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7 ----------------------------------------------
천계(天界)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나는 미호에게 다가갔다.
"미호."
미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은 먼저 황궁에 가서 이득을 얻을 생각인지 따라오라고 한마디를 남기고는 가 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고는 미호에게 말했다.
"내 동료가 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어."
"......"
미호는 침묵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명백히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미호가 내심 내가 보여준 흑요석의 기억을 진실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려 17회나 되는 전생동안 축적된 이야기는 위증이라는 가능성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미호가 잠시 후 말했다.
"백웅. 망량을 구해내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때 생각해 봐야겠지."
"네 목표를 묻는 것이다."
그런 질문이었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백련교주의 제자가 되어서 천령단의 비밀을 알아내고 향후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알아볼 거다. 하는 김에 칠요도 모아야겠지."
"신... 그건 천계(天界)를 포함하는 것이냐?"
"여동빈같은 신선은 몰라도 고위층의 대라신선들은 왠지 수상해.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자 내 대답에 미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생각이라면, 너와 나는 이번 생에는 함께 할 수 없겠구나."
"... 그렇구나..."
나는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내심 충격이라 이를 악물었다. 미호 본인의 입으로, 그것도 흑요석의 기억을 전달받은 미호에게 거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손에 힘이 쭉 빠지려 할 때 미호의 말이 이어졌다.
"꼭 천계와 적대해야만 하는 것이냐? 이제 황궁이라는 세력을 물리쳤으니 너는 그 공으로 등선(登仙)할 수 있을 것이다. 천계에 올라 불로불사를 누리면 안되는 것이냐?"
미호의 말에는 알 수 없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미호의 입장 - 즉 천계와 적대하는 이상 결코 동료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내뱉으려다가 겨우 참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미호. 그러면 물어볼게."
"물어봐라."
"내 기억을 읽으면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은 어차피 흉신의 르뤼에가 떠올라서 수백 년 후에는 멸망한다. 그 때는 불로불사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지? 그 때가 다가오면 천계도 멸망하는 게 아니냐? 신선도 그 때가 되면 모두 소멸당한다고!"
"......"
미호는 할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나는 미호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정해진 파멸을 기다리고 싶지 않아. 최선의 길이 있다면 그걸 찾아내고 싶은 거야. 망량도 검마도 진소청도... 그들 모두가 내 뜻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동료가 되어준 거지. 내 마음을 모르겠어?"
"그건... 으음..."
미호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모르겠구나. 내가 생각하기엔 벅찬 일이구나..."
미호는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화제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선은 황궁으로 가자꾸나. 망량을 구해야할 것 아니야."
"그래야겠지."
"주작이란 놈이 사라져 버렸는데 어떻게 망량을 구할 생각이냐?"
나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갈부도 주작이 망량을 숨겨놓은 장소는 몰랐지만, 주작이 여러번 죽었다 되살아나면서 결계에 균열이 생겼을 거야. 천우진의 도움을 받으면 찾아낼 수 있겠지."
"......"
미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다. 본녀도 망량을 구하는 일을 도와주겠다."
"정말이야?"
"그래. 하지만 이후에 충돌이 일어나면 양보할 수 없다."
스아앗
미호가 말이 끝나자마자 허깨비처럼 월영과 함께 사라졌다. 월요의 힘으로 공간을 도약한 모양이었다. 나는 미호의 움직임보다 늦으면 곤란했으므로 급히 움직일 필요성을 느꼈다.
' 이런.'
파앗
나는 우선 천우진과 제갈사가 있던 장소로 가서 그들과 조우했다. 그리고 곧장 비등으로 이동해서 일행들이 모여있을 태룡전 앞으로 향했다.
태룡전 앞의 상황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마인과 용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백련교 고수들의 시체도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엄청난 격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검마와 독고성을 비롯한 무영문, 뇌신류 일행들이 모여서 상처를 치료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나는 검마를 보자 급히 외쳤다.
"문주! 그 상처..."
