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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내 말에 천우진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사실상 그가 나보다 먼저 알아챈 사실이었고 그의 말 덕에 내가 알아챈 것이기 때문이다.
불로불사의 청년은 바로 황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황제가 아니고서는 주작에게 명령을 내릴 자가 없었고, 제갈부가 내게서 물러서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불로불사라지만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버리는 건 내황각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황제라고 가정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하지만 나는 곧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내가 봤던 황제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당신이 언제 황제를 봤는지는 모르지만, 불로불사니까 현저히 다를 수밖에."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어두운 공간 저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있군."
스으으...
선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체(動體)를 중심으로 마치 얼굴의 역할을 하는 듯한 촉수와, 집게가 여러 개 뻗어져 나와 있었다. 그는 쉬킥거리는 소리를 내며 심어를 우리에게 보내 왔다.
[ 불청객이군... 백웅... 또 너냐...?]
선지자는 예전에 내가 그를 도발한 일 때문에 짜증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전면에 나와있는 걸 보면 이야기를 해볼 생각 정도는 있는 듯 했다.
천우진은 그가 고위 이족이라는 걸 알아챈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선지자에게 말했다.
"추가로 거래를 하러 왔소. 오늘은 서로에게 득이 될 거래라고 확신하오."
나는 지은 죄가 있었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 어떤 거래를 말하는 거냐...?]
"잠시."
나는 족자를 들었다. 그리고 천우진이 아까 알려준대로 해자(解字)를 손가락으로 그려서 족자의 봉인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제갈사가 족자의 봉인에서 해방되어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사는 난데없는 곳에 나타나 있다는 감각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저편에 이족까지 보이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서 말했다.
"제갈사.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그러자 제갈사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개소리 마라. 너희가 나를 이토록 억압했는데 무슨 말인들 들어줄 것 같으냐?"
바로 이게 문제였다.
아까 제갈부를 맞이했을 때 제갈사를 족자에서 꺼낼까 생각했지만 꺼내지 못한 이유다. 제갈사는 지금 영문모르게 천우진에게 납치되어서 이차원에 지속적으로 봉인당해 있었다. 제갈사가 아니라 보통 인간이라고 해도 원한을 가질수밖에 없다. 제갈사를 꺼내준다고 해서 그가 우리 말을 들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 뭐... 제갈부 때문에 제갈사를 어떻게든 확보하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망량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말했다.
"곧 제갈부가 여기에 올 거요. 그 놈은 이미 봉선의식을 성공시켰고 우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오는 거요."
"......!!"
제갈사는 제갈부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듯 했다. 나는 연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제갈부를 상대할 꾀를 내어 준다면, 곧 선지자와 마도서를 거래할 때 당신에게 확실한 이득을 주겠소."
"마도서? 이득? 네가 설마 저 이족과 마도서를 거래한다는 말이냐?"
"그렇소."
"흐음..."
제갈사가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가 천우진을 힐끔 보며 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나를 봉인하지 않겠다고 약조하면 도와주겠다."
나도 천우진을 쳐다보았다. 천우진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인간에게 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있다면야 허락하겠지만 의미없어보이는군."
"한 번 믿어봅시다. 제갈사에게는 독특한 술법이 있을지도 모르오."
"그러지."
천우진은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인 듯 내 말에 승낙했다. 거래요건이 갖춰지자 제갈사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아주 좋아."
그 때였다.
파앗
"아주 멀리까지도 오셨군. 하지만 여기가 너희의 무덤이다!"
결국 찾아왔구나.
제갈부가 전이술을 써서 아스타나 대사원의 입구쪽에 나타났다. 그는 여러 개의 부적을 몸 주변에 띄운 채 신령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명백히 술법의 수준이 다른 전생 때와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환신 천우진이 제갈부를 상대로 열세에 몰린다는 것만으로도 그 힘을 알 수 있었다.
