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296화 (29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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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나는 청룡무관에서 잠시동안 진소청과 더불어서 주작의 공손검법에 대항할 방법을 의논했다. 진소청은 자신의 경험에서 공손검법의 흐름을 유추했고, 위험해보이는 초식에 대해서 내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백웅. 그 자를 상대할 때는 굴공검과 천축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걸 권하오."

"왜 그렇소?"

"간합을 조절하게 되면 공손검법의 무결성에 흠집이 나게 되오. 상성상 좋소."

나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설마 태산의 그 싸움에서도..."

"그렇소. 당신에게서 전해받은 장삼봉의 심득을 응용했던 거요. 당신도 나처럼 그와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거요."

"그거 다행이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주작을 상대하는 게 영 승산이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진소청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젠 어떻게 할 거요?"

"잠깐 동영에 들렀다가 화신류에 복귀할 생각이오. 백련교주와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야겠지."

"좋은 생각이오."

나는 잠시 후 진소청과 함께 비등을 써서 동영으로 향했다. 동영의 흑요석 광산에 도착하자, 나는 인부들의 눈을 피해서 질좋은 흑요석을 캐기 시작했다. 진소청은 인적없는 갱도에서 조그마한 흑요석 광물을 하나 집어들며 신기한 듯 살펴보았다.

"그리 특이할 게 없는 것인데 당신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보물이 되는구려."

"그리 편리한 것도 아니오. 크기에 따라서 기억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차이가 나는데 그게 좀 불만이오."

흑요석 술법은 만능으로 보였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만일에 내가 여태껏 살아온 모든 지식과 경험, 무공 등을 한번에 전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2십여 장이 넘는 크기의 엄청난 흑요석이 필요하다. 그런 흑요석은 인간세상에서 찾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기억의 용량이 많고 시간의 흔적이 길수록 필요한 크기가 더더욱 늘어나기도 했다.

"이제 미호를 찾아갑시다."

흑요석을 필요한 만큼 캔 다음에는 미호가 있을 교토의 천황궁으로 향했다. 천황궁에 도착하자 나는 미호의 기척이 있는지를 살폈고, 수상쩍인 술법의 흔적을 발견하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우리는 미호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 아니?'

미호가 없다!

본래 미호에게 조종당해서 혼미해져있을 천황은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 정무(政務)를 보고 있었고 식신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미호의 술법력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인지라 나는 멸혼보로 천황 앞에 나타났다.

"헉."

"난데없는 방문이라 미안하오."

나는 천황에게 포권을 한 후 말했다.

"당신은 꼬리 아홉 달린 여우요괴에게 홀린 상태로 여태껏 지내온 기억이 없소? 우리는 그 요괴를 쫓던 중인데 흔적이 느껴져서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소."

"으음..."

천황은 침음성을 흘리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자네들은 그 여우의 부하인가?"

"부하면 쫓을 리가 없겠지. 우리는 그 요괴를 꼭 만나봐야 하오."

"그 요괴는 얼마 전에 내 매혹술을 풀어버리고는 떠나 버렸네. 그래서 나는 덴노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야."

"어디로 갔소?"

천황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알려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군. 굳이 말하자면 고려로 넘어간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일세."

"고려라... 뭘 찾아서 간 거요?"

그가 손사래를 쳤다.

"모르네.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게나. 나는 이대로 쭉 지냈으면 하는 마음일세."

"알았소."

나는 진소청과 함께 천황궁을 빠져나왔다. 진소청은 동영이 처음인지 동영의 건축양식이나 사람들의 옷가지를 보고 신기해하는 듯 했다. 나는 전각건물 위에 서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진소청에게 말했다.

"진소청. 나와 함께 고려로 가 봅시다."

"가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지금 시점에서 미호를 찾아서 고려를 뒤질 시간이 있겠소?"

"두 군데만 확인하면 될 것이오."

"두 군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군데를 찾아봐도 미호가 없다면 그 때는 어쩔 수가 없지."

파앗!

