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3 천계(天界) =========================================================================
인류라고 하는 거대한 개념이 나오자 나는 괴이쩍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인... 류?"
인간(人間)나 중원인 서역인 등의 구분은 흔히 썼다. 그러나 인류라는 말은, 마치 인간을 구별시켜서 정의하는 듯 했으며, 심지어는 인간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윽고 나는 그 어감이 어디서 위화감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라보는 세계관의 크기 차이였다.
눈 앞의 흑묘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이 세계의 '티끌'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족과 사신을 포함해서 인류라고 따로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도리어 지금까지 내가 파악해 온 세계의 '진실'에 따르자면 망량선사처럼 인간족속을 사해구분 없이 인류종족이라고 통칭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 나처럼 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오랫동안 접해온 자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통상적인 중화(中華)의 개념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가 없는 단어였다.
망량선사가 말했다.
[ 애초에 너는 파천의 가호가 어떤 능력인지도 모르고 있지. 뭔지도 모르는데 일단 받아두면 쓸만한 편리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설명해 줘. 어떤 능력인지."
[ 싫어.]
"빌어먹을!"
망량선사가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긁은 후 말했다.
[ 나는 대부분의 힘을 외신(外神)을 봉인하는 데 쓰고 있다. 너희에게 나눠줄 수 있는 파천의 가호는 아주 티끌만한 힘이며, 그저 내 본질에서 흘러나온 미비한 잔류(殘流)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것조차 아깝고, 대출혈이고, 힘들다고 느끼는 중이다. 봉인을 하고있는 지금도 시시각각 엄청난 힘이 소모되고 있어.]
그가 꼬리를 흔들었다.
[ 그렇기에 방금 네가 말한 댓가에서 세 배는 받지 않으면 수지가 안 맞지.]
"세... 세 배?"
[ 그정도면 딱 되겠군. 사실 괘씸죄로 좀 뻥튀기시키긴 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내놓은 댓가만 해도 굉장히 많았다. 거기서 세 배라 함은, 말 그대로 내 맨몸뚱이를 제외하고 목갑이나 비등까지 탈탈 털어야 하는 것이다. 황궁에서 무명제사서를 훔쳐오기까지 해야하리라.
아니, 그래도 부족하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파천의 가호를 얻어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성질을 냈다.
"아니, 얘기의 논점을 흐리지 마! 애초에 나한테는 그렇게 비싼 댓가를 받으면서 어째서 각지의 인간들에게는 공짜로 배포하는 거냐고?!"
[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군. 아직도 이해를 못 했냐?]
"뭘?"
[ 당장 위급해서 죽어가는 인류에게 치료를 베품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너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내게서 파천의 가호를 얻으려 한다. 자선과 거래의 차이다.]
"크윽. 나도 인류라고!"
[ 글쎄?]
"뭐?"
내 반문에 망량선사는 대꾸하지 않고 뒹굴뒹굴 바닥에 굴러다녔다. 한참동안 그렇게 흙투성이가 되어서 놀고 있던 망량선사가 드러누우며 말했다.
[ 있는거나 잘 써라. 어차피 지금의 네 녀석에게 내 축복은 필요도 없을 거다.]
"아니 씨발, 그러니까 파천의 가호가 뭔지나 가르쳐줘! 알아야 대가를 모으던가 말던가 할 거 아냐!!"
[ 호오. 그 세 배의 보물을 모을 자신이 있다는 거냐?]
"그래!!"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망량선사는 한참 나를 응시하더니 말했다.
[ 파천의 가호란 하늘(天)을 부수는(破) 힘이다. 이는 삶과 죽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측으로 인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며, 이중성이 존재하는 개별적인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음을 뜻한다.]
"......"
[ 뭐, 쓰기 나름이지.]
나는 뭔 개소리를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대라신선들의 축복들은 하나같이 강력했으며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이 놈은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관념적인 설명이라서 어떤 능력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슨 가호라는 거냐?"
[ 너는 멍청해서 이해를 못할 거다.]
"이 고양이 자식이..."
내가 이를 부드득 갈자 망량선사가 서서히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재수없는 검은 고양이가 말하는 게 들렸다.
[ 넌 나와 얘기하려면 아직 멀었어.]
지금까지 한 건 얘기도 아니라는 말이냐?!
[ 인과(因果)를 더 쌓아라.]
나는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여동빈의 사당 앞에 누워 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정신 차렸소?"
