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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선지자와의 거래가 끝난 후 나는 셋을 데리고 진랑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작전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천제단을 열어서 삼황오제에게서 창힐의 언령에 대처할 방법을 얻어야겠어."
"당연히 그게 전제조건이겠지만."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제갈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현실적으로 우리와 황궁의 전력을 비교해봐야 하지 않겠냐."
"무슨 소리요?"
"나는 이쪽 전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인원으로는 이야기도 안 돼. 좀 더 조력자가 필요하다."
"전력이 부족하다니... 나와 진소청의 무공이면 금의위 오개 조 이상이 덤벼들어도 이길 수 있소. 그리고 당신의 사술과 천우진의 술법이면 충분할텐데."
"으이그... 정말이지 멍청한 거냐 일부러 그러는 거냐? 그건 봉선의식을 행하기 전의 이야기였지."
"뭣..."
난데없이 빈정거리기냐?
내가 제갈사를 노려보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그 생각은 나도 동의하오. 지금의 황궁은 전에 없이 강력해져 있을 것이오. 내 술법으로도 감당이 안될지도 몰라."
"강력해졌다니?"
"우선 황제는 황궁에 온갖 소환수를 불러두고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시켰을 거요. 즉 황궁에 존재하던 금의위나 어림군이 이족의 힘을 받아서 강력해졌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아!"
"게다가 다른 건 몰라도 그 태산노옹이라는 자의 힘은 호법사자급일지도 모르오. 봉선의식을 통해서 창힐과 계약을 맺은 이상 그들은 신의 권능을 빌려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오. 언령 뿐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전투력에서 별격의 존재가 되어버렸을지도."
"하지만 진소청은 태산노옹을 일대일로 몰아붙였잖소."
내가 항변하자 천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태산노옹은 태산에 있던 팔진도를 유지하는데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붓고 있었을 거요. 그 상태에서 진소청같은 초절정고수와 겨루니 질 수밖에 없지. 허나 태산에 있던 팔진도를 거두고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킨 태산노옹이 얼마나 강할지는 예상이 불가능하오."
"......"
그 정도란 말인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제갈부와 태산노옹은 창힐의 언령을 쓰지 못하는 걸로 보이오. 그런걸 쓸 수 있었다면 진작에 썼겠지. 우선 언령은 황제만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겠군."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그는 우묵한 눈을 들어서 제갈사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다들 백웅을 바보취급하지 마시오. 그는 세밀함이 부족할 뿐, 큰 국면을 보는 능력은 이 자리의 어느 누구보다 낫소."
진소청이 일침을 가하자 제갈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왠지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리저리 놀릴 기회만 보고있는 듯 했다. 나도 제갈사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천우진도 고개를 돌렸다.
두놈 다 성격 괴팍하고 자존심 강하기로 천하에서 알아주는 놈들이라 나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진소청은 그 분위기를 파악하고 내가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진소청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웅. 당신이라면 세력을 원하는만큼 일궈낼 수 있을 거요. 생각나는대로 지침을 말해 주시오."
"흐음..."
세력이라.
나는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지금 내가 강호에 뿌려둔 씨앗은 여러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검마의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뇌신류의 세력이었다. 거기에다가 화신류의 추천을 통해서 백련교주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내 영향력은 생각보다 막강한 것으로 보였다. 검마측의 고수들과 뇌신류 고수들만 합류해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십수 번이나 전생을 하며 모아왔던 인과율과 인맥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향후의 진로였다.
' 뇌신류와는 백련교주를 반전의 권능으로 암살하기로 약속했어. 그게 문제야.'
그 당시에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백련교주처럼 껄끄럽고 손이 닿지 않는 존재를 가만히 놔두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뜻밖의 강적으로 출현한 이상 그 생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황제를 반전의 권능으로 암살하는 게 낫지 않을까?
봉선의식으로 불로불사를 손에 넣은 강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 억지로 필멸자의 힘으로 황제를 죽이려 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신의 힘으로 놈을 없애버리는 게 편하고 안전하지 않을까?
어차피 가만 놔둬도 백련교주는 상당히 수동적인 존재였다. 흑백련이 따로 백련교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게다가 내게 백련교주의 제자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백련교주보다는 황제를 죽이는 쪽이 훨씬 나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백련교주를 죽여야 할 일이 생기면 암살권이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옛 지배자]가 여러 번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굉장히 아까운 권리였다.
