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6 천계(天界) =========================================================================
19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저주때문에 몸이 녹아 죽었지만 막상 전생하고 나니 고통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신경계까지 한번도 녹아버린 탓에 고통이 적었으리라. 단지 천천히 죽어가면서 느꼈던 그 절망감과 좌절감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계 수련도 남아 있었고 천령단의 비밀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난데없이 주작에게 응보의 저주를 받아서 죽을 줄이야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 도저히 예상도 못 했어.'
이미 망량과 진소청을 통해서 이야기를 다 조율해 둔 상황이었다. 신의 힘으로 주작을 없애버리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주때문에 죽을 거라는 상상은 보통 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운사가 점괘로 경고해준 시점에서 망량과 논의해보았어야 하긴 했다. 하지만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는 일이 어떤 변수가 있을까 싶어서 성급하게 칠살마을로 간 게 잘못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 괴롭다.
미호가 보고 싶다...
갑자기 울적해져서 눈가를 닦았다. 가슴이 아렸다.
나는 잠시 후 충격을 딛고 18번째 삶에서 얻었던 것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 우선 남궁가 놈들의 위선을 알아냈고, 삼황오제 순의 보패인 순어구가 있는 위치를 알아냈어. 그리고 진소청에게서 삼보절기의 기초를 얻어냈고 망량에게서 천신령의 술법을 배웠고, 제갈사에게서 이혼대법의 기초를 배웠다. 그 외에도 뇌신류에서 이광의 동기뻘 되는 전승자인 범균과 정윤보의 소재를 알아냈다.'
얻어낸 게 많다.
그러나 잃어버린 걸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 천계 곤륜산의 입산권리... 그리고 천령단의 비밀... 그리고 목숨...'
셋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전체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비명횡사해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쳇. 그러면 이번에는 조금 움직이는 걸 달리 해야겠군..."
천암비서를 얻고나서 비등을 얻는 것까지는 그대로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에 존재하는 순어구라는 보패를 확인한 이상, 동선(動線)은 바뀌어야만 했다. 나는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암비서를 얻은 후 격렬하게 산동까지 달려서 비등을 얻었다. 비등을 얻자마자 나는 이제 구출해야 할 무리가 총 3개가 되었다는 걸 되새겼다.
해적무리 혈도단에 붙잡혀 있는 여인들.
뇌옥에 붙잡혀 있는 황연 대장군과 포로들.
남궁세가의 비처에서 학대받고 있는 여인들.
문득 황당해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 세상에는 개새끼가 왜 이리 많다는 말인가?'
인신납치는 물론이고 살인과 폭력이 천지에 횡행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세상이 이렇게 개판이라는 걸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나 자신은 촌장집에서 노예처럼 살면서 울적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평안하고 평범해 보였던 것이다.
이건 이족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인간은 이런 동물이란 말인가?
하지만 더 깊은 생각을 해 봤자 우울해지기만 할 뿐 상황변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에 콧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흥!"
한숨을 쉬면 입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콧숨을 쉬면 그나마 힘이 덜 빠져나간다. 지혜랄 것도 없지만 살아가면서 너무 개같은 일이 많았던 내가 얻게 된 요령이었다.
' 다 구해야겠지만 먼저 뇌옥부터 가야겠지.'
어느 쪽이 특별히 불쌍하다느니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뇌옥에는 목갑이 있기 때문에 목갑부터 얻어야 나머지 일정이 순조롭기 때문이었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곧장 뇌옥으로 가서 거대 두꺼비를 마주쳤다. 나는 여동빈의 강신을 쓸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어서 직접 싸우기로 했다.
"삼보절기(三步絶技)를 연습하자."
[ 끄오오오!!]
나는 이윽고 거대 두꺼비와 미친듯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거대 두꺼비의 덩치가 너무 커서 죽이는 데 시간을 걸리는 걸 제외하면, 이제 처치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나는 진소청에게 그간 배웠던 삼보절기의 요령을 체득하기 위해서 수련을 시작한 셈이다.
[ 절기 칠성둔영(七星遁影)은 북두(北斗)의 움직임에 따라서 만변(萬變)하오. 그리고 칠성의 기운이 극으로 차오르면 위치가 반대가 되지.]
