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298화 (29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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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나는 백련교주 앞을 벗어나면서 생각했다.

' 뇌신류를 설득한다고...?'

닷새라는 시간이 있어도 무리일 것 같다. 확실히 무리다. 가장 온건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독고성이라고 해도 교주암살을 단호히 지시할 정도로 백련교에 대한 적대심이 높았다. 아니, 뇌신류 전승자 중에서 백련교와 타협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숙청이라 함은 자신의 문파가 풍비박산나고 사문의 고수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일이므로 그럴수밖에 없다.

직접 원한이 없는 나로서는 백련교를 꼭 무너뜨려야 하냐는 생각이 들기에 타협도 이용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뇌신류 무인들에게 있어서 나같은 선택은 불가능하다. 내가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한백령이 말했다.

"교주께선 닷새라 하셨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풀릴 원한이 아님은 나도 안다."

내가 한백령을 쳐다보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유를 가져라. 본녀가 너를 도와주겠다."

한백령은 백련교와 뇌신류의 악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주와 달리 뇌신류의 입장을 어느정도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한백령이 이렇게까지 말해준다면 나도 한결 수월한 마음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염령을 이용해서 한씨세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한진성을 따라가서 어떤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는 고색창연한 한 자루의 검(劍)이 놓여 있었다. 검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거치대 위에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굉장한 힘을 머금고 있는 검이었다.

"이 검이 바로 용연(龍淵)입니다. 가져가 주십시오."

"......"

두 번째 듣는 말이군.

나는 예전에도 한진성에게서 용연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한지화와의 혼인을 거부한 댓가로 마음의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 때와는 상황이 달랐으므로 나는 한진성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내게 왜 용연같은 보검을 주는 것이오?"

"화신류와 백웅 님의 인연을 돈독히 하려는 게 첫 번째이고, 또 하나는 백웅 님이 강해졌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지?"

한진성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용연보다 좋은 보검은 천하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검에는 영기(靈氣)가 스며들어 있어서 어지간하면 부러지지도 않고 날이 상하지도 않으며 예기가 유지됩니다. 그리고 검사에게 있어서 병기의 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실 겁니다."

"... 으음."

"앞으로 동급 이상의 고수와 싸우실 때는 무기도 중요해 지겠지요."

그 말을 하는 한진성의 시선은 내 허리춤의 검으로 향해 있었다. 이 검은 비등을 얻을 때 대룡상회의 표물에서 대충 가져온 철검이었는데, 그 동안의 격전 때문인지 날이 빠져 있었다.

확실히 두 고수가 같은 실력이면, 이 철검을 가진 쪽은 결코 용연검을 가진 자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검기로 검날을 강화시키고 무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명검일수록 유리했다. 필요한 내공도 크게 차이날 뿐만 아니라 내구도도 차이나고 보검의 예기가 실전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검마처럼 아예 이기어검을 주무기로 사용할 정도가 아니라면 병장기가 좋은 쪽이 반드시 유리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맙게 받겠소."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뭐요?"

"전에 요청하셨던 화산파 인물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정천맹으로 넘겼습니다. 정천맹주 위지혼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나는 한진성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책임하지 않소? 화신류를 의탁해서 찾아온 자들이거늘."

한진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외부인에게 저희 화신류의 비밀을 들킬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화산파의 멸문은 본디 정천맹이 뒷감당할 일이므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들이 피해를 입진 않겠소?"

"그럴 리가요. 정천맹주 위지혼은 아주 강하고 공명정대한 자입니다. 그가 비호해 주겠다고 선언했다면 천하의 그 어떤 문파도 화산파 고수들을 건드리지 못하겠지요."

"다행이군."

"다만 정천맹에서 지낸다면 눈칫밥은 먹겠지만 그건 멸문당한 자들이 감수해야 할 업입니다."

"흐음."

