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7 천계(天界) =========================================================================
"조카야 오랜만이다!"
싱글싱글 웃는 제갈사는 우리가 진랑곡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루마리에서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망량은 뚱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반갑소."
"넌 아직도 나를 숙부 취급 하기 싫은 거냐?"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좀 다른 이유지. 당신이 어디로 튈지 전혀 짐작을 못하겠어서 짜증이 나오."
그랬다.
망량은 현재 존경하던 아버지인 제갈유룡이 주작이며 최악의 적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제갈사 정도는 애교 수준으로 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그가 천방지축에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책사로써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 어감 차이를 느꼈는지 제갈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 이상한 놈과 다닌 덕에 좀 달라졌나 보군."
"아무튼 백웅을 구해줘서 고맙소. 그럼 댓가를..."
"아, 됐다. 저놈이 이미 줬으니까."
제갈사가 금괴를 꺼내서 보여주자 망량이 말했다.
"그럼 상견례는 했고, 무슨 목적으로 날 보려 한 거요?"
"그야 저 놈이 너와 동료라고 하는 걸 확인하러 왔지. 사실이니 다행이다."
"후... 당신이 걱정해줘도 그리 기쁘지 않소."
"매정한 놈."
제갈사는 투덜거렸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왠지 제갈사는 망량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망량은 그리 제갈사를 좋아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것이다. 잠시 제갈사를 응시하던 망량이 말했다.
"제갈사. 솔직히 말하시오."
"뭘?"
"백웅에게 이혼대법(移魂大法)을 걸었겠지."
나는 깜짝 놀랐다.
"헉?!"
이혼대법이라니?!
그것은 배교 교주만이 전수받는 비전으로서 제갈사가 이혼대법의 달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으므로 난데없는 망량의 말에 놀란 것이다. 그러자 제갈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이혼대법은 배교비전 아니냐?"
"당신이 배교의 교주잖소."
"허참. 그건 맞는데 내가 저 놈에게 이혼대법을 걸었다는 증거 있냐?"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성격상 백웅이 사불상을 갖고있는데도 자유롭게 풀어줄 리가 없지. 틈을 봐서 백웅에게 접촉해서 백을 빼 내어 그의 심령을 교묘하게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니오? 시야를 공유할 수 있으니 백웅이 어딜 가도 찾아낼 수 있다 생각했겠지!"
"......"
제갈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급히 망량에게 말했다.
"내가 이혼대법에 걸렸다고? 아무런 증상도 없는데..."
"그게 바로 이혼대법의 특징이오. 당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하지만 당신의 시야며, 촉각이며, 후각 등등 모든 오감의 정보가 제갈사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을 것이오. 왜냐하면 제갈사가 이미 당신의 백을 꺼내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지."
"......!!"
듣고 있던 제갈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혼대법에 제대로 걸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증거 내놔 증거. 심증이나 상황증거만으로 감히 숙부를 겁박하려는 생각이냐?"
제갈사가 짐짓 화난 듯 말했다.
"선동과 날조로 승부를 보려 하다니 슬프구나 조카야."
"이 경우에는 물증은 필요도 없지. 심증과 상황증거로도 충분해. 굳이 물증이 필요하시다면야..."
그렇게 말한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백웅. 제갈사를 공격해 보시오."
좋지!
쉬익
나는 망량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제갈사의 목에 검을 날렸다. 당연히 죽일 작정으로 휘두른 검이었기에, 본디 제갈사의 무공이라면 막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놀라고 말았다.
"?!"
멈췄다.
나는 제갈사의 목 근처까지 검을 뻗었으나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제갈사가 결계나 방어막을 펼쳐서 자신을 보호했나 생각했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망량이 말했다.
"이혼대법이 극성에 이르면 상대방이 결코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금제를 걸어둘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소. 역시나 제갈사 당신은 백웅을 믿지 못하고 어느 새 공격불가의 금제를 걸어두었구려."
제갈사는 물끄러미 망량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손가락으로 내 검극을 밀었다. 그러나 손가락과 팔에 제대로 힘과 의지가 전달되지 않아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잘 알고 있구나."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그, 그럼 제갈사가 나를 조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소. 지금 백웅 당신은 완전히 이혼대법에 걸렸소."
망량은 제갈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접촉을 하는 것만으로는 이혼대법을 걸 수가 없소. 그게 가능했다면 배교가 이백 년 전에 세상을 지배했겠지. 아마 이혼대법에 걸릴 만한 계기가 있었을 거요."
계기?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제갈사에게서 도움을 받을때 이상한 두루마리에 감싸인 적이 있었다.
