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5 천계(天界) =========================================================================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황궁 내에 침투했다. 내가 먼저 도착한 곳은 수정석비가 있는 황궁 내부의 심처였다. 무저갱 지하의 이족유적이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었으며, 나는 여기에 극소수의 간부만이 오기에 경비가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수정석비를 힐끔 살펴 보았다. 총 14개의 조항이 있었으며, 마치 시적인 내용과 은유가 섞여있는 듯 했다. 예전에 한 번 살펴보았기에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 틀림없는 진실로써, 확실하고 가장 진실하다.]
[ 유일한 기적을 이루기 위해, 아래와 위는 같으며 위와 아래는 같다.]
[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의 명상에서 나왔으니,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 태양은 그것의 아버지, 달은 그것의 어머니, 바람이 그것의 자궁으로 지구는 그것의 보모다.]
[ 만물의 완벽성의 아버지가 여기에 있다.]
[ 만물의 힘은 흙으로 통합된다.]
[ 조심스럽고 위대한 재주로 전체에서 감지하기 힘든 불에서 흙을 뺀다.]
[ 이것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모든 것의 아래와 위에 있는 힘을 받는다.]
[ 당신은 모든 것의 영광을 얻는다.]
[ 모호함이 사라질 것이다.]
[ 이것은 가장 강한 힘으로, 모든 액체를 투과하고, 모든 고체를 통과한다.]
[ 그래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 나는 지혜와 철학의 세 조각을 가지고 있기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tmegistus)라 불린다.]
[ 이 판은 태양의 운행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흐음..."
새삼 수정석비를 보면서 의문점에 휩싸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닥치고 가져가기만 했지만, 이제 이 석비가 어떻게 해서 강력한 주술의 힘을 행사하는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 이 수정석비는 서양에서 온 것이고, 서양인들도 노리고 있는 보물이야. 그렇다면 이 수정석비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헤르메스라는 인물인가?'
망량이나 술법사들에게 맡겨두기만 했지만 나 스스로도 이 수정석비에 대해서 연구해볼 필요가 느껴졌다. 왜냐하면 지금의 과제는 나 자신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수정석비의 '힘'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석비를 목갑에 넣은 후 이번에는 무명제사서가 있는 내황각으로 갔다. 역시나 내황각에는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찾는 무명제사서는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명제사서만 가져가야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망량의 조언을 상기했다.
[ 백웅. 이번에 무명제사서만 가져올 게 아니라 천문측정자료와 천문을 측정하는 장비까지도 가져와야 하오.]
[ 그건 어디에 있소?]
[ 당신도 알다시피 무명제사서는 3층에 있고 내황각주 제갈부는 5층에 있소. 그리고 천문에 관련된 자료는 4층에 있소. 대략 서른 권 정도이고 하나의 서가에 몰려있으니 찾기 쉬울 거요.]
[ 4층이라...]
[ 다른 건 몰라도 천문장비는 서역에서 직수입한 최신장비요. 그건 반드시 갖고와야 하오.]
망량과 함께 오면 간단했겠지만 만에 하나 제갈부가 나타날 경우 망량의 얼굴이 들키면 곤란했다. 지금은 황궁이 되도록 반응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 무명제사서는 나중에 갖고가자.'
무명제사서를 가지고 가면 제갈부가 전이술을 써서 쫓아오게 된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위치만 확인하러 온 셈이다.
나는 내 기척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4층으로 향했다.
3층과 달리 4층에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은신해서 그게 혹시 제갈부의 기척인지 살폈는데, 평범한 문사(文士)의 것이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았는지 별다른 기가 없었기에 나는 상대의 이목을 수월하게 따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천문자료는 여기...'
빠르게 서가 네 개를 목갑에 집어넣은 후 주변을 살피자, 천문장비가 있는 별실이 보였다. 하필이면 문사 두세 명이 그 별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기에 빼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멸혼보를 쓰면 억지로라도 숨어들 수는 있겠지만 원래 멸혼보는 은신용이 아니었기에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 할 수 없지.'
은신술(隱身術)
술법을 시전하자 내 몸이 투명하게 되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술법 중에서도 특히 요긴한 것으로, 예전에 남궁환의 방에 숨어들어갈 때도 쓴 적이 있었다. 은신술에 보법의 요령을 이용해서 기척을 숨기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천문장비가 있는 별실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목갑 안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천문장비는 독특하게 생긴 게 많았기에 하나하나 구분할 깜냥이 되지 않았다. 얼추 다 챙겼다고 생각한 나는 진랑곡으로 귀환했다.
진랑곡에 돌아와서 망량에게 장비를 보여주자 망량이 흡족해했다.