한진성의 말은 냉혹해 보였지만 현실이었다. 나든 한진성이든 화산파 고수들을 위해서 거기까지 배려해줄 이유는 없다.

"원하신다면 위지혼과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지금 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구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한진성과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더 하고 난 다음 화신류를 빠져나왔다. 화신류를 빠져나온 후 바로 비등으로 청룡무관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전에 흑백련이 있던 수요의 유적으로 향했다.

파앗!

유적 위의 연못에 도착하자, 나는 잔뜩 따갔던 흑백련의 공간에서 절반 정도가 채워진 것을 확인했다. 꽤 시간이 지나서인지 흑백련이 자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해도 연꽃 치고는 빠른 생장속도라서 나는 신기함을 느꼈다.

' 아직 꽃이 발아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자랐군. 그렇다면 완전히 자라는데는 3년 정도가 필요한 건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지만 지금도 꽤 자라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 만 했다. 어쩌면 흑백련을 지속적으로 양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잡생각을 거두고 연못 아래로 다시 이동했다.

이 수요의 유적에서 나는 금괴를 포함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고 보니 한가지를 빼먹은 기분이 들어서 직접 찾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윽고 유적의 가장 깊은 지하까지 들어갔고, 어두운 동굴에서 삼황오제 전욱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예전에 망량에게서 듣기로 이 전욱의 동상에 새겨져 있는 갑골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 아아, 북(北)에 있던 천지간의 통로가 무너졌나니.

신자(神子) 고양씨(高陽氏)가 황제(黃帝)의 부름을 받아 되돌아가노라.

인간의 호소에 치수(治水)의 비법을 세상에 남기었도다.

그리하여 막야(莫耶)를 징표로 남긴다. ]

망량은 이 갑골문을 단서로 전욱이 북방의 통로때문에 되돌아갔으며 막야에 숨겨진 힘이 수분조종이라는 가설을 세운 바가 있었다. 또한 수요의 유적에 있던 단서와 연계해서 막야의 2차 봉인지가 북극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렇게 보면 전욱의 갑골문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쓸모가 없어보였다.

나는 전욱의 동상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동상 자체가 가치가 있어."

나는 이 동상이 꼭 필요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삼황오제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야 자체를 제물로 바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었고 다른 것도 마땅히 바칠만한 게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삼황오제와 관련있는 유물이 필요한데, 내 기억 속에서는 바로 이 전욱의 동상이 그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 동상을 매개체로 삼는다면 삼황오제 전욱이 불려나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삼황오제이므로 사황 창힐보다 격이 높았다. 고대의 비밀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창힐의 언령에 대항할 방법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동상을 목갑에 넣은 후 어두컴컴한 동굴의 바닥에 걸터앉았다.

"다른 삼황오제의 유물도 찾아봐야겠군."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오랫동안 전생을 해 왔는데도 삼황오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아는게 없다. 지금 나는 고대사 문헌에나 나오는 삼황오제의 전설이 필요한게 아니었다. [옛 지배자]와 대등한 계약을 맺을 정도인 신적 존재들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요를 비롯해서 칠요를 모아야했고, 그 외에도 삼황오제가 남긴 유물이 있다면 그걸 얻어내야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삼황오제가 만일 적이 된다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삼황오제와 싸워서 쓰러뜨려야 하는가?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고작해야 [옛 지배자]의 사도인 달기조차도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는데 중화의 창조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내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행동이 매우 많았지만, 적이 신(神) 그자체라고 생각하자 대처법이 줄어들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 나는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째서 칠요라는 물건을 만들었고 그렇게 복잡한 계약을 해야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속의 삼황오제와 신으로서의 삼황오제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망량이 이번 봉선의식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이라는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들과 같은 수준에 올라야만 했다. 천암비서로 전생을 반복하는 동안에 백련교주나 황제는 어떻게든 없앨 수 있겠지만 결국 신을 상대하려면 신적인 힘을 얻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망량은 봉선의식을 통해서 신의 권능을 얻어서 내게 힘을 주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궁을 토벌하고 망량을 구해내야 해!"

