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0 천계(天界) =========================================================================
한백령은 나를 탐색하려는 듯 여기저기 뜯어보다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과연 상당한 실력인 듯 하군. 내공도 굉장해..."
"호법사자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지요."
"그 정도는 아니다. 바다와 강의 차이겠지."
"......"
묘한 비유를 한 한백령이 곰방대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넌 누구냐? 전성기 뇌신류에서 너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제가 반로환동했다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럼 설마 네 나이에 그 정도 내공을 얻었다고?"
"저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로환동은 착각이십니다."
내가 대답하자 한백령이 침묵하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홱하고 곰방대를 내게 던졌다.
그 곰방대는 느려보였다. 마치 허공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말도 안되는 거력을 품고 공간을 격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게 현재 위치가 아니었으니 이 또한 의념절기로 만들어낸 환영인 게 분명했다. 나는 찰나간에 그 한 수를 간파하고는 이를 악물고 검에 전력을 실어서 마주 쳐냈다.
꽈과광!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동시에 나는 튕겨져서 밖으로 날아가서 땅에 나뒹굴었고, 한백령은 격공섭물의 경지로 자신의 곰방대를 회수하며 내게 걸어왔다.
"이건 내 장기인 검혼일수(劍魂一手)로 방금 전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펼친 절초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강호의 초절정고수라 하는 놈들도 방금 내 일격을 받으면 방어가 불가능하며 전신혈맥이 터져버린다. 하지만 너는 무기도 상하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냈구나. 이건 현재의 네 내공이 호법사자를 제외하면 천하제일이란 뜻이다."
"크윽."
"보아하니 내상도 입지 않았군. 대단한 내공이야."
감탄하듯 말한 한백령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내공을 가진 건 현재 무림에서 신승 명호대사 뿐이지. 그런데도 반로환동이 아니라고?"
"믿으시든 아니든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영약의 기연을 얻었을 뿐입니다."
"흐응."
한백령은 곰방대를 고쳐잡은 후 말했다.
"아무튼 좋다. 교주께서 너를 인정하셨다면 나도 따를 수밖에. 하지만 만일 본녀와 화신류에게 해가 가는 일이 있다면 결코 너를 용납치 않겠다."
"......"
"그럼 편히 쉬거라."
화르륵
한백령이 홀연히 한 줄기의 불꽃을 남기고 사라졌다. 저게 아마 예전에 망량에게서 들었던 화신류의 비전신법인 화영미리보(火影米理步)인 듯 했다. 고아한 맛이 깊으면서도 극한의 공격력을 뒷받침하는 절세보법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 편히 쉬라니 잘도 편히 쉬겠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교주의 행사가 파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낙양에서 장령곡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한백령이 직접 와서 나를 봤다는 건, 그만큼 나라는 존재가 신경쓰인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교주가 나를 호법사자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지금의 행동은 수상쩍은 나를 견제함과 동시에 내 정보를 탐색하는 과정이었으리라.
한백령이 사라지자 나는 밖에서 기다리던 시비에게 갔다. 시비는 아까 폭음 때문에 기절했는지 혼절상태였고, 나는 그녀에게 내공을 주입시켜서 깨웠다. 간신히 시비가 일어나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안 죽어서 다행이오. 당신도 무공을 약간 익혔구려."
"전대 곡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폭발은 너무 강했습니다."
그럴 만하다. 방금 전에도 그녀는 내상을 입은 상태이길래 같이 치료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력의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이 아니라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황연에게 갑시다."
"네."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황연 대장군의 거처로 갔다. 그는 흰 옷을 입고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자 책을 덮었다.
"왔군."
"몸은 좀 어떠십니까 장군?"
"괜찮다네. 이곳은 공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군."
그렇게 대꾸한 황연이 지긋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백련교주에게 붙잡힌 상태구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후... 어찌된 경과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얼떨결에 백련교주의 후원을 받아 황궁과 겨루게 되었으나 너무 갑작스럽군."
나는 별 수 없이 황연에게 백련교주에게 붙잡히게 된 경위를 말했다. 황연은 끝까지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자네에게나 내게나 전화위복인 셈인가? 자네는 백련교에서 출세하게 되었고 나는 뜻밖에 무림최강세력의 도움을 얻게 되었군."