"잘 됐군."
"망량. 물어볼 게 있소."
"어떤 거요?"
"수정석비의 14조항은 어떤 의미인 거요?"
"호오... 그게 궁금하다니 연금술(鍊金術)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군."
"생각해보니 연금술사가 다루는 연금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이오."
내 대답에 망량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연금술이란 건 서역에만 있는 기술이 아니오. 동방에도 연단술이라 하여 마찬가지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지. 다만 서역인들은 연금술에서 끝내지 않고 그걸 마법이나 수비학의 영역으로 발전시킨 모양이더군..."
"연금술로 금도 만들 수 있소?"
"물론이지. 수정석비의 제 2항을 보시오."
나는 망량의 말에 수정석비를 목갑에서 꺼냈다. 그리고 제 2항을 살펴보자, [ 유일한 기적을 이루기 위해, 아래와 위는 같으며 위와 아래는 같다.] 라는 문장이 있었다.
"하늘과 땅, 위와 아래."
망량은 2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수정석비는 본디 궁극의 물질인 현자(賢者)의 돌을 제작하기 위한 제작서에 가깝소. 4항에서 세상에서 가장 신령한 물질인 ‘현자의 돌’을 이루는 태양과 달의 기운이 본래 하나라고 말하고 있지 않소?"
"태양과 달의 기운?"
"태양은 불, 기운, 유황을 상징하는 것이고 달은 물, 정액, 수은을 상징하는 거요."
"아."
"하늘에 존재하는 불은 본래 땅에 존재하는 물과 하나이며 땅에 존재하는 물은 본래 하늘에 존재하는 불과 하나라고 하고 있소. 이는 오행상생(五行相生)으로 이해하면 쉽소."
나직이 설명한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이 둘은 서로 돌고 돌며 결합하여 현주(玄珠), 즉 현자의 돌을 이루게 되는 것이오. 이러한 상형을 가리켜 [아래와 위는 같으며 위와 아래는 같다]고 은유한 것이 되오."
나는 신기해서 망량에게 물었다.
"망량. 이 문장은 수수께끼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해석할 수 있소?"
"말했잖소. 연금술이란 원래 동방에서도 연구하고 있는 학문이오. 나는 오행과 팔괘의 이론에 정통하니 이걸 해석하는 건 그리 어려울 게 없소. 하물며 이 수정석비의 이론은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맞닿아있으니."
"흐음."
"하지만 이 14항은 그자체로는 효력이 없소. 이건 이론일 뿐이고, 14항을 구현화시킬 수 있는 수정석비의 영험함이 대단한 것이오."
망량은 수정석비의 겉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수정석비는 고도의 연금술로 제작되어 있으며 생전 처음 보는 재질로 되어 있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야금술지식으로도 수정석비의 재질을 설명할 수 없구려. 이 재질을 알고 있는 건 아마 수정석비를 서역에서 가져 온 그 연금술사 뿐일 것이오."
"즉 재질이 영험해서 강한 영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이오?"
"바로 그렇소."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 수정석비의 일부를 깨어서 파편을 사용하면..."
"그건 안 되오. 이 수정석비는 고도의 술법으로 만들어진 거라서 그랬다가는 전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소. 이건 내면까지 투과해서 읽으면 추가내용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건드려서는 안되오."
단호하게 말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더 물어볼 게 있소?"
"13항을 보면 이 수정석비를 만든 게 헤르메스인가 하는 서역인같은데 맞소?"
"으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수수께끼같군."
망량도 모르는 부분이 있구나. 내가 속으로 생각하자 망량이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갈사에게 갑시다."
나와 망량은 천우진이 있는 오두막으로 갔다. 천우진은 밭을 매고 있다가 우리가 오는 걸 보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형. 왔소?"
"그렇네. 제갈사를 만나러 왔네."
"알았소."
파앗
천우진이 보패 산하사직도에서 제갈사를 꺼내자, 그림에서 사람의 몸뚱이가 튀어나오며 섬광이 일어났다. 그리고 제갈사가 멀뚱히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못된 놈. 숙부를 이렇게 험하게 대하느냐?"
제갈사가 짜증을 내자 망량이 피식 웃었다.
"본론부터 얘기하겠소. 수정석비와 이혼대법을 교환합시다."
"......"
말 그대로 구구절절한 사설을 제거하고 본론부터 찔러들어간 망량이었다. 제갈사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수정석비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거 맞느냐?"
"연금술의 보물인 건 확실하지."
"흐흠... 나도 소문만 들었는데. 어디 한번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보자."
제갈사의 제안에 망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숙부는 먼저 교환에 응할 의사가 있는지부터 내게 밝히시오."