우선 망량이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지금부터 터무니없는 수라장에 말려들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내가 도중에 꺾이면 망량은 정말로 개죽음을 당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파앗

나는 화산으로 향했다. 화산의 천제단이 어디있는지는 지난번에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화산의 봉우리를 뛰어다니면서 천제단을 찾아다녔다. 멸혼보의 경공으로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던 와중에 천우진의 천리전성(千里傳聲)의 술법이 들려 왔다.

[ 이리로 오시오! 여기요.]

이윽고 천우진의 목소리를 따라가자 거기에는 천우진과 제갈사가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화산의 천제단인지 천제단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초상기인이 3명 서 있었다.

"아니...?"

내가 당황해서 초상기인을 쳐다보자 제갈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정석비를 이용해서 만들어 봤다. 괜찮지 않으냐?"

"초상기인은 왜 만든거요? 제물용이요?"

"눈치가 빠르군. 봉선의식도 공양의식이니만큼 반드시 제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건 필수품이지."

"헌데 왜 셋 다 여자요?"

아닌 게 아니라 서 있는 초상기인 셋은 모두 빼어난 외모를 지닌 미녀의 모습이었다. 또한 가슴이 엄청 크고 허리가 세류요같아서 제갈사의 여자취향을 알 수 있었다.

' 미부(美婦)를 좋아하는군.'

내가 질린 표정을 짓자 제갈사가 후훗, 하고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숭한 남자를 만드는 건 싫다."

"......"

"봉선의식에서 중요한 건 음양팔괘의 조화같은 게 아니니까 걱정 마라."

옆의 나무에 기대어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중요한 건 차례, 권리, 자격, 시운이오."

"권리는 내가 갖고 있소. 나머지는 뭐요?"

"봉선의식의 차례에 대해서는 내가 사형에게 전수받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시운은 그저 천지교태(天地交胎)의 기운이 강해지는 때를 택하는 것인데, 이 또한 내가 천법(天法)으로 조종할 수 있으니 상관없소."

거기까지 설명한 천우진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자격... 이라고 해야겠지."

"자격? 그게 권리와 다를게 뭐요?"

"자격이란 건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자격. 봉선의식을 행할 권리는 당신에게 주어졌지만 그 의식으로 불려나온 삼황오제가 당신에게 힘을 줄지는 다른 문제요."

"......"

나는 천우진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어이가 없어졌다.

"잠깐...? 그러면 황제라는 놈에게 신의 권능을 받을 자격이 있었단 말이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겠지. 사황 창힐이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그가 불로불사와 언령을 하사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빌어먹을!!"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지금의 명 황제라는 놈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혈육을 주살하고 천하에 온갖 횡액을 뿌린데다가 도적과 간신배가 들끓게 한 암군(暗君)이오! 더욱이 이족과 거래해서 사악한 인신공양도 서슴지 않는 악당인데, 그런 놈에게 신의 권능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나한테 화 내지 마시오. 결과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내가 뭘 어쩌란 말이오?"

퉁명스럽게 대꾸한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의 안목을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려 들지 마시오. 신은 말 그대로 신. 그들에게 있어서 권리자가 정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인성이 좋으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오. 인간이 정치를 잘하건 말건 창조신인 삼황오제 입장에서 알 게 뭐요?"

"으음."

그것도 그렇다.

"아마도 신만이 가지는 기준이 존재하겠지."

"그 기준이 뭐요?"

"나도 모르오. 망량 사형도 그 기준만큼은 알 수 없다고 했소. 확실한 것은 황제가 어떤 식으로든 그 기준을 만족시켰다는 점이겠지."

"......"

"금주법으로 천기를 알아보려 해도 지금 천계가 굉장히 경계하고 있어서 알아낼 수가 없었소."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사가 키득거렸다.

