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5 천계(天界) =========================================================================
나는 멍하니 제갈사를 쳐다보다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도와주시오!"
그래. 지금 저 제갈사가 왜 금오도에 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지금 중요한 건 한치앞도 알 수 없는 개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다. 제갈사는 배교의 교주이며 사술의 대가이니 틀림없이 내게 쓸만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그러자 제갈사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절해라."
"어?"
"넙죽 엎드려서 제발 도와달라고 빌어라."
"......"
저 놈이 미쳤나!
나는 순간 속에서 화가 치솟아올랐지만 제갈사의 말대로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 뭣하면 그냥 목숨을 끊고 말지 저런 미친놈의 말을 듣고싶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이를 까득 물면서 말했다.
"싫소!"
제갈사가 순간 눈에 이채를 띄더니 말했다.
"합격!"
"엉?!"
휘리릭
다음 순간 제갈사가 왠 두루마리를 들어서 펼쳤고, 두루마리는 마치 폭풍처럼 늘어나더니 장내를 가득 채웠다. 두루마리에 갇혀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손천군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인간 놈!! 어딨느냐!!]
쉬쉬쉬쉭
쉬쉬쉭
마치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뻘건 기운이 스쳐가는 게 두루마리 바깥에 보였다. 손천군이 해일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참 후 소리는 잦아들었고, 제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解)."
내 주변을 둘러싸던 두루마리는 그 한 마디에 마치 씻은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서 자기 품속에 집어넣은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저 놈도 멍청하다니까. 숨었다는 생각은 못 하더라고."
"......"
"내가 네 녀석을 살려줬는데 이름 정도는 까보지 그러냐?"
제갈사의 말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 소웅(小熊)."
"정말 농민스러운 이름이구만 그래. 크크크... 인간 맞군."
"방금 전에 합격이니 뭐니 했던 건 무슨 소리요?"
내 물음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순순히 도와달라는 놈은 재미없잖아. 개소리하는 놈이 재밌지."
나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보통이라면 그 상황에 무릎을 안 꿇잖소?! 뭔 생각을 하는거요!"
"아 뭐~ 그럴수도 있지만~"
제갈사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네 녀석은 손천군의 해일을 의념절기로 양단하고도 더 싸우지 않고 도망갔단 말이지? 그건 손천군과 자신의 실력차를 잘 알고 있고, 내가 안 도와주면 죽을 위기라는 걸 잘 인지하고 있다는 뜻. 그런데도 내게 무릎꿇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라... 유쾌해!"
나는 제갈사가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병신같아보이는 소리지만 나름대로 방금 전의 내 상황을 면밀하고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내가 화혈진을 깬 수법이 의념절기라는 걸 알고 있다면 이미 내 무공수위가 제갈사에게 읽힌 셈이었다.
내가 제갈사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네 주변에 은신해 있는 건 고명한 영수(靈獸)같군. 뭐하는 놈이길래 영수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알 필요 없잖소."
"알 필요 있지. 내가 네 녀석을 살려줄 수도 있는데."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안되면 죽으면 그만이니까 제발 꺼지시오!"
"......!!"
나와 눈이 마주친 제갈사가 흠칫 놀랐다. 그는 정말로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제갈사의 옆에 서 있던 얼음미녀, 도왕 벽지상이 말했다.
"가자."
제갈사가 대꾸했다.
"... 아냐, 난 저 녀석을 도와줄 거다. 먼저 가라."
도왕 벽지상이 제갈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무슨 변덕이지?"
"크크... 나중에 보자고."
"맘대로 해라."
휘익!
도왕 벽지상은 다음 순간 허공으로 뛰었는데 그대로 모습이 소멸되어 버렸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공간이동이나 그에 상응하는 특수한 기술이었기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천지방 무림에서 괴짜 도박마로 악명높은 도왕 벽지상에게 저런 기술도 있었단 말인가?
' 그보다 동료인거야 뭐야? 도통 관계를 모르겠어.'
