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1 천계(天界) =========================================================================
화룡신검을 찾는 일이 허탕을 치자, 나는 별 수 없이 나머지 기연을 찾아서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수요의 유적으로 가서 흑백련을 최대한 많이 따서 목갑에 우겨넣었으며 천년설삼도 채취했다. 그리고 유적 내부로 들어가서 금괴가 들어있는 목함을 얻고 수호자 거대거미를 쓰러뜨린 후 수요 막야를 획득해서 삼황오제 전욱의 동상도 얻었다.
그리고 거대거미의 몸뚱이에 순어구를 갖다대서 독기를 제거한 후 거미의 영단을 얻어서 목갑에 추가로 집어넣었다. 지금까지는 흑백련, 천년설삼만 갖고 있었는데 거미영단이 전생과정에 추가가 된 셈이었다. 나는 수요의 유적에서 볼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태경촌 화씨가문의 서재에 가서 은빛 봉황조각을 획득했다.
' 거의 다 되었나.'
굳이 남은 과정을 말하자면 성련의 재배지로 가서 성련을 따던가 황궁 내황각에 가서 무명제사서를 얻는다던가 수정석비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황궁세력을 자극할 위험이 있는데다가 당장 절실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망량의 의견을 듣고 가져올 시기를 정하기로 마음먹은 후 진랑곡으로 가려고 했다.
멈칫
"아 맞다!"
나는 생각난 김에 동영으로 이동했다. 동영의 천황궁으로 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귀와 후귀의 식신이 등장했고, 나는 마치 반가운 옛 친구를 보듯이 손을 흔들었다.
"여어!"
콰과광
전귀와 후귀는 문답무용이라는 듯 나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멸혼보로 피하면서 외쳤다.
"미호! 할 말이 있는데 공격 좀 멈춰 봐!"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귀와 후귀의 공격이 멈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귀한 옷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부채를 들고 걸어나왔다.
"넌 누구지?"
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건 미호가 동영 천황의 아내로 변신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기뻐서 씨익 웃었다.
"반가워 미호!!"
타다닷
"뭣?!"
나는 달려들어서 미호를 안았다. 미호는 난데없이 내가 안자 깜짝 놀라면서 둔갑술로 빠져나갔지만 나는 멸혼보를 가속시켜서 한번 더 안았다. 또다시 안기자 미호는 얼굴을 여우형태로 바꾸면서 으르렁거렸다.
[ 뭐냐 인간! 무례하구나!!]
미호는 당장이라도 여우불꽃을 토해낼 것 같은 기세였다. 그야 난생 처음보는 인간이 자신을 안으려 들면 경계심을 가지는 게 정상인 것이다. 나는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너무 좋다."
얼마만에 보는 미호인가.
[ ......]
미호는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지금 내 행동이 말도 안 되고 황당한 건 알고 있다. 이게 내 전체 계획을 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행동이 미래에 내 죽음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미호를 좋아한다.
미호를 보고 싶고, 끌어안고 싶고, 느끼고 싶다. 예전까지의 생에서는 미호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억지로 참아 왔지만 그리움이 난데없이 사무치면서 미호에게로 와 버리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문득 미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내게 강제로 끌어안겨 있던 미호는 한참동안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보다가 여우로 변한 얼굴을 인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섬섬옥수를 들어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인간."
쾅
그러더니 미호가 힘을 발휘해서 나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자세를 잡자 미호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본녀를 끌어안다니 색마(色魔)나 다름없구나. 너같은 파렴치한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지!"
"미호. 나는 백웅이라고 해."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아직은 안 되겠지만 곧 다시 만나러 올게. 그 때는 네가 가장 원하는 걸 이뤄줄 수 있을 거야. 꼭 약속할게."
그러자 미호가 소름돋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진심으로 공포심을 느낀 듯한 표정이었다.
"너... 너, 저리 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무슨 소리냐니..."
"저리 가랏!!"
