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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내가 청룡무관으로 가자 독고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 얘기가 많겠군. 안에서 이야기하자."
"네."
그는 정말로 내가 찾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지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소 성급해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이윽고 청룡무관 와룡전의 안쪽방에 들어가자, 거기에는 이광과 진소청, 청월도 함께 있었다. 아마도 별다른 일이 없으면 계속 와룡전에서 대기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독고성은 자리에 앉은 후 말했다.
"우선 그간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해 다오."
"네."
나는 진소청과 함께 다녔던 일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소청과 헤어진 후 백련교와 협상하고 봉선의식을 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봉선의식에서 내가 수요를 얻었으며 황제의 언령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자 독고성은 흡족해했다.
"그래, 그 요상한 술법에 대처할 수 있다면 황궁을 엎는 정도는 무리없지."
"다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뭐냐?"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말을 꺼냈다.
"백련교와 손을 잡아 주십시오."
"......!!"
그 순간, 청월과 이광의 전신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청월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는데 동시에 자신의 살심(殺心)을 억제하기 힘들어보였다. 일그러진 표정은 잠시 후면 흉신악살처럼 변할 것이다. 이광은 냉막하게 가라앉은 표정이었으나 저 표정 아래에 심대한 분노가 깃들어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진소청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며, 독고성도 마찬가지로 흠, 하며 턱을 괴는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독고성이 가장 온건해 보였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독고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을 설명해 봐라. 이유없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진 않았겠지."
"백련교주는 뇌신류가 백련교에 되돌아오길 원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뇌신류 호법사자로 임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크크크... 호법사자라..."
독고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입만 웃고 있을 뿐 눈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서 그가 상당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독고성의 감정이 심한 격류를 일으키기 전에 말을 꺼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백련교와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백웅 네 녀석... 뇌신류 호법사자, 천령단, 교주의 절세무공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으냐?"
독고성이 퉁명스럽게 비꼬자,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아닌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말로 그걸 노렸다면 저는 방금 했던 이야기를 왜곡했을 겁니다. 저는 교주의 이 제안을 이용해서 뇌신류가 재흥하는 초석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련교주는 이미 원로원을 풍신류 용비천의 거점으로 파견했습니다. 이건 어물쩡 나서는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황궁과의 전쟁을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본인도 그렇게 천명했습니다. 그때부터 닷새였으니, 지금쯤은 아마 백련교 무류의 대부분의 고수들이 수도 낙양 근처에 포진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
"그리고 백련교가 황궁과 싸워서 이기게 되면 그 때부터는 백련교 천하가 되겠지요."
내가 독고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뭔가를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백련교가 천하를 쥔 다음에 백련교주를 암살하자는 거냐?"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틈을 봐서, 반전의 권능을 이용해서 차후에 백련교주를 암살하면 백련교 내는 혼란에 휩싸일 겁니다. 뇌신류의 힘이 충분히 쌓였을 때가 되면 분명히 뇌신류가 다시 크게 부흥하게 될 겁니다."
"흠... 다소 꼬아서라도 계획을 실행하자는 건가?"
"어차피 원래부터 교주는 암살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김에 황궁의 처리도 백련교에 맡기는 겁니다."
"......"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청월과 이광에게서 솟아올랐던 살기가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청월도 내 이야기의 진위를 살피는 듯 고뇌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고 이광은 여전히 냉막한 표정이었다.
독고성이 한참 생각하다가 탄식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계책이로군. 그렇게만 된다면 십 년 정도면 뇌신류는 확실히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전승자를 모으고 천령단의 비밀을 입수할 시간도 필요하니 바로는 안 될 겁니다."
"그렇겠지. 흐흐... 상당히 좋은 계책이야."
독고성은 기분이 풀린 듯 약간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청월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르신.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교주를 어떻게 암살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방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독고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청월. 자세한 건 지금 말할 수 없지만, 백웅에게는 백련교주를 완벽하게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점은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흐음..."
청월이 뭔가 고민하듯 팔짱을 낀 후 독고성에게 말했다.