제갈사와 벽지상은 서로 말을 놓고 있었고 서로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벽지상은 제갈사를 도와줄 의리는 없다는 듯, 지체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서 만날 약속을 한 것 같으니 관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연인이라고 하기에도 동료라고 하기에도 뭔가가 애매한 모습이었다.
나는 제갈사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말했듯이 날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소."
"흐흐흐. 네 녀석..."
제갈사는 뭔가 광기에 물든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거지?"
"뭐가 말이오."
"방금 전, 네 놈과 눈이 마주쳤는데... 네 녀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게 없어. 무예의 달인처럼 잊어버리거나 숨기는 것도 아니고, 고승(高僧)처럼 초탈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죽음의 본질을 '알고' 있는 눈이지."
"......"
"넌 뭐 하는 놈이냐? 생자(生者)가 그딴 눈을 할 수 있다는 건 이 광서생 제갈사, 한 번도 보고들은 적이 없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죽음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내가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건 전생(轉生)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본질적인 두려움은, 도리어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죽음이란 걸 성가시고 귀찮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제갈사가 보기에는 그게 죽음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날 도울 생각이면 끝까지 도우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처럼 수상한 자를 믿을 수는 없소."
"아주 좋은 자세야. 좋고 말고."
제갈사가 흐릿하게 웃었다.
"도와주지. 기한은 지상으로 돌아갈 때까지다."
"고맙소."
"크크..."
광소를 흘린 제갈사가 말했다.
"우선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왔는지부터 알고 싶은데."
"지금이 한가롭게 경위놀음이나 하고있을 때가 아니오. 조만간 손천군이 여기를 다시 뒤지러 올 것이오."
"아아, 그렇군. 손천군 놈이 귀찮으니 장소부터 마련하지."
제갈사는 품속에서 왠 봉밀된 작은 병을 두 개 꺼냈다. 그러더니 개중 하나를 내 쪽으로 던지더니 말했다.
"마셔라."
"이건 뭐요?"
"벌꿀술."
그렇게 말하고는 벌컥벌컥 병뚜껑을 열어 뭔가를 마신 제갈사의 몸이 갑자기 황금빛으로 빛났다.
파아아아 -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빛의 제갈사는 난데없이 전방으로 도약했고,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이상하게 생긴 마물이 날아와서 제갈사의 어깨를 앞발로 잡아챘다. 그리고 제갈사를 잡아챈 그 마물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
뭐, 뭐지?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멍청히 서 있다가 벌꿀술이라고 칭해진 병뚜껑을 땄다. 그리고 슬며시 안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안에는 뭔가 수상한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 에이, 만독불침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나는 잠시 마른 침을 삼키고는 벌꿀술을 들이켰다. 맛은 말 그대로 벌꿀처럼 달콤했다. 나는 이윽고 내 몸에 제갈사처럼 은은한 황금빛이 감도는 걸 느끼고는 앞으로 도약했다.
쐐액
동시에 아까처럼 내 어깨를 뭔가가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물이 휭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게 느껴졌다.
휘익!
"크윽!"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먼지투성이 건물이 보였고 뭔가 자재비품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어딘가의 창고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갈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가 어디게?"
나는 위쪽을 올려다 보았다. 제갈사는 쌓여있는 비품의 산 위에서 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힐끔 주변을 살피다가 말했다.
"잘 모르겠소만..."
"여긴 환계(幻界)에 마련해 둔 내 비밀장소야. 아까 있던 금오도에서 멀지 않은 차원이지."
"환계?"
"환계 모르냐?"
"알긴 알지만..."
환계.
그것은 지선 망량의 지식에 따르면, 물질이나 영매가 매우 불안정해서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한다고 하는 세계였다. 환계는 지성체의 꿈과 큰 관련이 있으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환계에 갈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이 곳에서는 환수들이 많이 산다고 알고 있었다.
제갈사는 자기 옆에서 고롱거리는 괴상한 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꿀술을 먹어야 이 녀석이 초광속(超光速)으로 차원을 넘는 걸 감당할 수 있다. 네 녀석은 배교의 귀한 보물을 처먹은 거라고, 소웅 놈아."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소."
