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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백련교주의 말은 뜬금없어보였고 너무나 거대한 개념이었다.
신과 결판을 낸다!
아무리 백련교주의 무공이 인간으로써 신선을 초월했다 해도 신이라고 하는 거대한 존재와 대등해질 수 있을 것인가? 보통 인간이라면 신선과 신의 차이점을 몰라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나는 무수한 전생을 통해서 그 사이에 하늘과 땅과 같은 심대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작이 대꾸했다.
"어떤 결판을 원하는 거지?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해 보시오."
[ 별 거 아니다. 그의 힘을 빌려서 세상에 흩어진 무생노모의 법문(法文)을 얻고싶다.]
백련교주의 대답에 주작이 잠시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게 당신의 진의(眞意)였군."
[ 내 의사는 전달했다. 네 대답이 필요하다.]
주작이 질린 듯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광오하오. 우리가 모시는 신이 감히 그런 제안에 응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백련교주는 무면탈을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후 어두침침한 기운을 흘리며 말했다.
[ 그래서 네놈의 신에게 나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무슨?"
백련교주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 우습게 보지 마라. 지금 네놈들이 사도(使徒)를 소환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있는 걸 모를 줄 알았나? 나는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
[ 아무리 강력한 신이라도 사도를 쓰러뜨리면 내 이야기를 들어 주겠지.]
주작이 크게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백련교주의 힘이 강해지며 장내를 뒤덮을 정도의 압력을 흘려내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리 주작의 힘이 강해졌다고 해도 백련교주가 본격적으로 힘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주작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주작은 그제서야 삿갓을 벗었다.
스윽...
삿갓 아래의 모습은 아까 보았던 주작 제갈유룡 그자체라서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그가 예비육체를 이용해서 되살아났다는 걸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제갈유룡은 우묵한 눈으로 백련교주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법문을 얻어서 교의(敎義)를 실천하겠다는 것인가? 당신의 강함은 역시 그 법문을 해석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군. 감당할 수 없는 불길한 그 법문을..."
[ 절대자의 조각일 뿐이지. 허나 큰 틀에서 보면 마찬가지일 뿐.]
"......"
[ 방금 전 황제의 제안에 응할까도 생각했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저 놈은 어차피 필멸자 꼭두각시에 불과해서 내가 원하는 걸 준다는 보장이 없었지. 차라리 직접적인 신관(神官)인 네놈과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쿠구구구...
하늘이 거대한 혈염(血炎)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흉측한 기운이 하늘의 중심에 모이며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가 바로 신의 사도가 강림하려는 것이란 걸 알아챘다.
주작 제갈유룡이 답답한지 말했다.
"그저 황제의 제안대로 천하의 반을 나눠받고 편히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신과 교섭하겠다니! 광오한 자."
한탄하던 주작이었지만 백련교주는 되려 웃으며 대꾸했다.
[ 내가 광오하다 한들 네놈보다 음흉하진 않다. 그놈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나?]
"무슨 소리요?"
[ 지금 여기에 있는 황제는 진짜겠지만 평소에 황궁에 놔뒀던 황제는 가짜였겠지.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겨도 가짜육체가 사라질 뿐일테니 말이다.]
"......"
[ 자아, 이제 때가 되었다.]
백련교주가 슬며시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기색을 알아챈 주작이 눈을 부릅떴다.
"안돼!"
퍼버벅
다음 순간, 주작의 몸이 크게 폭발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주작은 큰 부상을 입은 듯 땅에 누워서 피바다 속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백련교주의 한 수에 진정으로 당한 것은 주작이 아니라 바로 황제였다.
황제는 아예 산산조각이 나서 육편조각이 되어버렸다. 나는 놀라서 백련교주를 쳐다보았다.
"죽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주작을 이 자리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가볍게 대꾸한 백련교주가 재차 손을 뻗었다.
파앗
그 순간 주작의 몸이 사라졌다. 마치 백련교주의 공격을 피한 것처럼 보였다.
[ 아쉽군.]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백련교주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있었다.
백련교주도 주작이 부활할 수 있다는 걸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즉시 몇 번이나 부활하기는 버거운 게 분명했으므로, 황제의 목숨을 쥐고 흔들며 어쩔 수 없이 주작이 여기에 나타나게끔 유도한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주작에게 큰 타격을 가했으니 당분간은 주작이 아무 짓도 못할 것이다.
