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318화 (318/1,615)

0318 ----------------------------------------------

천계(天界)

흑태자 나레쑤언은 강직하게 생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내였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후반으로 보였으며 탄탄한 체구와 골격은 그가 무인(武人)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남만사람 특유의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외모보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기도였다.

나레쑤언의 기(氣)는 굉장히 강했다. 기파만으로는 동방무결에 전혀 뒤지지 않았으며, 마치 산악같은 힘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장기가 권(拳)이라고 했으니 한번 권법을 시전하면 굉장한 위력을 보일 것이다. 그는 분명히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초절정고수였다.

' 남만에 이런 권법고수가 있을 줄이야...'

수준만으로 볼 때는 현 무림의 정상급 초절정고수에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속으로 놀라고 있을 때 동방무결이 남만어로 무어라고 말했다.

"*&@ㅛ$#@*%#&..."

"#*%&@%&?"

"^%*$#%*..."

"......"

아 답답하다.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남만어에 대해서 뭔가 대비를 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현재 이쪽 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동방무결이 뭔가 농짓거리를 해도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동방무결과 나레쑤언은 무언가 한참 이야기를 하는 듯 했는데, 주로 나레쑤언은 시큰둥했고 동방무결은 필사적인 기색이었다.

그 때 나레쑤언이 문득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백련교의 원로원에서 나온 자인가?"

중원어다!

내심 반가웠으나 경계심도 들었다. 그가 난데없이 유창한 중원어를 구사해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진의가 짐작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백련교가 우리 일에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감히 나 따위가 어찌 교주의 심오한 뜻을 헤아릴 수 있겠소? 나는 사자(使者)에 불과하오."

그러자 나레쑤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노회한 대답이군. 정말로 반로환동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네."

"왕야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미안하오."

"아닐세. 그럼 부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바라겠네."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근위대를 따라서 어디론가 향했다. 넓은 왕궁의 정원을 여러 번 헤치듯이 굽이굽이 돌자, 마치 도시를 내려보는 듯한 언덕이 나왔다. 싱그러운 자연의 바람이 머물고 있는 그 정원에는 적의(赤衣)를 입은 괴인들이 서 있었다.

' 세 명?'

적의인 세 명은 괴이한 가면을 쓰고 있었고 전신에 적의를 입고 있었다. 입는다기보다는 옷으로 몸을 에워쌌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껴입은 복장이었다. 적의인들을 본 동방무결이 조심스럽게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 잡생각을 멈추시오. 저 자들은 축융족이고, 정신으로 대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소.]

[ 뭐?]

[ 이제부터 우리가 전음으로 하는 대화도 저들이 읽을 수 있다는 말이오.]

[ ......!!]

나는 깜짝 놀랐다.

' 전음을 엿들을 수 있다고?'

게다가 동방무결의 어투를 보면 사소하게 새어나가는 생각도 축융족에게 읽히는 모양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축융족은 굉장한 정신능력을 보유한 셈이었다. 내가 뇌정경을 운용하며 머릿속을 평정상태로 만드는데 집중하자, 축융족 3인 중에서 가운데에 서 있던 자가 말했다.

"처음 보는 인간이군. 너는 누구냐?"

내게 질문이 들어왔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리자,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백련교주의 사자로 남만에 온 여동빈이라고 하오."

"여동빈...? 그건 대라신선일텐데, 가명인가?"

"......"

"어째서 우리 거래 장소에 온 것인가?"

"이 일은 본교의 앞날에 중요한 거래요. 당연히 동방무결에게만 맡겨둘 수 없으니 원로원의 사자로서 참여하고자 한 것이오."

내 대답을 들은 축융족은 왠지 가면 안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기색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동료들을 한 번씩 쳐다본 후, 말했다.

"넌 굉장히 특이한 인간이군. 생각이 읽히지 않아. 술법으로 장막을 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 말에 동방무결도 놀란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축융족이 내 마음을 읽지 못하는게 기만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태연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냥 당신 능력이 부족한 거겠지."

