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356화 (356/1,615)

00356  천계(天界)  =========================================================================

파앗

벌꿀술을 먹고 다시 기묘한 마물의 도움을 받아서 지상세계로 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환계에 이어서 아귀계, 수라계라고 하는 곳을 지나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 장소에 반 각 이상 머물지 않은 것이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나는 평범한 산야(山野)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장령곡 뒷산이다. 조금만 가면 내 거처가 있지."

"그렇소? 그럼 난 이만..."

제갈사가 히쭉 웃었다.

"너와 망량의 목적이 뭔지 맞춰 볼까?"

"......"

나는 바로 비등을 써서 도망치려다가 제갈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갈사는 나를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수요 막야의 수기를 공양하고 영수를 얻었다라... 하지만 현이 녀석은 천계도 황궁도 아주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녀석이었단 말이지. 그런 현이가 수기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천계와 거리낌없이 교섭을 했다는 건, 네 녀석의 의도가 현이와 합치했다는 뜻이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천계나 황궁. 어느 쪽이든간에 쓰러뜨리려 하는 거겠지. 아니냐."

나는 그의 말에 침음성을 흘리며 대꾸했다.

"날 도와준 건 고맙지만 오지랖이 너무 심하군. 그 이야기에 대해 듣고 싶다면 나와 함께 진랑곡으로 가는 수밖에 없소."

"흐흐. 이제 현계로 와서 사불상을 뜻대로 타고다닐 수 있다 이거지? 나와 같이 다니기 싫다 이거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소."

제갈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맘대로 해.  나는 어느 쪽이든 좋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후 대꾸했다.

"진랑곡으로 갑시다."

이 자리에서 제갈사를 떨치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왠지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제갈사답지 않게 후한 제안이었고, 그가 뭔가 수작을 부려두었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섣불리 제갈사를 자극하는 것보다는 일단 그를 데려간 후에 망량과 논의하는게 낫다.

파앗

잠시 후 비등을 써서 진랑곡에 도착하자, 제갈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알하자드의 램프? 네가 어떻게 마도구를 쓰는 거지?"

"이건 내가 산동에서 우연히 얻게 된 순간이동능력을 가진 황금 비등이오. 서역의 이름같은건 모르오."

"흠. 금오도는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비등을 못썼다 이 말이군..."

뭔가 혼자서 납득하고 있던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야. 그거 사용한지 얼마나 됐냐?"

"며칠 안됐소."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걸."

"무슨 소리요?"

제갈사가 진랑곡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말했다.

"마도구는 마법으로 만들어서 성능이 좋은 편이지. 하지만 마법(魔法)은 이계의 술법, 결코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종종 함정도 숨어있고는 하지."

무슨 말인가?

나는 제갈사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서 산을 오르며 물었다.

"함정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설명해 주시오."

"글쎄다~ 알고 사용한 거 아니었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제갈사가 능청을 떨었다. 나는 그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내놓으라는 뜻이란 걸 알아 차렸다. 얼렁뚱땅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게 제갈사의 천성인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말했다.

"목숨을 구함받은 빚도 있으니, 이걸 드리겠소."

나는 목갑에서 금괴가 든 목함을 꺼냈다. 그리고 금괴를 다섯 개나 집어서 제갈사에게 건네 주었다. 금괴를 본 제갈사가 받아들더니 중얼거렸다.

"이것도 마법이 걸려있는 고대의 물건이군. 아주 오래된 금괴 같은데."

"무슨..."

제갈사가 금괴의 후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이걸 봐라. 이건 사물의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는 마법의 문양이다. [옛 지배자]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발톱을 새겨놓았으니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전혀 손상되지 않은 거지. 안 그러냐? 아무리 금이라고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는데."

"......"

"신기한 놈일세. 마법의 기물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는데도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단 말이냐? 크크크."

제갈사는 금괴를 자기 품 속에 집어넣더니 말했다.

"아무튼 정보료는 고맙게 받지."