칠성둔영의 요소를 생각해 본다.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 일곱 개의 별이 머릿속에서 휘돈다. 나는 칠성둔영의 보법에서 칠성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는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북두의 움직에 따라 만변한다는 것, 그리고 위치가 반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배워도 머릿속에 와닿지를 않았다.
뭔가 특이한 변화를 은유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파밧
[ 자기자신을 북두칠성의 축으로 잡고 나머지 육성(六星)의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떠올리시오. 그렇게 해야 별을 이어붙이면서 천지인의 삼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오.]
나는 이를 악물고 칠성둔영의 보법을 펼쳤다. 거대 두꺼비의 공격을 피하면서 진소청의 가르침을 실현하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너무나 추상적인 요결이었기에 실전에서 써먹을 수가 없었다.
' 이해가 안 돼!'
결국 나는 이백여 초 동안 계속해서 칠성둔영만 주구장창 펼치다가 결국 여동빈을 부르고 말았다. 더 피할 수도 있었지만 거대두꺼비와 오래 싸워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 마(魔)를 척결하러 내가 왔...]
' 여동빈!'
여동빈이 강신하자마자 나는 비명을 지르듯이 심어를 날렸다. 막 내 몸을 움직여서 거대두꺼비를 물리치려던 여동빈은 흠칫거렸다. 그리고는 이형환위를 써서 거대두꺼비의 손공격을 피해낸 여동빈이 반문했다.
[ 무슨 일인가 연자여? 내가 저 마물을 척결하겠다.]
'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 뭐가 문제인가.]
' 절기 칠성둔영(七星遁影)은 북두(北斗)의 움직임에 따라서 만변(萬變)하는데, 자기자신을 북두칠성의 축으로 잡고 나머지 육성(六星)의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떠올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 ......]
여동빈은 황당한 듯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검을 쭉 뻗어서 거대한 강기를 거대두꺼비에게 날렸다.
콰과광!
[ 꾸에에엑!!]
거대두꺼비는 단숨에 팔을 포함해서 몸뚱이의 일 할이 날아가버린 모양이었다. 거대두꺼비가 독혈을 뿜어내며 푸들거릴 때 여동빈이 말했다.
[ 재밌는 무공을 연구하고 있구나, 연자여. 무공의 기억을 보니 열심히 수련한 듯 하구나.]
기특하다는 듯 중얼거린 여동빈이 말했다.
[ 과연 천지인(天地人)을 제압하는 삼보(三步)인가. 기본에 충실한 좋은 무예로다. 무공 창시자의 꼼꼼한 성격이 엿보인다.]
' 헉...'
나는 속으로 놀랐다.
칠성둔영의 발전형이 삼보절기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여동빈은 바로 그 극점(極點)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알아챈 것이다. 그 천재 진소청조차도 한 달 동안 혹독한 훈련 끝에 겨우 복원해낸 절기인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놀라자 여동빈이 말했다.
[ 연자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도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이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동빈은 사방에서 떨어지는 수천 개의 독혈을 가볍게 피하며 대꾸했다.
[ 연자는 검천(劍天)의 경지에 올라있지. 그렇기에 하수들의 검공(劍功)을 보면 수련기간과 수준, 원리, 장단점을 일견(一見)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 그렇습니다만...'
[ 마찬가지다. 나는 그 칠대절학의 창시자와 대등한 경지에 올라있기에 완성형이나 장단점을 바로 알 수 있을 뿐이노라.]
' ......!!'
여동빈은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전율했다.
' 이... 이게 투선(鬪仙)의 위력인가?'
동격 이하의 무공을 보자마자 즉시 파악해버리는 무예의 안목! 이것은 단순히 달인의 경지라고 치부하기에는 초능력(超能力)에 가까웠다. 인간의 경지에서 여동빈을 따라하기는 커녕 발끝도 흉내낼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그저 편리한 존재로만 여겼는데 무예수준이 오르면 오를수록 여동빈에게 경외심이 느껴졌다.
검 한 자루로 수천의 마물을 베고 도륙하여, 무도(武道)의 끝에 등선하여 투선(鬪仙)이 된 인류영장의 수호자!