"흠. 진품 수정석비라면 충분히 바꿀 의사가 있다."
제갈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현이 네가 황궁에서 나왔을 적에 장령곡에 왔다면 이혼대법을 물려줄 의사가 있었다. 전에 말했지 않았냐?"
"......"
나는 놀라서 망량을 쳐다보았다. 그 말대로라면 망량은 예전에 배교의 차기교주가 될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또한 제갈사가 망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망량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백웅. 그걸 꺼내 보시오."
"알았소."
나는 수정석비를 꺼내서 장내에 드러내 보였다. 그러자 제갈사가 감탄하며 수정석비를 손으로 쓸었다.
"훌륭하군! 이건 볼 것도 없이 진품이야."
"숙부. 교환에 응하겠소?"
"물론...이지만."
말꼬리를 흐린 제갈사가 말했다.
"나로서는 이제 와서 네가 이혼대법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말해줄 수 없다면?"
"그럼 뭐 나도 교환 못 하지. 수정석비는 탐나지만 그게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안좋은 흐름이었다. 망량은 침음성을 흘린 후 말했다.
"이혼대법을 써서 신대륙의 천문을 측정하려 하오."
제갈사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엥?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이 이상은 숙부가 우리 일을 도와준다고 약속해야 알려줄 수 있소."
그러자 제갈사가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참나! 하나도 지지 않으려 드는군."
"누군들 안 그렇겠소?"
"잠깐 생각 좀 해보고."
"그러시오."
제갈사는 뒷짐을 진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다. 일단 힘 닿는데까지 도와주지. 힘이 안 닿으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꼭 그렇게 사족을 붙여야 하오?"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
"... 당신은 정말 존경할래야 존경할 수가 없소."
망량은 한숨을 쉬고는 제갈사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황궁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또한 칠요에 대한 것과 태산노옹에 대한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 정보내용은 상당히 많아서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놀랄 정도였다.
' 이 정도면 거의 7할은 말한 거 같은데...?!'
제갈사에게 이렇게나 털어놔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망량은 우리의 정보를 노출시키는 한이 있어도 제갈사를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망량이 말한 정보의 질은 굉장히 고급이었기에 제갈사도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듣기만 할 정도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제갈사가 말했다.
"... 제갈유룡이 정파삼대기인인 태산노옹이라고? 그리고 악신을 모시는 사제라니..."
"그게 사실이라는 데는 내 목을 걸어도 좋소."
"......"
제갈사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크게 비웃는 표정을 하며 뇌까렸다.
"제갈유룡, 이 위선자 놈... 그런 주제에 내가 배교에 입문하자 사악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추방시켜? 크크크..."
"내 아버지를 변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때는 당연한 선택이었소."
망량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배교는 [옛 지배자]를 모시는 사악한 종단이었으며 그들이 연마하는 술법 또한 사악한 인신공양의 마법이었소. 어찌 제갈가에서 그걸 용납할 수 있겠소?"
"크큭!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하지 않고 제약을 받아들인 채 제갈가에서 나와 준 것이다. 형님과 연을 끊고 여생은 내 마음대로 살고싶었던 거고. 헌데 형님이 정작 [옛 지배자]를 섬기고 있다라..."
제갈사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쿡쿡 웃었다.
"아주 지랄맞군! 기분이 더러워."
"어쩔 생각이오?"
"물론 협력하지. 형놈의 엉덩이를 걷어찰 때까지."
휙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이공간에서 책자를 소환해서 망량에게 던졌다. 망량이 책자를 받아들자 제갈사는 말했다.
"이혼대법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방법이 비효율적이란 걸 말해두지."
"뭐?"
"원주민들에게 이혼대법을 시전해서 수십 수백배의 천문 관측자료를 손에 넣는다라... 뭐 그럴듯하긴 하지만 너무 정공법 아닌가?"
제갈사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황궁부터 멸망시키고 [문]을 손에 넣은 다음에 1만 군세를 이끌고 가서 야만대륙을 정벌해라. 그리고 부족장을 족치다보면 개기일식의 때를 잘 알고 있는 놈도 있지 않겠나? 그게 더 쉬울텐데."
"음!"
나는 제갈사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확실히 그 방법은 쉬울 듯 했다. 그러자 망량이 잔잔하게 대답했다.
"그 방법도 생각해 봤소. 하지만 황궁을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부족장들이 화요의 유적지에 대한 전설을 알고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소. 그렇기에 좀 더 확실한 때를 찾는 것이오."
"흥... 뭐 맘대로 해라."
제갈사는 투덜댔지만 나는 이 순간 실감할 수 있었다.
제갈사가 자기만의 동기를 가지고 동료로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