선택을 해야 한다.
백련교와 황궁, 거대한 두 개의 축 중에서 어떤 걸 쓰러뜨리는 게 나은가.
' 껄끄럽군...'
나는 이 문제를 눈 앞의 동료들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영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자가 없었다. 제갈사 놈은 워낙 제멋대로라서 나를 위한 조언을 해 준다는 보장이 없었고, 천우진 또한 내 사정에 냉담한 편이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얼굴도 모르는 백련교주를 상대하기 보다는 그냥 황제부터 죽이라고 말해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진소청에게 상담하기에는, 그가 현재 뇌신류에 몸담은 인물이라는 점이 걸렸다. 진소청이 뇌신류에 중점을 두고 대답할 확률이 높기에 객관성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검마와 상담을 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잠시 후 말했다.
"지금 내 사정을 일단 말해 주겠소."
동료들에게 너무 사실을 감추고 있으면 신뢰관계에 흠이 가게 된다. 게다가 눈 앞의 세 사람은 이번 생에서 최대의 동료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상황을 알아두는 편이 나은 것이다. 내가 이번 생에 진행했던 내용을 다 털어놓는데는 대략 한 식경의 시간이 들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제갈사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무영문 검마에 뇌신류의 은거고수들이라고... 이거 정말 미친 놈일세? 네놈 목표는 강호의 지존(至尊)이 되는 거냐?"
"지존? 아니오. 나는 만일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게 그거지. 네가 모아온 놈들이 전부 아군이 된다고 하면 강호를 뒤엎고도 남는다. 보기보다 위험한 놈이었잖아."
질린 표정을 짓던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간에 그정도면 딱 좋군. 독고성, 검마, 진소청 등 최절정고수들을 선발해서 비등으로 최심부에 잠입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언령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게 제일 필요하겠군."
"그 전에 오악 중 나머지 사악(四岳)의 천제단 중 하나를 골라서 확보할 필요가 있겠소. 당신들은 어디가 좋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러자 제갈사와 천우진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화산(華山)!"
둘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자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치 촌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들에게 질문했다.
"화산이라고? 나는 가장 안전한 숭산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나는 소림사의 제일고수인 신승에게서 도움을 받기로 약조까지 받았다. 소림사의 고승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천제단에서 봉선의식을 치르면 그보다 안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심 정해진 답을 물어본다는 느낌이었는데, 뜻밖에도 술법사 두 명이 화산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자 제갈사가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설명했다.
"봉선의식이 그냥 제물을 바치는 공양의식이라면 네 말대로 숭산이 제일 낫겠지. 그러나 봉선의식은 비밀(秘密)이 엄수되어야만 하며, 일반적인 공양의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이 놈이 거기까지는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군."
"무슨 소리요? 일반적인 공양의식과 다르다니?"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봉선의식의 본질을 생각해 보시오. 그건 [옛 지배자]이거나 거기에 가까운 존재를 직접 소환하는 의식이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존재만으로도 세계의 법리(法理)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대한 신격이 그 자리에 소환된다는 말이고, 그 여파는 틀림없이 물질계에 미치게 되는 것이오."
"으음!"
"흉신(凶神)의 힘이 강해지는 해에 성좌가 빛을 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초차원적 신격의 강림은 지상의 사물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오."
중얼거리던 천우진은 말을 이었다.
"운 나쁘게 질 안좋은 사신(邪神)이 장난을 치면 그 장소에는 재앙이 내리게 될 것이오. 태산의 천제단은 황제 공손헌원의 결계가 남아있는 곳이라서 그런 위험부담이 가장 덜하기에 대대로 주된 봉선의식 장소로 쓰였던 것이오. 나머지 사악의 천제단에서 봉선의식을 치르게 되면 소환된 신격이 어떤 난장판을 만들어버릴지 예상이 불가하오."
천우진의 자세한 설명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산에서 의식을 치르는게 부담감이 적단 것이오?"
"그렇소. 숭산에서 일을 치르게 되면 봉선의식 때문에 소림사에 어떤 피해가 갈지 모르는 거요."
"그렇군."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화산파가 망해버린 덕에 화산은 현재 무주공산일 것이오. 그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인명피해가 적겠지. 화산파의 멸망은 불행한 일이지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화산에서 의식을 치르는게 낫다고 말한 것이오."
