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7 천계(天界) =========================================================================
청룡무관으로 돌아가자는 이광의 말에 진소청은 대답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째서냐?"
"저는 지금 백련교 내부로 파고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
이광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는 진소청이 갑자기 승부수를 던진다는 걸 알아채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망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연 진소청은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진소청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남궁세가를 멸한 이유는 그들이 금수같은 자들인 탓도 있었으나, 그들이 화신류의 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음!"
"옆의 두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결과 얼마 전에 화신류의 종사인 한백령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교섭하여 백련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이광이 폭발해야 정상이다. 그에게 있어서 뇌신류를 추방시킨 백련교는 철천지 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광은 뜻밖에도 곰곰히 생각하는 기색으로 침묵하다가 말했다.
"계속 말해 보거라."
"스승님. 현실적으로 저와 스승님의 힘만으로 뇌신류를 재흥시키는 건 무리입니다. 벽력삼존이나 독고성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무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백련교는 현 무림의 확고부동한 절대최강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음..."
"저는 백련교주의 제자가 되어서 그의 무공을 얻고, 그 자의 약점을 찾아낼 생각입니다."
"......!!"
이번에는 확연히 이광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는 슬슬 그의 인내력이 한계치에 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광이 왼쪽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핏줄기가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광은 한번 더 참기로 했는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소청아. 너무나 비현실적인 소리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남궁세가를 홀로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네 무위를 측정할 수 있었다. 무언가 기연(奇緣)을 얻어서 강해진 것 같구나. 맞느냐?"
"네."
진소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삼봉 진인의 유학인 칠대절학을 얻었습니다."
"장삼봉! 무당파의 초대조사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걸 제 나름대로 수련한 결과 소기의 성취를 얻었습니다."
그러자 이광은 아무런 가식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구나! 좋아. 그건 광세절학임에 분명하구나."
그렇게 흡족해하던 이광이 다시 표정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교주는 무서운 자다. 마지막에 보았을 때 그 자는 자신의 친위세력인 원로원에게조차 자신의 비밀을 3할 이상 털어놓지 않았다. 소청이 네가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약점을 알아낸다는 보장은 없고 되려 역습당할 게 분명하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이광은 뚫어져라 진소청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 스승이신 이청운 호법사자가 교주에게 패사(敗死)할 때, 자신은 교주의 진짜 무공에 대해서 1할도 모르고 있다고 내게 말씀하고 돌아가셨다. 당시 스승님은 백련교의 2인자로서 독고준 다음으로 교주에 가까운 위치였으나 사실상 교주의 패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무리 수신류와 뇌신류가 다른 유파라지만 스승님은 대단히 천재적인 인물이셨다. 그런 스승님을 끝까지 기만한 백련교주가 과연 소청이 네게 호락호락 당해줄 것 같으냐?"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이청운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군.'
대결의 이유는 어찌되었건 막상 백련교주와 이청운의 대결이 시작되자 백련교주는 이청운이 전혀 모르고 있던 전법으로 싸운 모양이었다. 백련교주의 무공이 물론 더 높아서 이긴 거겠지만,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 아군을 늘 견제하고 기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백련교주가 매우 노회한 인물이라는 증거였다. 수백 년 묵은 능구렁이가 따로없으리라.
무엇보다도 천하제일의 지략을 지닌 사신위 주작조차도 교주의 다음 행동을 읽지 못해서 낭패를 당했을 정도였다. 교주는 무공 외적으로도 심계가 깊은 인물이 분명했다. 그렇게 보면 이광의 걱정은 단순히 오지랖이 아니라 아주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소청은 그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화신류와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백련교 본단으로 가려 합니다."
"그건 죽음의 길이다."
"스승님... 그럼 이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 백련교주를 꺾으려 하십니까?"
"......"
이광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소청은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는 백련교에 대항하는 뇌신류의 전승자를 모아서 싸우려 하시지만 그것이야말로 현실성이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변화한 백련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패잔병만 끌어모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해봐야 아는 일이다."