검마가 쓰게 웃었다.
"후... 수십 마리의 마인과 용인은 만만치 않더군. 천하의 백련교 고수들도 저렇게나 당했으니."
검마의 왼쪽 가슴에는 큰 부상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전신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이광이나 진소청도 검마만큼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부상자가 되어 있었다. 가장 부상이 적은 것은 독고성으로, 그가 현재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상당한 부상을 입은 채 누워있던 무영문도 하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크흑... 문주님 혼자셨다면 괜찮으셨을 텐데 저희를 감싸시다가..."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검마의 무공으로 볼 때 저 정도의 부상을 입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무영문도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다 보니 헛점이 생겨서 일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 덕분인지 무영문도들은 중상자가 거의 없었고 사망자가 한두 명에 불과했다. 부상자를 돌보던 독고성이 이쪽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백웅. 우리 상황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황궁으로 들어가라."
"백련교주 일행이 들어갔습니까?"
독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태룡전 뒤편에 새로운 건물이 나타났다. 저기에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독고성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약 5층으로 보이는 전각이 있었다. 틀림없이 저건 태룡전이 붕괴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전각이었다. 나는 전각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함정일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지금 다른 선택지가 있느냐? 저기에 만일 황제가 숨겨놓은 보물이 있다면..."
"아뇨.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힐끔 제갈사를 쳐다본 후 말했다.
"제갈 일족의 책사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죠. 보이는대로 따라가다가는 망합니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망량이나 제갈사의 책략성향을 생각하면, 제갈일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제갈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새끼야. 날 왜 쳐다봐?"
"잘생겨서."
"개소리 하네 쉬벌새끼가..."
투덜거리던 제갈사가 말했다.
"그래. 저 건물이 술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함정일 가능성은 높지. 근데 저기를 안 가면 지금 뭘 하겠다는 거냐? 부상자 치료하면서 여기서 허송세월이나 하겠다고?"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텐데?"
"뭐?"
나는 말을 이었다.
"전국옥새(傳國玉璽)부터 얻고 시작할 것이오."
"......!!"
내 말이 떨어진 순간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왜냐하면 전국옥새는 술법사와 무림인을 가리지 않고 알고있을 수밖에 없는 전설적인 물건이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진정한 천자의 증명!
나라에서 나라를 이어져서 수백 수천년간 존재하는 진정한 옥새!
많은 황조에서 옥새를 만들어서 황조의 증명으로 썼지만 전국옥새만큼 패권(覇權)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력이 다 되어서 창백하게 앉아있던 이광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뭐라고?! 그런 게 대체 어디... 쿨럭! 쿨럭!"
"스승님!"
이광이 피기침을 토하며 주저앉자 황급히 진소청이 그를 부축했다. 확실히 황실에서 수십 년간 근무했던 어림군 대장 출신인 이광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정보일 것이다. 검마가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음... 확실히 그렇군. 그걸 먼저 확보해야해. 백웅 자네 굉장히 냉정해졌군."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망량을 구출할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그럼 최정예를 골라가게."
검마가 긴 한숨을 토하더니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천우진 진소청을 데려가면 되겠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독고성도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을 받았다.
"나는 이 곳을 통제하고 있겠다."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제갈사가 열받았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기랄! 전국옥새를 얻는 일에 나를 따돌린단 말이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독점하는것도 아니잖소? 당신을 위한 떡고물은 남겨둘테니 걱정 마시오."
"웃기지 마라. 난 여기서 바로 깽판을 칠 수도 있다."
고오오...
제갈사가 술법을 끌어올리는 기색이 보였다. 보랏빛 영기가 회오리치며 제갈사의 눈이 사나운 빛으로 물들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배교의 현 교주이며 강력한 술법사이자 사법사인 것이다. 그가 깽판을 친다고 하면 두려운 일이 생길 게 분명하다.
퍼벅
"끄엑."
