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2 천계(天界) =========================================================================
파앗!
나는 이광이 말하는대로 하북성으로 갔고, 거기에서 랑방(廊坊)이라는 지역으로 갔다. 랑방에는 일대의 패주노릇을 하는 귀룡방(鬼龍邦)이라는 문파가 있었는데 이광은 대뜸 귀룡방의 정문으로 쳐들어갔다.
퍼벅 퍼벅
"끄아악."
"아악, 누구..."
우리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귀룡방도들을 패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귀룡방주가 나와서 이광에게 덤벼들었으나 5초만에 얻어맞아서 널부러지고 말았다. 자신이 항거할 수 없는 고수들이 떼거지로 왔다는 걸 알아챈 귀룡방주가 기가 죽어서 말했다.
"저... 저는 그리 나쁜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살려주십쇼..."
"네가 범균의 생활비를 대 주는 물주(物主)라는 걸 알고 있다. 범균은 어디 있지?"
"히익! 그 분의 행방을 말하면 저는 죽습니다요."
"지금 죽을테냐 나중에 죽을 테냐?"
"......"
어쩔 수 없이 귀룡방주가 범균이 지내는 장소를 말해주자 우리는 그 곳으로 향했다. 근처에 있던 중간 크기의 마을에서 가장 큰 장원이 있었는데 거기에 마창 범균이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원으로 들어가자 똥씹은 표정의 장년인이 안쪽에서 흑색 창을 들고 걸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이광! 왠 행패지?"
범균의 나이는 이광과 비슷한지 대충 말을 놓는 듯 했다. 이광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창 범균. 은거생활은 끝났다. 뇌신류의 전승자가 모일 때가 되었다."
범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 백련교하고 한 판 붙어보겠단 소리냐? 내 은거생활을 방해하지 말고 꺼져!"
"마창이라고 불리면서 강북제일창으로 거론되기도 하고, 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지. 그리고 귀룡방을 물주로 삼아서 안빈낙도도 실천하고. 그렇게 노년까지 편하게 즐기겠다는 말인가."
나직이 이야기하던 이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야말로 웃기지 마라 범균! 뇌신류가 추방되던 그 날의 치욕을 잊은 것이냐? 너도 그 날 같이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쳤을 텐데!"
"......!!"
범균이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알아, 안다고! 그 원한을 어찌 잊겠는가! 하지만... 힘이 없어! 그래서 난 내 삶을 즐기겠다는데 무슨 헛소리냐?"
"......"
범균이 발악하듯 외치는 말에 이광은 당황했는지 굳었다.
"죽일테면 죽여 봐라! 하지만 나는 헛소리에 어울려주느니 그냥 죽겠다!"
이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진소청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소청아. 네 말이 맞았다."
"스승님."
"인간의 복수심은 무한하지 않구나..."
이광은 포기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는 이제서야 뇌신류의 복수심에 대한 실체를 알게 된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낙양으로 가서 엄숭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청룡 이광의 이름을 대서 권신 엄숭을 대면할 수 있었는데, 엄숭은 자신의 호위무사인 정윤보를 내놓으라고 하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광. 궐에 있을 때 그대와 나는 친밀한 관계 아니었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는데."
"그런가?"
그러자 이광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창을 들어서 살초를 쏘아냈다. 엄숭의 머리통을 일 초만에 터뜨리려는 험악한 살초였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기습적으로 발출되었으므로 난다긴다하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반항하지 못하고 죽을 게 뻔했다.
카강!
그 순간 격렬한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자리에는 왠 흑포 괴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흑포 괴인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독고성 어르신까지 오셨군. 헌데 왜 갑자기 엄숭에게 살초를 쓰나, 이광."
엄숭은 두 사람 사이에서 충돌하는 살기에 실신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흑포괴인은 팔짱을 낀 채로 태연하게 이광의 살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정윤보."
나타난 것은 엄숭의 호위무사인 정윤보였다. 정윤보 또한 이광과 동년배인지 거리낌없이 말을 놓는 모습이었다. 나는 방금 전의 격돌에서 두 사람의 실력이 거의 호각이라는 걸 알아챘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흠."
대단한 권법의 달인이다. 저 정도 고수가 아무리 권신의 호위라지만 일개 호위무사로 만족하고 있단 말인가? 당장 강호에 뛰어들면 구파일방에 맞먹는 세력을 일궈낼 수 있을만한 일대종사가 눈 앞에 있는 정윤보였다.
이광은 곧장 정윤보에게 지금까지의 경과와 뇌신류의 새로운 작전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정윤보는 다 듣고 나자 차갑게 말했다.
"꺼져."
"왜?"
"복수고 뭐고 관심 없다. 되려 네 녀석이 아직까지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니 놀랍군."
이광이 이를 으득 갈면서 말했다.