내 대답에 축융족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축융족은 뭔가 생각하듯 눈을 데굴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너희는 우리가 요구한 것을 가지고 왔느냐?"

"여기 있소."

그러자 동방무결이 앞으로 성큼 걸어나오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흑백련 두 쌍을 축융족에게 내밀었다. 축융족은 흑백련을 받아든 후 한참동안 천천히 관찰을 했는데, 이윽고 왠지 치직거리듯 거슬리는 말투로 말했다.

"... 나. 레쑤언에게 줬던 성련이 아니군. 이. 건 뭐지?"

마치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껍질을 쓰고 있는 듯 불쾌하고 기이한 말투였다. 동방무결의 안색이 굳어지는 걸 봐서는 대답할 말을 달리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것은 개량한 성련이오. 흑색과 백색의 연꽃을 동시에 복용하면 굉장한 내공증가는 물론이고 주술에 저항력을 가지게 되오. 본교의 극비사항이니 누설하지 마시오."

"......"

축융족은 감정을 진정시킨 듯 고요해졌다. 그러더니 말했다.

"효과가 더 좋다는 뜻이냐?"

"저주에 효력이 좋은걸로 알고 있소."

"... 어중이떠중이가 아니군. 영약의 정확한 효과를 판별하고 있는가..."

그렇게 중얼거린 축융족은 이윽고 말했다.

"좋다. 너희 말을 믿겠다. 우리는 너희가 의뢰한 고문(古文)의 해석을 시작하겠다."

"얼마나 걸리겠소?"

"사흘이면 족하다."

축융족 세 명은 대화가 끝나자 어디론가 총총걸음으로 가 버렸다. 아마도 나레쑤언의 왕궁에 있다는 도서관으로 향했으리라. 내가 그들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자 동방무결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군. 너무 긴장이 되어서 말이 안 나왔소."

"당신같은 천방지축이 긴장을 하다니."

"빌어먹을... 비꼬지 마시오. 오늘 저 자들은 대단히 온건한 태도로 나온 거요. 첫 대면에서 나는 저들의 정신능력 때문에 기가 빨아먹히는 줄 알았소."

투덜거리는 동방무결은 진심으로 축융족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동방무결 뒤에 서 있던 백원쌍마는 아예 굳어서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다지 체감할 수 없었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경우에는 축융족의 정신능력에 큰 압박감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동방무결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두지만 저 신형 성련은 극비사항이오. 당신이 극비사항을 누설했다는 사실이 본교에 밝혀지면 당신이나 나나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오."

"으윽..."

동방무결은 뭔가 찔린 표정을 짓더니 내게 전음을 보냈다.

[ 그렇게 압박만 하지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이야기해 봅시다.]

[ 무슨 대안?]

[ 저 원숭이 두 놈을 적당한 때 처리하게 도와주시오.]

[ ......]

아무래도 동방무결은 자신이 호위역으로 고용한 백원쌍마를 살인멸구할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만리타향까지 따라온 자들을 해치운다는 건 쉽사리 할 발상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동방무결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도(魔道)에 가까운 무림인인 것이다.

[ 뭐 그건 지금 이야기할 일이 아니군. 나중에 때를 봅시다.]

[ 알았소.]

우리는 다시 근위병을 따라서 왕궁의 숙소에 도착했다. 명색이 남만 최대제국의 왕궁이라서인지 숙소는 굉장히 크고 화려했다. 생전 처음 보는 축조양식이긴 했지만 사람이 걱정없이 편히 쉴만한 세련된 공간인 게 사실이었다. 나는 비단으로 된 이불의 감촉을 즐기며 느긋하게 누우며 생각했다.

'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군. 하지만 여기까지 끌어오려고 무리수를 많이 던진 것 같다.'

동방무결이 백원쌍마를 살인멸구하려 했지만, 사실은 나도 동방무결을 없애야 한다. 그가 살아서 백련교로 귀환할 경우 내 존재가 드러나서 백련교가 나를 추적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동방무결이 교에 복귀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동방무결을 죽인다면 그나름 문제가 있다. 동방무결이 비록 교에서 정식지위는 없어도 교주의 희망을 건 극비임무를 수행중인 몸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동안 연락이 없다면 당연히 백련교에서 조사를 위해서 남만에 고수를 파견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백련교가 진실을 알아낼 것이다.

