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9 ----------------------------------------------
천계(天界)
18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외양간에서 일단 나오기로 했다.
움직이자.
생각할 게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해야할 게 많았다. 일이 너무나 복잡하게 꼬여있는데다가, 17번째 생에서 죽었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기분이 머릿속에서 창궐할 때 가만히 쳐져 있으면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천암비서를 얻으러 갔다. 천암비서를 얻고서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산동으로 향해서 비등을 얻었다. 여기까지는 내 모험의 필수품인 천암비서와 비등을 얻는 것으로써, 축약할래야 축약할 수가 없는 과정이었다.
이윽고 대룡표국의 표물에서 비등을 꺼낸 후 야밤의 건물지붕 위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기나긴 한숨이 터져나온다. 이제 또 바쁘게 뛰어다닐건 분명하다. 해야할 일도 많다. 무엇보다도 '신(神)'이라고 하는 거대한 존재를 생각하니 암울한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 걸 상대로 인간이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지붕 위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전 생에서는 비등을 얻고난 후에 뇌옥으로 가서 거대두꺼비와 싸웠다. 그리고 나서는 황연을 구출해서 청룡무관에 데려다준 후, 검마에게 가서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승시켰다. 이후 해적일과 포로해방을 검마에게 맡긴 후 망량에게 기억을 전승시켜주고 막야의 수기를 공양하러 갔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생에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게 진행하는 게 옳다. 하지만 나는 문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대로라면 봉선의식으로 막야를 해방하게 되겠지. 막야의 힘을 얻기 위해서 봉선의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천계의 정보를 태산노옹 주작이 태산의 천제단에서 훔쳐보고 있는 이상, 그건 빠르든 늦든간에 주작과 정면충돌한다는 뜻이 되겠군.'
그리고 17번째 전생에서 주작의 행동력과 두뇌는 굉장히 좋아서, 나는 언제나 한수앞을 제압당하고 뒤통수를 맞았다. 백련교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황궁반파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신의 강림으로 패배한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주작과 부딪히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작은 단지 무력이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지략과 계략에 있어서 최적의 상황을 읽고 들어간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작과 맞닥뜨리면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는 주작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게 아닌가?
' 내 무공으로 할 수 있을까?'
주작의 본신능력은 이광조차도 아래에 둘 정도로 강력하다. 무엇보다도 칠요인 토요 팔괘도의 힘을 대여해 와서 상대방의 힘을 봉인시켜버리는 능력이 무서웠다. 내 현재 무공이 이광과 동수라고 가정해 보면, 내 단독의 힘으로 주작을 암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곰곰히 상황을 정리한 후 결론을 내렸다.
망량과 논의해서 앞으로의 일을 진행하되, 다른 무슨 일보다도 주작의 제거와 견제를 최우선으로 해야한다!
' 황제가 문제가 아냐. 주작을 없애야 황궁을 없앨 수 있다.'
망량에게 모든 생각을 맡겨둘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번에 망량이 납치당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망량 또한 인간이고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생각을 해 두면 망량과 함께 계획을 짜기 수월한 게 분명했다.
파앗
나는 일단 뇌옥으로 갔다. 그리고 뇌옥에 있던 거대두꺼비를 보자마자 여동빈을 불러내었다. 내가 직접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힘을 빼느니 그냥 여동빈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도와주시오!]
여동빈은 즉시 내 요청을 받아들여서 내 몸에 강신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서 거대두꺼비에게 덤벼들었다.
[ 하앗!]
여동빈이 거대두꺼비를 회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도서와 목갑, 쌍검을 챙겨서 황연 대장군과 인질들을 구출했다. 하도 여러번 구출하다보니 이 자들의 성명과 신분 등등을 내가 다 외울 정도였다.
' 흠. 황연 대장군을 바로 청룡무관에 놓아주지는 말자.'
귀찮은 일을 빨리 덜어낸다는 이득보다는 변수가 늘어난다는 불안감이 크다. 나는 우선 구출한 사람들을 모두 목갑에 밀어넣은 후 곧장 동영으로 가서 흑요석 일부를 채취했다. 그리고나서 무영문에 가서 검마에게 흑요석의 기억을 전승해 주었다.
우웅
"으음...!!"