제갈사가 제갈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마치 오래된 지인을 보는 듯 반가운 말투였다.
"어이 조카! 오랜만이야!"
제갈부가 흠칫 놀랐다.
"... 제갈사? 네가 어떻게 여길..."
"호로새끼. 간만에 본 숙부에게 경칭을 붙이지 않느냐?"
제갈사가 투덜대자 제갈부가 싸늘하게 말했다.
"미친 놈! 네놈은 집안의 수치다."
"정말이냐?"
"그렇다."
"이 숙부는 정말 슬퍼지는구나. 흐흑..."
우는 척 하던 제갈사가 제갈부에게 검지손가락을 겨누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터져라 고(蠱)."
퍼벙!
"커허어어어억!!"
제갈부가 비명을 터뜨렸다. 조그마한 폭발과 함께 제갈부의 심장부근에서 뭔가가 터졌다. 제갈부는 상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저렇게 될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갈사는 제갈부의 몸에 음양천고중 한마리를 박아넣어놓은 상태였고, 명령어 한번에 폭발하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제갈사는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이만 먼 길 떠나거라 조카."
"웃기는.. 소리...!!"
위이이이잉
그러자 제갈부의 몸 주변에 떠있던 부적들이 잘게 쪼개어져서 벚꽃잎처럼 흐르더니, 이윽고 그의 위중한 상처에 붙기 시작했다. 그 형상을 지켜보던 제갈사는 갑자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내게 외쳤다.
"빌어먹을... 저새끼 죽여! 사지를 절단내라!"
"알았소!"
나는 제갈사의 잔혹한 명령에도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 어감이 안좋긴 하지만 제갈사의 말대로 제갈부가 회복하게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부는 서둘러 무공을 발휘해서 피하려 했으나 몸이 만신창이였기에 별 수 없이 내 칼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악."
촤악
나는 서너 번의 칼질으로 제갈부의 사지를 잘라내 버리고, 그의 미간에 한 칼을 꽂아주었다. 뇌명이 실린 검강지기는 제갈부의 호신강기를 두부처럼 갈라버렸다.
피와 육편이 요란하게 튀었다. 나는 제갈부의 몸통과 머리를 분리해서 머리통을 한손에 잡아채버렸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죽이려면 불에 태우는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는 질린 듯한 눈으로 내 손에 들려있는 제갈부의 머리통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안 죽었군...."
"살아 있다고?"
내가 반문하자 제갈사는 제갈부의 눈썹을 몇 가닥 뽑더니 대꾸했다.
"이 놈은 진짜 불로불사가 되어버렸어. 봉선의식의 수혜를 입었다 이거지. 이 놈을 어찌할지는 잘난 천우진 님이 잘 알고 있을 거다."
제갈사가 비꼬는 어조로 말하자 천우진이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못된 놈들 때문에 산하사직도가 마를 날이 없군."
슈우욱
잠시 후 천우진의 술법이 펼쳐지며, 토막나버린 제갈부가 제갈사가 있던 족자에 봉인되어 버렸다. 모르긴 해도 이보다 확실하게 없애버리는 술법은 없었다. 족자 속에 처참한 광경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은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일단의 처리를 뒤에서 보고 있던 선지자가 말했다.
[ 인간끼리의 다툼은... 끝났는가... 내 용건도 서둘러 마쳐라.]
"알았소."
나는 선지자가 제갈부를 치워준 정도로 고마워할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선지자 또한 수천 년을 살아온 강력한 이족 대주술사이기 때문에 제갈부 정도는 손가락 까닥하면 공간전이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중하게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당신에게 무명제사서를 줄 수 있소. 무명제사서의 댓가로 봉선의식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오."
[ 무명제사서? ...]
"그렇소."
[ 일단 내놓기나 해라... 물건도 없는데 무슨 김칫국이냐...?]