"으... 내가 얼마나 잤소?"
"얼마나냐니. 당신이 쓰러진지 반 각도 흐르지 않았소."
그 정도면 갑자기 기절했다가 깨어난 셈이었다. 내가 마른침을 삼키자 망량이 말했다.
"그럼 갑시다."
나는 문득 여동빈의 사당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문을 느끼고 말했다.
"망량. 여긴 왜 여동빈의 사당이 있는 거요?"
"음?"
"여긴 도교의 수호자인 망량선사가 있는 마을이잖소. 그러면 마땅히 망량선사를 기리는 사당이 있어야 하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망량선사에게 공양을 바칠 때 이 사당을 쓰는 것이오?"
여태껏 전생을 하면서 그리 궁금해하지 않았던 사항이지만 왠지 궁금해졌다. 이치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망량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스승님은 원래 섬김도 공양도 필요없기 때문이오."
"뭐...?"
"여동빈에게 공양을 하게 되면 천계에 있는 여동빈은 그 공양물을 얻게 되오. 그리고 신선이나 천계의 영적 존재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인지하고, 신앙하고, 갈망할수록 강한 힘과 활력을 얻게끔 되어 있소. 꼭 그게 힘의 크기와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신선에게 인지도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오."
그렇게 말한 망량이 사당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은 특별하오. 섬김을 받든 그렇지 않든 그 분이 지니신 힘은 증감(增減)이 존재하지 않소. 또한 스승님은 섬김을 받을만한 실체가 천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당같은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오. 그렇지만 마을을 가만히 빈공간으로 놔두기도 뭐해서 대충 민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여동빈의 사당을 놔둔 거요."
"......"
나는 그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왜 그렇소? 증감이 존재하지 않다니... 인간의 신앙심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스승님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니까."
"음..."
모순적이다.
나는 망량선사가 자신의 힘을 불리려고 인간에게 파천의 가호를 내리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관련도 없다니! 나는 문득 방금 전에 망량선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자선과 거래의 차이다.]
자선.
망량선사가 인간을 돕는 건 자신의 이득이 아니라 자선을 베푸는 거란 말인가? 그건 물론 선(善)한 행동이겠지만 어쩐지 껄끄럽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벌레처럼 약한 인간에게 아무런 이유없이 자선을 베푸는 건 왜인가?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설마 망량선사는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을 돕는 건가?"
망량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신(神)의 생각을 필멸자인 내가 어찌 알겠소."
"좋아하지도 않는데 도울 이유가 없잖소?"
"그렇지 않소. 그 반례는 많소. 다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
중얼거린 망량이 말했다.
"백웅.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스승님을 직접 뵈며 수련하지는 않았소."
"뭐?"
"처음 스승님을 모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나도 사제도 현몽(現夢)의 술법으로 가르침을 받았소. 당신이 본 흑묘(黑猫)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꿈에서만 뵌 게 사실이지."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당신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소?"
"흠..."
망량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무얼 생각하든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으로 현신하셨소."
"미녀를 생각하면 미녀로 현신한다는 말이오?"
"그런 식이오. 다만 나는 스승께 존경심을 지니고 있기에 임의의 형상을 상상하곤 하오. 꽤 근엄한 모습이지."
쓴웃음을 짓는 망량은, 마치 자기자신에게도 허물이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긴 무엇을 생각해도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결국 자기자신을 투영하는 셈이 아닌가? 어떤 식이든간에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잠시 후 망량이 말했다.
"일단 사불상을 불러 보시오."
"그러지."
나는 허공에 크게 외쳤다.
"사불상!!"
휘오오오
그러자 갑자기 눈 앞의 허공에 오색구름이 뭉쳐들더니, 그 한가운데에서 마치 현실을 비틀어 찢듯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점토처럼 뒤죽박죽 엉키더니 이윽고 기이한 짐승의 모습을 만들었다.
목은 낙타, 뿔은 사슴, 꼬리는 당나귀, 발굽은 소와 비슷하다. 나는 산해경에서 봤던 사불상의 외양묘사와 대동소이하자 놀랐다. 산해경은 진짜로 기이한 요수들을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다만 사불상은 전신에 용린(龍鱗)이 돋아 있었으며 신령스러운 기운을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기는 딱 준마와 비슷하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사불상과 눈을 마주치고 있자 망량이 경고했다.
"영수 사불상은 지선(地仙)보다 훨씬 높은 존재요. 그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엥?"