나는 우선 비등을 써서 월요의 봉인지인 강화도 마니산으로 갔다. 이 곳에는 서산대사가 늘상 결계를 펴고 있었으며 제자인 유정과 함께 숙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은 겉으로 위장된 마니산이 아니라 월요의 제단 그 자체였으므로, 우리의 침입은 서산대사가 감지할 수 없었다. 서산대사의 결계는 어디까지나 외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월요의 고대제단에 도착한 나는 주변 기색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는 내부로 비등으로 들어가서 월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 있군.'

나는 월요의 삼신기가 멀쩡히 놓여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걸 건드려서 갖고나오지만 않으면 월요의 수호자가 소환되지 않으므로 나는 일단 월요를 놔두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소청이 물었다.

"월요가 있소?"

"있소. 미호는 아직 여기에 도달하지는 못한 모양이오."

"다행이군. 다음으로는 어디에 갈 생각이오?"

"거창(居昌)에 갈 생각이오."

"거창?"

나는 목을 우드득 풀어주며 대답했다.

"아까 만났던 천황은 타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의심되는 신계와의 통로가 고려 거창에 있을거라고 말했던 적이 있소. 그렇다면 미호가 월요를 찾기 위해서 반드시 그 장소를 탐색하려 할 것이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는군.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 주시오."

"타카마가하라가 신계와의 통로라면, 그 장소는 우리가 아는 어떤 곳과 비슷하지 않소?"

내 말을 들은 진소청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제단!"

"예전에는 감을 잡지 못했지만 확실하오. 아마 거창에는 중원 오악의 천제단처럼 뭔가 천계에 통하는 장소가 존재할 것이오. 미호가 동영에서 가장 가까운 신적인 영소(靈所)를 찾는다면 거기에 들르겠지."

물론 정황상 천제단이 아닌 다른 장소일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우선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탐색해보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과연, 그렇겠군."

납득한 진소청은 이내 생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종잡을 수가 없구려. 어떨 때는 한없이 범상하다가도 방금 전에 보였던 총기는 대단한 수준이었소. 모험을 하는 도중에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얻었던 정보를 모아서 계속 생각할 뿐이오. 마치 모든 게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예전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으니 그걸 정리할 수밖에 없소."

"아니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 어쩌면 당신의 가장 큰 재능은 그런 쪽에 있을지도 모르오."

"금칠은 그만 하시오. 서둘러 움직입시다."

진소청의 칭찬이 무안해져서 나는 대충 넘겨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런 논리추론능력은 망량과 오랜 세월 지내오다보니 저절로 어깨너머로 익힌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거창에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거창 근처인 합천으로 갔다. 합천에는 예전에 해인사(海印寺)를 찾으러 근처까지 가본 적이 있었다. 나는 합천에 도착하자 곧장 거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창 지역에 들어서자 나는 곤란함을 느꼈다. 이곳 어딘가에 타카마가하라로 추정되는 곳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어딘지 확실히 알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하자 진소청이 제안했다.

"오악의 천제단은 모두 산에 있었소. 근처에서 높아보이는 산을 올라봅시다."

"그게 좋겠군."

하지만 딱히 높고 험준해보이는 곳이 잘 안 보였다. 대륙과는 달리 고려는 산지가 낮고 완만해서 밍숭맹숭한 기분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뒤지기도 귀찮은 일이라서, 결국 우리는 근처에 있는 해인사로 가서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해인사의 주지인 대정법사는 십이율 소속의 술법사였으나 일선에서 물러난 장로급 인물이었다. 조계종(曹溪宗)의 스님이기도 했다. 대정법사는 우리를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거창 일대는 고대에 자타국(他國), 거타(居陀)등으로 불렸소. 한때 가야국이 위치하던 장소로써 삼국시대에는 격전지였소. 하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특이점이 느껴지는 장소는 아니오."

"그렇습니까..."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찾아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명나라 인이 돌아다니는 건 십이율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것이오."

대정법사는 점잖게 이르고는 대면을 끝내버렸다. 다소 냉랭한 태도였으나, 일단 이야기에 응해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가 우리를 크게 의심해서 술법으로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 아냐. 분명히 거창에 뭔가 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특이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잠깐. 타카마가하라는 고원 분지잖아? 그럼 높은 고원부터 찾아볼까.'

