는 욕심 부리다가 멍청하게 다 놓치지 말고 백련교주의 신임을 얻을 기회를 잡으란 말이다!]
전부 다 알고 있다!
[ 어... 어떻게 그걸...]
[ 시간 없다! 좀있다 설명해 줄테니까 일단 내 말대로 해라 빡대가리 새끼야 씨발!!]
[ 백련교주가 날 죽이면...]
[ 죽으면 되지 별거있나?! 전생자 주제에 별걸 다 겁내네!]
끝까지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정신을 차렸다. 제갈사의 말이 혼란스럽던 내 머릿속을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계속 갈팡질팡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리라.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십이율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십이율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놈일세. 왜 다른 놈의 혼을 같이 지니고 있는 거지? 강신술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십이율주는 일견에 내 머릿속에 제갈사의 영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우선 필요한 이야기만 했다.
"말씀하신 칠요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쪽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십이율주는 그 말에 침묵하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용비천과 용중일도 놀란 눈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폐가 터질 듯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십이율주가 말했다.
"했던 말은 지킨다. 칠요를 가져오면 불가침조약,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생각해 보신다니요? 맺어주셔야 도리가 아닙니까."
"어 그랬던가? 그러면 그렇게 하고."
나는 어물쩡 넘어가려 하는 십이율주를 보자 속으로 이가 갈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눈 앞의 인물도 노회한 너구리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 공손하게 포권한 후 말했다.
"그럼 반 시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안에 가져오겠습니다."
"기다려 주지. 하지만 만일 나를 기만한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물론입니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영수 사불상을 불렀다. 그러자 사불상이 눈 앞에 나타났고, 좌중의 시선이 미처 쏠리기도 전에 사불상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 백련교의 본단, 교주전으로 가 줘.]
[ 알았다.]
파앗!
사불상의 등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백련교의 교주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강대한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졌고, 그들 하나하나는 초절정고수인 원로원 고수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공격해 오려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급히 사자후를 내질렀다.
[ 뇌신류 호법사자로 내정된 백웅이오! 급한 일로 교주님을 뵙고자 하오.]
사아악
그러자 내 앞에 원로원 고수 한 명이 소리소문없이 나타나서는 말했다.
"백웅. 교주는 네가 보고싶다 해서 아무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아주 급한 일이오. 교주께 알현을 하고싶다고 전해주실 수 있소?"
"네 녀석, 정식절차도 밟지 않고 이리 무례하게 침범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
"제발..."
내가 간절한 기색으로 쳐다보자, 원로원 고수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명이 빠른 경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가 되돌아와서는 말했다.
"따라와라."
나는 원로원 고수들을 따라서 교주의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교주의 알현실로 들어가자 교주가 신기한 듯 말했다.
[ 백웅. 너는 요녕성에 가지 않았던가? 수천 리 길을 벌써 갔다왔단 말인가?]
나는 숨을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게는 영수 사불상이 있어서 천지를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 호오, 그렇군... 그럼 나머지는 아직 요녕성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 좋아. 무슨 일로 갑자기 되돌아 온 건지 말해라.]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교주님. 십이율주는 불가침조약의 댓가로 현재 칠요(七曜)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외의 어떤 댓가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주께서 지니고 계신 칠요를 가지러 왔습니다."
[ 내가 칠요를 가지고 있다고...?]
잠시 후 교주가 깨달은 듯 말했다.
[ 그렇군. 네가 칠요를 획득했던 거였어. 그리고 백웅 너의 소지품 중에 칠요가 있구나.]
"네. 교주께서 지니고 계신 그 고대의 검이 바로 칠요 중 수요(水曜) 막야이며, 십이율주가 원하는 물건입니다."
[ 이건가.]
휘잉!
교주가 이기어검술을 부렸는지 허공을 격하고 수요 막야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바로 수요 막야입니다."
잠시동안 수요 막야의 모습을 감상하던 교주가 말을 이었다.
[ 십이율주... 정말 건방진 작자군. 우리가 전설의 칠요를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불가능한 조건부터 내놓다니, 내 역량을 시험하고자 하는가...]
"......"
[ 허나 어쩔 수 없지. 아직 십이율과 부딪히는 건 시기상조. 협력할 수밖에.]
그렇게 말한 교주가 발 뒤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 백웅. 어째서 내게 수요 막야의 정체를 이야기하지 않았지?]
올게 왔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즉시 찢겨죽을 게 분명하다. 나는 속으로 긴장하며 천천히 말을 골랐고, 이윽고 대답했다.
"우연히 얻은 고대의 검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교주를 아직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호오...]
"교주께서는 제 보물을 모두 가져가셨으나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지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 상황에서 칠요 중 수요가 있다고 말씀드린다는 게 무모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교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아본 후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 ......]
교주는 곰곰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즉각적인 살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주는 아무런 심경의 변화 없이 간단하게 손가락을 튕기는것만으로도 나를 격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교주가 중얼거렸다.