"......"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거대한 불행을 눈앞에 두고서도 마치 기계처럼 냉정하게 합리를 따지는 술법사의 감성에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소청이 입을 열었다.
"백웅. 이제 슬슬 백련교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화신류에 귀환할 때가 임박하지 않았소?"
"시기로 볼때 그렇게 되었소."
"내 생각에는 이번 일에 백련교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소."
".....!!"
나는 뜻밖이라서 진소청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방책이었다. 백련교의 힘을 등에 업어서 황궁을 견제한 후, 백련교의 모든 세력을 흡수할 수도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신류 소속인데다가 이광의 제자인 진소청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선택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소청의 제안이 의외라 생각한 것이다.
진소청이 희미하게 웃었다.
"불편하게 생각할 것 없소. 나는 당신의 선택과 결단이 옳든 틀리든간에,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 생각이오. 망량을 구해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만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소?"
"고맙소."
나는 진소청에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도 진소청을 완전히 믿기가 힘들어서 껄끄러워했는데 진소청의 그릇은 나보다 몇 배는 넓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포용력과 대범함이 그의 인격에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은 실로 대인(大人)의 풍모였다. 역시 진소청은 영웅(英雄)의 자질이 충만한 사내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지금까지 진소청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뇌신류의 제자라느니 이광의 제자라는 건 그저 핑계였을 뿐이고, 사실은 그의 엄청난 재능에 질리고 두려웠기에 무의식적으로 경원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소청과 기억을 공유해서 동료로 받아지는 것도 늦어진 것이리라.
' 정신차리자 백웅.'
나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 스스로도 진소청이나 검마같은 영웅들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하고 그릇을 키워야만 한다. 내가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 천우진이 말했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변수는 역시 그 여우겠군."
"미호(美狐)를 말하는 거요?"
"당신은 미호가 월요를 얻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그건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오. 사형의 예측대로 미호가 서왕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천계의 모든 대라신선이 그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뜻이오. 본디 천계 출신이니 강신을 받는데 인과율의 제약도 훨씬 덜하겠지. 천계의 신선들이 천지를 제집처럼 들여다보면서 정보를 준다면 그녀는 금새 월요의 봉인지를 찾아낼 것이오."
"......!!"
"대륙 각지에 있는 도교의 사당이나 묘역, 사원, 문파 모두가 정보를 습득할만한 곳이오. 토지신을 소환하거나 신도들의 정보까지 공유되면 그 정보량은 엄청나겠지."
나는 천우진의 차분한 분석에 침음성을 흘렸다. 제갈사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낄낄거렸다.
"크크크... 요괴를 천대하던 고고한 신선들이 미천한 여우요괴에게 힘을 몰아준다는 건가? 웃긴 일이군."
"웃어넘길 일이 아니오. 지금 천계도 봉선의식이 끝나버린 걸 알고 있을 거고, 봉선의식의 주재자가 명 황제라는 걸 알아챘을 거요. 칠요를 확보해서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세상에 개입할 게 분명하오."
"그렇다는데 어쩔거냐 백웅?"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걱정 마시오."
"걱정 말라는 놈들이 꼭 별의별 짓을 다 저지르는데 말야."
이 놈과 이야기하다 보면 명줄이 짧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닥치시오. 당신은 비꼬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거요?"
"하아? 지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 해도 할건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내가 현이 놈처럼 네놈에게 밑천 다 털어가면서 도와줄 이유는 없어."
어이없다는 듯 대답한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었다.
"뭣보다 나는 이번 일이 잘되든 말든 내 목표와 별 관계가 없어보인단 말이지. 배신은 안하겠지만 적극적인 도움은 바라지 마라. 이혼대법을 준 것만 해도 대출혈이니까."
나는 문득 생각나서 질문했다.
"이혼대법은 대체 뭐하는 거요? 배교의 술법서요?"
"크크... 이러니까 대출혈이라는 거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놈에게 사문의 최대비급을 넘겨주다니... 이혼대법이 강호에 유출되면 이걸 얻으려고 수천 명이 서로 죽고 죽일텐데."
푸념을 하던 제갈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설프게 수련할거면 관둬라. 이혼대법을 제대로 연성하면 천하제일의 비급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독이 될테니까."