순식간에 황궁세력을 정리한 백련교주가 나와 미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육합전성을 보냈다.
[ 짐작하고 있겠지만 곧 여기에 사도가 강림할 것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사도에 맞서 싸워줬으면 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단독으로 사도와 싸워서 이길지는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그 강대한 칠요의 힘이 2개나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를 도와 다오.]
"......"
나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백련교주의 심경변화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원래 황제에게 굴복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며 칠요의 힘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칠요의 위력을 본 결과 충분히 신의 사도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이 되자 황제 일행을 쓸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본녀가 왜 그래야 하지? 내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 네가 천계의 사자임은 알고 있다. 이 일이 천계의 업(業)에 속하는지 알아봐야하지 않을까?]
"흐응..."
미호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스으으으...
"으윽."
나는 갑작스럽게 단말을 통해서 여동빈의 힘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히 여동빈이 내게 강림하려는 기색이었으므로 나는 당황했다. 아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왜 갑자기 지금에 와서 강림하려는 것인가?
' 여동빈. 무슨 일이오?'
여동빈이 내 질문에 대답했다.
[ 연자여. 사도와 싸우기 위해서는 내 힘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맡겨라.]
' 무슨... 천계는 사도와 싸우기로 했단 말이오?'
[ 사도가 인과율을 얻어 이 땅에 내려오면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승산이 있다면 마땅히 토벌하는 것이 옳으리라.]
여동빈의 말은 옳았다. 그리고 만일 여동빈이 내 몸을 가지고 싸운다면 전에 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여동빈 때문에 죽은 적이 있었으므로 쉽게 몸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동안 죽을 고생을 해서 내 무공을 높였던 이유는 여동빈에게 쉽게 의지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망량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미호를 바라보았다.
"미호.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이냐?"
"이 흑요석을 받아 준다면 네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걸 따를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나는 목갑에서 기억을 담아둔 흑요석을 꺼내서 미호에게 내밀었다. 미호가 원래라면 내 제안을 무시하겠지만, 지금 상황은 미호에게 있어서 중요한 상황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미호가 크게 불리해질수도 있고 유리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미호는 머리가 좋아서 그걸 금새 알아챈 건지 나를 노려 보았다.
"잔머리를 쓰는구나."
"믿어 줘. 어차피 천계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는 네게 어떤 저주가 통하겠어?"
지금의 미호는 천계의 사자였다. 온갖 대라신선과 천신의 가호를 받고 있기에 이 세상 대부분의 저주를 무시할 수 있으리라.
"그 흑요석이 뭔지부터 말해라."
"이건 자신의 기억을 담아서 전송할 수 있는 물건이야. 그리고 여긴 내 기억이 들어 있어."
그러자 미호가 황당한듯 말했다.
"네 기억을 내게 보여주겠다고?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받아보면 알 거야. 선택은 네 몫이고."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결코 네게 해가 되는 게 아냐."
백련교주는 흥미로운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하늘이 점점 더 붉은 빛으로 물들며 마(魔)의 기운이 강렬해지는 걸 느꼈다. 더 이야기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미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호는 나를 강하게 노려보더니 말했다.
"좋다! 만일 본녀를 속인 거라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받아들였다!
"여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호에게 흑요석을 건네 주었다. 미호는 흑요석을 받아들었고 잠시 후 내 기억이 그대로 미호에게 읽히기 시작했다. 미호가 한동안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부들부들 떨었다.
"너... 설마... 그런..."
미호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미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와 몇 번이나 만났어. 이번에는 상황이 꼬여서 그러지 못했을 뿐이야."
"말도 안 돼... 그런..."
미호가 중얼거리다가 이내 안색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 기억이 사실이라 해도 너를 믿을 수는 없다."
"그렇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너를 도울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
미호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미호는 백련교주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 제안대로 하겠다."
[ 잘 생각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천계에서도 토벌령이 내려졌으니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미호가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번 생에서 목숨을 아낄 이유가 없다. 이기든 지든 간에 이 싸움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나도 싸우겠습니다."
백련교주가 흐뭇하게 말했다.
[ 잘 됐군... 그럼 호법사자를 부르겠다.]
"나머지 둘은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당장 데려오기 힘들텐데..."
