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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며칠 후, 축융족들이 고서의 해석이 끝났다고 우리를 불렀다. 나는 조용히 왕궁을 둘러보며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의 부름에 따라갔다. 축융족 세 명은 도서관의 의자에 앉아서 해석결과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내용은 내가 아는 것과 대동소이했다.
"용화수란 건 화요(火曜)의 비보 곁에서 화기로 자신의 씨앗을 데우며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대양의 남방으로 3천 리를 향하면 신농씨가 황제에게 패해서 유배되었다는 전설의 대륙이 나타난다."
"......"
"그리고 화요의 봉인지는 그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바위산에 존재한다. 봉인과 수호자를 뚫으면 용화수의 씨앗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방무결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백원쌍마는 그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듣기에는 마치 전래동화를 듣는 것처럼 지극히 황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해석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태초의 순수한 성련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아마 너희 백련교의 성련 이야기겠지."
그 말에 동방무결이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축융족의 말이 이어졌다.
"그 순수한 태초의 성련은 수요(水曜)의 유적 근처에 피어나는 흑백련(黑白蓮)의 형태이다. 수요의 유적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욱(?頊)이 마지막으로 치수(治水)의 증거를 남긴 태곳적의 산(山)에 있으니, 그곳에서 칠요 중 강력한 수요의 비보를 함께 얻을 수 있으리라."
동방무결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흑백련이라면...?"
"아마 너희가 우리에게 준 것과 같다."
화악 하고 내게로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동방무결은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성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지?"
"......"
"개량한 성련이라고? 왜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아니 태초의 흑백련을 얻었다면 당신은 설마!"
동방무결은 천하제일의 의원이었기에 머리도 좋았다. 그는 금새 사실을 유추해낸 듯 했지만, 나는 당연스럽게 축융족에게 말했다.
"취향이 고약하군. 굳이 나를 이렇게 곤경에 빠뜨려야 했소?"
"이봐!"
동방무결이 내 대답을 원하는 듯 강한 살기를 표출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축융족이 냉막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먼저 받은 의뢰를 수행할 뿐이다."
"그럼 이제 내 의뢰도 수행해 줘야겠군."
"이미 했다."
풀썩!
다음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내게 덤벼들 것 같던 동방무결과 백원쌍마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은 눈을 부릅뜬 채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질린 눈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진맥했는데, 몸 상태는 정상이었지만 의식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정신제압인가?"
[ 우리 종족은 하등생물의 정신을 제압할 수 있다. 저 자들의 정신력이 강하다 해도 우리 셋이 힘을 합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축융족은 숨길 생각도 없는지, 입고 있던 적의에서 슬며시 염언을 꺼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놀랐잖소. 이 자리에서 동방무결과 싸웠다면 일이 다 틀어졌을 텐데."
[ 알 바 아니지.]
"후..."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나는 축융족을 찾아가서 2가지의 의뢰를 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동방무결 일행을 제압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었다. 고문의 해석이 끝나는대로 그들을 꼼짝 못하게 제압해달라는 의뢰였는데 축융족이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술법인지 특수능력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정신능력은 대단해 보였다.
나는 혼절한 동방무결과 백원쌍마를 힐끔 내려다본 후 말했다.
"추가 의뢰요. 이 자들의 기억을 조작해 주시오."
[ 별 걸 다 시키는군. 우리가 네 졸인 줄 아느냐?]
"댓가는 충분히 줄테니 부탁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들을 살인멸구할 수밖에 없소."
[ 알았다.]
이윽고 나는 축융족이 내가 의뢰한대로 가짜기억을 그들의 뇌리에 흘려넣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최면상태에서 그들의 대답을 들어서 가짜기억이 새겨진 걸 확인한 후, 그들 세 명을 그대로 목갑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원할 때 풀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추가로 흑백련 한 쌍을 더 꺼내자 축융족이 말했다.
[ 한 쌍 더 꺼내라.]
"무슨 소리요?"
[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남만어를 터득하게 해 달라는 의뢰를 지금 들어주겠다는 소리다.]
"아!"
나는 축융족의 말대로 흑백련을 한 쌍 더 꺼냈다. 그러자 축융족이 손을 들어서 내 이마에 갖다대었고 이상한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건 명백히 이족의 언어였으며 인간의 발음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우웅
녹색 빛이 내 미간에 감돌더니 이내 스러졌다.
"......!!"
나는 다음 순간, 내가 남만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이 곳에서 나고자란 사람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축융족이 시험하듯 남만어로 말했다.
"내 말 알아듣겠나? 이 곳 아유타야 제국의 왕이 나레쑤언이며 그가 흑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물론이오. 흑태자 나레쑤언을 잘 알고 있소."
"좋아."
내가 마주 남만어로 대꾸하자 축융족이 흑백련을 주섬주섬 자기 품에 챙겨넣었다. 할 일을 다 해줬다는 태도였다. 차갑기에 조금 서운했지만, 확실히 축융족은 자기가 의뢰받은 일을 다 해주는 족속인 것이다.