"하지만, 백웅이 뇌신류 호법사자가 된다는 건 과하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냐?"
"항렬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독고성 어르신이 마땅히 뇌신류의 호법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호법사자가 된다 함은 뇌신류의 종사(宗師)가 된다는 걸 뜻합니다. 저는 현재 뇌신류에서 그 자격이 있는 건 독고성 어르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 말의 논리성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당연히 정상적인 순서라면 독고성이 최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꾸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나서는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잠자코 독고성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독고성이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내가 호법사자가 되는게 옳다. 이청운과의 경쟁에서도 그의 재능이 불가일세의 천재라서 양보했을 뿐, 원래는 내 순서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교주는 백웅이 호법사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건 백웅을 선두에 내세워서 뇌신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백련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숙이고 들어가는 상황이라면 거기에 반대를 해봤자 의미가 없다."
"아니 어째서 의미가 없습니까?"
독고성은 한숨을 쉬었다.
"불보듯 뻔하다. 난 알 수 있다."
"왜입니까."
"숙부... 교주는 그런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단 한 번도 자기 고집을 꺾은 적이 없다."
"......"
청월이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같은 일족의 조카인 독고성보다 백련교주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한 게 옳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여태껏 보아온 백련교주의 행적을 보아도 그가 엄청난 옹고집이라는 건 익히 알 수 있었다.
독고성의 말이 이어졌다.
"다행히도 백웅이 호법사자로서 그렇게 자격이 없는 건 아니다. 뇌신류의 창권검 삼법(三法)을 모두 상당한 경지로 익혔으며, 무엇보다 뇌신검무를 익혔다. 게다가 알고 있는 뇌신류의 무공도 굉장히 많지. 나는 백웅이라면 인정 못할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
청월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당한 불신감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흠... 어르신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다."
그 때였다.
"놀고 있군!"
갑자기 가만히 있던 이광이 불쑥 내뱉은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졸지에 핀잔을 들은 독고성과 청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청월은 당장이라도 이광에게 덤벼들 것처럼 살기를 끌어올렸지만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
"뭐라고? 방금 내가 잘못 들은거냐 이광?"
"아, 죄송합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빌어먹을 놈! 뒈져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벌떡 하고 청월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구구구...
그의 손에는 이미 뇌신권(雷神拳)의 우레같은 강기가 맺혀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출수해서 반경 삼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으리라. 청월의 무공은 벽력삼존답게 초절정에서도 상당히 높은 진경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이광이 청월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자 이광이 나직이 말했다.
"일단 제 말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저는 종사의 직계제자일진대 이런 중대사에 한 마디 할 자격도 없단 말입니까?"
"으음."
청월이 주춤했다. 이광이 띠껍게 말하는 바람에 열받긴 했지만 이광은 전대 호법사자 이청운의 하나뿐인 직계 수제자였다. 호법사자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광보다 할 말이 많은 자는 없었다. 청월은 이내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라."
"감사합니다."
이광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저는 이 일에 두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문점이라?"
"첫 번째는 바로 교주의 진의(眞意)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꺼낸 이광은 한없이 냉철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교주는 저 백웅더러 우리 뇌신류를 모아오라 명령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그의 이야기를 들어서 백련교의 본단으로 찾아간다면, 그 자리가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으음..."
"그가 우리를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교주의 말 한 마디만 믿고 찾아가는 건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광의 말을 들은 독고성은 다시 생각을 하는 기색이었다. 턱을 괴고 있던 독고성이 대꾸했다.
"두 번째는 뭐냐?"
"첫 번째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도를 가진 교주가 백웅과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구나."
"우리가 백웅의 말에 따라서 백련교의 본단에 따라갔을 경우 최악의 경우 우리가 모두 전멸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후에 백웅은 반대하는 자 한 명도 없이 뇌신류의 종사위, 교주의 절세무공, 거기에다가 천령단까지 한꺼번에 얻어서 천하 제이인자가 되겠지요. 아주 완벽한 계획입니다."
"......!!"
"이후엔 자기 입맛에 맞는 제자를 길러내서 뇌신류를 수신류에 종속시키려 할지도 모르지요."