[ 걱정 마라.]
백련교주는 갑자기 자신의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손등에 이상한 문양이 떠오르더니 빛을 뿜어내었고, 백련교주가 기력을 집중하자 그 빛은 마치 태양처럼 밝아졌다.
파앗!
"......!!"
다음 순간 호법사자 용비천과 독고준이 눈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교주에게 부복했다. 마치 이 일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자 교주가 말했다.
[ 놀랄 것 없다. 이것은 백련교주의 권한이다. 호법사자를 원할 때 소환할 수 있지.]
여상스럽게 말한 교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 슬슬 내려오겠군.]
"이길 수 있을까요?"
[ 후후.]
교주의 웃음에서 나는 괜한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황제는 물론이고 주작이나 연금술사까지 다 조져버린 이상, 교주의 계획대로 사도까지 쓰러뜨리고 신과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주가 행한 일이 퇴로를 다 막아버린 상황이었기에 이제는 싸우느냐 마느냐의 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쿠르르릉!!
하늘이 완전히 시뻘건 구름으로 메워져서 천지가 피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적뢰(赤雷)가 떨어지며 요사스러운 진동이 울려퍼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농밀한 마력이 숨을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수요 막야를 꽉 붙잡았다. 내면에서 여동빈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 연자여! 내게 몸을 넘겨라!!]
"......"
[ 그대의 역량으론 부족하다!!]
나는 짜증이 나서 벌컥 말했다.
' 좀 가만히 있어보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 뭣...]
내가 여동빈과 다투는 동안에도 사도의 강림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쿠르르릉...
어둠이 나타난다.
피빛 구름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거대한 존재가 응결되듯 소환되는 게 보였다. 그 존재는 마치 산악처럼 거대했으며 은빛 털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꼬리가 모두 아홉 개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평원을 메울 정도의 압박감을 가져다주는 그 존재는 바로 여우(狐)였다.
나는 일전에 저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달기(?己)."
신의 사도이자 마왕(魔王)급의 존재!
이번에도 역시나 나타난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달기의 모습이 거품덩어리로 보이지 않고 그대로 눈에 보인다는 점이었다. 달기가 너무나 강력한 요력(妖力)을 지니고 있어서 격하(格下)의 존재는 그 모습을 관찰하는 것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또 하나는 달기의 주변에 왠 조그마한 형체가 열 개 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달기에 비해 조그맣다는 것일 뿐 그들 하나하나는 충분히 인간급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저 10개체 또한 뭔가 강력한 존재일 가능성이 컸다.
달기는 지상에 나타나자마자 백련교주에게 시선을 한 번 향하더니, 다음으로는 미호를 보며 진득하게 웃었다.
[ 우후후... 내 꼬리가 여기 있었구나.]
꼬리?
이상한 소리를 하던 달기였지만 미호는 상당히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다소 전의를 잃은 듯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놀라서 미호를 쳐다보았다.
"미호! 괜찮아?"
"... 으... 저건... 아아..."
미호는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혹시 달기가 공격해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달기도 그저 미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챘다.
' 달기가 미호의 영혼을 제압하려 드는구나!'
제압당하고 난 후에는 달기가 그녀의 영혼을 잡아먹을 기세였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아무리 신의 사도인 달기라고는 하지만 칠요의 주인이 된 미호를 그대로 잡아먹으려 들다니?
바로 그 때 백련교주가 달기에게 말했다.
[ 신의 사도여. 나는 백련교의 교주.]
달기의 시선이 힐끔 백련교주에게로 향했다. 백련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소.]
[ 후후, 미친 놈!]
달기는 백련교주의 말에 비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 가라, 금오십천군(金鰲十天君).]
그러자 거대한 달기의 몸뚱이 근처에 떠 있던 열 개의 신형이 두둥실 움직여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싸워라.]
"존명!"
백련교주와 삼대 호법사자는 기다렸다는듯 응전할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젠장, 할 수 없지!'
좀 더 결정적인 때 쓰고 싶었지만 기선을 빼앗기면 미래가 없을 것 같았다. 달기 하나도 엄청나게 강력한데 졸개로 보이는 금오십천군도 만만치 않은 존재일 것 같았다. 자칫하다가는 달기와 싸우기 전에 모든 힘을 소모해버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호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나는 입맛이 쓰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기억을 되살려서 천천히 수인(手印)을 맺었다. 그리고 내 주문에 수요의 영력을 흘려보내며 나직이 외쳤다.