"밥통 자식. 못 알아들은거냐 그런 척 하는거냐? 이 귀여운 녀석이 우리를 금오도에서 탈출시켜줬다는 거다."
고로로롱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그 마물은 눈이 없고 박쥐와 같은 날개를 가졌으며, 벌과 파충류를 합친 듯한 모습이었다. 또한 제갈사를 따르는 듯 제갈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 저 마물이 초광속으로 이동한다고?'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저 마물의 능력은 초광속으로 이동해서 차원을 넘는 것이며, 방금 먹은 벌꿀술은 그 속도에서 생명체를 보호해주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내가 제갈사를 말없이 쳐다보자 제갈사가 말했다.
"애송아. 벌꿀술 값을 어떻게 낼 테냐?"
나는 최선을 다해서 반박했다.
"당신 말마따나 여긴 환계요. 현실세계로 돌아갈 때까지는 댓가고 뭐고 내가 당신에게 빚진 게 없는 셈이오."
"엉? 환계라고 해서 안 위험한 줄 알아? 여기에 사는 환수들도 나름대로 한 성깔 하는데."
제갈사가 투덜거리자 나는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차원을 넘는 능력이 있으면 그냥 현실세계로 갈 것이지 왜 환계로 왔단 말이오?"
제갈사는 눈을 꿈벅거렸다.
"내가 뭐하러?"
"응?"
"현실세계같은 건 하나도 재미 없어. 쓰레기같은 인간족속만 널려 있고 세계도 중화에 갇혀서 좁아터졌지. 나는 그딴 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순간적으로 제갈사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제갈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여기에 와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 사후세계는 물론 존재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엿보기]를 하러 다른 통로를 만들어서 거주했거든. 내 영혼은 여태껏 침묵하며 보존되어 있었던 셈이다.]
[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하지. 혈계(血界)라던가 환계(幻界)라던가 수라계라던가 이것저것... 나는 인간세상보다는 그 쪽이 훨씬 흥미로웠으니까.]
과거에 제갈사와 했던 의미불명의 잡담들.
나는 그게 제갈사의 헛소리나 망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제갈사는 인간으로서 정해진 수명을 거부하고, 배교의 마법을 배워서 차원을 넘는 능력을 익힌 후, 환계나 혈계, 금오도를 비롯해서 온갖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노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 앞에 있는 제갈사는 육체를 지닌 상태가 아니라 영혼체(靈魂體)일 것이고, 이 기지도 제갈사가 엿보기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통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이제서야 제갈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대충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를 인간계로 데려다 주면, 내 동료인 망량이 당신에게 사례해 줄 것이오."
"망랴앙? 뭐라?"
제갈사는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띠꺼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네 녀석이 내 조카의 친구라고 말할 셈이냐?"
나는 모르는 척 했다.
"조카? 망량이 왜 당신 조카요."
"망량이라는 별난 칭호를 쓰는 놈은 내 조카인 현이 밖에 없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는 눈을 빛냈다.
"얼른 사실대로 말해라. 안 그러면 네 녀석을 멀리 떨어진 이계에 백 년간 처박아줄 수도 있으니까."
"크윽..."
나는 마지못하는 척 제갈사에게 망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망량과 동료라는 사실과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경위를 적당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제갈사가 말했다.
"재밌네. 간만에 현이나 만나봐야겠다."
"잠깐..."
"뭐냐?"
나는 제갈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왜 금오도에 웬 여인과 함께 있었는지 알고 싶소. 그녀는 누구요?"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지?"
"말해줄 수 없는 거요?"
제갈사가 코웃음을 쳤다.
"말해줄 이유도 없는데 말해주는 건 변태나 하는 짓이지. 알고 싶으면 그만한 댓가를 내라."
"댓가를 내면 말해줄 거요?"
그러자 제갈사가 희한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멍청하게 생긴 주제에 지식욕은 끝내주는군."
"......"
그는 다시 한 번 벌꿀술을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흥... 지금은 그냥 닥치고 따라와. 네놈이 현이의 동료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