"천령단도 없잖습니까?"
"음..."
이광이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다른 자였다면 이광이 대번에 호통을 치거나 폭력을 행사하려 들었겠지만 상대는 다름아닌 진소청이었다. 실제 무력으로도 진소청이 앞서는데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이광은 진소청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친아들 이상으로 진소청을 아끼고 사랑하는게 이광이기 때문이다.
진소청이 눈을 빛냈다.
"저는 이청운 호법사자만큼의 재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백련교주는 그런 저를 이용하려 하겠지요. 서로가 이용하는 동안에 최대한 백련교의 비밀을 알아내고,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겠습니다."
"......"
이광은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상당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자식이 속을 썩여서 답답해하는 부모의 표정처럼 보였다. 이광이 잠시 후 말했다.
"소청아. 다시 생각해 보아라. 너는 백련교에 맞서는게 비현실적이라 했으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전승자를 규합하고 일대세력을 만든 후 정사파와 연맹을 갖추면 백련교라 해도 우리를 쉽게 건드릴 수 없다. 복수란 백 년이 걸려도 할 수 있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백 년이라고요?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진소청이 어이가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전승자들의 복수심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길어도 제 대나 다음 대까지가 한계입니다. 뇌신류의 무공은 극히 뛰어나니 이후의 전승자들은 현실성없는 복수에 매달리느니 자신의 삶을 찾아갈 것입니다. 속전속결이 아니면 뇌신류는 말 그대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자는 우리 유파에 필요 없다."
"모순된 소리를 하십니다. 없는 손도 빌려야 할 판에 타인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신 겁니까."
"윽..."
나는 이광의 이마에 땀이 맺히며 쩔쩔매는 기색을 확연히 느꼈다. 말 그대로 천적을 만난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깨달았다.
' 이광은 설령 황제나 주작이라 해도 거침없이 엿먹이고 패도적으로 굴었는데, 자신이 아끼는 진소청에게는 한없이 나약해지는구나.'
이광은 권위에 굴복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충성과 권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인간이었으며 그렇기에 진충보국을 논하며 우국지사의 충성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광이라고 해도 권위가 아닌 애정 앞에서는 멈출 수밖에 없다.
당황하던 이광은 말했다.
"그래 좋다. 백련교주에게 가서 제자가 된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수신류의 무공을 배우려는 생각이냐?"
"필요하면 배울 수도 있겠지요."
진소청은 그렇게 대꾸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저는 우선 천령단의 비밀을 알아내는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음!"
"그 무한의 내공을 얻는다면 정말로 승산이 생길 테니까요."
"......"
이광은 아까와 달리 진소청의 말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진소청에게 차분하게 논박당하자 진소청의 계획의 실천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이광은 말했다.
"소청아. 우선 네 말을 이해는 했다. 그러니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 사부에게 차분히 말해줄 수 있겠느냐...?"
"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이광과 둘러앉았고, 진소청이 우리를 이광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망량은 천하를 떠돌던 술법사이고 나는 뇌신류의 전승자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진소청이 적당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자 이광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이광이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알았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단."
이광은 진소청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와 함께 성묘(省墓)를 가자."
"네?"
"지금껏 백련교의 이목이 두렵고 사존의 유해가 염려되어 찾아가지 못했지만, 네 계획이 그렇다면 이제 상관없겠지. 대계(大計)를 실행하기에 앞서서 선대에게 축원을 비는 건 후대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광은 확실히 일대 무예의 종사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성격은 개같은 인간이지만 어쨌든 무림의 명문을 이끄는 자인 것이다. 진소청은 그 말에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며칠 정도는 늦어도 될 테니까요. 헌데 어디로..."
"감숙성 무위(武威)의 오화(五和) 지방이다."
이광은 약간 슬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곳에서 내 스승이 숨을 거두셨다."
그 말에 장내가 잠시 엄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역대 최강의 뇌신류 호법사자 이청운!
그가 백련교주에게 입은 부상으로 숨을 거둔 땅이 무위의 오화 지방인 것이다.