"멸망의 때에 흐르는 성좌(星座)여! 나 그대의 권능을 빌리노라. 다가올 천 년의 때를 경배하노라!"
파지직
바로 그 때였다.
선지자에게서 배운 흉신(凶神)의 주문을 발동시키는 순간, 내 몸에 엄청난 힘이 밀어닥치더니 순식간에 수요의 최대능력과 비슷한 수준까지 힘을 뻥튀기 시켰다. 그것은 주문 자체의 공능이라기 보다는 마치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힘을 빌려주는 듯한 현상이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성좌의 힘이 내 몸에 임했다.
곧이어 허공에 허무의 어둠이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금오십천군을 어두운 촉수로 붙잡아 버렸다. 금오십천군들은 당황한 듯 했으나 잠시 후 촉수에 붙잡혀서 이공간으로 끌려들어가 버렸고, 그 촉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수십 수백개로 증식해 버렸다.
꾸불텅거리는 원야(元夜)가 허공을 수놓았다.
꿈틀거리며 뻗어나온 촉수가 달기에게 손을 뻗쳤다. 달기는 그 촉수를 피하려는 듯 발버둥치며 뒤로 물러섰고 이내 거대한 불꽃을 토해냈다.
쿠콰콰쾅
촉수는 달기의 불꽃에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어쩐지 달기 주변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이 제거된 느낌이었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촉수의 힘이 달기를 보호하는 주문을 제거해 준 것이다.
달기는 상당한 피해를 입은 듯 비틀거리다가 경악에 차서 외쳤다.
[ 흉신의 주문이라니! 게다가 후예만이 쓸 수 있는 권능까지... 너는 흉신의 자손이냐?!]
나는 흉신의 주문을 더 쓰고 싶었지만 선지자에게 얻은 건 단 일 회의 사용권 뿐이었다. 선지자가 허락해주고 말고를 떠나서 필멸자는 딱 한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심 아쉬움을 느끼면서 대꾸했다.
"확실한 건 여기가 네 무덤이란 것이다!"
미호가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미호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 확인한 후 여동빈에게 말했다.
' 여동빈. 팔선을 소환할 수 있겠소?'
[ 물론이다. 수요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가능하다.]
' 그럼 갑시다.'
파지직
여동빈이 내 몸에 강림했다. 여동빈은 마치 자기한테 이야기하듯 말했다.
[ 내 보패인 화룡신검보다 이 막야가 훨씬 좋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여동빈이 수요 막야를 높이 치켜들었다.
[ 칠요여! 내게 힘을 다오.]
그러자 신연(神煙)이 일어나더니 대수해에서 보았던 중화팔선(中華八仙)의 모습이 신령스러운 빛을 띄며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들은 단순히 여동빈에게 축복을 주려고 나타난 게 아닌지, 그들 하나하나가 독립된 개체로서의 힘이 느껴졌다.
중화팔선이 나타나자 달기가 버럭 외쳤다.
[ 어림없다!]
달기가 힘을 사용했는지 아까 흉신의 주문에 끌려들어갔던 금오십천군이 다시 이공간에서 비집고 나왔다.
중화팔선들은 금오십천군의 모습을 확인하자 여동빈에게 말했다.
[ 금오도의 십천군인가! 저들이 방해하면 달기에게 닿기도 전에 힘이 다할 것이리라.]
[ 검선 여동빈이여! 저 사악한 절교(絶敎)의 무리들은 우리가 상대하겠다!]
[ 부디 이 땅의 정의를 실현시켜다오!]
이윽고 중화팔선들이 저마다의 보패를 들고 허공으로 날아가서 금오십천군과 겨루기 시작했다.
쿠콰콰쾅
순식간에 하늘이 불타는 것 같았다. 대지에 거대한 압력에 요동치며 금오십천군들이 사용하는 절교의 비술과, 팔선의 우도술법이 요란하게 격돌했다. 그 대결의 와중에 미호, 백련교주, 여동빈과 삼대 호법사자는 달기를 향해 정면으로 짓쳐들었다.
백련교주가 외쳤다.
[ 하압!]
단순한 기합.