[ 믿을 수가 없군. 십이율주가 칠요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너는 결코 내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언제고 내게서 보물을 되찾으려는 생각이 있으니까.]
"그건..."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칠요의 존재를 알렸다는 것... 그건 그만큼 네가 천령단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는 뜻이겠지.]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교주가 왠지 웃는 듯 했다.
[ 후후... 말하자면 너는 내게 칠요와 천령단을 교환하자고 제시한 셈이군.]
"저를 죽이시렵니까?"
[ 아니. 너 정도로 재밌는 놈이라면 쉬이 죽일 수는 없지. 배짱도 마음에 든다.]
스윽
백련교주가 발 뒤에서 가면을 쓴 채 걸어나왔다. 무면탈을 쓴 백련교주는 마치 귀신처럼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형상이라서 소름돋았다.
[ 네가 내게 수요의 존재를 숨긴 일은 문책하지 않겠다. 지금은 십이율주와 직접 얘기할 필요가 있겠군.]
자칫하면 비밀을 숨긴 괘씸죄로 이 자리에서 터져죽었을지도 모른다. 백련교주의 성정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사불상을 부를까요?"
[ 당장.]
역시 백련교주는 용비천으로는 회담이 안되는 걸 느끼고 직접 가려는 것이다.
파앗!
나는 백련교주와 함께 영수 사불상을 타고 회담자리로 향했다.
난데없이 나와 백련교주가 회담자리에 나타나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고오오오...
지금까지는 십이율주와 삼사가 압도적으로 풍신류를 누르는 형상이었으나 백련교주의 존재감 하나만으로 대등한 압력이 중앙에서 충돌하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백련교주의 기세와 십이율주의 기세가 백중세를 이루며 다른 모든 잡스러운 기운을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말도 안되는 무형지기의 와류(渦流)!
삼사들이 백련교주를 보자 놀랐는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백련교주인가..."
"과연 듣던대로군."
십이율주 또한 백련교주의 정체를 짐작했는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 백련교주가 장내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백련교주와 십이율주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현 시대의 절대자들이 어떻게 쟁투할 것인지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만다라가 충돌하는 기분이 든다.
나조차도 그 압력이 불편해서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이윽고 백련교주가 먼저 육합전성을 실어서 말했다.
[ 십이율주.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그 말에 십이율주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백련교주, 말은 많이 들었소. 옛 존재의 비밀을 해석했다는 게 사실이었군."
[ ......]
백련교주는 그 말에 왠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 되었다. 그건 정곡을 찔려서일수도 있고, 십이율주의 기량이 자신의 생각보다 높아서일 수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백련교주든 십이율주든 서로를 거의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백련교주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십이율주가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선계의 영수를 자유자재로 타고다닌다라... 상급 신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넌 대체 뭐지?"
"우연히 얻게 된 기연일 뿐입니다."
"그런가~"
왠지 십이율주는 내게 호기심이 생긴 기색이었다. 나 또한 불편해서 고개를 돌리자 백련교주가 자신의 품에서 수요 막야를 꺼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 율주. 이것이 바로 그대가 말한 막야일 터인데.]
십이율주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정말로?"
[ 건네주는 건 쉬우나 그대가 진위여부를 어떻게 판별할지 알 수가 없군.]
교주는 은근슬쩍 십이율주를 떠보는 기색이었다. 그 심계를 읽은 듯 십이율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십이율주와 단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진품이라면 두말않고 받아들일 것이고, 거짓말도 하지 않겠소."
[ 좋소.]
피잉
빠른 속도로 교주에게서 십이율주에게 막야가 투척되었다. 엄청난 속도였으나 십이율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었고, 그는 수요 막야를 받아들어서 한동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는 대략 일 각에 걸쳐서 꼼꼼히 훑어보더니 탄성을 흘렸다.
"과연, 아직 봉인상태긴 하지만 이건 칠요군. 사황 창힐의 기운도 있고... 진품이군."
[ 그럼 약속대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
십이율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봉인해제방법을 알고 있소?"
후오오
나는 갑자기 전신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한기가 느껴지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십이율주가 암중에 뿜어낸 의념의 힘이 나를 압도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긴가민가했지만 역시 십이율주가 일반적인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은,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법사자 바로 아래급의 내공을 지닌 내가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움츠러들 리가 없는 것이다.
압박감을 느끼는 건 나뿐이 아닌지 용비천과 용중일도 움츠러드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그 기묘한 역장은 풀렸다. 백련교주는 약간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말했다.
[ 내가 그걸 그대에게 말해줘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그야 당연하지. 당신은 마도서(魔道書)를 해석할 정도의 역량이 있으니 의심할만 하지 않소? 어설프게 칠요의 봉인을 건드리면 위험하니 나로서는 물어볼 수밖에."
[ 말할 수 없군. 그건 말할만한 게 아니야.]
"흐응..."
백련교주와 십이율주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대치했다. 나는 그 침묵속에서 거센 압박감을 받으며 내 위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 높다!
저 두 절대자의 무공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저들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잡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수련치와 노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그 엄청난 힘에 전율하고 있을 때 백련교주가 입을 열었다.