처음에는 흑요석을 전해준다고 하니 긴가민가하던 검마였다. 하지만 흑요석을 통해서 내 17회차 분의 기억을 얻고 나자, 그의 안색은 혼란스러워지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내게 말했다.
"그렇군.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패배했던 거군..."
그것은 17회차의 전생에 대한 검마의 한마디 감상이었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암울한 기분이 들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검마는 손깍지를 끼고는 말했다.
"요는 주작이 천계의 정보를 선점하고 있으니 섣불리 나설 수 없다는 게 되겠군."
"그렇습니다. 태산노옹이라는 이름으로 태산의 천제단을 지키고 있는 이상, 봉선의식의 정보는 언제든지간에 주작에게 흘러들어가겠죠."
"그리고 그 때부터는 전력을 다하는 주작의 귀계(鬼計)와 싸워야하는 걸테고."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검마가 말했다.
"망량과 논의하기 전에 내게 이야기한 건 잘한 일일세. 자네는 이 정보를 망량에게 전해주기 전에 몇 가지 주의해야할 게 있어."
"네?"
주의해야 한다니?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검마가 말했다.
"첫 번째. 자네는 주작이 망량의 아비되는 자라는 걸 유념해야 하네."
"망량은 혈연때문에 배신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강하게 주장하자 검마는 껄껄 웃었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망량은 천재라서 그런 인연에 발목잡힐 사내가 아니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의 망량이야."
"......?"
"생각해 보게. 아무리 흑요석의 기억전승률이 높다고 해도 결국 망량의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셈일세. 그리고 그 정보 와중에는 자신의 아비가 정파 삼대기인 태산노옹이며, 수황위 주작이며, 천계의 정보를 훔쳐서 대명제국을 위해 사악한 용도로 쓰려고 한다는 엄청난 진실이 담겨있네. 가문에서 쫓겨나서 진랑곡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던 한량이었던 망량이 이걸 어찌 받아들이겠나?"
"헉!"
나는 검마의 말뜻을 알아듣고 헛숨을 삼켰다. 검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의 전생에 휘말리긴 했으나 이 기억을 전승받는 와중에 내 나름대로 이득을 챙길만큼 챙기고 있네. 즉 객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망량은 자네와 너무 밀접하게 얽혀있으므로, 이번 정보를 받아들일 경우 어떤 충격을 받을지 모르네."
"그, 그렇겠군요."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인지라 머리를 굴리게 되었다.
확실히 그렇다.
여태껏 망량이 응당 정보를 받아들여서 아군이 되어줬기에 생각지 못했지만, 이번 일은 조금 다르다. 17회차에 밝혀진 주작의 정보는 바로 망량의 직계혈육의 일이었다. 망량이 평생을 두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를 난데없이 하나 더 쥐어주는 것이다. 굳이 망량이 아니라 해도 그 누구라 할지라도 혼란에 휩싸일 게 분명했다.
검마가 말했다.
"물론 망량은 어쨌든간에 뛰어난 그릇이므로 혼란을 수습하고 자네를 도와주겠지. 그러나 정신력이 크게 소모될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내 생각에는 이제부터 자네가 망량을 배려해줘야 한다고 여겨지네."
"배려요?"
검마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바로 자네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주는 것일세. 책사라는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어둠속에서 광명을 발견한 기분이 들겠지. 또한 그건 자네가 간접적으로 망량을 떠받쳐줄 수 있음을 의미하네."
"......!!"
나는 검마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깊이 고개숙여 포권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아닐세."
새삼 검마가 어째서 사파의 지존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무력뿐만이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심계와 용인술(用人術)이 굉장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검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망량의 정신줄이 아슬아슬하게 끊어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셈이 되고 말았으리라.
사실 지금까지 낌새는 있었다. 망량에게 기억을 전승할 때마다, 그는 기억으로 읽은 자기자신의 실패를 감지하고는 허망해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겪어본 적도 없는 인생경험에서 무수히 실패했다고 하면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망량은 언제나 자기 정신력을 수습해서 나를 도와줬던 것이다.
내가 곰곰히 생각할 때 검마가 말했다.
"우선 나와 무영문도들을 비등으로 해적섬까지 옮겨 주게. 자네는 그것만 해 주고 볼일 보러 가게."
"네."
"해적섬에서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지."
파앗!
