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2 천계(天界) =========================================================================
"뭐라고?"
망량은 오화칠금선으로 그들을 겨누며 호통을 쳤다.
"진소청은 그 날 큰 자비를 베푼 것이오! 그 날 당신들의 목숨을 모조리 거두고 멸족(滅族)시켜도 되었는데 그저 해악을 저지른 자들만 처벌했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새로운 가주를 추대한 후 성만 바꾸면 되는 거였소. 오대세가의 지위는 어쩔 수 없이 박탈당했겠지만 안휘성 무림일대에서 백안시되는 건 피할 수 있었겠지."
"......"
"그토록 경고했는데도 그저 본거지만 옮기고 당당하게 남궁세가임을 고수한다라... 현실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들만 모여있다거나, 진소청을 우습게 본 게지. 남궁세가의 악명을 이어받은 건 당신들의 선택이오."
"그, 그건..."
"원한다면 당장 오늘 당신들의 구족을 멸할 수도 있소."
냉혹한 일침에 남궁세가 고수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망량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망량이 뭐라고 더 몰아붙이려고 입을 열자 진소청이 손을 내저었다.
"망량. 그만하시오. 이들도 알아들었을 거요."
"흠..."
"비록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나 이제 알았을 거요. 당신들이 외부에 도움을 뻗을 길은 모두 막혔소. 용중일은 자기가 끼어든 이상 당신들을 더욱 철저히 괴멸시키려 할 것이오."
"......"
"풍신류가 작정하고 나서면 전성기의 남궁세가도 괴로울진대 지금은 답이 없겠지."
남궁세가 고수 한 명이 체념한 듯 말했다.
"우리더러 뭘 어쩌란 거냐?"
"방금 전에 어떤 거래를 하려 했는지, 그리고 남궁세가가 누구와 연결하려 하는지를 말해 주시오. 그걸 말해준다면 남궁세가가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도와주겠소."
"새 출발...?"
"망량의 말대로 성을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란 말이오."
남궁세가 고수 두 명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극도로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걸 말하면 우리 일족들이 죽지 않게 보호해줄 수 있느냐?"
진소청이 힘있게 말했다.
"물론이오. 풍신류나 다른 강호세력이 당신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소."
"알았다..."
이윽고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거래내용을 털어놓았다.
거래내용인즉, 남궁세가는 마지막 보루로 가문의 보물을 갖고나와서 풍신류와 거래를 하기로 했다. 풍신류의 무공은 기오막측한 것이기에 그걸 얻게 되면 주변간섭을 떨치고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풍신류와 연락을 하게 되었고 풍신류의 대표자인 용중일과 양자강 근처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그 보물이란 건 어디 있소?"
"천공대주의 품 속에 있다."
"천공대주?"
망량의 반문에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제일 먼저 용중일의 암경에 격살당해서 서서 죽어있는 자였다. 아마 그가 남궁세가 제일의 무력단체인 천공대의 대주였을 것이리라.
' 어쩐지 다들 무공이 상당해 보이더니.'
이 자리에 온 다섯 명의 남궁세가 고수들은 모두 장로 다음가는 고수들이었다. 그래서 평균무공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셋이 당해버렸으니 앞으로의 미래가 더 암울할 것이다.
망량이 눈짓하자 나는 천공대주의 품속을 뒤졌다. 어차피 보물을 내가 얻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뒤지는게 낫다.그러자 품속 깊은 곳에 왠 커다란 낚싯바늘이 은빛 천에 감싸여 있었다.
"낚싯바늘?"
하얗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얀 낚싯바늘을 만지작거렸다. 낚싯바늘은 그리 특별한 재질이 아니었고 나무로 깎여 있었으며, 특이한 점은 위쪽 부분에 새하얀 보석이 가득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무슨 보물이오."
"... 우리도 잘 모른다."
"흐음. 설마 용중일은 당신들이 보물을 갖고 나온다는 걸 몰랐던건가?"
알았다면 분명히 보물의 용도부터 전해들은 다음에 죽이려 했을 것이다. 그러자 남궁세가 고수가 참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랬을 것이다. 대주는 먼저 그의 속내를 알아본 다음에 비급의 거래조건을 말하기로 했으니..."
진소청을 쳐다보자 그는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청이 독순술로 읽어낸 대화내용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설프게 잔머리를 굴리다가 된통 맞았군. 그걸 말하지 않았으니 용중일은 일단 죽이고 봤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이 나와 진소청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계획이 바뀌었군. 말이 나온 김에 남궁세가와 담판을 지으러 갑시다."