누가 순식간에 초절정고수 셋을 제압해 주겠는가?
호법사자가 아니고서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쓸만한 자들이군.'
선지자도 그렇고 저 종족은 굉장히 유능했다. 내가 내심 축융족을 고평가하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축융족이 말했다.
[ 바로 우리를 따라와라. 무창의 탑을 이용하게 해 주겠다.]
그들은 한번에 일을 몰아서 처리하는 게 기본 성격인 듯 했다. 아무래도 아스타나의 선지자도 그렇고, 그들은 일의 효율성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자들인 듯 하다. 나는 그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잠깐 기다려 주시오. 나레쑤언과 만나서 볼 일이 있소."
[ 우리는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다. 얼마나 기다려줘야 하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중대한 일이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 ......]
그들은 뭔가 의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 이내에 끝내고, 여기에 와라.]
"알았소."
나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나레쑤언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나레쑤언이 반 각도 되지 않아서 옥좌로 나왔고, 나는 다시금 사와스바티와 함께 서 있는 나레쑤언을 볼 수 있었다.
나레쑤언이 말했다.
"동방무결이 보이지 않는군. 그는 어떻게 했지?"
"갈등이 있어서 잠시 잠재워뒀습니다."
"......"
그는 침묵하다가 옥좌에 턱을 괴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처리하게."
"왕야의 생각보다 더욱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패기 마음에 드는군. 그 말을 꼭 지키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레쑤언은 내가 동방무결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를 듣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방무결은 그가 꼭 지켜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넘어간 것이다. 동방무결보다는 나와의 교섭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 며칠 전에 미리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지.'
흑요석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해두지 않았다면, 나레쑤언은 동방무결을 건드리는 것은 자기 손님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곳에서 나레쑤언과 혈전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고두고 후환이 되었을 테지만 - 나레쑤언을 설득한 덕에 이 시점을 평화롭게 넘길 수 있는 것이다. 나레쑤언을 정치적으로 설득한 효과였다.
나레쑤언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말해서, 본왕은 그대가 보여준 기억이 완벽한 진실이라 생각지 않네. 따라서 그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아. 그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대가 보여준 기억에서 본왕이 나아가야 할 길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 그 과정에 그대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직감이 들어. 그래서 일단은 그대와 내가 서로를 이용하며 이득을 추구하는 걸로 해 두지."
"네."
지극히 정치적인 언사였지만 나는 이 대답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그가 나를 적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를 수상쩍게 생각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레쑤언이 대명제국의 정복야욕에 큰 부담감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나레쑤언은 그 나름대로 나를 장기판 위의 말로 이용해먹을 생각일 것이다.
' 이용하겠다면 일단 이용당해 주지. 당신이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나레쑤언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에게 소개시켜줄 자는 바로 서방의 기술자일세."
"기술자요?"
"난파해서 본국에 흘러들어왔는데, 서방의 상인들이 숨기고 있는 총포기술을 추가로 해석해서 본인에게 건네준 자일세. 또한 뛰어난 야금술의 달인이기도 하지. 그 덕에 총기 기술을 많이 발전시킬 수 있었어."
그렇게 말한 나레쑤언이 손을 들자,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걸어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이 푸른 눈을 지니고 있는 색목인이었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더니 중원어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내가 그를 힐끔 쳐다보자, 나레쑤언이 말했다.
"그대 얘기를 하자 큰 관심을 보이더군. 중원어를 잘 하니 이야기를 해 보게."
"......"
"원하는대로 총기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해 줄 것이네."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중원어로 이야기를 하라고 해도,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란 말인가? 대놓고 총기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그가 설명할 수 없을 게 뻔한데다, 설령 한다 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고, 게다가 나레쑤언의 눈치마저 보였다. 망량이라면 이 상황에서 나레쑤언의 말뜻을 읽어냈겠지만 나는 쉽사리 짐작이 되지 않았다.
서역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할 말이 없으신가보군요. 저는 이만..."
"자, 잠깐만."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름도 뭣도 모르는 서양기술자에게 대체 뭘 말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왠지 나레쑤언이 나를 곯려주려고 이상한 제안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가 앗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거 보시오. 이거 어떻게 생각하오?"
스윽
나는 그만 황금비등을 떡하니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황금비등은 마도구였다. 서양 기술자가 이걸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괜한 뻘짓을 했다는 생각에 내 얼굴이 붉어졌을 때였다.
"이럴수가."
탄성이 울렸다.
갑자기 눈 앞에 서 있던 서역청년의 입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가 어째서 알하자드의 램프를 갖고 있나?]
"어?"
나는 그 순간 서역청년의 말이 인간세상의 말이 아닌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게 이족(異族)의 언어이며, 내가 여러 번 들어왔던 낌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역청년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동업자인 것 같은데 그 물건을 얻게 된 과정을 말해주시죠."
"도, 동업자?"
"시치미 떼지 마시고. 어차피 그런 내숭은 안 통하니."
서역청년은 왠지 안달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순간 상대방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 이 놈은 마도사(魔道師)구나!'