"정윤보! 스승이 살해당한 원한을 갚고싶지 않은 거냐!"
"내 스승은 약해서 죽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백련교라면 지긋지긋해. 내가 왜 호위무사를 수십 년이나 하고 있다 생각하나?"
"잘 모르겠는데. 말한 적이 없잖나."
정윤보가 차가운 눈으로 이광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와 나, 범균 셋은 뇌신류의 촉망받던 후기지수로 동기(同期)였지. 허나 그것도 벌써 오십년 전 일이다 이광. 네가 아무리 종사의 직계라지만 이제 현실을 볼 때도 되지 않았나? 우리의 인생은 벌써 절반이 넘게 왔단 말이다."
"절반...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주 큰 상관이 있지. 내게 증손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냐?"
"......"
이광은 뜻밖의 말에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내 일에 관심이 없었으니 알 턱이 없지."
클클 웃던 정윤보가 말했다.
"정상적이라면 우리는 손자를 볼 할아버지의 나이다. 가정을 꾸리고 행복만 추구해도 인생은 짧지. 네 녀석은 용모도 수려했는데 어쩌다 홀아비로 늙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낙양에서 만난 내 반려자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꾸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너..."
"너는 제정신이 아니야. 백련교에 복수할 가능성을 떠나서, 동기인 우리들이 볼 때 너는 일개 광인(狂人에 불과해."
정윤보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광. 네 인생에 남은 건 뭐지? 정말 복수를 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나?"
"......"
이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나간 듯 마치 눈동자가 비어버린 듯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소청이 앞으로 성큼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
"당신이 당신 행복을 추구하는 건 알 바가 아니오. 하지만 당신의 무공은 뇌신류에서 받은 것. 그렇다면 뇌신류에게 받은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겠소? 그것이 무인의 의리라고 생각지 않소?"
"네가 진소청이군. 이야기는 이광에게 많이 들었다."
정윤보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난 충분히 사문의 빚을 갚고 있다."
"어떤 근거요?"
"내가 엄숭의 호위무사가 되어서 그의 목숨을 절대적으로 지켜주는 대신 엄숭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서 각지의 뇌신류 무인의 신상정보를 보호하며 지원해주고 있지. 그게 벌써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엄숭이 뇌신류에게 지원한 자금은 황금으로 수십 관은 될 것이다."
"......"
"그에 비해 네 스승은 사신위 청룡이니 뭐니 휘황찬란한 명호만 번득이다가 지금은 무관주인으로 전락했지. 누가 더 뇌신류를 위해 공헌했나?"
이건 안된다.
정윤보는 이미 수십 년 동안이나 자기의 삶을 흔들림없이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해봤자 뇌신류 복수의 허망함만 되새기는 꼴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아무리 계획이 그럴듯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듯 했다.
' 그래서 이광이 개파대전을 열었는데도 동기들이 한 명도 안 온 거였군.'
범균은 강호에서 놀다가 사파에게 돈을 뜯어내며 잘먹고 잘사는 삶을 선택했고, 정윤보는 나름대로 현실과 타협하면서 뇌신류에게도 나름대로의 의리를 다 했다. 그런 인물들이 이광이 불러봤자 올 리 만무한 것이다.
독고성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너와 이광은 뇌신류 후기지수 중에서 재능으로 최상이었는데 이따위 꼬라지가 될 줄이야."
"독고성 어르신. 서로 살아가는 법이 다른 겁니다."
"됐다! 네녀석은 네녀석 맘대로 살아라. 구걸하지 않을테니까."
"배웅하겠습니다."
"꺼져라."
화를 낸 독고성이 홱하고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윤보와 싸워서 그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의미가 없었다. 하물며 엄숭의 저택에서 난동을 부릴 경우 장기적으로 큰 화가 미칠 건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퇴각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앗
이광은 돌아온 후 넋을 놓은 듯 와룡전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이광의 옆에 진소청이 붙어서 위로했다. 독고성은 속이 상했는지 근처의 주점에서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심한 듯 지켜보던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계획이 틀어졌구려."
"이광에게 동기가 있었을 줄이야..."
"범균이든 정윤보든 일파의 주인이 되고도 남을 고수들이오. 이광은 그들을 필요할 때 비장의 한수로 부르려 했을 거요."
"그러면 뭐 하오? 다들 복수에는 관심도 없는데."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망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사실 정상이오. 정윤보 말대로 오십 년이나 지난 일 아니겠소? 백련교에 복수심을 아직 놓고 있지 않은 이광이 대단한거지."
"정윤보는 이광을 광인이라 하지 않았소?"
"물론 세인들의 기준으로는 광인이지. 허나 달리 말하자면 이광처럼 독한 사람이 드물다고도 할 수 있소. 또한 독한 인물은 그 나름 쓸모있지."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이 와룡전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광은 이대로 무너질 인물은 아니오. 조만간 재기할테니 우리는 시간을 아낍시다."