"충고 고맙소."
나는 이후 제갈사와 천우진에게 지침을 내렸다.
"나는 진소청과 함께 검마와 뇌신류 쪽을 정리하고 다시 진랑곡에 오겠소. 그 때까지 천우진 당신은 화산에 가서 천제단을 탐색하고 확보해 주시오. 제갈사 당신도 천우진을 도와주시오."
"알겠소."
"알았다."
파앗!
나는 진소청과 함께 검마의 무영문으로 향했다. 검마는 내가 진소청과 함께 있는 걸 보자 꽤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즉시 검마에게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진소청도 흑요석을 공유해서 아군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자 검마는 감탄한 듯 말했다.
"그렇군... 내가 알던 진소청의 실력보다 몇 배는 진보되어 있어서 놀랐는데, 그대도 백웅에게서 장삼봉의 절학을 전수받았겠군."
진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문주께서도 뛰어난 성취를 얻으셨군요."
"허허, 자네에 비할 바는 아니지... 얼마 후 천하무림이 경동하겠구나."
감탄성을 흘리던 검마가 말했다.
"그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네."
나는 검마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말했다. 망량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검마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고민하던 검마가 말했다.
"태산노옹이 황궁의 사신위 주작이었다면, 현재의 그 자는 호법사자급 존재일세. 황제 다음가는 최악의 장애물이라고 여겨야겠군."
"망량을 구출하는게 가능할까요?"
"지금은 알 수 없네. 나도 그 자들과 부딪혀보지 않으면 판단할 수가 없어."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뇌신류 고수들과 지금 합류하는 건 반대일세. 당분간 독자노선을 걷고 싶군."
"네?"
"독고성은 자네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이광은 그렇지 못해. 그는 이번 일에 굉장히 미묘하고 흐트러지기 쉬운 관점을 보유하고 있어.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를 아군에 받아들이면 독(毒)이 될 뿐! 이광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뇌신류와 연합할 수 없네."
"......"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검마의 말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범하고 포용력있는 자였으나 동시에 사파의 지존으로서 적아의 구분을 철저히 하는 성격이었다. 우국충정과 동시에 자기모순을 품고 있는데다 음흉하고 사나운 이광같은 무인을 아군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으리라.
내가 할 말을 잃자 진소청이 나섰다.
"검마. 스승님을 나쁘게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백웅의 전생에서 스승님은 편협하고 오만하게 그를 기만했고, 이번 일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 스승님의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아 주십시오."
"수제자인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광에 대해서 알건 다 안다고 생각하네. 그는 분명히 뛰어난 무인이지만 자신의 신념이 불완전한 존재야. 또한 그는 닭의 머리가 될 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는 걸 참을 수 없을거라 보네."
진소청은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는 계기가 필요하신 것 뿐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운명의 굴레에 억압받아 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계기는 백웅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가?"
"저는 당신들이 보지 못했던 스승님의 진면목을 보아 왔습니다. 그 분이 자기모순을 해결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
검마가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백웅의 판단에 맡기지.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나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번 일은 천하를 뒤엎는 대전(大戰)이 될테니 이광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저는 진소청의 말을 믿겠습니다."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곧 뇌신류와 합류할 준비를 하겠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이광을 믿는 게 아니라 진소청을 믿었다. 그래서 이광에 대한 신뢰를 진소청의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을 뿐이다. 그게 내가 동료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 신뢰라는 건 정말로 힘든 거군.'
천하제일의 무공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고 활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새삼 인연이라는 게 정말 까다롭다고 여겼다. 아무리 전생을 해도 쉽사리 해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다.
잠시 후 검마가 내게 조언했다.
"내 생각은 일단 수요의 봉인을 풀고 백련교주의 제자가 된 후, 백련교주 본인과 교섭을 하는 게 제일 좋아보이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는 게 낫겠지."
"역시 그게 좋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백련교에 들어간다면 꼭 한가지 알아봐야할 게 있네."
"무엇입니까?"
검마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천령단(天靈丹)을 이룩하는 방법일세."
"으음...!!"
"이번에 자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알아내야 하네."
검마의 말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다.
"백련교가 천령단을 독점하는 이상 자네가 몇 번을 다시 전생하더라도 역학관계가 뒤집어지지 않을테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