"......"

하지만 방법은 있다. 진퇴양난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다 풀어낼 수 있는 난관이었다. 나는 적당한 대책을 생각해 내고는 다른 문제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쳇. 축융족이 나를 경계하는 것 같은데..."

마지막에 봤던 그 눈빛은 명백히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축융족이 나를 경계한다면, 나는 원래 동방무결이 얻었던 권리인 무창의 탑 관람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무창의 탑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러면 손해이다.

나는 한참동안 곰곰히 생각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움직이자."

조금이라도 승산을 올리려면 뭔가 행동을 해야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우선 품속의 목갑에서 흑요석을 꺼낸 뒤 필요한 만큼만 가공을 했다.

나는 곧장 나레쑤언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근위병은 나레쑤언의 사생활 중이라서 만날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 나레쑤언을 만나지 못하자 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남만에 존재하는 고대의 도서관. 그 곳에서 축융족 세 명은 차분하게 앉아서 고서를 읽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말할 게 있소."

우두머리로 보이는 축융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일을 방해하면 더 오래 걸린다."

"미안하군. 하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것과는 별개로 말할 게 있소."

"말해 봐라."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붕대를 묶어서 가리고 있던 손등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손등에서 회색빛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자, 축융족들은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

"이것은!!"

나는 그들이 당황하자 씩 웃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무창의 탑을 1회 이용할 권리요. 당신들은 아스타나의 선지자와 동족이 아니오?"

그러자 가운데에 서 있던 축융족이 인간의 성대로 말하지 않고 선지자가 말하듯이 정신으로 염언(念言)을 보내 왔다.

[ 이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일족의 왕(王)뿐이다. 너는 우리들의 왕을 뵙고 왔느냐?]

"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게 권리를 부여한 건 사실이오."

[ 터무니없는 인간이군. 설마 왕께서 인간 따위에게 이 권리를...]

축융족들은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의 말투에서, 나는 이 종족이 인간을 하등생물로 깔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대로 거래를 해 주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훨씬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왼쪽에 서 있던 축융족이 말했다.

[ 아까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과 나는 완전한 동료가 아니오. 때가 되면 서로 견제할 사이지."

[ 그렇군. 그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냐.]

"그건..."

나는 축융족에게 내 요구조건을 말했다. 축융족들은 서로 염파를 보내면서 뭔가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대꾸했다.

[ 그 두 가지는 쉬운 조건이다. 해 주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해 줘야할 이유가 없는게 문제다.]

나는 능글맞게 대답했다.

"나는 아까 당신들에게 주었던 흑백련을 더 많이 갖고 있소. 한 건당 한 쌍씩 추가로 드리도록 하겠소. 게다가 왕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나를 돕지 않는 건, 당신들의 위치상 어떨까 싶은데."

[ 흠... 교섭할 줄 아는 인간이군.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 있던 축융족이 눈을 데굴거렸다.

[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감사하오."

[ 만일 우리 뒤통수를 치면 네놈은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축융족과의 추가교섭을 마치고 방에 되돌아왔다.

다음 날, 나는 아침일찍 나레쑤언을 알현하러 갔다. 나레쑤언은 이번에는 자리에 있는지 내 알현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남만의 조정은 매일 입조를 하지는 않는 건지 왕의 개인시간이 많아 보였다.

"원로원 고수가 나를 이토록 보고싶어 하다니. 무슨 일인가?"

나는 남만 최대의 패주이자 제왕인 나레쑤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흑태자라고 불릴 정도의 영웅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던 나는 천천히 말했다.

"동방무결에게 듣기로, 서방의 열국과 잦은 교류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네. 서방의 기술은 앞서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 그들의 기술력은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서방의 총기와 문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자들의 기술은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싶어 왕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레쑤언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자네가 묻는 건 국정의 극비사항이지. 신문물, 그것은 군(軍)과 큰 관련이 있는 기술을 감히 왕인 내게 묻는다는 것인가?"