"얼른 얘기해 주시오."

제갈사가 계단을 일곱 층계참 오른 후 입을 열었다.

"마도구의 함정이라는 건 말이지, 충전식일 때 발생한다."

"충전식?"

"물론 무한동력(無限動力)을 지닌 기물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대부분은 사용한계가 있다. 신이 아니라 마도사가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생기는 약점이지."

"사용한계라니... 설마 사용횟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오?"

"물론! 그 사용횟수가 다 소진되면 작동이 멈춰서 평범한 물건이 되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등을 얻고 나서 꽤 많이 사용했지만 그런 건 느끼지 못했소."

그렇다.

비등을 얻고 나서 약 십여 년 가량 생존하며 총 수백 회나 사용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비등이 고장나거나 작동이 안 되기는 커녕 멀쩡하게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내가 항변하자 제갈사가 묘하게 웃었다.

"그 램프는 대식국(大食國)의 미친 마도사가 말년에 제작한 거지. 그 놈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 줄 알아? 벌건 대낮에 투명한 마물들에게 잡아먹혔어."

"......"

"제 분수를 모르고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마도사의 말로는 그렇지. 뭐 달리 말하자면 놈은 힘을 얻기 위해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들과 많은 거래를 했지. 그 덕에 그만큼 강력한 기물을 만들었을 수도 있긴 해. 나는 좀 다른 견해다만."

"뜸들이지 말고 말해 주시오."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그 마도구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효율이 좋을수도 있다는 거지."

"목적?"

"그런 식으로 한정조건을 붙여놓고, 한정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주인을 잡아먹을수도 있다는 말이다. 뭐 내 일이 아니니까 잘 모르겠다만."

"......"

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 목적이라고...?'

짐작가는 건 있다.

처음 비등을 썼을 때 보았던 괴이독랄한 마계(魔界)! 고려 인근의 지저에 존재하는 [옛 지배자] 해신(海神)의 존재라던가 흉신의 처소, 그리고 암천향의 모습을 본 일이 있었다. 아마도 이 마도구 황금비등은 사용자에게 반복적으로 그 장소를 보여줌으로서 가도록 유도하는 용도일지도 몰랐다.

설마 이 비등은 사용자를 이족에게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말일까?

' 근데 그러면 나는 왜 영향을 안 받지?'

당연히 그런 함정이 있다면 사용자의 정신에게 압박감을 줘서 미치게 만들거나 현혹시키는 기능도 같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비등을 얻었을 때의 그 공포감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제갈사의 말에 따르면 황금비등은 뭔가 모순적인 존재였다.

내가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동안에 진랑곡의 오두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제갈사가 망량을 찾자 나는 대답했다.

"망량은 급한 볼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있소. 며칠만 기다리면 올 것이오."

"날 속였냐?"

"절대 아니오. 지금 망량은 그의 사제가 신열에 걸려서 간호하는 중이기에, 그를 수고스럽게 하기 싫은 거요."

내 말에서 진실성을 느꼈는지 제갈사가 훗하고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날더러 여기서 며칠 숙박하라, 이 말이군."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좋소."

"아냐 뭐. 귀여운 조카를 보고싶은데 그정도 쯤이야 참을 수 있지, 크크."

제갈사가 괴이하게 웃으며 근처의 우물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던 그 여인... 그녀는 동료 아니오? 안 찾아도 되오?"

나는 어떻게든 벽지상에 대한 정보를 끌어내고 싶었다. 지금껏 전생하면서 그녀의 정체만큼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네녀석 왜 이렇게 끈질겨?"

"걱정이 되어서 그러오. 금오도는 대단한 마경(魔景)인데 아녀자 혼자 괜찮을지..."

그러자 제갈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같잖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크하하하!! 그 녀석을 걱정한다고? 십천군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

"걱정 붙들어 매라. 그 녀석은 누구한테 걱정받을만한 녀석이 아니니까. 되려 너나 내가 걱정받으면 모를까."