미호는 명백히 당황해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수백 년 묵은 구미호라서 왠만한 일에는 능글맞게 대하며 표정변화조차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는데, 지금 내 말을 듣자 마치 끔찍한 변태를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저건 미호가 진심으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왜 저러지?
미호의 소원인 승천을 이뤄주면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인데?
후와아악
하지만 나는 이내 미호가 진심으로 나를 죽일 작정으로 화염술을 소환하며 전귀와 후귀를 부리기 시작하자 깨달을 수 있었다.
' 아...!!'
눈 앞에 있는 미호는 내가 아는 미호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 호법사자의 풍탄을 대신 맞았던 미호가 아니다.
나와 상호교감하면서 사랑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키웠던 미호가 아니다.
최악의 위기에서 같이 죽어달라는 부탁에 씩 웃어줬던 그 미호가 아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생면부지의 타인(他人)이다.
진작에 깨달았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느꼈던 사무치는 그리움이 쌓여서 판단력을 그르치게 만든 것일까? 내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움이 몰아치면서 갑자기 멍해졌다.
콰과광
"미호, 미안!"
슈욱
나는 폭음을 뒤로 하고 비등을 써서 중원으로 되돌아왔다. 미호와 싸워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모를 평화로운 시냇가에 앉아서 수류를 쳐다보던 나는 생각했다.
' 또 바보짓을 했어.'
바보짓을 했다는 건, 지난 번 생에 뜬금없이 죽어버린 충격을 무엇으로든 정서적으로 해소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방금 전에 그 탈출구로 미호를 생각했고, 그녀와 장난스럽게 교감하면서 내 불안감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보다시피 미호의 공포를 샀을 뿐이다.
몸이 저주때문에 녹아서 죽었을 때의 충격은 굉장했다. 또한 황궁 최대의 강적인 주작을 편법으로 쓰러뜨릴 수 없고, 반드시 정공법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굉장했다. 나는 방금 전에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해버린 셈이다. 백련교주의 위의에서 느꼈던 압박감이 증폭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너무 외롭고 힘들다.
나는 정말로 주작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끝도 보이지 않는 암도(暗道)를 희미한 잔향에 의지한 채 한도 끝도 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망량과 검마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며 어떻게든 달려왔지만,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울적한 기분이 폭발하며 내 마음속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다리 사이에 고개를 박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참동안 침묵했다. 이런 자세로 있다 보면 눈 앞은 깜깜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첫 번째 삶에서 힘들 때면 줄곧 이렇게 침묵하곤 했다.
"......"
흥!
나는 잠시 후 콧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엉덩이를 털었다.
그냥 그런 것 뿐이다.
지금은 단지 그런 순간이었을 뿐인 것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진랑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망량에게 흑요석을 전달해서 기억을 전승시키고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망량은 바로 직전에 미호를 찾아갔던 기억과 감정을 보았는지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소?"
"그냥 내 실수였소."
"힘들면 말하시오.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겠소."
망량의 걱정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이 약해질 때도 있는 거지."
"음... 그렇다면 별 말 하지 않겠소."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내 질문에 망량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주작이 [옛 지배자]에게 부탁해서 자기자신에게 응보의 저주를 걸어뒀다면, 일이 까다롭게 된 것이오. 굳이 칠살마을의 반전권능이 아니라 해도 주작을 죽인 자는 똑같은 저주를 받게 되니까."
즉 주작을 없앤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
주작을 없애는데 까다로운 조건이 붙은 셈이었다. 주작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는 건 누가 됐든간에 섣불리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광이나 백련교주는 주작을 죽였는데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잖소?"
"그거야 영혼은 멀쩡했으니까 '죽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만일에 여벌용 육체를 모두 없애고 주작을 완전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 누군가는 주작과 함께 동반자살을 해야만 하는 셈."
"......"
"정말이지 까다롭군..."
투덜거리던 망량에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멋대로 행동하다 죽었는데... 화나지 않소?"
망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말마따나, 그럴 때도 있는 거지."
"......"
