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1 천계(天界) =========================================================================
계삼탕을 맛있게 먹은 후 우리는 백련교를 나서서 청룡무관으로 갔다. 청룡무관에는 이미 이광이 돌아와 있었고, 그는 우리를 와룡전에서 떨떠름한 안색으로 맞이했다. 이광은 진소청에게서 그동안의 경과를 들은 후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백웅이 뇌신류 호법사자가 되었다고?"
"네."
"실력으로는 확실히 그럴만 하지만... 교주의 꿍꿍이속을 모르겠군."
중얼거리던 이광이 말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뇌신류를 규합하고 있다는 증거를 교주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천령단의 비밀을 내놓겠지요."
"흠... 의심스럽다!"
단호하게 말한 이광이 형형한 눈빛을 빛냈다.
"천령단은 무한의 내공이다. 그걸 너희 셋에게 대뜸 내놓겠다는 건 너무나 후한 조건이다. 또한 그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백련교의 힘의 균형을 정면으로 해치는 일이지. 나는 교주라는 인간이 맨정신으로 그런 조건을 내놓을 리가 없다 생각한다."
이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르신."
"왜인가 망량?"
"생각해 보십시오. 교주는 수신류의 수장으로서, 화신류와 풍신류를 긴장하게 만들 필요성이 충분히 있는 자입니다. 뇌신류를 키워서 그들의 세력에 경종을 울리게 만들면 저절로 교주의 권위는 확보되겠지요. 또한 뒤쳐진 뇌신류의 세력을 키워주려면 천령단 소유자가 셋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망량의 말에 이광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뇌신류 대부분의 전승자들은 백련교 자체에 강한 복수심을 지니고 있다. 적대적인 천령단 소유자가 셋이나 생겨나는 변수를 교주가 감당하겠다고? 이제 소교주가 치료되어서 중원진출을 앞둔 마당에 뭐하러 그런 짓을? 꿈보다 해몽이군."
"어르신의 말씀이 통상적으로는 옳겠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린 망량이 말을 이었다.
"교주는 뇌신류 최종오의에 아주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뭐라고!"
"지금은 뇌신류 전승자를 모으라고만 시켰지만 종래에는 최종오의를 연구하게 만들어서 뇌신지혼을 완성시킬 작정이겠지요. 그리고 완성된 뇌신지혼의 소유주를 통해서 자신의 무공을 한단계 발전시키려는 게 교주의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광은 정말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마도 지금까지 이광이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었으리라. 안 그래도 천하무적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백련교주가 뇌신류의 절학을 아쉬워하고, 심지어 그걸로 자신의 무공을 향상시키는 밑바탕으로 삼으려 한다니? 50여년 전에 백련교에서 내쫓긴 이광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관점이 분명했다.
망량은 말을 이었다.
"또한 현재 교주의 역량은 천령단 소유자가 셋이든 다섯이든 홀로 해치울 수준에 이르러 있습니다. 풍신류의 용비천조차도 그의 한 손가락에 무공술이 제압당해서 땅에 떨어질 정도이니 이미 인간이 아니지요."
"그 정도인가..."
침음성을 흘린 이광은 크게 고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즉... 그 놈은 우리 뇌신류가 아무리 강해져도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거냐?"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크크... 크하하하!!"
이광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던 이광은 눈이 벌개져서 말했다.
"오냐, 좋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무시한다면 본때를 보여줘야지! 우리 뇌신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게 착각이라는 걸 단단히 가르쳐 주고 말겠다!!"
지금까지 백련교와의 연수에 소극적이고 회의적이던 이광과 달리, 지금은 완전히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 이광이었다. 그것은 교주가 철저히 뇌신류를 무시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종사의 정통직계로서 이렇게까지 유파의 잠재력을 무시당하는 건 천하에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불붙었군.'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저렇게 된 이광은 아무도 못 말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독기와 잔인함, 천재성으로 상대를 어떻게든 짓밟고 마는 게 이광의 성정인 것이다. 풍진강호를 홀로 버텨왔던 이광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이광은 곧 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내가 파악한 뇌신류 전승자는 총 세 명이 있다. 칠 주야 이내에 그들을 청룡무관에 불러모으지."
"죄송합니다만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한 명은 극호. 그 녀석은 멸혼보의 정통후계자로서 관중의 기루에서 기둥서방으로 위장하고 있다. 소청이도 본 적이 있지."