"농담하지 마십시오. 교주는 지금 심심풀이로 저를 살려두고 있을 뿐입니다. 필요가 없거나 질리게 되면 언제든지 저를 죽일 겁니다."
내가 질색하며 대답하자 황연이 피식 웃었다.
"그건 자네 뿐만이 아니야. 중원 신주팔황에 있는 그 어떤 존재가 백련교주의 손을 피할 수 있겠나? 단지 자네는 가까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는 차이일 뿐이지."
"음..."
"그 정도 되는 절대자라면 적으로 만들기 보다는 아군으로 포섭해야 하지. 그게 대명제국의 조정이 감숙성에 터를 잡은 백련교를 건국 이래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일세. 역대 백련교주는 언제든지 황제를 암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후우, 앞으로 어찌해야할지 막막합니다."
황연은 훗하고 웃더니 내게 책을 내밀었다.
"이건?"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하나인 사마법(司馬法)일세. 자네가 오기 전까지 소일할 게 없어서 읽고 있었지. 이 곳의 전대 곡주는 꽤 책을 좋아하는 자였는지 동서고금의 온갖 서책이 쌓여있었다네."
나는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사마법은 병법책이잖습니까. 이게 제게 쓸모가 있겠습니까?"
"허허."
황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사마법을 내 품에 넣을 수밖에 없었고, 황연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자네는 자신의 처지에 투덜거리지만, 나는 자네가 내심 비수를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길이 생기는 법이니,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네."
나는 황연에게서 물러나왔다. 황연 대장군은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좋게 생각하려는 듯 했다. 어찌보면 그에게는 전화위복인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비등! 목갑!
천암비서는 교주의 변덕으로 운좋게 되찾았지만, 순간이동과 저장고를 잃어버렸다는 건 뼈아픈 손실이었다. 게다가 수요는 물론이고 온갖 보물을 교주에게 다 빼앗겨버리지 않았는가? 교주가 영약은 물론이고 마도서 등을 멋대로 쓸 것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재시작하고 싶군.'
하지만 나는 참았다.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남을수록 정보가 쌓여서 차후의 생에 유리해지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치욕과 상실감을 견디면서 최대한 살아남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망량과의 연락을 최대한 끊어야 한다. 망량은 운좋게 교주의 마수를 피한 모양이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내 쪽에서 먼저 망량에게 연락을 했다가는 교주가 망량까지 옭아매고 말테니 피해야만 했다. 당분간은 백련교 생활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망량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곡주께서 부르십니다."
다음 날, 나는 교주가 호출하자 교주가 있는 장령곡주실로 향했다. 내가 장령곡주실에 도착하자, 나는 뜻밖의 인물들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놀랐다.
"......!!"
독고준, 용비천, 한백령!
백련교의 3대 호법사자들이 교주의 옆에 도열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어제 장령곡에 있던 게 한백령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백령을 비롯해서 모든 호법사자들이 교주의 호출때문에 장령곡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 곳은 현재 실로 용담호혈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키자 교주가 천천히 말했다.
[ 백웅. 어제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네가 가지고 있던 흑백련 덕분에 소교주가 저주를 해제하고 깨어났다.]
"겨, 경하 드립니다."
[ 뿐만 아니라 네가 가지고있던 보물은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너는 그 자체로 본교에 큰 공을 세웠다 할 수 있으니, 네게 뇌신류 호법사자의 위(位)를 내리며, 천령단(天靈丹)을 하사하겠다.]
나는 그 말을 듣자 힐끔 다른 호법사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들 아무런 동요가 없는 걸로 봐서는 사전에 얘기가 된 듯 했다. 다만 눈빛이 결코 곱지 않았으므로 나는 재빨리 부복하며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 너는 용비천을 따라가서 풍신류의 일을 도와주고 본단에 복귀해라. 복귀하는대로 천령단을 수여하겠으니 최선을 다 하도록.]
용비천을?
나는 왠지 떨떠름했으나 일단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백련교주가 흡족스러운 듯 말했다.
[ 오늘부터 백련교의 천하가 시작된다. 너희는 나를 도와서 본교의 최종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라.]