"달리 말하자면 당신이 자기 목숨으로 시험해본 덕에 이득을 봤다고도 할 수 있지. 다 진행해 놓고 최종결전도 이겼는데 주작의 저주때문에 누군가가 죽으면 그게 더 손해일수도 있지 않소? 다 이겼는데 당신이 자살할 수도 없잖소. 크크."
낄낄대던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단순하게 갑시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요."
단호하게 말한 망량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당신은 죽어서 전생한다고 보고, 이번 회차에 뭔가 굉장한 걸 얻으려고 하지 맙시다. 내가 보기에 이번 회차에서 당신이 얻어야 할 것은 기연이 아니라 시간이오."
"시간?"
"그렇소. 시간."
이윽고 나는 망량과 함께 삼황내문의 봉인지로 갔다. 망량은 삼황내문을 갈무리해서 단번에 강력한 영력을 손에 넣었고 그 후에 망량선사가 있는 마을로 갔다. 그리고 천우진의 경계를 통과해서 수기공양의 의식을 진행하자, 망량은 말했다.
"태허천존이시여! 서왕모의 축복을 얻고 싶습니다."
[ 아, 아니 잠깐...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노라.]
나도 옆에서 태허천존을 윽박질렀다.
"빨리!"
[ 알았다...]
태허천존의 다음 차례로 서왕모가 나타났다. 서왕모가 모습을 드러내자 망량은 힐끔 내게 눈짓을 했고 나는 당초 이야기를 맞춰둔 대로 입을 열었다.
"서왕모님. 미호의 금제를 풀어 주십시오."
이후는 예전처럼 서왕모가 미호의 금제를 풀어줌과 동시에 내게 10년간 호위임무를 맡기는 식이 되었다. 그리고 서왕모는 자신의 기운이 남아있는 탓에 축복을 내리지 않고 다음 순서로 이동했는데, 그건 예전에 보았던 남화노선이었다.
"다음!"
남화노선이 당황했다.
[ 아니?! 아무리 제망량의 제자라지만 인도 따위가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다음이랬잖소. 귀 먹은 거요?"
[ 으으...!!]
망량은 남화노선의 차례를 가볍게 넘겨버리고는 여동빈의 차례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미 여동빈과는 단말이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따로 얻을만한 축복이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여동빈에게 질문했다.
"여동빈. 혹시 무예의 재능이 상승하는 축복같은건 없습니까?"
내 질문에 여동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 연자여. 날로 먹으려 들지 마라.]
"......"
나는 뻘쭘해져서 여동빈의 다음 차례로 넘겼다. 그러자 아주 간만에 무당파의 개조사, 원원자 장삼봉이 천우진에게 강신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의 강신의식을 진행하면서 속으로 긴장했다.
' 강신차례를 넘기면서 여기까지 오는 건 두 번째로군.'
달리 말하자면 장삼봉 이후로 넘긴 적은 달리 없었다. 장삼봉은 나를 보더니 말했다.
[ 그대에게 축복을 내리고 싶으나 내 기운이 있구려... 그대에게 다음 차례로 넘길 것을 권하고 싶으나... 허나...]
"허나?"
[ 이 천우진이라는 술법사의 체력이 서서히 한계에 가까워지는구려...]
"......"
천우진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면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대라신선을 무려 다섯 명 이상 받아들인 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영매라도 이 정도 되면 미치거나 죽는 게 정상이었다. 나는 힐끔 망량을 쳐다보았지만 망량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래도 넘기는 게 낫소."
"음... 넘겨 주십시오."
[ 알았소...]
원원자 장삼봉은 자신의 차례를 넘겼다. 다음 차례는 천신 예였지만, 그의 축복은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으므로 두말않고 넘겨버렸다.
파앗!
이번에 대라신선의 기운이 내려오는 걸 본 나와 망량은 긴장했다. 여기서부터는 본 적이 없는 차례였다. 과연 장삼봉 다음은 어떤 대라신선이 강림할 것인가? 이윽고 천우진의 눈빛이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물들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 나는 강상(姜尙)이다.]
그와 동시에 망량이 침음성을 내었다.
"태공망(太公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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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예의 순서가 빠져있어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