얼핏 호탕해 보였지만 말투의 내부에 약간 노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언제 호통을 칠지 모르는 감정상태였다. 나는 그 상태를 빠르게 감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백련교는 잠재적인 대적(大敵)으로 명 제국의 조정을 겨누고 있습니다."

"......"

나레쑤언의 노기가 가라앉고 나를 주시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알아낸 사실은, 명 제국이 사악한 종교와 결탁해서 인신공양의 의식을 벌이고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전세계 각지에 문(門)을 열어서 지배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야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내 말에 나레쑤언은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들어보지 못했네. 허나 너무 허무맹랑해 보이는군. 그게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지?"

"이 흑요석으로 기억을 보신다면 제 말을 믿어주실 수 있을 겁니다."

"......?"

내가 흑요석을 내밀자 근위병들이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어디선가 근위병들이 추가로 쏟아져 나와서 오와 열을 이룬 채 총기로 나를 겨누었다.

촤촤촤촥

그 속도는 매우 빠르고 일사불란해서 그 자들이 잘 훈련된 정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긴장상태가 유지되자 나레쑤언이 손을 저었다.

"물러나라."

근위병들이 썰물 빠지듯이 물러섰다. 나레쑤언은 상체를 숙이고 턱을 괴며 말했다.

"터무니없는 자로군. 대체 원하는 게 뭔가?"

"왕야께서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다."

"흐음... 믿는다라... 그게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는 걸 알고는 있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늘 체감하고 있지요."

"... 좋아. 그렇다면 나와보거라, 사와스바티."

나레쑤언의 말이 끝나자 뒤편에서 왠 아름다운 미소녀가 걸어나왔다. 정결하고 고운 인상이었으며 이목구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된 조형을 가진 소녀였다. 나이는 대략 10대 후반으로 보였으며 상당히 육감적인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애첩이다."

사와스바티라고 불린 미소녀는 나레쑤언의 옆에 섰는데, 나레쑤언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네가 저 흑요석을 먼저 받아보거라."

"네."

사와스바티가 흑요석을 받자, 그녀에게로 기억이 전송되었다. 사와스바티는 전혀 생소한 기억에 깜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당황한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나레쑤언에게 말했다.

"왕야. 이 분은 거대한 길을 걷고 계십니다."

"호오..."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나레쑤언은 그제야 호기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게도 줘 보게."

파앗

나레쑤언에게도 기억이 흘러들어갔다. 그것은 물론 다른 동료들처럼 내 전생 전반을 담은 기억이 아니라 황궁 세력에 대한 기억만 간추린 요약본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황궁과 싸우다가 어떤 정보를 알아냈는지, 그리고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천암비서를 포함해서 핵심적인 비밀은 담겨있지 않았다.

'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17회차의 기억만으로도 일국의 군주가 경계하게 만들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나레쑤언은 진중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죽음을 반복하면서 명 제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싸우는 전사(戰士)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보셨듯이 지금의 명 황제는 미쳤습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라면 중원의 3할을 악신에게 던져주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자국의 민초들에게도 이럴진대, 만일 그들의 계획대로 되어서 정복전쟁을 시작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타국의 백성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

남만의 패주 나레쑤언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나는 그의 불안을 부추기기 위해 말했다.

"대학살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보셨듯이 힘을 갖춘 명 제국은 아유타야의 힘만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 그렇겠군. 사도라는 존재 앞에서는 총기가 아무런 쓸모가 없겠어."

나레쑤언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아. 그래서 자네의 목적은 내가 지금부터라도 명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또한 서방의 총기에 대해서, 그들의 신문물에 대해서도 알려 주십시오. 어쩌면 그들의 기술력에 명 제국에 대항할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나레쑤언이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일모레면 도서관의 해석이 끝난다 들었네. 자네가 볼일을 다 보고 나면 본왕을 찾아 오게. 중요한 자를 만나게 해 주지."

"감사합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알현장소를 빠져나왔다.

즉흥적으로 생각이 나서 행동하긴 했지만, 일이 모두 계획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