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9 천계(天界) =========================================================================
그리고 백련교주는 내게 말했다.
[ 네 무공을 좀 알아봐야겠으니 따라와라. 대련을 해 보자.]
"알겠습니다."
교주가 아직 내 전생의 비밀을 모르는 게 다행이다. 그는 그저 내가 배짱이 좋다고만 알고 있을 뿐, 지금 천암비서가 없어서 불안한 상태라는 건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백련교주의 심계를 버텨내기로 작정하자 속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교주와 함께 대련장으로 가던 도중 아까의 무림인들이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교주는 잠시 멈춰서서 그들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 너희는 오늘부터 백련교에 입교하여 충성하라.]
"넷?!"
[ 입교절차는 조만간 본교의 사자가 나와서 진행할 것이다.]
웅성...
무림인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렇게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그들이 이 자리가 백련교에 가입하는 자리라는 걸 전혀 모르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중견 무인이 일어서서 외쳤다.
"장령곡주! 무슨 말씀이시오? 당신의 엄청난 무공은 알겠으나 설마 백련교 소속이셨소?"
[ 그렇다면?]
"그... 그건. 언질이라도 좀 해주셨으면 마음의 대비를..."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걸 보니 반발감은 있으나 현실적인 무공차이를 깨닫고 기가 죽은 듯 했다. 마음만 먹으면 백련교주가 그들 모두를 순식간에 때려죽여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우습다는 듯 백련교주가 대꾸했다.
[ 백련교 소속이라는게 부끄러운가? 무인의 명예를 운운하고자 하면 그 자를 존중해 줄 테니 앞으로 나오거라.]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고개를 드는 자도 없었다. 나갔다가는 일 초만에 찢겨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련교주는 약간 자애로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 걱정 말아라. 그대들은 도리어 오늘의 일을 천하의 행운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내가 손수 거두었으니 특별히 돌봐주도록 하지.]
"가...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장령곡주 만만세!!"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그들의 환호성을 들은체 만체하고 걸음을 옮기는 백련교주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보였다.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재미삼아 거두었지만 영 쓸모가 없어보이는 놈들이군.]
나는 그 말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지 백련교주가 그들을 몰살시킬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죽이실 겁니까?"
[ 내가 돌보겠다 말을 했는데 어찌 그러겠나? 단지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만한 벌을 받겠지.]
"......"
[ 본교에서도 유능한 인재만이 살아남으니 중원인은 말할 것도 없다.]
단호하게 말하는 백련교주에게서는 감정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격차가 나는지라 일반적인 무림인들을 벌레처럼 여기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나는 꽤 넓은 연무장에 도달했고, 백련교주가 팔짱을 꼈다.
[ 어디 공격을 해 봐라. 뇌신류의 무예를 얼마나 성취했는지 봐야겠군.]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내심 이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련교주와의 일대일 대련!
여기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내 행운일 수밖에 없다. 나는 검을 들고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집중상태에 들어갔고, 이윽고 빠르게 일 검을 출수했다.
쉬칵
굴공참(屈空斬)이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며 교주의 전면을 베어갔다. 지난번에 했던 무식한 내력을 담은 참격과 달리 이번에는 무공의 묘리를 최대한으로 살린 공격이었다. 한번에 쏟아붓기보다는 포석을 까는 공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세를 깨달았는지 교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 재밌는 무공이야.]
휘리릭
굴공참은 원래 공간을 조정하기에 쉽게 피하거나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교주는 마치 장난이라도 하듯 굴공참의 왜곡도를 눌러펴고는 우장(右掌)에서 가벼운 장력을 떨쳐 냈다. 나를 시험해 보는 듯한 느린 공격이었으나, 나는 그 장력에 담겨있는 잠재력이 개세적인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의 내 힘으로는 결코 정면에서 막을 수 없는 공격이란 걸 알아채자마자 나는 멸혼보를 전개했다. 엄청난 속도로 장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교주가 허공에 무형의 강기를 열 개나 띄우더니 내게 다시 발사했다.