잔잔한 이광의 말은 독고성과 청월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듯 했다. 특히 청월은 갈피를 못 잡는 듯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는데, 이광의 말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는 증거였다. 독고성은 청월보다는 훨씬 수양이 깊어서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또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광이 말을 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저 백웅이라는 놈에게 뇌신류와 모두의 목숨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으음."
나는 기가 막혔다.
' 언변이 뭐 저렇단 말인가?'
이광은 자신이 뇌신류의 호법사자가 되고싶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뇌신류의 원로고수들이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불안감을 자극하며 나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공격해 버렸다.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뇌신류의 미래에 대해서 내가 보여준 그림을 없던 것으로 해버린 것이다.
실로 교활하며 영악한 언변!
이광이 무력만 가지고 있는 멍청이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지혜와 임기응변을 지닌 간웅이라는 증거였다. 내가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잘못 대처할 경우 이광에게 말려들어서 손쓰기 힘든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 여기에서는 쓸데없는 행동을 자제해야 돼.'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무엇일까.
나는 독고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르신."
"......"
"어르신은 저를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실 겁니다. 그리고 제가 위증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넌지시 흑요석으로 전생의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독고성에게 상기시켰다. 그러자 독고성이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알고 있다. 허나 말이다."
"네."
"망량의 납치도 그렇고 얼마 전부터 일이 꼬이고만 있지 않느냐? 오늘도 검마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신녀문을 사이에 두고 정보망을 공유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론 검마가 믿을 수 있는 자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인물인 것도 사실이지."
"......"
"나는 불안하다."
나는 그 순간 독고성의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흑요석의 기억이 가지는 불확실성!
흑요석은 내 기억을 마치 주마등처럼 보여주기 때문에 왠만해서는 현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독고성은 내 기억을 읽고 납득은 했으되 그걸 현실에 바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겪고 있는 모험이 워낙 방대한 범위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생경한 경험의 연속이기 때문에, 독고성은 그게 단지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독고성이 잠시 후 말했다.
"이 일은 보류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백웅. 너혼자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우리 전력을 보존하며 상황을 좀 더 살피고 싶구나."
"어르신의 말이 옳습니다."
옆에서 청월이 맞장구를 쳤다. 그는 원래부터 새파란 내게 뇌신류 호법사자위를 주는 일이 마땅치 못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광은 보이지 않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 그게 아니야!'
백련교에게 있어서 유일한 적수가 될만한 존재는 현재 황궁 뿐이었고, 교주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거침없이 황궁을 치러 나선 것이다. 황궁을 꺾고서 백련교가 중화유일세력으로 부상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통제할 자가 없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뇌신류가 황궁 공격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차후에 백련교에 귀환한다고 하더라도 공과에서 밀리게 된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백련교가 겪을 수 있는 최고난이도의 전투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뇌신류가 합류해봤자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뇌신류의 재흥이 점점 더 멀어질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면서도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여기까지의 계산은 전적으로 내 계획대로 뇌신류가 움직인다는 가정하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광의 언변 때문에 독고성과 청월이 내 의도 자체를 의심하는 지금 상황에서 이걸 설명해봐야 입에 발린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어떻게 하지?'
청룡무관에 오기 전, 제갈사는 내게 뇌신류를 설득할 비책을 알려주며 경고했었다.
[ 다만 한 놈만은 조심해야 할 거다. 그 놈은 어떻게 튈지 예측이 안 되는군.]
[ 알고 있소.]
[ 뭐... 정 이광이 방해된다면 그땐 달리 수가 없겠지. 놈과 사생결단을 내는 수밖에.]
[ 놈과 목숨걸고 싸워야겠군.]
그러자 제갈사가 답답한지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었다.
[ 이 멍청한 새끼야! 사생결단이라고 하면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냐? 누가 칼밥먹고 사는 무인 아니랄까봐 시부럴새끼가.]
[ 그럼 뭘 하란 말이오?]