우리는 즉시 비등을 사용해서 남궁세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되돌려주며 성을 바꾸고 새출발을 할 것을 종용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즉시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남은 남궁세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우리 말을 따르기로 하는 기색이었다. 일단 살고봐야 했기 때문이다.
남궁민이 체념한 듯 말했다.
"가주와 소가주는 죽었나요?"
"아직 죽진 않았소. 하지만 그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오."
"......"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시체라도 돌려주세요. 그들이 인간으로서 말종이었지만, 죽은 후까지 모욕할 필요가 있습니까..."
진소청과 나는 약간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검왕 남궁명과 남궁환은 내 목갑 안에서 반죽음이 된 상태로 쓰러져 있으니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추상같은 기세로 엄포를 놓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소. 그들은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아야 하오."
"어떤 벌을 내릴 생각이십니까?"
"그들에게 피해입은 자들과 유족들에게 무공을 폐해서 내던진 후 갈가리 찢어서 포를 뜰 것이오.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들의 시체조각을 짓씹고 불태우겠지."
"헉!"
남궁민이 경악해서 눈을 크게 떴지만 망량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놈들을 천참만륙 해야 성노예로 학대받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로가 될 것이오."
"으흑... 흐흐흑..."
남궁민은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남궁가 사람들이 절망해서 쓰러져서 울었다. 통곡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존경받던 가주와 소가주가 천참만륙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망량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은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허나 그들이 인간이하의 금수같은 짓을 수 년간 행하도록 알아채지 못하고, 그들을 막지 못한 건 당신들의 잘못이오. 가주와 소가주, 남궁팔검이 수십 명의 여인들을 납치감금하는데 그걸 아무도 몰랐을 리가 없잖소! 누군가는 알고 있었겠지만 자기 일이 아니니 모른척 했겠지."
"......"
군중 속에서 몇몇이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망량은 싸늘하게 말했다.
"백웅. 갑시다."
우리는 남궁세가에서 다시 무영문으로 가서 검마에게 계획이 변했음을 알렸다. 검마는 어차피 남궁세가가 멸한거나 다름없으니 상관없다고 흔쾌히 넘어갔다. 일단의 일처리가 끝나자 나는 진랑곡에서 남궁명과 남궁환을 꺼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단전을 밟아서 무공을 폐했다.
퍽! 퍽!
"으억..."
"끄악..."
부자가 복부의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그들을 동정어린 눈으로 보는 자는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망량, 진소청도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기를 불어넣어 검왕 남궁명의 정신을 맑게 했다.
남궁명의 눈빛에 서서히 맑은 빛이 돌아오자 나는 질문했다.
"남궁명. 이 낚싯바늘이 무엇인가?"
"뭣... 너는 누구..."
남궁명은 상황파악을 못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목갑 안은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그는 남궁세가에서 진소청에게 구타를 당해서 기절한 기억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남궁명에게 말했다.
"남궁세가는 멸문했다."
"......!!"
그가 경악하자 나는 차분하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남궁명은 바닥에 엎드린채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고함을 질렀다.
"이노옴!!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으아아아아!!"
남궁명이 일어나서 덤벼들려 했지만, 이내 몸의 이상을 느끼고는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단전이 박살나서 내공이 사라진 걸 깨닫자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남궁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편하게 죽고싶으면 내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게 좋을 거다."
"이익...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참혹한 짓을 하는거냐!"
"참혹한 짓이라니? 너와 네 자식새끼가 여인들을 납치강간한 짓만 하겠나."
"윽..."
"마지막 경고다.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지 않으면 너와 네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다."
남궁명은 내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냈는지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하면 살려줄 것이냐?"
"살려줄지도 모르지. 네 자식놈 목숨도 네가 하기에 달려있다."
"......"
남궁명은 이를 악물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뭐든 말하겠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자식만은 살려다오."
"크크."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 이렇게 나쁜 놈도 자식은 챙기는구나.'
하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촌장도 금만재를 끔찍이 아끼는 걸 본 적 있다. 그들에게 학대당한 여인들은 인간취급도 하지 않으나 자기 혈연만큼은 어떻게든 보호하려 드는 것이다. 감탄보다는 역겨움이 마음속에서 치밀어올랐다.
"그래, 뭐."
나는 손가락에 백색 낚싯바늘을 집어들고는 남궁명에게 물었다.
"이 낚싯바늘이 뭐지? 천공대주가 너희 가문의 보물이라고 가지고 나왔는데."
"그... 그건..."
"빨리 말해."
남궁명은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본가의 초대 가주께서 남기신 유물(遺物)이다."