"존명!"
"존명!"
시립해 있던 한백령이 교주에게 말했다.
"교주. 그럼 염령으로 가시지요."
[ 그러지.]
교주는 이윽고 한백령과 함께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무래도 화덕 염령을 이용해서 교주가 본단에 복귀하려는 모양이었고, 그건 교주가 장령곡에 더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한백령은 교주에 대한 예로 그를 안내하기 위해서 화신류 대표로 여기까지 온 셈이었다.
그리고 백련교주와의 모임은 파했다. 호법사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용비천이 내게로 다가와서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용비천은 내가 원수같은 뇌신류일텐데도 차분한 말투였다. 그래서 나는 용비천을 따라서 걸어가면서 물었다.
"내가 뇌신류인데 짜증내지 않는구려."
그러자 용비천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교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소교주의 괴질이 치유된 이상, 이미 백련교의 천하가 예약되었다. 이제 와서 오십 년 전에 퇴출당한 뇌신류 따위를 뭐하러 신경 쓰지?"
"......"
"과거에는 너희가 우리 적수였을지 모르지만 이젠 아니다. 오십 년동안 우리 풍신류는 놀고있었던 게 아니고, 너희와는 비교되지 않는 전력을 키웠지. 본교에 뇌신류가 복귀한다 해도 너희는 영원히 하류이니 헛된 꿈 꾸지 마라."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 이 개새끼...'
뇌신류 무인으로서 용비천의 말투에 깔린 경멸을 읽은 것이다. 아무리 내가 뇌신류에 소속감이 없다지만 이토록 재수없는 말투를 듣고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나는 용비천에게 크나큰 원한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임무가 뭔지 몰라도 당신과 함께 하는게 아니었으면 좋겠군."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구나. 너와 내가 함께 해야한다."
"무슨 임무인데 천하의 호법사자가 직접 나선다는 거요?"
내 질문에 용비천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동방무림 십이율(十二律)과 정식 동맹을 하러 간다!"
"......!!"
십이율?!
십이율이 지금 왜 나온다는 말인가? 나는 당황했지만 이윽고 어찌된 일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 백련교가 중원진출을 하기 힘들었던 제약이 사라졌다. 그래서 최대의 난적인 황궁을 처리하기 전에 새외의 최대변수인 십이율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구나. 만에 하나 십이율이 적이 되면 곤란하니까!'
일전에는 보지 못했던 일이지만, 아무래도 내가 못본 것이었을 뿐 백련교주는 용비천에게 동맹임무를 시켰던 모양이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동맹을 맺는 것 뿐인데 왜 내가 같이 가냔 말이오."
"짜증나는 놈."
으르렁거린 용비천이 대꾸했다.
"십이율주는 대단한 무공의 소유주로써 초인(超人)이며 교주께서도 경시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휘하의 삼사(三師)도 매우 강력한 자들이지. 그 자리에서 기습받으면 위험하니 소수정예가 필요한 것이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 십이율은 대단한 곳이구나.'
용비천은 풍신류 호법사자로써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반선급의 강자였다. 그런데도 막상 십이율주가 있는 장소에 혼자 가는게 부담스럽고 두려워서 고수를 하나라도 더 데려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십이율주의 무공이 어쩌면 호법사자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럼 당신의 아들인 용중일도 함께 가는 거요?"
"그렇다."
"당신은 아들을 아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잘도 아들을 데려가는군. 여차하면 당신이 아들을 보호해줄 생각인가 보구려?"
나는 최대한 이죽거렸다. 눈 앞에 있는 용비천이 하도 맘에 안 들어서, 한 판 싸우는 한이 있어도 속을 긁고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비천은 되려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반대지. 내 아들이야말로 가장 믿음직하다."
"......?"
이게 무슨 뜻이지?
내가 뭔가 물어보려 하자 용비천이 결국 신경질을 냈다.
"아, 닥쳐라. 지금 당장 출발할테니 짐 꾸리고 따라오기나 해라!"
"... 알았소."
빌어먹을 새끼.
내가 십이율에서 억울하게 죽게 된다면, 반드시 네놈도 저승에 보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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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10월이 30일까지인줄 알아서 예약아이템 사용을 잘못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