그것이 바로 화룡의 화신이자 추앙받는 검선 여동빈인 것이다.
여동빈은 설명이 끝나자 바로 허공에 이기어검을 수십 개나 띄웠다. 강고한 의념으로 만들어진 이기어검은 마치 광선처럼 빛나고 있었고, 이윽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서 두꺼비의 살거죽을 폭발시켜버렸다.
퍼퍼펑!
이어진 것은 압도적인 도륙이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거대한 두꺼비를 해치운 여동빈이 말했다.
[ 연자의 무공수련에 도움을 주고 싶으나, 그 보법의 경지는 현묘한 것이라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 없다. 일조일석으로 연마하는 게 좋으리라.]
그리고 내 몸에서 강신이 풀리려 할 때였다. 나는 급히 천신령의 술법을 이용해서 십지(十指)에 불을 밝혔고, 그러자 몸이 덜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아니?]
' 죄... 죄송합니다.'
[ 연자가 술법으로 내가 떠나가는 걸 막았는가?]
' ......'
그랬다.
천신령의 술법에는 영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이용해서 여동빈이 떠나가는 걸 막은 것이다. 여동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대라신선급의 술법이구나. 연자는 어찌 그 술법을 얻었는가?]
하긴 삼황내문에서 비롯된 술법이니 대라신선급인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투선인 여동빈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
'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원하는 게 있어서 나를 멈춰세운 것일 터. 용건을 말하라.]
여동빈의 준엄한 말에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 저는 무예의 재능이 일천해서 수십 년이 걸려도 이 삼보절기를 깨닫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부디 어떻게든 도움을 주실 수가 없겠습니까? 도와 주신다면 반드시 그 빚을 갚겠습니다.'
[ ......]
내가 간절하게 말하자 여동빈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여동빈이 말했다.
[ 투선인 내가 인간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인과율로 금지되어 있는 것... 허나 연자는 나와 인연의 단말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 금지될 일은 아닐 것이리라.]
' 감사합니다!'
나는 기쁜 생각이 들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백련교주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천계의 투선 여동빈이 늘 내 근처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의 깨달음이 미진할 때는 여동빈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내심 기뻐하고 있을 때 여동빈이 말했다.
[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도와줄 게 없다.]
' 네? 무슨...'
[ 연자는 이미 신(信)으로 시작하여 해(解)로 이어지며, 입멸(入滅)하여 공(空)을 깨달아 천둔(天遁)이 되는 천둔검법의 5단계 요결을 모두 습득했다. 그리하여 본디 선검(仙劍)의 경지에 도달해야 옳은 것!]
' ......'
[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천둔검법의 요결은 그대 내면의 모순을 치유하는데만 쓰여, 그대를 올바른 선검의 경지에 올려놓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천둔검법을 더 가르칠 수는 없다.]
나는 아차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마물떼거리를 뚫을 때 여동빈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 때 천둔검법 요결의 도움을 빌려서 내가 겪고 있던 검류의 혼란을 해결하려 했다. 그 당시에 여동빈에게서 천둔검법 요결을 모두 전수받음으로서 혼란은 해결되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정상적인 무인이 익히면 단번에 선인급 검술을 얻는 것인데... 검류의 혼란을 해결하는데 잠재력을 써 버려서 사라졌구나!'
후회가 막급하다. 하지만 그 때의 선택을 딱히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천둔검법이란 초식이 존재하지 않는 신선의 검예이기에 더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당황하자 여동빈이 슬며시 말했다.
[ 허나... 방법이 하나 있다.]
' 무엇입니까?'
[ 내가 인간시절에 쓰던 보패 화룡신검(火龍神劍)에는 내 스승 화룡진인의 깨달음이 비장(秘藏)되어 있다. 나 또한 그 깨달음을 통해서 강대한 무를 얻었으니, 연자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검선 여동빈의 보패 화룡신검!
듣기만 해도 뭔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여동빈이 천계의 화룡을 소환하던 장엄한 풍경을 몇 번이고 보지 않았던가? 화룡신검의 비결을 익히면 비슷한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목표를 잡았다.
' 좋아, 이번 생에는 화룡신검부터 찾자!'
18번째 삶의 좌절과 실망을 이겨낼 수 있는 목표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