나는 이윽고 검마와 무영문도들을 혈도단 해적들이 있는 해적섬으로 옮겼다. 지난번에는 검마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해적들을 함께 참살했지만, 나와 검마에게 있어서 이건 한 번 지나친 적이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검마도 다소 냉정해져서 내 시간낭비를 줄이는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장 수요 막야의 유적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비등보다 수요를 우선시했으나, 충분한 힘이 쌓인 지금에는 순서를 조금 뒤로 미뤄도 무방했다. 나는 연못에서 흑백련을 최대한 채취한 후 유적 내부로 들어가서 거대거미를 죽이고 막야를 획득했다. 그리고 덤으로 지하까지 내려가서 삼황오제 전욱의 동상도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수요의 획득이 끝나고 난 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진랑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초가집에서 촛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망량의 방 문을 벌컥 열었다.
망량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백웅이오."
나는 망량 앞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나 말해 두려 하오.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며,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견명하게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소."
"......?"
망량이 황당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요? 당신 미친 놈인가?"
"뭐 보통은 그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품속에서 흑요석을 꺼내서 망량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건 상대방에게 자신의 기억을 전달하는 흑요석의 술법이오. 아스타나의 선지자에게서 얻었지. 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흑요석으로 내 기억을 읽어야 하오."
망량이 고함을 쳤다.
"웃기는 양반이군. 그런 술법이 있다손 쳐도 내가 뭐하러 이걸 받아들여야 하오?"
"망량. 그러면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소."
나는 앉은 자세를 바꾸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망량.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오. 나는 그 당시에 내가 가야할 길도 모르고 헛된 욕망에 휩싸여 좌충우돌하고 있었소. 그러던 중에 당신을 만나게 되어 앞날이 보이기 시작했소. 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엥...? 당신과 나는 초면일 텐데."
"구면(舊面)이오. 왜냐하면 이건 첫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오."
나는 짧게 말한 후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흑요석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오. 왜냐하면 당신도 모르고 있었던 당신 혈육의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오."
"......!!"
"제갈부가 중원지보라던가, 그가 황궁에 협력하고 있다던가 하는건 댈 것도 아니지. 당신은 크게 놀라게 될 것이오."
망량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되려 묘한 표정이 되어서 호기심을 느낀 듯 말했다.
"신기한 자로군. 내게 흑요석의 기억을 전해줄 생각이라면서 뭘 그렇게 겁부터 주고 있소?"
"그래야 당신이 받을 충격이 덜해질 테니까."
"크크... 뭐 한번 얼마나 대단한 기억이길래 그러는지 어디 봅시다. 줘 보시오."
망량이 손을 떡하고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흑요석을 내밀었다. 흑요석이 망량의 손에 닿는 순간 기억전송이 시작되었다.
우웅
"윽...!!"
망량은 마치 침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동안 황망하게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 정말 쓸데없는 배려요, 백웅."
"......"
망량이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그렇게 약한 놈이 아니오."
망량은 내 17회차까지의 기억을 얻은 것이다.
나는 망량의 대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계속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소. 당신은 어떻소?"
"잠깐 시간을 주시오. 이 기억을 되새겨보고 싶군."
"알았소."
망량은 말 없이 약 한 식경동안 기억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길고 긴 묵상이 끝나고나자 망량이 입을 열었다.
"제갈유룡... 그는 내 아버지이자 평생을 내황각주로 살아온 존재였소. 나와 제갈부는 그 분을 언제나 존경했으며,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술법사였지. 또한 술사들 사이에서는 정심정대한 대협(大狹)으로도 일컬어졌소. 내 숙부 제갈사가 사법(邪法)에 손을 대자 즉시 금제를 가하고 내쫓을 정도로 단호하셨지."
"......"
"당신에게 기억을 얻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었소."
그는 꺼지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허나... 설마 내 아버지가 그런 자였을 줄이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평생이 흘러도 이 비밀을 알 수 없었을 것이오."
"미안하오."
"미안할 게 뭐가 있소? 그저 그가 위선자(僞善者)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오. 그리고 제갈사 이상으로 타락한 마도(魔道)의 종자라는 걸 알게 된 거요. 나는 되려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오."
망량은 훗하고 웃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 봅시다, 백웅."
나는 마음속으로 뭔가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망량이 스스로 충격을 딛고 일어섰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