"유물? 어떤 유물이냐."
"하(夏)나라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유물인데, 자세히는 모른다."
"뭔가 특이한 능력이나 공능이 있으니까 소중하게 보관한 거겠지."
"......"
"이 낚싯바늘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말해라."
남궁명이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이 낚싯바늘은 생각보다 큰 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검을 뽑아들어서 바닥에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남궁환의 목덜미에 갖다대었다.
"셋을 셀 동안에 말해라. 셋, 둘..."
"그건 순어구(舜??)라고 한다!!"
자식의 목숨을 구하려고 소리를 내지른 남궁명이었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설명했다.
"순어구의 능력은 정화(淨化)와 천리통(千里通)이다."
"천리통?"
우리는 놀라서 남궁명을 쳐다보았다. 특히 망량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설마 이건..."
남궁명은 내가 계속 남궁환의 목에 칼날을 갖다대고 있자 버럭 외쳤다.
"내 아들 목에서 칼을 치워라! 부탁이다."
"좋아. 정화와 천리통이 뭔지 설명한다면."
남궁명의 목에 핏대가 섰다.
"순어구에 닿인 모든 것은 정화된다. 만독(萬毒)은 물론이고 기생충이나 오염된 것도 한순간에 정화되는 효능이 있다."
"그 어떤 독이든 정화한다는 말이냐?"
"물론이다."
"그게 사천당문의 독이라 하더라도?"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 묵은 대요괴의 독단도 중화시켰다는 본가의 기록이 있다. 해독을 시도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 될 거라고 생각한다."
"호오..."
나는 슬며시 칼을 떼는 척 하다가 다시 남궁환의 목에 겨누었다. 천리통에 대해서도 설명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남궁명은 이를 갈다가 어쩔 수 없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순어구를 갖고 있으면 그 누구에게든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있다."
"전하는 것만 가능한가?"
"아니다. 상대방의 대답도 들을 수 있다."
"......!!"
나는 망량이 방금 전에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먼 거리에서 의사를 자유자재로 쌍방교류할 수 있는 천리통의 공능! 그건 그 어떤 절세고수도 흉내낼 수 없는 성능이었다. 또한 남궁세가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부와 명예를 쌓아올 수 있었던 게 단순히 운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용법은..."
남궁명은 약 반 각 동안 순어구의 사용법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했다. 그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남궁환의 목에서 칼날을 치웠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한 번 시험해 봅시다."
"어떻게?"
"나를 남쪽 대륙에 데려다 주시오."
"알겠소."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망량을 남쪽 대륙에서 해안가에 데려다놓았다. 그리고 다시 비등으로 진랑곡에 되돌아온 후 순어구에 내 의지를 흘려보냈다.
[ 망량, 들리시오?]
수신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의지를 전송하기만 하면 들린다고 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망량의 대답이 들려왔다.
[ 들리오.]
[ 정말이군.]
나는 다시 망량을 데리고 중원 진랑곡에 돌아왔다. 그리고 순어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남쪽 대륙까지의 거리는 최소한 수천 리가 넘을 것이다. 일만 리가 넘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마치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망량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꽤 모험을 했지만 순어구만큼 대단한 성능을 지닌 도구는 얼마 보지 못했다.
망량이 말했다.
"백웅. 이건 마도구가 아니오."
"응? 마도구가 아니라니..."
나는 순어구가 영락없이 마도구인 줄 알았다. 마법으로 제작되어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목갑이나 비등같은 종류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망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말했다.
"고사(古事)에 이런 기록이 있소. 순(舜)임금은 여산(廬山)의 농부들이 분쟁을 하는 곳에 찾아갔는데, 순이 가서 경작을 하니, 1년 뒤에는 밭고랑이 바르게 되었소. 황하 강변의 어부들이 낚시터를 두소 다투고 있었는데, 순이 가서 낚시질을 하니 1년 뒤에는 순윗사람에게 양보하게 되었소. 동이(東夷)의 도공이 만든 그릇은 품질이 나빴지만, 순이 가서 그릇을 만드니 1년 후에는 그릇이 훌륭해졌소."
"......?"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 뜻을 알아채고는 놀라서 외쳤다.
"서, 설마 이건..."
"그렇소."
망량은 감탄하는 눈빛으로 순어구를 손에 들며 말을 이었다.
"순(舜) 임금이 직접 사용했던 낚싯바늘(??). 즉 이건 황궁 지하의 전국옥새와 마찬가지로 삼황오제(三皇五帝) 순(舜)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한 절세보패요!"
============================ 작품 후기 ============================
한자가 깨져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