투투투퉁!
나는 연속으로 뇌신검무의 절초를 뿜어내며 오십 참(五十斬)을 떨쳐냈다. 제자리에서 연속으로 휘두르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으나 아직까지는 참을 만 했다. 내가 강기투사를 견뎌내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뇌신류의 순수무공을 쓰는 게 아니군. 몇 가지 무공을 더 배웠어. 무공연원을 말해줄 수 있겠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감춰도 듣고마실 거 아닙니까?"
[ 그렇다 해도 양해를 구하는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지.]
"무당파 장삼봉의 비전 칠대절학을 얻었습니다."
[ 칠대절학!]
나는 감춰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장삼봉의 칠대절학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했다. 설명을 흥미롭게 듣던 백련교주가 감탄하더니 말했다.
[ 과연 진인 장삼봉... 훌륭한 무학이다. 내 무공에 결코 뒤지지 않는구나.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좋았을 터인데.]
그렇게 중얼거린 백련교주가 다시 말했다.
[ 허나 그것만이 아니군. 너는 뭔가를 더 가지고 있고, 특히 보법에서 현묘한 경지가 느껴지는구나. 그것도 말해라.]
아주 밑천을 다 드러내라 하는군.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삼보절기입니다."
[ 삼보?]
"칠성둔영의 묘리를 이용해서 천지인을 제압하는 묘수입니다. 하지만 구상만 했을 뿐 저는 아직 수련 중입니다."
[ 한 번 시전해 봐라.]
"그러죠."
스스슥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삼보절기를 펼쳐냈다. 그리고 이해한 만큼 펼쳐내고 나자, 백련교주가 왠지 웃는 기색이었다.
[ 하하하... 나를 웃기려는 건가? 아주 엉망진창이구나.]
"......"
뭐랄까, 너무 솔직하게 웃는 심정이 느껴져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수련기간이 최소 석 달은 넘었는데 아직 멀었단 말인가?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구상도 아주 적절하며 훌륭하고, 완성된다면 일대절기가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막춤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가 없다.]
"... 아직 미진한 건 알고 있습니다."
[ 크크. 일세절기를 개발했건만 본인의 오성이 딸려서 수련을 하지 못하다니...]
백련교주는 잠시 후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 좋다. 그 칠대절학의 구결을 내게 넘겨라. 그러면 그 삼보절기란 걸 익혀서 알려주마.]
"......!! 정말이십니까?"
[ 그렇다. 어차피 내가 보기에 너는 이대로라면 평생 가도 삼보절기의 일 성도 익히지 못할 테니까.]
"그, 그 정도는..."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평생 가도 못 익힌다는 말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진소청은 한 달만에 연구해서 익혔지 않은가? 그러나 반박할 수가 없는게, 아마 천지 아래 최강의 무예를 지닌 존재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내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한가지 더.]
"말씀하시지요."
[ 네가 가진 물건들 중에서 단 하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휙하고 백련교주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던져 주었다. 나는 그 물건을 받자마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천암비서(天暗秘書)!
이걸 어떻게 돌려받아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백련교주가 그냥 던져 준 것이다!
[ 나도 이족의 언어를 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르겠더군.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입수한 거지?]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백련교주를 쳐다보았다.
"이건 마도서 아니었습니까?"
[ 모르겠군. 말투를 보아하니 너도 모르는 모양인가 보구나.]
"......"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의혹이 솟아올랐다.
역시 교주는 무생노모의 법문을 해석한 자 답게 이족이나 마도서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 하지만 그런 교주도 천암비서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듯 했다. 예전에 제갈사 또한 천암비서를 해석할 수 없었다는 기억이 있었기에 이 일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천암비서란 무엇인가?
이것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 확실한 건, 이걸로 전생(轉生)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백련교주에게 들켜선 안 돼!'
이건 기회다. 지금을 놓치면 두 번 다시 백련교주의 손에 들어간 천암비서를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어설프게 굴었다가는 눈치가 귀신같은 백련교주가 천암비서의 가치를 눈치챌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최대한 내 감정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천암비서를 땅에 던졌다.
