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5 천계(天界) =========================================================================
주작을 없애게 되면 앞으로의 행보는 탄탄대로일 게 분명하다. 직접 싸워서 쓰러뜨리지 않는다는 건 조금 찜찜했지만, 어려운 싸움을 일부러 하는 것이야말로 바보일 것이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소? 주작은 당신의 아버지요."
"그는 이미 마도(魔道)에 빠진 마인(魔人)에 불과하오. 알량한 혈육의 정을 잊지 못하면 그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자들이 죽게 될 것이오."
망량은 무겁게 말을 이었다.
"봤잖소. 수백 수천만의 백성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옛 지배자]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복마전의 지배자가 강림했다는 것은 [제물]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그 순간 4개 성에 지배자의 마력이 뻗쳐서 지옥도가 펼쳐졌으리라. 세상의 멸망이나 다름없는 악몽같은 광경일 게 분명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작은 막아야 한다. 나는 망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겠소."
"아, 백웅."
망량이 깜박했다는 듯 말했다.
"뇌신류를 데리고 가기 전에 제갈사를 만나서 그가 만든 총기를 북룡대에 전해 주시오."
"그 일이 있었군."
나는 망량의 말에 지체없이 제갈사에게로 향했다. 제갈사는 수정석비 근처에서 뭔가를 중얼중얼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만들어 내었어야 할 총기같은 건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제갈사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총기를 받으러 왔소. 내가 요동성까지 운반할 거요."
"아, 그건가."
"총은 어딨소? 보이질 않는구려."
그러자 제갈사가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쳤다.
쿠르르릉...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수천 정이나 되는 총기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서역인이 가지고 있던 최신 총기라는 걸 알아채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총기를 주워서 살펴보자 제갈사가 말했다.
"얼른 갖고 가라.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으니까."
"무슨 일?"
"알아서 뭐 하게? 도와줄거냐?"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겠소."
제갈사는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얼른 눈 앞에서 사라져라."
"... 성격 정말 개떡같군. 꼭 그렇게 말해야 하오?"
"그럼 뭐? 뭘 원하는데?"
신경질적으로 제갈사가 말하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혼대법에서 백(魄)을 좀 더 쉽게 빼내는 법을 알려 주시오."
"아, 기초를 수련하고 있었지?"
"이제 수련한지 꽤 되어서 봐주었으면 하오."
제갈사는 탐탁치 않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이 놈의 백을 빼내 봐라."
휘익
제갈사가 구석에서 꺼내서 던진 것은 웬 복실복실한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사람이 키우는 녀석인지 나를 봐도 물거나 짖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강아지의 이마 쪽에 갖다대었다.
그 순간이었다.
왕!
강아지는 갑자기 내 손을 물려 하다가 내가 피하자 그대로 품 속에서 뛰어서 쏜살같이 제갈사 쪽으로 갔다. 제갈사는 강아지를 안아 들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말했다.
"아이구 멍청한 놈아. 그거 하나 못 하냐?"
나는 방금 전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살기(殺氣)를 전혀 뿜지 않았는데 왜..."
"어설프게 백을 건드리려 하니까 방어본능이 자극된 게 아니냐."
"아니 왜 뜬금없이 강아지의 백을 뽑으라고 시키는 거냔 말이오."
"강아지 하나 어찌할 수 없는데 사람은 어떻게 하게?"
"그런 당신은..."
다음 순간, 제갈사에게 쓰다듬어지고 있던 강아지가 갑자기 내 쪽을 보며 사람 목소리를 내었다.
"잘 하잖아."
"헉!"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강아지가 제갈사인 양 목소리를 내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제갈사는 낄낄대더니 말했다.
"이게 이혼대법이다. 내가 보기에 네 녀석은 앞으로 3년은 더 기초를 쌓아야 해."
"큭..."
"굳이 요령을 가르쳐 주자면 상대방을 혼백의 결정체로 파악해야 한다. 그럴만한 [눈]이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런 재능이 없다면 죽어라 연습해서 흡인력을 늘리는 수밖에."
결국 수련부족이란 뜻이었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곱씹은 후 말했다.
"알았소."
제갈사에게서 빠져나오면서 나는 그를 힐끗 뒤돌아 보았다. 그는 동물을 좋아하는지 내가 가거나 말거나 강아지와 재밌게 놀고 있었다. 사람을 마치 장난처럼 죽일 수 있으며 심지어 자기 혈육조차도 망설임없이 회칠 수 있는 광인(狂人)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사람은 싫어도 동물은 좋아하는 건가?'
역시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총기를 모아서 목갑에 넣고는 바로 요동성으로 이동해서 황연 대장군에게 총기 수천 정을 주었다. 황연 대장군은 총기를 받아들자 놀라운 듯 말했다.
"엄청나군... 이렇게 뛰어난 병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네."
"마음에 드십니까?"