"너무 겁주지 마라. 잘못 불렀다 하더라도 최대한 달래보려고 이렇게 제물도 준비하지 않았느냐? 신이라는 건 떼쟁이 어린애랑 비슷한 거라서 쉽게 생각하면 쉬워진다."

"속편하게 말하는군. 일이 잘못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게 될 텐데."

"죽으면 뭐가 어떻단 말이냐? 결국 다 똑같은 건데? 뭐, 하긴 너는 사후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가기 싫겠구만."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요는 네 녀석이 신에게 인정받을 만한 재목이냐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편하게 생각해라."

"알았소."

"크크크. 이래서 네놈이 마음에 든다니까. 그 눈빛은 죽음을 인정하는 눈빛이라서 아주 마음에 든다구."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합시다."

제갈사가 개소리를 하건 말건 나는 천천히 천제단 앞으로 걸어가서 섰다. 천우진은 내 손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전욱의 동상인가. 그를 불러내고 싶소?"

"물론이오."

"괜찮은 선택이군."

그러자 천우진이 미리 꽂아놓은 깃발에 서서히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고, 제갈사도 천제단 근처에 삼재의 방위로 초상기인을 배치했다. 뛰어난 술법사 두 명이 의식을 보조하기 시작하자 빠르게 천제단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윽고 천제단에 푸른 영기가 흘러나오더니 서서히 어둠의 구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어둠의 구체는 잠시동안 내가 들고 있던 동상과 감응하더니 허공에 팔괘(八卦)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

팔괘가 서서히 천제단에 내려앉으며 하늘의 먹구름이 한층 강해졌다. 마치 천지를 뒤덮는 듯 자욱하게 맺힌 먹구름은 태양의 빛을 한줌도 남김없이 삼켜 버렸다. 완전히 시꺼멓게 천지가 뒤덮였을 때였다.

"도올(禱?)이..."

천우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서 희뿌연 빛과 함께 괴이한 요괴가 날뛰듯이 튀어나왔는데, 그것은 전설상의 요괴인 도올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지니며 몸은 호랑이와 비슷한데 호랑이보다 크고 호랑이의 다리가 있어서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난훈이라고까지 불리며 투쟁을 좋아하는 요괴였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올이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망량귀(??鬼), 학귀(?鬼), 소아귀(小兒鬼) 등 산해경에서 보았던 전설적인 요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저마다 요괴무리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그 숫자가 허공을 메울 정도로 많아서 수천 마리는 되어 보였다.

쿠오오오 -

요괴들이 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신령스러운 빛이 떠돌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음악의 신인 노동(老童)이나 태자장금(太子長琴), 궁선 과 같은 하급신으로 보였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내뿜는 신기(神氣)가 검선 여동빈이 내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저들 또한 신격으로 보였다.

요괴와 신위들은 소환된 후에도 날뛰지 않고 허공에 도열하며 뭔가 조형을 이루었다. 무언가 행차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자체로 허공에 계단이 생기며 어둠 속에서 빛이 꼬부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요기와 마기, 신기가 얽히고 섥히는 태초의 혼연이 이 자리에 나타난 듯 했다.

잠시 후 하늘이 열렸다.

현실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존재가 그 손을 드러내었다. 천지를 뒤엎을 듯이 거대한 그 손이 서서히 줄어듬과 동시에 제관(帝冠)을 머리에 쓴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무언가의 크기는 요괴나 신격에 비해서 그리 크지 않아 보였으나, 나는 엄청난 위압감 때문에 한순간 숨이 멎을 뻔 했다.

' ... 허억...'

마치 [옛 지배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위압감!

내가 간신히 눈을 들어서 그 어둠의 존재를 올려다보자, 그 존재는 천상천하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 나는 황제의 후예인 오제(五帝) 전욱(?頊). 나를 부른 자 누구인가?]

봉선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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