[ 보나마나 이광이란 놈의 성격상 옆에서 교묘하게 끼어들면서 이간질하는 수법을 쓸 거다. 이런 수법을 파해하기 위해서는 혼수막어를 써서 교란시키는 당사자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 놈조차도 네 의도에 끌어들여서 설득부터 하고 시작해야 한단 말이다.]
[ 어렵구만.]
[ 크으... 빌어먹을... 현이라면 내가 이딴 설명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되자 제갈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광이 작정하고 깽판을 놓으려고 나선 이상, 아무리 독고성과 청월의 불안감을 낮추려 해봐도 역효과였다.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나는 이광에게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광은 귀계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수십 년이나 버티며 정계에 압박을 줄 정도의 거물이었다.
그렇다면, 이광을 설득한다.
그게 아니라면 놈에게 큰 충격을 줘야 한다.
칼싸움과는 또 다른 싸움이 내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다가 이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 이광.]
이광은 내 전음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되려 내 말을 꼬투리잡을 준비를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 당신이 깽판을 놓는 건 소용이 없는 짓이오. 왜냐하면 이 일은 바로 당신 일이기 때문이오.]
[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네놈이 뇌신류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마.]
이광의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내 말실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조금만 잘못 말을 꺼내는 순간 독고성의 의심을 부추겨서 나를 쫓아내게끔 만드리라. 나는 그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승부수를 던졌다.
[ 황연 대장군이 내게 말해주었소. 선제의 임종 때 황태자가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 자리에 주작 태산노옹도 있었다고.]
[ 뭐... 라고?]
이광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나는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며 전음을 이었다.
[ 황연 대장군은 당신이 이 사실을 모를거라 했소. 왜냐하면 그 이후에 정국이 너무 급변하는 바람에 주작의 존재가 정계에서 묻혀버렸고, 당신 또한 무림의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 여유가 없었다고 하니까.]
[ 그 말이 사실이냐? 정말로 주작이 선제의 임종때 함께 있었단 말이냐?]
[ 당신은 충분히 의심해봐야 하오. 황제와 주작이 여기까지 왔는데 선제의 죽음과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비꼬듯이 마지막 말을 던졌다.
[ 안 그래도 천지사방이 의심으로 가득한 당신인데, 마지막 신념인 충성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거군.]
"......"
이광은 황망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냉막하게 상황을 조율하던 가면이 깨진 것 같았다. 그는 잠시 후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 어르신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백웅의 말이 맞는 듯 합니다."
독고성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냐?"
"교주는 그렇게 얕은 계책을 쓸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주의 무공을 한번이라도 더 보아두어야 대항할 방법을 알 수 있겠지요."
"흐음... 그것도 그렇지."
"우선 백웅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법사자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더라도."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백웅의 의견에 따르는 걸로 하자꾸나."
독고성은 금새 의견을 전환했다. 나는 독고성이 팔랑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독고성은 아닌 척 해도 이광을 상당히 존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호법사자의 선제권이 자신이 아니라 이광에게 있다는 생각마저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이야기와 이광의 이야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이광이 내 편을 들어주자 바로 태세를 전환한 셈이었다.
' 한 고비 넘긴 건가?'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진소청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 백웅. 할 말이 있소.]
[ 뭐요?]
[ 스승님께도 무당파의 심득을 전해주는 걸 허락해 주시오. 스승님의 무위가 향상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나와 그의 악연을 알고있지 않소?]
[ 방금 전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스승님을 설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진소청이 내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전에 없이 간절했다.
[ 나는 그런 예감이 드오. 지금의 스승님은 당신이 전생에 만났던 스승님과 다르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벌써 스승님은 꽤 변하셨소. 당신의 전생에 마지막이어도 좋으니 제발 한 번만 스승님을 믿어 주시오.]
[ ......]
믿으라니.
내게 이광을 믿으라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성을 낼 뻔 했다. 하지만 진소청의 직감이라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동안 보아온 게 있었기에 나는 섣불리 무시하지 못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 ... 좋소.]
[ 고맙소.]
이게 마지막이다.
두 번 다시 이광에게 뭔가를 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정말 몸이... OTL 최대한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