선지자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저번에 그와의 내기에서 강압했던 일 때문에 나를 좋지 않게 보는 모양이었다. 적대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황궁의 내황각으로 이동해서 무명제사서가 꽂혀있는 서가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무명제사서 옆에 있던 다른 책들까지 무더기로 목갑에 쓸어넣고는 재차 선지자가 있는 대사원으로 향했다.
"여기 있소."
[ ......]
내가 무명제사서를 건네자 선지자는 진위를 확인하려는듯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촉수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 진짜 마도서군... 잘 받았다.]
"거래할 수 있겠소?"
[ 솔직히... 거래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무명제사서 정도면... 일단 생각은 해 보겠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지식의 보고(寶庫)인 마도서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자기자신의 신념 때문에 나를 내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뇌하던 선지자가 무명제사서를 이공간에 쑤셔넣은 후 말했다.
[ 좋다... 거래하자.]
"고맙소."
선지자가 강한 어조로 경고했다.
[ 네놈은... 대화 중에 나를 도발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지금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물론이오."
나는 꽤 아슬아슬하게 거래가 성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선지자가 마도서만 받고 엿먹으라고 하면서 도망쳐버린다면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내심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선지자가 말했다.
[ 봉선의식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거겠지. 우선 내가 아는 걸... 말해주겠다.]
"부탁하오."
[ 내가 파악하기로 현 시점에서 이번 시대의 봉선의식은 완료되었으며... 수혜자는 대명제국의 황제이다. 소환의식에 불려나온 것은 황제 공손헌원 휘하의 대신(大神)인 사황(史皇) 창힐(倉頡)이었다. 의식에 참여했던 자들은 불로불사를 얻게 되었고, 황제는 사황 창힐의 권능을 얻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는 점이었다. 내가 수요 막야의 수기를 공양해서 대가를 얻은 것과 대동소이했기에 잘 이해가 갔다. 단지 규모가 크냐 작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의문점을 말했다.
"사황 창힐의 권능이란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 언령이다.]
"창힐의 언령에는 어떤 힘이 있는지 알고 싶소.]
그러자 선지자가 촉수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 모든 인간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한다. 사황 창힐은 이 능력을 사용해서 고대 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으니, 이번 명의 황제도 그걸 노리고 그를 소환한 거겠지.]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창힐의 언령이 인간에 대한 통제력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요?"
[ 이해하기 어려운가? ... 원숭이같군.]
뭔가 푸념을 하던 선지자가 설명을 했다.
[ 쉽게 말해서 인간인 이상... 창힐의 언령에는 거역할 수 없으며 생사여탈권을 지배당한다. 그가 죽으라 하면 죽을 것이고 불구덩이에도 뛰어들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배자로서는 천금처럼 느낄만한 능력이지.]
"......!!"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끼어들었다.
"죄송하오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보고자 하오. 괜찮소?"
[ 그대 정도면... 질문할 자격이 있지. 말하라.]
"언령의 술법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내포하지 못하오. 아무리 강력한 언령술사라도 그정도 지배력을 가진 예가 술법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소. 언령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소. 그 말은 술법체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야기요."
환신이라 칭해지며 중원 제일의 술법천재인 천우진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선지자도 약간 생각을 하다가 대답하는 기색이었다.
[ 창힐의 언령은 매개체를 발동시키는 권능이다... 한정조건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강력할만 하다... 그 매개체란 너희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순간, 천우진의 안색이 바뀌었다.
"설마 한자(漢字)?"
[ 그렇다... 그게 바로 사황 창힐만의 고유권능이지...]
선지자의 눈이 데굴하고 빛났다.
[ 너희가 인간이며... 한자의 문화권에 속하고 있으며... 팔괘(八卦)의 힘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제반사항을 모두 충족시킨다. 반면에 셋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창힐의 권능은 먹히지 않지...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빌어먹을... 신(神)은 신이군. 설마 그런 원리였을 줄이야."
천우진이 한숨을 토해냈다.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일인 듯 했다.