황금비등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린 것, 그리고 황금비등의 제작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이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 모두가 그가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는 마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갈사나 연금술사와 같은 사악한 술법사!
또한 놈은 어찌된 일인지 나를 같은 마도사라고 생각한 채 황금비등의 유래를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일단 당신 이름부터 알려주시오. 그럼 생각해 보지."
"귀찮게 하는군. 동양인은 다 이런가?"
서역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
"......"
혀 꼬부라지는 발음이라서 못 알아듣겠다. 차라리 이족의 언어가 낫다.
"필리푸스 파라켈수스라고 부르시지요."
정말 서양인답게 괴상한 이름이었다. 내가 나레쑤언을 쳐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레쑤언이 피식 웃었다.
"통성명이 힘든 자일세."
"그렇군요."
파라켈수스는 애가 타는지 말했다.
"아니 그걸 얻게 된 경과는 상관없어. 내 비전(秘傳)과 교환합시다. 어떻습니까?"
"미안하지만 이건 바꿀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크으... 쓰잘데기없군."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이 왕국에 오래 머물고 있을테니 내킬 때 찾아오십시오."
퍼엉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나레쑤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제멋대로인 자."
"저 자는 이족과 결탁한 사악한 존재입니다. 위험합니다."
내가 서양인의 본질을 지적하자 나레쑤언이 옥좌에 앉은 채 손에 깍지를 꼈다.
"그래서 뭐? 어쨌든 그는 대외적으로 뛰어난 기술자이자 야금술사로서 우리 아유타야에 큰 도움을 주고 있네.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용해야지."
"......"
"아마 명 제국의 황제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허나 그는 야망을 키운 나머지 그 '연금술사'라는 존재에게 휘둘린 모양이군."
중얼거리던 나레쑤언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그대와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 다음에 찾아오게."
"네."
나는 대꾸하고는 나레쑤언 앞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군주라는 건 다 저런 건가?'
나레쑤언은 악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 파라켈수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가 이족에게서 힘을 빌리는 마도사라는 걸 이전부터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나와 그를 대면시킨 이유는 파라켈수스를 자극시켜서 더 심층지식을 끌어내려는 의도였으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적인 의도였지만 그렇기에 위험했다. 나레쑤언은 현재 명 제국의 황제보다는 똑똑해 보였지만, 그가 언제 마도사에게 휘둘려서 세상을 망칠지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아마 인신공양같은 사악한 방법은 스스로 멀리하고 있겠지만 나라가 위험해질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축융족에게 갔다. 더 이상 여기서 볼 일은 없다.
"갑시다."
"그래."
축융족을 따라서 어디론가 향하자, 확실히 예전에 동방무결이 말했던 대로 거인의 유적이 등장했다. 삼황오제의 전설에 나오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후손, 이른바 치우(蚩尤), 과보, 공공, 형천과 같은 거대신의 일족의 유적이었다.
유적 그 자체가 바로 무창(無窓)의 탑으로 보였다. 새까맣고 구멍뚫린 돌으로 이루어진 그 탑은 굉장히 거대했다. 내가 멀리에서 무창의 탑을 지켜보자 축융족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무창의 탑 내부에 들어오자 안쪽에 공동처럼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초록빛 보석으로 이루어진 격벽 때문에 바깥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신기해서 격벽을 만지작거리자 축융족이 경고했다.
"그 안쪽은 신(神)이 봉인되어 있다. 손대지 마라."
"신?"
"제일 큰 봉인지는 따로 있다만 손대지 마라. 거인이 하나라도 깨어나면 골치아프다."
그렇게 중얼거린 축융족은 다짜고짜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무창의 탑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나도 더 이상 한눈팔면 미움받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다."
이윽고 탑의 정상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축융족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가면을 벗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무표정이라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축융족들이 동시에 뭔가 큰 고함을 내질렀다.
"......!!"
잠시 후, 나는 빛에 휩싸인 채 어딘가 이상한 곳으로 도착해 있었다.
'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축융족이 많았는데...'
주변에 아무런 축융족도 안 보인다!
내가 어지러움을 털어내며 바깥쪽으로 걸어나오자, 거기에는 축융족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가 말했다.
"1회 사용권이 절반 사용되었다. 되돌아갈 때는 내게 말해라."
"무슨 소리요?"
"뭣... 무창의 탑의 기능을 모르는 것인가?"
"그렇소."
그 자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탑 밖으로 나가보아라.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서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서 무창의 탑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탑 바깥에 펼쳐진 광활하고 아무것도 없는 벌판과 평야를 보자,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헉!"
이 곳은 전혀 새로운 곳이다.
새로운 대륙이다.
' 그렇구나! 이 곳에 화요가 있는 거다.'
나는 다음 순간 무창의 탑의 기능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탑]에서 [탑]으로 공간이동하는 기능! 이 곳은 아마 화요(火曜)가 존재하는 세상 남쪽 끝의 대륙일 것이고, 나는 남만에서 이 대륙까지 한번에 이동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