진소청은 멋쩍게 웃었다.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또 한 명은 범균(梵均). 이 녀석은 강호에 마창(魔槍)이라고 알려져 있고 강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말에 망량이 놀란 듯 말했다.
"마창 범균! 강북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창술의 절정고수가 뇌신류 전승자였습니까?"
"그렇다."
"흠... 놀랍군요."
"마지막은 낙양에 있다. 권신 엄숭(嚴嵩)의 호위무사로 있는 정윤보(鄭潤普)다."
이광의 말에 망량은 고개를 갸웃했다.
"권신 엄숭은 현재 조정을 해치는 간신이며 권신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찌 뇌신류의 전승자인 그가 엄숭의 호위무사가 된 것입니까? 그리고 그의 이름은 강호에서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듯 합니다만..."
그 말에 이광이 쓰게 웃었다.
"엄숭의 곁에 있는 이유는 등잔불이 어둡기 때문이다. 엄숭의 부하로 있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니까. 또 하나, 정윤보는 무명소졸이 아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뇌신류 귀혼일파의 일원이며 회전권(回轉拳)의 달인이다."
이광이 덧붙인 말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권법은 나를 뛰어넘는다."
"......!!"
"단지 무림에 명성을 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호위무사로 지낼 뿐, 엄숭조차도 그의 실력을 아껴서 융숭한 대접을 해주고 있는 중이지."
그 광오한 이광이 자신보다 권법이 위라고 말할 정도라니!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이광의 자존심이라면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무영문의 검마조차도 평소에 얕보고 있던 이광 아니었던가?
나는 순간적으로 이광의 말에서 정윤보의 무위를 측정할 수 있었다.
' 초절정고수!'
종합적인 무위는 이광에 비해 부족하겠지만 틀림없이 초절정의 반열에 오른 달인인 게 틀림없었다. 말이 초절정고수지 천하무림에서 일 푼 이내에 들어가는 극강의 초인이라는 의미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뇌신류의 전승자라고 해도 그리 수준높은 자는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광이 여기까지 말했다면 밑천을 거의 다 말한거나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망량도 이야기를 꺼냈다.
"어르신. 사실 저희는 독고성 어르신의 위치도 파악했습니다."
"정말인가!"
"네. 이광 어르신께서 함께 가셔서 그 분을 설득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독고성 어르신까지 도와준다면 아주 일이 쉬워질 것이다."
"......"
나는 일이 너무나 순탄하게 풀리는게 약간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일종의 심술같은 감정이었다. 예전에는 피똥을 싸면서 머리터지게 진행했던 어려운 일이 난데없이 술술 풀려나가자 느껴지는 황당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기분이 나쁜 것은, 이 모든 게 이광이 순순히 협력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이광 저 인간이 버럭거리며 대들지 않고 이쪽을 평범하게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나아져 버리는 것이다.
' 빌어먹을! 당신은 정말 양파같은 인간이오.'
어찌된 게 까도 까도 또 나온단 말인가?
정말 무서운 건 아직도 이광은 밑천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쯤 되면 싫다기 보다는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황당해서 굳어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스승님은 청류계의 수장인 등곽(鄧郭) 어르신과 의형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음, 그래."
"만일 등곽 어르신이 뇌신류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경우라면 어떤 경우를 생각하십니까?"
진소청은 내 예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뇌신류가 등곽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묵살해버렸던 이유를 짐작하고싶은 모양이었다.
"......"
뜻밖의 질문인지 이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진소청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를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내 안색을 되찾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청류계 전체의 보신(保身)이 걸려있는 경우겠지."
"보신이요?"
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류계란 대쪽같은 간언을 하며 올바른 정치원리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세력이자 야당(野黨) 세력이다. 군주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으나 청류계가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며 존속하는 이유는, 청류계에 대부분의 능력있는 신하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청류계를 숙청할 경우 국정 자체가 운영이 되지 않으며 군주의 지배력도 추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몰살(歿殺)당할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게 청류계의 관리들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모로 몰려서 구족이 멸할수도 있으니, 그들은 극도의 원칙주의자이며 청렴결백을 유지하려 하지. 왜냐하면 언제나 동창요원이나 금의위가 그들의 약점을 캐내려고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른 이광이 말을 이었다.
"등곽 형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경우는 청류계의 보신에 크나큰 위협이 되는 경우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광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망량이 감탄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는 현직 관리도 얼마 되지 않건만..."