나는 느닷없는 상황변화에 약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망량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 괜찮소. 아주 좋은 상황이오.]
[ 무슨 소리요?]
[ 이건 아주 큰 이득이 될 테니 얌전히 따라갑시다.]
[ ... 알았소.]
대화가 일단락나자 망량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삼절 이광님. 주변에 화신류나 풍신류의 졸개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물론일세."
"그 자들을 섣불리 칠 수도 없고 그 자들에게 감시당하면서 그 땅으로 가는 것도 꺼림칙한 일이지요. 제가 술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술법?"
"잘 보십시오."
망량이 오화칠금선을 들고서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시 후 우리의 몸 위에 왠 부적이 내려앉더니, 신령스러운 칠채(七彩)의 휘광이 맴돌았다. 잠시동안 심장 근처를 맴돌던 휘광은 가라앉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니다."
그리고는 망량이 모두의 손을 서로 잡도록 하고서는 앞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스아앗!
"......!!"
"헉!"
다들 놀라서 경호성을 내었다. 왜냐하면 망량이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신법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무림인인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걸음마다 풍경이 바뀌니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망량이 대략 스무 걸음을 내딛자, 그는 그제서야 멈추었다. 망량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대축지술(大縮地術)을 써서 이동했으니 왠만한 추적술로는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이광이 황당한지 망량에게 물었다.
"자네 대단한 술법사였군. 우리가 얼마나 이동한 건가?"
"한 걸음에 이십 리니까 사백 리를 이동했지요."
"사... 사백 리?"
대단한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사백 리를 이동했다면 적어도 스무 개의 마을을 지나쳤거나 산 여덟 개는 넘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동을 한다면, 전설속의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이라도 발라놓지 않은 한에는 그 어떤 추적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
이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진소청의 손을 꽉 잡았다.
"좋은 동료를 얻었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감사합니다."
"......"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자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저건 이광이 평상시 하던 것처럼 표리부동하게 남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상대가 진소청이기에 진실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하는 것이다. 진소청이 오늘 한 일은 나였다면 백 번도 더 충돌할 정도였으나 결국 이광은 한 번도 진소청과 대립하지 않았다. 완전히 부모의 마음으로 진소청을 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든다.
' 진소청처럼 대해달라고는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광 당신이 타인에게 그 일할만큼의 배려나 신뢰라도 베풀었다면, 나는...'
이광에게 격렬하게 뒷통수를 맞은 게 몇번인가. 애정과 신뢰가 사람마다 이토록 편중되고 차이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동시에 이광에 대한 강렬한 증오가 끓어올랐고, 나는 검강을 내뿜어서 이광을 죽이고 싶어졌다. 지금 내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이광에게 우세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찰나에 망량이 재빨리 내 어깨를 짚고는 전음을 보내왔다.
[ 진정하시오!]
나는 번뜩 정신이 들어서 그 희미한 살기를 숨겼다. 하지만 아마 그 살기는 망량도 눈치챌 정도였으니 이광이 느껴버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광이 슬며시 나를 쳐다보며 이상한 듯 말했다.
"자네는 왜 내게 살기를 뿜는 거지? 내가 뭔가 잘못했나?"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생하면서 무수한 악연을 쌓게 되어서 그 결과 증오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광은 나와는 이제야 갓 일면식을 거친 남남일 뿐이었다. 나는 이광에게 그 어떤 은원도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고는 말했다.
"미안하오. 아직 무공경지가 미숙해서 살기를 제대로 억제할 수 없소. 심중에 저절로 살기가 들끓는 부작용이 생겨서..."
"흠... 귀혼일파의 무공계열인가 보군.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네."
이광은 대충 납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는 조심해 주게."
"알았소."
나는 대꾸하면서도 뭔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망량의 대축지술에 편승해서 빠르게 이동을 하는 와중에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 아.'
이광과 뇌신류의 일로 부딪히지 않으면 이광은 평범하게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그와 맞부딪히지 않는 것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를 죽일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에 약간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