"이 병기는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일세."
"그렇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나는 황연 대장군에게서 빠져나와서 바로 진랑곡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황연대장군과 함께 동석했던 요동성주가 말했다.
"잠깐. 어르신께서 자네보고 멈춰보라 하는데..."
"네? 어르신?"
쉬익!
그 때였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홀연히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 자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므로 소름돋는 기분이 들었다.
사내의 모습은 독특했다. 고려의 복색같지 않은 고유한 복장이었지만 묘하게 중원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옷이었다. 거기에 외모 자체도 준수한 미남이지만 워낙 창백해서 당장이라도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키는 멀대처럼 컸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이하다'라고 느끼게끔 했다.
멀대 사내를 보자마자 나는 예전에 그를 일견(一見)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운사(雲師)!'
십이율주를 모시는 삼사(三師)의 일인!
대단한 술법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며, 예전에 내가 신단수가 있는 마을에 들어가려고 할 때 문을 열어준 적이 있었다. 운사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흉조(凶兆)다."
그렇게 말한 운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이여. 대가를 하나 내놓아라. 그러면 점괘와 함께 흉조를 피할 법을 알려 주리라."
"......"
나는 뜻밖의 제안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제안을 거절하겠지만, 상대방은 어쩌면 호법사자와 동급일지도 모르는 십이율주 직속의 대술법사였다. 그런 자가 흉조를 느끼고 점괘를 봐 주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뜻 대가라는 걸 내놓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 에이, 밑져야 본전이지.'
나는 주섬주섬 비등에서 성련을 꺼내서 내놓았다. 성련을 힐끔 바라보던 운사가 고개를 저었다.
"신기(神氣)가 적어서 별로다. 다른 거."
나는 흑백련을 꺼냈다.
"방금 전보다는 낫지만, 네 흉조를 물리치기에는 부족하다."
흑백련이 통하지 않자 나는 황당했다. 이걸로도 안 된다면 뭘로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내 목갑에 있는 귀한 물건을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서양인을 꺼내고 말았다.
"What the!!!!!"
아차.
서양인은 꺼내지자 마자 깜짝 놀라서 자신의 총을 찾는 기색이었다. 나는 재빨리 놈을 제압해서 꿇려앉혔다. 동석해 있던 황연 대장군과 요동성주는 이미 칼을 뽑아든 상태였다. 나는 민망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집어넣겠습니다."
"그 놈은 서양 놈인가?"
"네."
흥미롭게 서양인을 쳐다보던 황연 대장군이 말했다.
"어디 말을 시켜보게. 나는 서역어를 약간 알고 있어서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군."
"아..."
나는 황연의 말에 서양인의 아혈을 풀었다. 서양인은 발광하듯 뭐라고 외쳐대었는데 그 태반이 욕설인 건 당연해 보였다. 한참동안 서양인의 발광을 지켜보던 황연 대장군이 말했다.
"화란(和蘭)의 홍모귀(紅毛鬼)는 아니군. 양이(洋夷) 중에서도 아주 멀리 온 것 같고... 아라사 놈도 아닌데... 흠..."
서양인의 복장과 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보던 황연 대장군이 탄성을 질렀다.
"아!"
"어디 놈입니까?"
황연 대장군이 서양인의 가슴팍에 달려있는 이상한 문장을 가리켰다.
"내 기억으로는 이 문장... 분명히 대영제국(大英帝國)이라 자칭하던 놈들의 사신(使臣)이 하고 있었네. 황실에 서역의 사신이 찾아온 일이 있었지."
"대영제국? 제국이라 칭할 정도로 거대한 국가란 말씀이십니까?"
"나야 모르지. 아무튼 엄청나게 먼 타국인이라 할 수 있네."
제국이라.
나는 대명제국 외에는 제국이라고 칭할만한 나라를 본 적이 없었다. 머나먼 천축 쪽에 가면 그런 나라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쪽까지 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왠 서양의 나라가 제국을 자칭하고 있으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 굉장히 영토가 큰 나라인가 보군.'
황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때 내가 듣기로는 서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왕국이라 했네. 이 놈을 어디서 잡았는가?"
나는 남부대륙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곳에서 원주민을 학살하던 서양인 부대를 몰살시킨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황연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현재 서방의 열국들은 발달된 조선 항해기술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나 보군. 그 말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명에도 마수를 뻗칠것일세."
"과거 정화도 원정을 나가지 않았습니까?"
"글쎄... 이 놈들의 기술력은 차원이 달라 보이는군."
아까 내게서 받은 후장식 총기를 만지작거리던 황연이 말을 이었다.
"이 총기를 가진 북룡대의 정예 3천 명이 있다면, 그 열 배의 적을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몰살시킬 수가 있네. 거기에다가 기병의 소양이 있어서 총기병으로 운용할 수 있다면 그 두 배의 위력도 보일 수 있겠지. 이 무기는 역사를 바꿔버릴만한 무기일세."