나는 해인사를 물러나와서 거창 일대의 고원을 뒤져 보았다. 그렇게 약 두 시진동안 뒤지자, 아니나 다를까 뭔가 술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특수한 고원이 나타났다. 보통 인간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인식장해의 술법이 강하게 걸려있는데다가 결계도 펼쳐져 있었다. 진소청도 그 낌새를 알아챘는지 말했다.

"이 앞은 이공간인 것 같군."

"여기가 아마 타카마가하라일 것 같소."

"결계를 뚫어 보겠소? 이건 팔진도와 달리 의념절기로 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콰과과광

우리는 의념을 모아서 고원을 막고 있는 결계를 뚫었다. 강하게 힘을 집중시킨 의념은 좌도방문의 술법이나 결계를 뚫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와 진소청은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고수이니 만큼 이 정도 결계를 깨는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팔진도처럼 그자체로 보패급인 절진과는 달랐다.

우오오오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 농밀한 이계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직 현실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서 현계가 보존되어 있지만, 여기서 마기(魔氣)가 더 짙어지면 혈계(血界)나 환계(幻界)처럼 현실의 물리법칙이 뒤틀리게 되리라. 이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은 장소였고 타카마가하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진소청이 중얼거렸다.

"백웅. 이 자리를 벗어난 후 십이율과의 접촉은 지양해야 하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만났던 해인사의 대정법사가 이 장소를 몰랐을 리가 없소."

"내 생각도 그렇소. 여기도 강화도 마니산과 마찬가지로 십이율에서 비밀리에 숨겨둔 장소군."

약간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왠 돌비석이 보였다.

[ 제왕이진아시지령(帝王伊珍阿?之領)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아시라는 자의 영토라는 뜻인가?'

그리고 협곡을 더 올라서 분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화아아악

갑작스럽게 어둠과 함께 흑풍(黑風)이 몰려왔다. 그리고 재잘거리는 듯한 음소(陰笑)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지선 망량의 술법지식에서 이게 어떤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진소청의 팔을 잡아 끌며 외쳤다.

"물러서시오!"

파밧

우리는 이계가 덮쳐오던 경계점에서 급히 몸을 뺐다. 눈 앞은 멀쩡한 고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몇 발짝만 앞으로 옮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에 덮쳐오던 마기의 농도로 보아서 그 곳은 틀림없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장소였다.

나는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 곳은 암천향(暗天鄕)과 직접 연결되어 있소."

"암천향이라면 이계의 마신들이 거한다는 장소 아니오?"

"그렇소. 이 곳 타카마가하라는 차원문(次元門)인 것 같군."

차원문!

암천향으로 직접 통하는 문!

그것은 천계의 대라신선이나 도교의 신적 존재들이 목숨을 걸고 봉인하려 드는 장소였다. 차원문은 현실세계에 구멍을 뚫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차원문이 많이 열릴수록 암천향에 존재하는 [옛 지배자]가 힘을 발휘하기가 쉬워졌다. 종종 세상에 재앙이 일어날 때는 이 차원문의 존재가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 타카마가하라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천제단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장소가 아니다. 아니, 과거에는 그렇게 사용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이계에 잠식되어있는 차원문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는 차원문이 봉인되어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천황이 줬던 정보를 되새겼다.

[ 그녀의 혼잣말을 듣기로 이 세상에는 이족(異族)이란 게 있나보더군. 그걸 듣고 생각해 본 결과, 이 땅에 존재하는 이족의 근거지가 어딘지 알 수 있었네. 그 곳에 간다면 자네가 찾는다는 칠요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 그 곳은 타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불리며 자네들이 생각하는 신계(神界)같은 곳일세. 그러나 내가 생각해보니, 바로 그 곳이야말로 이족의 근거지일 듯 하더군.]

[ 천황에게만 비전(秘傳)되기를, 타카마가하라는 신(神)이 찾아온 대지가 아니라 불길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이며 통로일세. 그곳에서 도래한 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이 동영땅에서 신으로 군림한 곳이지. 나는 바로 그곳이 이족이라는 존재들이 거처하는 장소일 거라 생각하네.]

"......"

틀린 말은 없다.