"아니, 그러니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잖소."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 정말 끈질기군. 여자한테 인기 없지?"

"인기 얘기가 왜 나오는건지 모르겠군."

"야 빨리 대답이나 해. 인기 있어 없어?"

"......"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있던가?

첫번째 전생은 당연히 인기가 쥐뿔만큼도 없었고, 천암비서로 전생하는 동안에도 계속 못생긴 외모였으니 여자와 연이 없었다. 물론 절세미녀는 꽤 본 것 같았지만 미호를 제외하고는 인연이랄만한 게 없었다.

화련과의 잠자리를 거절한 적이 있고 서문혜도 거절했었지만, 그건 논외로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성형을 했을 때 여인들이 달라붙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내 외모만 본 일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논외다.

"......"

아니, 너무 억진데.

나 사실 여자한테 인기 있었던 건가? 마음만 먹으면 인기있을 구간도 꽤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내심 혼란스러워하다가 대꾸했다.

"남들만큼은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제갈사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어디선가 수박을 꺼내서 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인 소유의 이공간에서 꺼낸 듯 했다. 수박을 먹던 제갈사가 말했다.

"어? 뭐랬냐?"

나는 황당해서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뜬금없이 왠 수박을 처먹고 있소?"

"그러게. 너는 왜 뜬금없이 나한테 개인사를 묻고 앉아있냐?"

제갈사가 나를 비꼬았다. 그는 아무래도 벽지상에 대한 얘기를 그리 하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박씨를 퇫하고 뱉은 제갈사가 말했다.

"그 녀석과는 필요에 따라서 서로에게 이득을 제공하는 관계다. 충고해 두는데 오래 살고 싶으면 녀석에게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반드시 파멸하게 될 테니까."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것 참 겁나는군. 하지만 나는 황제도 두렵지 않소. 그녀가 설령 무림맹주라 해도 내가 겁먹을 일은 없을 것이오."

"황제에 무림맹주... 그딴 거랑 비교해봤자지. 크크."

"뭐?"

"아무튼 녀석의 이름 정도는 말해 주지. 벽지상이라고 한다."

"......"

그건 이미 알고 있다고!

제갈사는 수박을 먹다가 밑동을 휙 던졌다.

"파란 부분은 안 먹어. 맛없어."

나는 짜증을 냈다.

"아깝게시리 뭔 짓이오? 수박은 끝까지 다 파먹어야지."

"파먹어봤자 무우 맛밖에 더 나냐? 달콤한 것만 먹으면 돼."

"그 무맛이 또 묘미인... 아니 내가 왜 당신하고 이딴 얘기를 하고 있지?"

"됐고 나는 한 숨 잔다. 부르지 마라."

휘리릭!

제갈사는 말이 끝나자마자 왠 기이한 두루마리에 감겨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두루마리 안쪽의 이공간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두루마리를 건드려볼까 싶었지만, 교활한 사법사인 제갈사가 이토록 무방비할 리가 없다. 괜히 함정에 걸리거나 덤터기를 쓸 가능성이 높았기에 나는 두루마리를 건드리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제멋대로군."

제갈사가 내 전생에 도움이 되긴 하는 것 같은데, 이따금씩 폭주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걸 보면 정이 가지 않았다.

나는 며칠 후 망량을 데리러 갔다. 망량은 이제 천우진의 간호가 끝났는지 마을에서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망량에게 사불상을 소환해서 난데없이 금오도로 가게 된 일, 그리고 거기서 제갈사와 벽지상을 만난 일 등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망량이 말했다.

"제갈사를 억제하려면 우진이를 데려가야 하오. 하지만 지금 녀석은 막 신열을 갈무리하는 안정기에 들어갔으니 무리시킬 수가 없소."

"그럼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라신선 수 명 분의 신열이 언제 진정될지는 아무도 모르오. 어쩌면 일 년 동안 누워있을지도..."

"어떻게 해야겠소?"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별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제갈사와 이야기를 해볼 수밖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