"후, 결국 쓰레기였군요."
[ 무슨 소리지?]
"마도서인가 싶어서 이름모를 동굴에서 얻은 것인데... 다른 마도서들과 달리 아무런 능력이 없어서 그냥 놔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교주께서도 모르신다면... 버릴 수밖에 없겠군요."
[ 흐음...]
"손수 태워 주십시오. 그게 속이 후련하겠습니다."
교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 그건 좀 아깝지. 그냥 네가 가져라.]
"별로 필요는 없습니다만..."
[ 정확히는 그 용도를 알아내서 내게 보고해라. 그러면 큰 공적으로 인정해 주겠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좋아.]
"하아..."
속으로는 기뻐 죽을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이걸로 전생기회는 확보됐어!'
기약없이 교주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틈을 봐서 자살해서 전생한다는 전략이 다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살하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전생할 수 있다'와 '전생할 수 없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틈을 노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살할 수 없다. 백련교주의 감시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간에 천령단을 얻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얻을 것을 얻은 후 상황을 살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윽고 내가 장삼봉 칠대절학의 구결을 알려주자 백련교주가 그것을 머릿속에서 암송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 한 번 더 말해줄 수 있나? 한 번에 안 외워지는군.]
"네."
나는 다시 한 번 불러주면서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삼봉 칠대절학의 무공이 길긴 하지만, 천재들은 대개 한번에 외우던데.'
교주의 두뇌는 천재급이 아닐지도 모른다. 구결의 전승이 끝나자 교주는 그걸 외우려는듯 한참동안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라. 임무는 내일부터 주겠다.]
"네."
[ 황연을 보고 싶으면 시비에게 거처를 물어보아라.]
"그와는 딱히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백련교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너희는 내 장기말이니 안면을 터 두라는 말이다.]
"... 알겠습니다."
백련교주는 나름대로 부하들에게 배려를 해주는 듯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하의 효용성을 고려한 배려였다. 실제로는 엄정하고도 철저하게 부하를 다루기에 인간적인 맛이 없었다. 나는 갈수록 백련교주의 성향을 체득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칠대절학을 혼자 연구하는 백련교주에게서 빠져나와서 시비에게로 갔다. 시비는 연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와 함께 황연 대장군을 찾아가게 되었다. 시비의 뒤를 따라가던 중 그녀에게 질문했다.
"갑작스럽게 주인이 달라졌는데 놀랍지 않습니까?"
"놀랐긴 했지만... 원래 곡주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이 요절할 수 있으니 대비를 해 두라고요."
"그렇군."
제갈사는 자신의 명운이 짧아서 요절할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후 마법으로 세계를 돌아다닐 생각이었기에 딱히 목숨에 연연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내심 납득하고 있을 때 시비가 말했다.
"그리고 황연 대장군을 뵈기 전에 만나실 분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곡주님의 직계부하 되시는 분께서 미리 제게 언질을 하셨습니다. 틈이 나면 백웅 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지요."
"......?"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윽고 왠 방에 안내되어서 알 수 있었다.
"네가 백웅이냐?"
"윽..."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눈 앞에 서 있는, 흑발의 미녀. 마치 인형같은 느낌을 주는 그녀는 섬섬옥수를 탁자에 드리운 채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녀의 절세미모에 감탄하겠지만 나는 그녀의 외모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고 정체 또한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빛냈다.
"교주께서 새 천령단의 소유자를 정했다 해서 보러 왔다."
"교주께서 정하신 일이라 저는 잘 모릅니다."
"누가 뭐랬느냐?"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녀는 곰방대를 탁자에 두들겼다.
"교주께서 뇌신류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저의가 궁금하구나."
그랬다.
눈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화신류의 호법사자 한백령!
그녀는 난데없이 중원 장령곡으로 이동해버린 교주를 찾아 이 곳까지 온 게 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