암천향에서 비롯된 이족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이 타카마가하라이며 거창이다. 그리고 그 신적인 힘을 지닌 이족은 곧이어 동영으로 도래해서 신으로 군림했을 것이다. 타카마가하라가 차원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이미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혹시나 이 곳이 천제단같은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 흠... 그러면 올라올 때 보았던 비석대로라면, 이진아시(伊珍阿?)라는 자가 바로 최초의 군주이자 동영의 신이 된 존재겠군.'

나는 얼추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기자 옆에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백웅.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일단 물러납시다. 이 곳에 칠요의 단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호가 이런 곳에 와있지는 않겠지."

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미호와 마주쳐서 얘기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현재 그녀의 행적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소득이라고 한다면 타카마가하라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것 뿐이었다.

' 미호가 월요를 모으는 걸 당장 막을 수는 없겠군.'

파앗!

우리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도 낙양에서 화신류와 접촉하기로 했다. 진소청은 나와 헤어지며 말했다.

"내가 함께 가봤자 백련교에 쓸데없는 의심만 사게 될 것이오. 부디 건승을 기원하겠소."

"맡겨 주시오."

진소청을 청룡무관에 데려다 준 후 나는 낙양의 한씨세가로 갔다. 한씨세가에 도착하자 한진성이 나를 맞아 주었다.

"가신 일은 잘 되었는지요?"

한진성이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었소."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나는 당장이라도 교주의 제자로 들어가고 싶소만..."

내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자 한진성이 말했다.

"그 일에 관해서 가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 합니다."

"한 가주께서?"

"잠시 저를 따라오십시오."

"알았소."

나는 한진성을 따라서 가주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 곳에는 한백령이 흑단같은 머릿결을 뉘이며 곰방대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묵묵히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녀석 왜 황궁과 싸우려 하는 거지? 무슨 목적이냐?"

대번에 핵심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화신류에 제대로 정보를 전달한 적도 없었는데,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의 목적과 핵심이 단번에 파악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선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진성아. 네가 설명해라."

한백령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한진성이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현재 황궁의 모든 조직과 정보단체가 3명을 쫓고 있습니다. 그 셋 중 하나의 인상파기는 백웅 님 그 자체더군요. 나머지 하나는 뇌신류의 진소청이라는 걸 확인했고 다른 한 명은 정체불명입니다."

"......!!"

"무림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구파일방, 오대세가, 마도팔문 등에도 황궁이 압력을 넣을 예정입니다. 저희 한씨세가는 그 전에 정보를 입수했죠."

나는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사신위 주작이 우리의 인상파기를 수배시킨 것이다. 태산의 봉선의식을 방해하려 했던 우리야말로 황궁이 노릴만한 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다물자 한진성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가주께 거짓을 고하지 마십시오. 그럼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한진성의 충고로 들렸다. 한진성도 나와 같은 배를 탄 상황이기 때문에, 섣불리 한백령의 역린을 건드려서 내가 패망하는 걸 원치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건 절대명제인 것 같았다.

' 어떻게 하지?'

모든 걸 털어놓을 경우 한백령이 내게 협력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큰 사건을 저지른 나를 그냥 황궁에 넘겨버리고 적당히 일을 마무리하려 할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할 경우의 뒷감당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한백령을 그 정도로 신뢰할수도 없었다. 애초에 서로 이용하는 관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선택을 했다.

"태산에서 황제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최대한 말할 수 있는 걸 모두 말하기로.

이윽고 나는 약 반 시진 가까운 시간동안에 그간 있었던 일과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은 숨긴 채 봉선의식, 뇌신류와의 합류, 그리고 망량의 실종, 황제가 얻게 된 창힐의 권능에 대한 모든 것들이었다.

"......"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한진성과 한백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한진성조차도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실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리라. 한백령도 곰방대를 만지작거리는 빈도가 늘어나는 걸로 봐서는 속으로 당황한 듯 했다.

"... 이렇게 된 겁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한백령이 대뜸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지금 황제는 불로불사의 초인(超人)이 되었다는 건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언령이라... 정말인가."

"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한백령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떠날 채비를 해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어진 말에, 나는 상황이 앞으로 더욱 급박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련교의 본단에 데려다 주마. 그리고 교주께 방금 했던 말을 소상히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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