"......"
"이런 무기를 가진 병사들이 수만 명씩 몰려온다면 현재 대명제국의 군사력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어."
"대명제국에도 총병은 있잖습니까?"
황연이 고개를 저었다.
"본디 총기기술보다 화포기술이 더 빨리 발전하는 법일세. 이 놈들의 화포기술을 예측해 보자면 해상교전에서 상대가 안 될 것이네. 그리고 해상에서 압도당하게 되면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거점을 먹히게 될 것이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겠지..."
"음..."
"이 나라의 운명이 걱정되는군..."
황연은 진심으로 한탄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재빨리 서양놈을 목갑에 집어넣은 후 말했다.
"운사. 그러면 이것까지 합하면 어떻습니까?"
나는 성련, 흑백련, 금괴, 거기에다가 삼황오제 전욱의 동상까지 내놓았다. 힐끔 쳐다보면서 그 물건들의 가치를 파악하던 운사가 대답했다.
"그냥 가라."
"네?"
"너와 나는 오늘 연이 아닌가 보다."
후웅
운사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칠살마을로 갔다.
' 뭔 말인지 모르겠군.'
삼사의 역량이 호법사자와 맞먹는다 들었는데 헛소리나 한단 말인가?
나는 부정적인 마음을 털고는 흑패를 꺼내서 칠살마을의 촌장에게 줬다.
스스스 -
이윽고 나는 백목을 통해서 암천향의 밀림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 반전의 권능을 지닌 [옛 지배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환영한다... 환몽의 땅에 각별한 자가 찾아왔구나...]
나는 그 자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옛 지배자시여! 저는 소원이 있습니다!"
[ 호오... 말하라... 나에게 주어진 반전(反轉)의 권능으로... 삶을 죽음으로... 죽음을 삶으로 바꿀 한 번의 권리를 주겠노라... 그 누구라 할지도... 이 권능을 피할 수는 없다...]
예정된 수순이다.
' 좋아. 다 됐어!'
이제 주작만 죽이면 끝이다!
주작을 없애고 나서 천령단의 비밀을 얻고, 뇌신류와 진소청을 키워서 차후 백련교주까지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초기부터 설계해 왔던 완벽한 계획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주작 태산노옹을 죽여 주십시오."
말했다!
그러자 [옛 지배자]는 잠시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 과연... 그 인간을 죽이기를 원하는 것인가... 좋다...]
옛 지배자의 몸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며 뻗어나오더니, 허공 한 부분을 짚었다. 그러자 무언가 연기같은 것이 허공에서 흘러나왔다. 그 연기를 촉수에 휘감은 옛 지배자가 이윽고 그것을 꿀꺽꿀꺽 삼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 죽였다...]
예전에 황제의 암살을 부탁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옛 지배자]에게 물었다.
"그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여벌 육체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 없다... 내가 먹어버렸으니 결코 그런 일은 없겠지...]
그때 문득 [옛 지배자]가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 자의 저주(咀呪)는 몰라도...]
저주?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쿨럭!"
나는 갑자기 기침이 나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입에서 왠 선혈이 질질 흘러나옴과 동시에 눈, 코, 입에서도 피가 솟아올랐다. 그다지 고통은 없었지만 난데없이 선혈에 물들게 되자 깜짝 놀랐다.
' 뭐... 뭐야?!'
몸에 힘이 빠진다.
풀썩
내가 힘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자, 재밌다는 듯 나를 보고 있던 [옛 지배자]가 말했다.
[ 그 인간은 자신을 살해하는 자에게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하는 저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실행할 수 없는 저주... 아마도 은카이의 수면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영혼에 새긴 것이리라...]
"어... 어떻게 된..."
[ 내게 그따위 저주는 통하지 않으나... 살해를 의뢰한 것은... 바로 너이다... 인간이여...]
순간, [옛 지배자]가 즐거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재밌구나... 재밌어...]
쿨럭!
쿨럭!
' 아... 안돼...'
전신의 모공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하면서 내장이 녹아내리는 게 느껴진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내 볼살이 녹아내리는 게 보이는 게 끔찍했다.
전신에서 피를 뿜어내면서 피부와 살과 뼈가 녹아내리는 끔찍한 저주!
바로 그것이 주작 태산노옹이 자기자신에게 걸어둔 응분의 저주인 것이다. 그리고 말을 들어보니 그것은 신에게 부탁해서 새긴 것인 듯 했다. 그리고 [옛 지배자]는 그 저주를 의뢰자인 내게 고스란히 돌려준 모양이었다.
'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아직 못한 게 많다. 천계에서 수련도 못했고 천령단의 비밀도 못 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 경지까지 왔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 으... 이럴수가...'
부글부글
뇌수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것이 내 18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