"사신위로 있다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듣게 되지. 헌데 그건 왜 묻는 것이지?"
진소청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사실은 등곽 어르신이 낙양에 존재하는 타 세력에 큰 압박을 받고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만일의 경우 그분이 도와주지 못할수도 있을 듯 합니다."
"흠... 그 세력이 어디냐?"
"청류계 전체를 역모의 화로 몰아갈 수 있는 세력이겠지요."
"그럴만한 곳은 동창과 금의위 뿐인데."
"한 곳 더 있습니다. 풍신류입니다."
"......"
진소청의 말에 이광은 잠시 생각하다가 깨달은 듯 말했다.
"그 놈들이 황궁과 연수했군. 정말 개같은 조합이야."
"그 자들의 결속은 꽤 단단한 듯 싶습니다."
"알았으니 됐다. 놈들의 결속은 내가 깰 수 있으니 걱정 마라. 내 인맥을 동원하면 쉬운 일이다."
이광은 자신의 창을 챙겨들더니 말했다.
"그럼 어서 움직이지. 행동은 빠를수록 좋으니."
우리는 이광을 비등으로 데리고 즉시 사천으로 향했다. 사천 용왕곡에 도착하자 운무가 자욱한 장소가 펼쳐졌고, 독고성은 머지않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성은 꽤 당황한 모습이었다.
"너희 모두 뇌신류냐? 아니 그리고 너는 이광 아니냐!"
독고성의 말에 이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으음... 여긴 어쩐 일이냐."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이광은 지금까지의 전개와 뇌신류의 작전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신기한 듯 듣고 있던 독고성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 푸르락 해지더니, 종래에는 크게 노화를 터뜨렸다.
"숙부!! 어찌 그리도 뇌신류를 무시한단 말인가!!"
꽈릉!
독고성의 얼굴이 격렬한 분노때문에 수라처럼 변함과 동시에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한 줄기 내려쳤다. 그의 의념이 한순간 치솟으면서 천지가 그와 감응해서 뇌전의 기운을 끌어당긴 것이다. 독고성의 경지가 고명하기 그지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잠시 후 감정을 진정시킨 독고성이 말했다.
"알았다. 나도 최대한 너희를 돕겠다. 천령단과 최종오의만 얻게 되면 틀림없이 교주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꼭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독고성까지 합류한 후, 우리는 이광의 말에 따라서 뇌신류의 전승자를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관중의 기루인 춘경관(春景關)에 가자 대낮부터 술에 취해있는 극호가 보였고, 극호를 보자마자 독고성이 호통을 내질렀다.
"이노옴! 낮술이란 말이냐!!"
"허걱!!"
극호는 깜짝 놀라서 허우적대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독고성의 호통에 담겨있는 의념과 뇌전의 기운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극호는 한 순간에 독고성이 초고수라는 걸 알아챈 듯 약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할ㅂ... 아니 존장어르신이십니까?"
"주정부터 몰아내라. 술냄새가 불쾌하다."
"넵."
극호가 내공을 끌어올려서 주정을 손가락 끝에서 배출하자, 그의 얼굴에서는 붉은 기가 사라지고 술냄새도 없어졌다. 극호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옆에 있던 이광이 말했다.
"극호. 이제부터 뇌신류의 전승자를 모두 모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이광은 간략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극호의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말했다.
"백련교에 귀환하다니... 그건 복수와는 멀어지는 길 아닙니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이다."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원수의 도움을 받아서 어찌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믿어라, 극호."
"......"
한참을 생각하던 극호가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아무리 작전이라지만 원수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습니다."
예상 외였다. 평소에 늘 헤실대고 가볍기 짝이 없는 극호가 이토록 흔들림없는 자세라니? 극호가 엄청나게 심지가 굳은 사내라는 미호의 평은 정확했던 것이다. 극호의 말에 다들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잘 지내거라, 극호."
극호가 이광에게 포권했다.
"이광 사부,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래."
휘익!
극호는 인사를 끝낸 후 멸혼보를 써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인연이 정리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광이든 극호든 서로에게 타협점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셈이었다.
독고성이 언짢은 듯 말했다.
"고얀 놈! 누구는 원한이 없는줄 아느냐? 어떻게든 되갚아야 하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거늘."
"고정하십시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지요."
그렇게 말한 이광이 내게 말했다.
"그럼 다음은 범균이겠군. 어서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