콰과광
그러나 백련교주의 기합이 터져나오는 순간 달기의 몸이 크게 타격을 받은 듯 뒤로 날아갔다. 산 두 개는 되는 거리를 날려간 달기는 당황한 듯 비틀대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 방어막만 건재했어도 네깟 놈이...]
백련교주가 말했다.
[ 원영의 경지를 얕보지 마라.]
백련교주의 움직임이 한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팔선 중 최강이라 불리는 검선 여동빈조차도 일순간 백련교주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의미였다. 도저히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움직임을 가속한 백련교주는 잠시 후 태극(太極)을 소환했다.
태극은 달기의 지척까지 근접해서는 점점 커졌다. 일그러진 태극의 사이로 백련교주는 일 수(一手)를 내뻗었고 이윽고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났다. 달기가 당황하는 사이에 백련교주의 손이 일 타(一打)를 가했다.
꽈광
마치 천수관음(千手觀音)과 같았다. 여동빈의 인식세계에서도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극속(極速)으로 가속한 백련교주의 한 수 한 수는 산악을 무너뜨리는 거력(巨力)을 담고 있었다. 등 뒤에서 흐르는 극광(極光)은 마치 천마(天魔)를 앙복시키는 광채처럼 느껴졌다.
검선 여동빈이 옆에서 찬탄했다.
[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경지에...]
일그러진 태극 속에서 오직 교주만이 자유로웠다.
더욱 무서운 것은 교주의 움직임이 너무 빠른 데다가 수백 개의 진영(眞影)이 만들어져서 위력이 수백 배나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일 장이 쏟아졌다 싶으면 그 자리에는 수백 개의 장력이 스쳐지나갔고, 광륜(光輪)이 이따금 소환되어서 달기의 전신을 갉고 지나가기도 했다.
[ 죽어랏!]
잠시 후 공격을 퍼붓던 백련교주에게로 달기가 불꽃의 입김을 토해냈다. 달기의 저 화염은 고대에 일개 국가를 불태워버렸을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흉신의 주문을 몰아낼 정도로 강력했다. 게다가 과거 전력으로 보면 여동빈이 펼쳐낸 화룡소환을 무마시킬 정도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위이이잉
[ 나는 오행의 주인이다!]
그러자 백련교주는 합장을 하며 전신에서 광영(光影)을 내뿜었다. 태극은 백련교주의 몸으로 되돌아가더니 이내 오행(五行)의 형상을 만들었다. 거대한 냉기와 한기가 흘러나오더니 한순간에 내뿜어졌고, 달기의 화염은 백련교주의 몸을 티끌만큼도 상하게 하지 못했다. 달기가 당황했다.
[ 아니?!]
[ 오행 수극화(水剋火). 그것도 몰랐나?]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교주의 손이 허공을 누볐다. 그러자 교주의 등 뒤에서 오행의 형상이 만들어지더니 오대속성의 광륜(光輪)이 튀어나갔다. 재차 달기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교주의 공격속도는 차마 인간의 경지로는 형용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콰앙
달기는 저렇게 당하면서도 간간히 나를 향해서 꼬리공격을 내뻗었고, 여동빈은 그 공격을 간간히 쳐내고 있었다. 나라면 절대 감당하지 못할 꼬리공격이었기에 여동빈에게 몸을 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교주!"
"돕겠습니다."
콰과광
거기에 삼대 호법사자들이 끼어들어서 천령단의 무한의 내공으로 절초를 퍼붓기 시작했다. 백련교주와 삼대 호법사자가 누군가를 합공하는 일은 무림에서 전례 없던 일인 게 분명했다. 달기는 기(氣)가 폭풍처럼 쏟아지자 당황한듯 연신 몸을 움츠러들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진짜 말도 안 되는 맷집이군...'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 방어막이 깨진 상태에서 합공을 하고 있는데도 달기의 본체는 별로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충격을 받은 것 같긴 했지만 중상이라고 볼만한 상처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여동빈이 옆에 있던 미호에게 말했다.
[ 미호여. 월요를 발동시켜라.]
[ ... 저건 뭐지? 왜 나는 저 달기의 부름에...]
미호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방금 전에 달기에게 정신제어를 당할뻔한 충격이 컸던 것 같았다. 그러자 여동빈이 대꾸했다.