그러나 다음 순간 진소청이 달려들어서 제갈사의 뒤통수를 가격해서 일격에 기절시켜 버렸다. 제갈사가 맥없이 쓰러지자 진소청이 그를 바닥에 눕히고는 말했다.
"빨리 갑시다."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설마 진소청. 그 사이에 또 무공이 늘어난 거요?"
나는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가 희멀건 백면서생처럼 보여도 저 자도 절정수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은 영기를 소환해서 방어력과 신체능력도 높여놓은 상황이었는데, 제갈사가 반응하지도 못하는 속도로 움직여서 정확하게 그를 기절시킨 것이다. 기존의 진소청 무공보다 몇 단계는 발전했다는 뜻이다.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
저 말대로라면 황궁 태룡전 앞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실전으로 성장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지금 진소청의 무술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천우진이 몸이 달아서 외쳤다.
"갑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천우진도 술법사라서 술법의 보물을 보고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천우진과 진소청을 데리고 전국옥새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스으으
무너진 태룡전의 지하에 바로 전국옥새를 숨겨놓은 결계가 있었다. 나는 예전에 지선 망량이 이 전국옥새의 결계를 해제하는 일에 따라온 적이 있었다. 문제는 결계의 위력이 건재하는 한 결계의 중심부로 바로 향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계를 해제하지 않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내가 천우진을 힐끔 쳐다보자 그가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강한 결계지만 이 정도쯤은 별것 아니오."
천우진은 양손에 팔괘의 형상을 떠올렸다. 건(乾)과 손(巽)의 괘를 소환한 천우진은 전방으로 팔괘를 내뿜었고, 팔괘는 이지러지더니 이공간의 전방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천우진이 이윽고 주문을 외쳤다.
"급급여율령!"
콰광
잠시 후 폭음과 함께 전국옥새를 봉인한 미궁의 전면부가 깨어졌다. 나는 신기해서 천우진에게 물었다.
"급급여율령은 정식주문이 아니지 않소? 그걸 주문으로 써도 괜찮은 거요?"
내가 이렇게 묻는 까닭은 급급여율령이란 주문이 사실 한나라 시기 때 공문서에 붙어있던 서식용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국옥새의 봉인같은 고대결계를 깨는데 급급여율령같은 주문을 외쳐도 감당이 되는지가 궁금했다. 보통 고대의 언어를 주력(呪力)으로 삼을수록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묘한 경지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법! 나는 어감이 좋아서 잘 쓰고 있으니 신경 끄시오."
"그런가..."
"당신이 술수를 상급 경지까지 익히고 나면 지금의 질문이 얼마나 바보같은 건지 알게 될 거요."
그는 툭하고 내뱉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역시 성격이 안좋은 천재다웠다. 진소청이 나를 따라 걸어오면서 내게 질문했다.
"백웅. 전생하면서 술법을 배우지 않는 이유가 뭐요?"
나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음... 망량선사가 말하기를 내 무공의 재질이 떨어지지만 술법의 재능은 더 못하다 했소. 그래서 공연히 시간을 낭비할까봐 공부하기가 꺼려지는군."
"그건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당신을 보고 내린 평가겠지. 지금의 당신은 칠요 막야를 비롯해서 온갖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니, 지금이라면 술법도 배울 수 있지 않겠소?"
"그런 생각은 잘 해보지 않았소."
진소청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술법을 배우면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날 거요. 무공뿐만이 아니라 술법도 익혀보기를 권하겠소."
"그건 감이오?"
"감이오."
나는 진소청의 말에 혹했다.
' 그래. 다음 생에는 한번 술법을 배워 볼까?'
우선 망량을 구해내고 백련교주의 제자로 들어가서 천령단의 비밀을 알아낸 후에는 술법을 배우면 될 것이다. 미래의 계획이 차곡차곡 쌓이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한참동안 걷다보니 드디어 예전에 도착했던 공동에 올 수 있었다.
천우진이 공동의 한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있군."
"으음."