"이제 뭘 해야하오?"
"이광이 알고 있는 전승자가 그 두 명 뿐이지는 않을 거요. 전승자 일은 이광에게 맡겨두고, 일단은 수요의 유적으로 가 봅시다."
수요의 유적?
난데없이 생뚱맞은 소리가 들리자 나는 머리를 굴렸다. 분명히 수요의 유적에서 금궤가 들어있는 목갑도 얻었고 수요도 얻었고 전욱의 동상도 얻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뭐를 얻는단 말일까?
망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짜 영약이 있으니까 당연히 얻어야하지 않겠소."
"아."
이윽고 나는 망량과 함께 비등을 써서 수요의 유적으로 갔다. 그리고 절벽에 박혀서 죽어있는 수호자 거대거미의 시체에 다가갔다.
"순어구를 대시오."
키이이잉...
순어구를 갖다대자 순어구가 맑은 빛을 내면서 거미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정화의 기운이 한 차례 지나가자 거미의 몸에서는 푸르죽죽한 독혈(毒血)이 뿜어져 나왔고, 나는 독혈을 피한 후 바싹 마른 거미의 내단을 캐 내었다.
' 과연.'
과거 동방무결을 찾으러 사천으로 갔을 때 사천당문의 문주인 당무극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 흐음... 그런 게 있다면, 나라면 먼저 산성체액을 다 빼놓고 나서 내단이 모습을 드러내면 피독주를 미리 장비하고 수투로 옮기겠네. 햇빛이 닿지 않고 서늘한 곳에서 33일간 땅에 묻고 숙성시키면 과한 독기가 빠질테고, 그때부터 연단술을 이용해서 세심하게 독단으로 정제하겠지.]
[ 그렇군요. 시체는 어떻게 하죠?]
[ 시체도 기(氣)가 뭉쳐있는 덩어리일테니 독기를 다 빼서 말린 후 빠개서 먹으면 영약과 자양강장 내지는 정력증강의 효과가 있겠지. 특히 구전에 따르면 사람얼굴 부분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던데.]
그리고 당무극은 거미의 독단을 댓가로 제시하자 즉시 내 요구조건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독술의 달인인 사천당문주가 환장할 정도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게 이 거미의 내단인 것이다.
원래라면 피독주를 들고 조심스럽게 빼내어서 수십 일동안 독기를 가라앉히고, 연단술로 2차가공을 해야하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영단이 완성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손에는 순어구가 있기 때문에 거미의 독단을 한방에 다 해결해버린 것이다!
딱 손바닥에 올려질 만한 크기의 동그란 구슬내단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망량이 말했다.
"순어구는 역시 대요괴의 독조차도 해독하는군."
"이 거미내단은 얼마나 효과가 있겠소?"
"한 번 복용해 보시오."
"윽..."
나는 망설여졌다. 아무리 순어구로 완전히 독을 해독했다지만 극독을 보유한 거미의 내단을 맨정신으로 먹기는 힘든 것이다. 하지만 아무 해가 없을 거라는 망량의 말에 속는 셈치고 한번 먹어 보았다.
아그작 아그작
' 음... 소금맛이 나는군.'
나는 바삭거리는 식감을 즐기며 천천히 씹어먹다가 거대한 기운이 훅하고 내려오는 걸 느꼈다. 이윽고 나는 강한 압력이 기경팔맥에 쏟아지면서 성련을 섭취했을 때 같은 요동이 느껴지는 걸 알아챘다.
나는 재빨리 대주천을 거치며 몸의 기운을 안정시켰다. 잠시 후, 나는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음..."
그런데 무슨 변화인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망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웅. 여기에 손을 넣어 보시오."
망량은 조그마한 그릇에 왠 보랏빛 액체를 잔뜩 넣어둔 상태였다. 나는 그 그릇을 보자 인상이 구겨졌다.
"윽... 그건 저 거미의 체액..."
"그렇소. 극독이지."
"......"
"넣어 보시오."
나는 마지못해서 손가락을 살짝 넣었다. 그리고 이상이 없자 천천히 손 전체를 집어넣었고, 그래도 이상이 없자 한참동안 기다렸다. 무려 한 식경이나 체액에 손을 담궜다가 빼내자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럴수가!"
아무렇지도 않다!
안되면 그냥 자살할 각오로 넣었는데 뜻밖에 내 몸이 멀쩡했다. 중독이나 괴사, 부식은 커녕 피부가 전혀 주름지지도 않았다. 거미체액이 돌벽도 녹이는 극독인 걸 생각하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망량이 껄껄 웃었다.
"만독불침(萬毒不浸)이 된 걸 축하하오!"
그랬다.
거미의 내단을 먹으면서 가용내력이 급증한 것은 물론 만독불침지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