나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천우진에게 물었다.
"뭔 소리요? 우리가 한자를 쓰기 때문에 창힐의 언령에 걸린다는 말인가?"
"그 말 그대로요. 말(言)은 글자와 주술적으로 긴밀한 연관이 있소. 글자라 함은 수많은 인류의 군체(群體)가 공유하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이오. 또한 사황 창힐은 한자(漢字)의 창조자이니 거기에 자신의 권능을 방아쇠처럼 걸어놓는 게 충분히 가능하지. 총기에서 공이가 뇌관을 때리듯이, 우리가 그의 언령을 인식하는 순간 영혼이 굴복당하는 형식일 거요."
"으음..."
"한자를 뇌에서 한 번이라도 시인(示認)한 적이 있다면 영향력을 피할 수 없소."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한자를 전혀 모르는 백치라던가 문맹이면 되겠군. 그리고 중원인이 아니라 고려나 동영인이면 안 걸리는거 아니오?"
천우진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그들도 모조리 언령에 걸리오. 글과 말은 한가지이니, 의사체계와 신념체계를 소통하며 티끌만큼이라도 한자 문화권과 접점이 있다면 모두 영향권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요. 인간세계에서 어떻게 그 영향력을 피한단 말이오? 그 정도 되니까 삼황오제의 심복이라 할 수 있지."
"......"
뭐 그런 게 다 있는가?! 사기적인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정조건을 충족시킨 결과 나타나는 권능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아닌 자가 그리 흔하지도 않고, 한자 문화권에서 살고있지 않은 자도 그리 없다.
' 골치 아픈데.'
그 말대로라면 창힐의 언령과 싸울 때는 그 자가 언령을 발동하기 전에 기습해서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천수만의 군병들이 호위하며 철통같은 경계에 휩싸여 있고 심지어 불로불사지체를 이룬 황제를 어떻게 암살한다는 말인가?
나는 선지자에게 주문했다.
"여기 내 동료가 언령에 걸려서 혼란상태에 빠져 있소. 그에게 걸린 언령을 해주(解呪)해 줄 수 있겠소?"
[ 알았다.]
선지자는 허공에서 왠 지팡이를 소환했다. 그리고 진소청을 향해서 가리키며 뭔가 중얼거렸는데, 다음 순간 진소청의 몸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신비한 형상이 떠올랐다.
그 형상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팔괘였다. 피부에 올올이 새겨지듯 나타난 팔괘는 잠시동안 일렁이더니 곧 사라졌다. 잠시 후 진소청은 비틀거리면서 정신을 차렸다.
"으윽... 여긴..."
"정신이 드오?"
진소청이 제정신을 차리자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창힐의 권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족의 대주술사쯤 되면 방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인간인 이상 대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의미였기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윽... 정신이 혼미해..."
"한 숨 자시오."
진소청은 아직 언령의 여파 때문에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통을 억제하는 혈과 수혈을 눌러 주었고, 진소청은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래서 나는 선지자에게 말했다.
"아직 약간 댓가가 남아있지 않소?"
[ 흥... 말해라.]
"우리는 바로 그 황제와 싸워야 할 것 같소. 창힐의 언령에 대항할 방법이나 술법을 알려 주시오."
그러자 선지자가 말했다.
[ 그 전에 이야기해야할 게 있다...]
"무엇이오?"
[ 이전에... 네가 말했던 막야 2차봉인의 진실에 대해서이다. 나는 그 신화의 비밀을 알아냈다.]
흠칫!
그러자 듣고 있던 천우진과 제갈사가 거의 동시에 놀랐다. 특히 제갈사의 경우는 기겁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백웅 네 녀석... 도대체 무슨... 설마 네가 막야의 2차봉인을 풀려하는 건가?"
주술사에게 있어서 칠요와 해방이라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내가 막야의 소유주라는 걸 알고 있는 천우진마저도 놀란 걸 보면, 그는 2차봉인에 대해서는 몰랐던 걸로 보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선지자에게 대꾸했다.