나는 그 곳에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네모난 물체를 보자 침음성을 흘렸다. 그 물건은 신령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용(龍)이 양각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 눈으로 보아도 심상치 않은 영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일종의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예전에는 여기에서 대치만 하다가 전국옥새를 얻지 못하고 그냥 나왔었다. 그 때는 바로 찾지 못했던 물건이 바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궁금했다. 천우진이 말했다.
"태룡전의 결계가 통째로 무너지면서 전국옥새를 감춰놓은 봉인이 같이 깨졌던 모양이오. 완전히 거저먹기군."
"이제 이걸 가지기만 하면 되는 거요?"
"잠깐 기다리시오."
천우진이 나를 제지했다.
"전국옥새는 가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빨아들이는 기물이오. 섣불리 손대면 어떻게 될지 모르오."
"아!"
그러고보니 황궁 세력은 전국옥새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봉선의식으로 신의 힘을 얻기 전까지는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것은 전국옥새가 다른 기물이나 보패와는 달리 특수한 사용조건을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천우진이 다시금 팔괘의 술법을 시전해서 여러 개의 괘를 전국옥새를 향해 날렸다.
우우웅...
"내 술법으로 일단 봉인을 걸었소. 지금이라면 만져도 괜찮을 거요."
"알았소."
나는 전국옥새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순간 이상한 환영이 눈에 보였다.
우우웅
"......!!"
나는 아득한 천암(天暗)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한도 끝도 없는 어둠의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마냥 시꺼멓기만 하지 않았고 하늘 여기저기에는 반짝이는 은광(銀光)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천지의 별(星)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하수(銀河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끝도 없는 암천(暗天)에 흩어져 있는 별무리! 수천만 수억 개의 광성(光星)!
나는 이 풍경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 너는 살아 생전 이 우주(宇宙)를 본 적이 있느냐? 이 풍광을 타인에게 설명할 자신이 있느냐?]
[ 뇌는 거울일 뿐이다. 작은 시선과 작은 각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망량선사를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그가 내게 보여주었던 풍경!
나는 세상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믿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망량선사가 우주라고 지칭한 이 공간은 틀림없이 세상에 실존하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시커먼 우주 한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구체(求體)가 하나 있었다.
그 구체는 딱 내 몸뚱이만한 크기로 보였다. 나는 둥그런 구체에 대지와 바다가 구성지게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구체로 손을 뻗었는데, 구체를 만지는 순간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오제(五帝) 소호 금천(少昊 金天)께서 남긴 유물이다. 그대에게 삼황오제의 유물인 전국옥새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그 질문이 잠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시 후 그 목소리가 말했다.
[ 그렇지 않군... 그대는 더 거대한 존재와 계약을 하고 있구나... 그대에게 자격 운운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도리어 감격스럽구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말했다.
[ 이제 그대를 전국옥새의 주인으로 인정하나니, 대지와 대양의 전시안(全示眼)을 부여하겠노라.]
파앗
다음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전국옥새를 쳐다보자, 천룡(天龍)의 양각에 더불어서 봉황의 음각이 추가로 새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는 용과 더불어 봉황의 권능도 손에 얻는 모양이었다.
' 전시안?'
나는 어리둥절했다. 뭔가 특수한 능력을 손에 넣은 것 같긴 한데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천우진에게 질문했다.
"전시안을 얻었다는데 이게 무슨 능력이오?"
"어?! 진짜?! 그게 전국옥새의 능력이었소?"
천우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렇다는데."
"크아아아악!! 그건 내가 얻어야 하는데... 대라신선도 얻기 힘든 능력을..."
천우진이 괴랄한 비명소리를 내더니 잠시 동안 발을 굴렀다. 그것은 마치 어이없는 질투심에 발을 구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동안 소리없이 발광하던 천우진이 포기한 듯 내게 말했다.
"그걸로 사형을 찾으면 되겠군. 빌어먹을! 돼지목에 진주..."
"......?"
"사형을 찾고싶다고 생각하며 전국옥새를 사용하시오."
"알았소."
천우진이 투덜거렸다.