[ 그대는 수천 년 전의 상고시대에 마왕 달기의 아홉 꼬리 중 하나였다. 서왕모께서 날뛰던 달기를 제압할 때 꼬리를 잘라버렸는데 그 꼬리 중 하나를 천계에 가져와 수백 년동안 정화시키셨다. 그 결과 천계의 여우로 재탄생한 게 미호 그대이다.]
[ ......!!]
[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월요로 충분한 힘을 얻어 자아를 확립했으니 독립적인 존재다. 자존(自存)했으니 염려 말아라.]
미호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 그래! 죽여버리자!]
키이이잉
월요와 수요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달기는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에게 계속 밀리면서도 그 기색을 눈치챈 듯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백련교주가 그 발악을 눈치채고는 갑작스럽게 기술을 사용했다.
[ 현겁(賢劫).]
시간이 극단적으로 느려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이건 단순히 심적권청의 세계에 들어가서 시간감각이 느려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더욱 느려져서 세상의 만물이 아예 멈춰보이는 것처럼 뇌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아무리 교주의 기술이라고 하지만 의념절기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 이 공간은 원영으로 내가 지배한다.]
퍼버버벙
극정의 시간에서 교주의 손이 마치 자애로운 부처처럼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삼재의 방위를 제압하고 있었으며, 마치 당연한 것처럼 달기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달기가 재차 불을 내뿜으려 하자 교주는 더욱 빠른 속도로 달기의 턱을 쳐 버렸고, 잠시 후에는 거대한 일 권(一拳)이 달기의 몸뚱이에 쐐기처럼 틀어박혔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천 번의 절격이 달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수라(修羅)와 같은 기세!
나는 이 기술의 본질을 깨닫고 경악했다. 주변공간의 모든 것을 강제적인 심적권청의 상태로 밀어넣어버리고, 그 공간에서 자기는 극한으로 가속하는 대신에 상대방을 그 이상으로 약하고 느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 이, 이런 놈을 어떻게 무공으로 이겨?!'
나는 경악했다.
이건 의념절기가 아니다! 의념절기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교주의 무공은 무림인의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마왕 달기가 흉신의 주문으로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일방적으로 패는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무공에는 의념절기를 초월한 '다음 단계'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 ......]
그런 생각은 여동빈도 마찬가지인지 잠시 칠요의 공명발동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여동빈 스스로도 달기를 제압한 후 백련교주를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달기를 없애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했는지 수요의 힘을 이끌어냈다.
[ 받아라!]
여동빈의 외침이 들려오자 백련교주와 삼대호법사자들이 뒤로 빠졌다. 달기는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에게 너무 얻어맞아서 경직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달기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 이 놈들! 부활하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
섬광이 밀어닥쳤다.
아까 수천 마리의 마물을 쓸어버렸을 때처럼 칠요 두 개가 공명한 힘이 전방을 휩쓸었다. 달기는 울부짖으며 섬광에 휩쓸려서 소멸되었고, 이윽고 지형이 변화하여 황폐화된 대지가 연기를 흘렸다.
후두두둑...
여동빈은 백련교주를 흘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 그대는 어찌 등선(登仙)을 하지 않는가? 그대라면 즉시 대라신선의 자리에 오를 것일진대.]
백련교주도 지금 내 몸을 쓰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팔선의 검선 여동빈이란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백련교주가 훗하고 웃더니 대답했다.
[ 나는 아직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 말을 듣자 여동빈이 흠칫했다.
[ 설마 그대도 무신(武神)을 만났는가? 그대에게도 무신이 나타났는가?]
[ 후후... 그렇소. 나는 축복이라 생각하오만.]
여동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뒤편의 전황을 보았다.
[ 십천군이 사라지는가.]
그랬다.
중화팔선과 피튀기게 술법대결을 벌이던 금오십천군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환자인 달기가 소멸되었기에 그들 또한 되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큰 싸움의 막이 내렸다.
나는 눈 앞의 위업에 할 말을 잃었다. 어찌되었든간에 칠요의 주인과 백련교주가 연합해서 달기를 토벌한 것이다. 항우같은 격외의 절대존재의 힘을 빌리지 않은 성과였으므로 놀라울 수밖에 없다.
하물며 백련교주의 무위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는 고금제일인이 틀림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