"두루마리..."
"아마 그럴 거요. 제갈사는 당신을 술법으로 보호함과 동시에, 자신의 법보 영향력을 이용해서 빠르게 이혼대법을 걸어버린 거겠지."
"크윽."
나는 제갈사를 노려보았다.
설마 첫대면인 사람에게 그대로 이혼대법같은 무서운 술법을 걸어버린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혼대법을 배울 때 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찰나의 접촉으로는 걸 수가 없다고 배운 적이 있었기에 방심한 탓도 있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젠장... 망량선사라는 작자가 대단하긴 한가 보구나. 배교비전에 대해 그 정도로 상세히 알고 있어서 네게 가르쳐 주다니."
"제갈사. 당장 이혼대법을 푸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소."
제갈사는 그 말에 물끄러미 망량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가만두지 않겠다니 무슨 말이냐? 네가 나를 제압할 정도의 술수를 손에 넣었다는 말이냐?"
"나는 경고했소. 백웅은 내 최고의 붕우(朋友)이니, 그를 공격하는 건 나를 공격함과 같소."
"흐응..."
제갈사가 슬며시 손을 들려고 하자 망량이 재차 경고했다.
"백웅을 시켜 나를 공격한다면 나는 반드시 당신을 없애고 말겠소."
"뭐?"
제갈사는 그 말에 놀란 듯 했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아니라 놀란 것으로 봐서는 망량이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했다. 그리고 망량에게 잠재력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내 생각보다 많이 바뀐 것 같군. 오늘은 내가 물러나마."
위이잉
그 때였다. 제갈사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백(魄)이 흘러나오더니 갑자기 내 이마 한가운데와 통하는 광선이 만들어졌다. 내가 놀라서 그 광선을 보자 무언가가 내게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고, 이윽고 광선 또한 사라졌다. 아무래도 제갈사가 훔쳐온 백을 되돌려준 듯 했다.
망량은 내 근처로 와서 영안의 술법을 발동해서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아직 의심스럽군. 완전히 해주(解呪)할 때까지 백웅 당신은 긴장하고 조심하시오."
"... 알겠소."
망량이 제갈사를 돌아보았다.
"내 동료에게 이혼대법을 쓴 이상 당신과 나의 신뢰는 완전히 끊어졌소. 죽고싶지 않으면 여기서 당장 꺼지는 게 좋을 것이오."
"난 이혼대법을 시전한 후 아무 짓도 안 했다. 너야말로 과민반응하는 게 아니냐?"
"흥!"
망량은 코웃음을 쳤다.
"이혼대법은 차도살인(借刀殺人)에 진화타겁(?火打劫), 욕금고종(欲擒故縱), 반객위주(反客爲主) 어느 쪽이든 가능한 수법이지. 이혼대법에 걸린 순간부터 당신의 장난감 꼭두각시일 뿐 살아도 산 게 아니오. 원한다면 자신의 부모도 찔러죽이게 할 수 있는 금단의 술법을 걸어놓고 과민반응이라고!"
"......"
"내가 당신을 왜 싫어하는 줄 아시오?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언제나 당신 하고싶은 대로만 하기 때문이오. 심지어 자신의 파멸에 남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지. 당신같은 인간은 정말 최악이오."
망량에게 매도당하자 제갈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잘 알고 있네."
"다행이군."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이지?"
제갈사는 쿡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남의 고통이란 걸 제대로 이해하는 놈은 없어. 내가 아파야 아픈거지 고통을 공감한다니... 그런 게 어딨나? 심지어 사후세계조차도 신들의 사정으로 지옥이나 다름없으니 선업(善業)을 쌓을 필요도 없다. 오로지 강자만이 모든 걸 얻고 영혼마저 농락하는 이런 세상에서 왜 남을 보살피고 도와줘야 하는 거냐?"
"이 자식..."
나는 화가 나서 당장 제갈사를 공격할 뻔 했지만 망량이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망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면 당신처럼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오. 하지만 내 스승께선 그런 세상을 바꾸고자 지금 이 순간에도 힘을 쓰고 있소. 사람들이 내면의 선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바뀔 것이오."
"크크크..."
제갈사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섬뜩한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오늘 일은 사과하지. 그럼 다음에 보자."
"꺼지시오."
휘익!
제갈사는 잠시 후 술법을 써서 사라지고 말았다. 망량은 그가 확실히 갔는지 확인하듯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내게 말했다.
"백웅. 스승님께 갑시다. 제물로 바칠만한 게 필요하오."
"이혼대법이 확실히 풀렸는지 확인하러 가야 하오?"