[ 십이율주. 칠요 막야를 넘겨주었으나 회담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오?"
[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 중 하나. 그걸 받고 불가침조약 하나로 퉁칠 생각이라면 너무 날로 먹는 게 아닌가 싶군.]
백련교주가 은근슬쩍 말을 이었다.
[ 나로서는 칠요의 가치에 상응하는 성의를 받고 싶소.]
"......"
역시 백련교주도 어디 가서 당하고 다닐 자는 아니었다. 칠요 중 수요를 넘겨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추가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자 십이율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배 째라... 라고 말한다면?"
[ 나는 잘 쨀 수 있다는 걸 말해두지.]
쿠구구구!
백련교주의 몸 주변에서 갑작스럽게 만다라의 형상이 치솟았다. 그 형상을 보자 삼사는 거의 동시에 보패같은 걸 꺼냈고, 십이율주도 은하구절편을 자신의 손에 잡았다. 백련교주가 전투태세를 잡으며 자신의 최종절기에 가까운 심천무량을 끌어올리는 중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 심천무량(心天無量). 이만큼 무시당하고도 일천년 백련교의 교주라 자처할 수는 없소.]
거대한 소우주가 한순간 비쳐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백련교주는 지금 당장이라도 결판을 낼 생각으로 보였다. 그러자 십이율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어설픈 수는 통하지 않는군.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지."
[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소?]
백련교주가 기세를 가라앉히자 장내의 전투분위기가 사라졌다. 십이율주는 자신의 은하구절편을 허리춤에 넣으며 대꾸했다.
"이걸로 충분할 거요."
십이율주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커다란 언월도를 공중에서 잡아채더니 백련교주에게 던졌다. 공격이 아니라 투척이란 걸 알았기에 백련교주는 망설임없이 언월도를 붙잡았다. 백련교주가 언월도를 힐끔 쳐다보자 십이율주가 부연설명했다.
"자령언월도(紫靈焉月刀). 당신이라면 그 가치를 알 수 있겠지."
[ ......]
교주는 한참동안이나 자령언월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 마도구(魔道具)인가.]
"칠요보다는 훨씬 당신에게 잘 어울린다 보는데."
[ 받아들이겠소.]
아무렇지도 않게 교환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마음속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자령언월도!
' 저... 저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문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 자령언월도(紫靈焉月刀)를 얻으려 했어요. 자령언월도에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무공이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입수했기 때문이에요.]
[ 자령언월도의 현 주인은 전(前) 암경무투회의 우승자이자 새외제일인(塞外第一人)이라고 불리는 자예요.]
[ 십이율주(十二律主). 그가 자령언월도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검마가 말해줬던 정보도 떠올랐다.
[ 자령언월도가 시공간(時空間)을 조종할 수 있다는 소문이었네.]
[ 자령언월도에 감겨 있는 검은 천을 풀게 되면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움직여 버린다고 하더군. 투마는 아마 그게 기진이보의 묘용이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무공이라고 생각한 자도 적지 않은 모양이었네. 시공간을 조종할 수 있는 절세무공이라는 정보가 떠돈 이유인 게야.]
검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신기한 보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모험을 하면서 수많은 보패와 마도구를 마주치게 된 지금의 나는, 저 자령언월도가 마도구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시공간을 조종할 수 있는 마도구!
그게 자령언월도라면 지금의 교환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불가침조약을 맺고 수요를 주는 대신 자령언월도를 받은 교환은 아주 정확한 셈이다. 십이율주가 직접 암경무투회에 참여해서 회수할 정도의 마도구라면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십이율주는 자령언월도를 주는 한이 있어도 수요를 얻고싶은 거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교주에게서 내 보물을 되찾는 걸 넘어서서, 교주를 통해서 자령언월도의 위력을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이후의 과정은 마치 물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용비천과 용중일이 미리 준비했던 지필묵을 꺼내와서 십이율주와 함께 조약의 내용을 적었고, 거기에 인(印)을 찍었다. 직후에 서로가 한 부씩을 가져가서 봉(封)하여 두루마리의 형태로 보관하자 완전히 불가침조약이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되돌아가기 전 십이율주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돌아갈 준비를 하는 교주에게 말했다.
"교주. 백웅과 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교주는 힐끔 십이율주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무슨 꿍꿍이요?]
잠시동안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그들이 뻘짓을 하는 게 아니라 고도의 전음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라는 걸 알아챘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교주가 대꾸했다.
[ 딱 하루요. 이후에는 돌려보내시오.]
"그렇게 하겠소."
엥?!
나는 난데없이 교주와 떨어져서 십이율과 하루를 지낸다는 사실에 황당해서 외쳤다.
"교주. 무슨 말씀이십니까?"
[ 친선사절로 하루를 머물고 와라. 율주께 무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지만 그건..."
[ 백웅 호법사자. 교주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
나는 울고싶은 기분이 되었다. 저 음흉스럽기 그지없는 십이율주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 하루를 머문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의 술법에 당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