나는 황당해서 망량을 쳐다보았다.
"그 말대로라면 과거 지선 망량보다 더 높은 존재라고? 이건 그저 짐승 아니오?"
"아니오! 천계의 영수는 신수(神獸)이며 천계의 사도요. 게다가 사불상은 천계의 절대자인 원시천존께서 태공망에게 직접 내린 영수. 그 격은 기린(麒麟)이나 봉황(鳳凰)에 못지 않소.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마시오."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해도..."
나는 곤란함을 느꼈다. 어쨌든간에 영수 사불상이니 타고다니는데 쓰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등에 타는 것 자체가 불경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 못 타는 영수가 대체 무슨 가치야?'
내가 우물쭈물할 때였다.
[ 인간이여. 그대가 내 등에 타는 걸 허락하노라.]
"헛."
나는 갑자기 들려온 영언(靈言)에 사불상을 쳐다보았다. 사불상이 보낸 게 맞는지, 사불상이 천천히 몸을 돌려서 나보고 타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불상의 등 위에 탔는데 사불상의 말이 이어졌다.
[ 어디로 가고 싶은가?]
"음... 그러면 북극(北極)으로..."
[ 알겠다.]
나는 정말로 북극으로 가고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사불상의 이동속도를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불상 주변의 공간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이더니 기이한 섬광을 뿜어내었다.
파아앗 -
엄청난 추위가 느껴졌다. 나는 내공으로 혹한을 가볍게 버텨냈지만 이 추위는 결코 범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천지가 새하얗게 뒤덮여 있는 걸 보자 즉시 알 수 있었다. 사불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북극에 온 것이다.
"......!!"
[ 이걸로 끝인가?]
공간을 이동해서 즉시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원하는 곳으로 공간이동할 수 있는 건가?"
[ 공간을 구부리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설령 수천 리가 떨어져 있어도.]
"오오...!!"
나는 신기함과 함께 경탄을 느꼈다. 과연 사불상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게는 같은 성능을 지닌 비등이 있었기에 왠지 시들한 기분도 함께 느껴졌다. 비등 또한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건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점을 사불상에게 이야기하자, 사불상은 약간 오기가 생긴 듯 대꾸했다.
[ 그래? 그런 도구에 질 수 없지. 내 또 다른 능력을 보여 주겠다!]
"어떤 능..."
파앗!
"으아앗?!"
나는 난데없이 기화요초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산세에 도착하자 놀랐다. 햇살은 따스하고 천지에 생명력이 가득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상세계가 아니었다. 그렇게 확언할 수 있는 이유는 사방에 오색구름과 향기가 가득했고 난생 처음보는 기암괴석들이 만장단애를 이루고 있었으며 하늘에 빛의 강이 흘렀기 때문이다.
"설마 여긴..."
[ 금오도(金烏島)다.]
으스대듯 말한 사불상이 말했다.
[ 절교(絶敎)의 중심지로서 요괴선인들의 본거지이다. 원래는 봉신전쟁 이후 무수한 결계로 봉인되어 있어서 들어갈 수 없지만 나는 자유자재로 들어올 수 있다. 그 비등에 결계를 뚫는 능력은 없을 터! 이는 천계에서 오로지 나만이 가진 능력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은 지상세계에서 보지 못했는데."
[ 당연하다. 이 곳은 암천향과 마찬가지로 이계(異界)니까.]
나는 사불상의 말이 옳다는 걸 마음 속으로 인정했다.
' 그렇군.'
비등으로는 천계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천계에는 모종의 결계가 쳐져 있어서 비등으로 가 보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불상은 그 어떤 차원공간 결계가 펼쳐져 있어도 방어를 무시하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기린이나 봉황에 비견되는 영수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사불상을 통해서 금오도에 들어왔지만 다음 전생 때 비등을 이용해서 금오도에 올 수는 없다. 좌표가 기억되었다고 해도 방어막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사불상을 타야 이계 금오도에 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불상 소환능력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에 흡족함을 느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더 낫다."
[ 훗... 이제 알겠느냐.]
"그럼 돌아가자."
[ ......]
"사불상?"
사불상은 잠시 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차원무시 능력은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어...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이어진 사불상의 말에 나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 지금 당장은 못 돌아간다!]
"이런 씨발!!"
그렇다.
나는 만 하루 동안, 요괴선인들의 고향이자 인간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악(惡)의 이계인 금오도에서 버텨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