"물론이오. 제갈사가 순순히 약속을 지킬 리 없..."
그 때였다.
휘리리릭!
"어?!"
나는 어느 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멸혼보를 써서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었다. 나도 내 몸이 왜 멋대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어서 황당했다. 이미 망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내 몸은 훨훨 날아서 산천초목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갈사가 킬킬대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렸다. 이혼대법으로 내 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나랑 좀 놀아줘야겠다 애송아.]
제갈사!!
나는 급히 사불상을 타려 했지만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이거 풀어!!"
[ 잘 안 들리는구만.]
"으아아아!! 이혼대법 풀라고!!"
[ ......]
타다다닷
나는 계속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린지 약 반 식경 정도 지났을까, 말없이 나를 똥개훈련 시키던 제갈사가 말했다.
[ 너 대체 뭐냐?]
"어?!"
[ 쨍알거리는 게 시끄러워서 바로 이성을 멈춰버리고 이혼(移魂)을 발동시키려 했는데 들어먹지를 않는군. 네 몸의 통제권은 있지만 혼이 옮겨지지가 않아.]
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 말대로라면 이혼대법의 시전자가 원한다면 상대방의 영혼을 완전히 잠재우고 그 몸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제갈사는 자신의 혼을 내 몸으로 옮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생전 처음 겪는 일이군. 백(魄)을 아무리 움직여도 혼(魂)이 따라 움직이지가 않아. 설령 요괴나 선인이라고 해도 혼백의 구조가 다르지 않으니 마땅히 움직여야 할 터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빌어먹을! 지랄하지 말고 이혼대법 풀어!!"
[ 이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나...? 이성도 뺏을 수가 없다니.]
혼란스러워 하는 제갈사였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제갈사로서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인 듯 했다.
제갈사는 내 몸을 멈추게 하고는 말했다.
[ 네 녀석은 내가 천천히 연구해야겠다. 어서 여기에 와라.]
후우웅
잠시 후 나는 비등을 억지로 꺼내서 발동시켰고, 제갈사가 있는 장소로 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제갈사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공격하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내게서 삼 장 앞에 서 있던 제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군. 아무리 봐도 그냥 인간인데...?"
"이거, 풀어."
제갈사는 피식 웃었다.
"혼자서 풀어 봐라. 물론 배교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
나는 그 순간 열화가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이딴 놈에게 몸을 조종당해야 하는 것인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가? 이대로라면 목갑에 있는 보물을 모두 강탈당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검선 여동빈을 강림시키려고도 해 봤지만 역시 인간이 상대라서인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다가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 그래!'
지금 이혼대법으로 내게 새겨진 명령은 [공격불가]였다. 놈을 공격하려고 하니까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등을 써서 도망치려고 해도 바로 다음 순간 돌아오게 되니 미칠 것 같은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이번 생은 포기다!"
"뭐?"
휘익!
나는 비등을 써서 곧장 백련교주 앞으로 갔다. 발 뒤에 있던 백련교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으아아아아!!!"
제갈사가 재차 나를 조종하기 전의 찰나, 나는 전력을 다해서 백련교주를 공격했다. 뒷감당 따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위잉
백련교주의 몸 근처에 만다라가 피어나는 게 보였다. 그 만다라는 순식간에 내 의념과 무형지기를 없애버리고 힘을 뺏아 버렸다. 백련교주는 내 모든 내공을 담은 강격을 손가락 하나로 막아내고는 순식간에 내 목을 제압해서 대롱대롱 들었다.
"크윽..."
일 초만에 나를 제압한 백련교주가 내 목을 잡고 들어올린 상태로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 뇌신검무를 쓰다니 뇌신류 잔당인가...?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나타난...]
파앗
그 때였다. 제갈사가 이혼대법으로 귀환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비등을 발동시킨 것이다.
제갈사는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도망쳐 봤자 내 손바닥 안... 응?"
다음 순간 제갈사와 백련교주의 눈이 마주쳤다.
비등은 접촉해 있는 상대를 함께 이동시키는 능력이 있으므로, 당연히 내 목을 잡고 있던 백련교주도 함께 이동해 버린 것이다. 백련교주는 나를 멀리에 던져 버리고는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 여긴 어디냐? 그리고 네놈들은 누구냐?]
"......"
삽시간에 제갈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 앞에 있는 존재가 말도 안 되는 인세최강의 절대자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 대답해라.]
그랬다.
백련교주에게 죽는다면 그것대로 좋았고, 아니면 이런 식으로 비등을 이용해서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이다. 백련교주에게 상대방을 제압할 경우 목을 잡아채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