"개돼지새끼! 혼자만 다 처먹네."
"......"
개돼지새끼는 뭐야.
파앗
잠시 후 나는 천우진, 진소청과 함께 어딘지 모를 어두운 공간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양손 양발이 사슬에 매여있는 한 청년의 모습을 발견했다. 고문은 받지 않은 듯 했으나 오랫동안 묶여있었는지 몸이 초췌해져 있었다. 나는 제대로 찾아왔음을 깨달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망량."
망량은 내 목소리를 듣고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망량에게 다가가려 하자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는데 잘도 다가가는군. 그냥 전시안으로 한번 사형을 살펴보시오, 돼지새끼야."
나는 울컥해서 되물었다.
"고맙...긴한데 왜 자꾸 돼지라는 거요?"
"천하의 보물이란 보물은 혼자 다 처먹고 있으니 짜증나서 말해 봤소."
"꼬우면 당신도 비등이나 얻으시오."
"돼지새끼."
"......"
아오 진짜.
나는 성질을 꾹꾹 누르며 전국옥새를 들고 다시 전시안을 발동해서 망량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술법의 존재가 그대로 눈에 읽혔다. 신기하게도 내게는 그 술법의 명칭과 발동원리, 파해식이 모조리 읽혔다. 그래서 그냥 읽히는대로 술법의 파해식을 조종해서 망량에게 걸려있던 함정술법을 없앨 수 있었다.
파아앗
마지막으로 망량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술법을 제거하자, 망량이 눈을 떴다.
"엇... 여긴?"
망량이 정신을 차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쇠사슬을 검강으로 잘라 주었다.
"일어났소?"
망량은 사슬이 잘리고 몸이 자유를 찾은 후에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내 손에 들려 있던 전국옥새를 살펴보고 상황을 알아챈 듯 말했다.
"그렇군! 당신이 날 구출해 줬군."
"무사해서 다행이오."
"......"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망량에게 말해 주었다.
망량이 한숨을 쉬었다.
"면목이 없소. 잘난 척 천제단을 돌아보려다가 이런 꼴이 될 줄은..."
"상관없소. 누구나 실수를 하지. 실수한 횟수로 치면 당신보다 내가 몇십 배는 많을 것이오."
"아니오. 내 실수때문에 당신을 위험에 빠뜨렸소. 정말 미안하오."
망량은 크게 낙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소청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오. 그리고 이제 황제와 주작도 물리쳤으니 일이 거의 다 끝났소."
"아...!!"
망량이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내게 다급히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오. 아직 하나도 안 끝났소."
"무슨 말이오? 이제 남은거라고 해봐야 백련교주가 신과 결판을 내는 것밖에..."
"백련교주가 중요한 게 아니오!"
머리를 긁은 망량이 말을 이었다.
"나는 흑요석에서 당신의 기억을 통해서 홍몽(鴻?)의 술(術)을 얻어서 정신제압을 당한 동안에도 최소한의 이지를 보유하고 있었소. 내 생명의 안위 때문에 봉선의식 권리를 뺏기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당신의 전생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았던 것이오."
"아...!!"
나는 상황이 어찌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전생하던 동안에 동영의 천황에게서 얻어낸 홍몽의 비술! 망량은 지선의 술법역량과 삼황내문의 힘으로 그걸 터득해서 사용한 것이리라. 잠시 한숨을 쉰 망량이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주작의 의도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지. 그리고 지금 당신 말대로라면 일은 하나도 끝나지 않았소."
나는 황당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전국옥새도 얻었고 황궁의 마인세력도 몰아냈으며 사도 달기도 쓰러뜨렸고 심지어 황제도 없애버렸소. 주작은 어디선가 되살아났겠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뭘 어쩌겠소?"
"그렇군. 아주 좋은 상황이오. 하지만, 하지만 말이오."
망량이 침통하게 말했다.
"곧... 복마전(伏魔殿)의 지배자가 강림하면 그 모든 건 의미가 없어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