"그 비밀을 내게 알려주겠다는 거요?"
[ 그렇다... 네가 알려준 일이기에 네가 들을 자격은 있지... 하지만.]
"하지만?"
선지자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촉수를 일렁였다.
[ 댓가가 부족하다. 언령에 대항할 방법이나 봉인해제의 진실이나... 두 가지 중 하나는 포기해야겠지.]
역시 그런 이야기인가.
선지자는 거래의 댓가를 철저하게 계산하는 자였기에, 내게 모든 걸 알려주는 건 자신이 크게 손해본다고 여기는 듯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곤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추가적인 댓가를 내놓으라는 말인가."
[ 그건 네 선택이지... 더 내놓으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선지자는 은근슬쩍 간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저 말투에는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기에, 나는 이 거래에서 선지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라는 걸 알아챘다. 동시에 미묘한 악의도 느껴져서 선지자가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지?'
나는 목갑에 소유한 내 소지품을 생각해 보았다. 경험으로 볼 때 금괴나 천년설삼을 내놓아봤자 선지자는 쓰레기취급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지식이나 주술적으로 가치있는 보물이었다. 나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난 걸 꺼내 보았다.
"이건 어떨까?"
[ 그건...?]
내가 내민 것은 은빛 봉황조각이었다. 촉수로 은빛 봉황조각을 받아든 선지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내가 긴장해서 쳐다보고 있자 선지자가 잠시 후 말했다.
[ 괜찮지만 좀 더 필요하다...]
말투를 보니 은빛 봉황조각에 상당한 가치가 있는 듯 했다. 저게 어떤 효력이 있으며 어떤 비밀을 품고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지자는 그 가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나는 뭘 더 내놓을까 생각하다가 옆에 있던 제갈사를 쳐다봤다.
제갈사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리둥절해했다.
"왜 쳐다봐?"
"제갈사. 갖고있는 거 내놔 보시오."
"뭐라고!"
그가 성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왜 내놓지? 그리고 가진 것도 없어 이새끼야!"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막야의 2차봉인에 대한 진실을 듣는건 나 혼자만이 아니오. 당신도 같이 듣는 거니까 당신 나름대로 댓가를 내놔야 하지 않겠소? 그게 궁금하지 않소?"
제갈사가 머뭇거렸다.
"...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정말 나 가진거 없다. 저기 천우진 놈이 이것저것 많이 갖고 있겠지!"
내가 슬며시 천우진에게 시선을 옮기자 천우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게도 물론 내놓을만한 댓가가 있지. 하지만 저 놈이 내놓지 않으면 내놓지 않겠소."
"그건 무슨 논리요?"
"제갈사 저놈은 비밀을 많이 꿍쳐두고 있소. 그걸 내버려두고 나만 보물을 내놓는건 배알이 꼴린다 이 말이오."
천우진은 손해보는 걸 싫어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또한 제갈사가 말로는 가진 게 없다지만 속으로는 많이 꿍쳐두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 했다. 나는 제갈사를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출혈을 감수하기로 했다.
"제갈사. 댓가를 내놓으면 당신에게 수정석비를 주겠소."
제갈사의 안색이 바뀌었다.
"수정석비라니. 설마 현자의 돌의 제작법이 적혀있다는 그 석비를 말하는 거냐?"
"그렇소."
"그걸 준다면 나도 흔쾌히 내가 가진 걸 꺼내놓겠다. 얼른 다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전에 당신이 뭘 내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뭐라고?"
"사실은 나도 천우진과 같은 마음이라서 말이오. 나 혼자만 보물을 다 내놓는게 정말 배알꼴리는 일이오. 그래서 그냥 당신들을 쫓아내고 나만 막야의 비밀을 들을 수도 있지."
"......!!"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요."
제갈사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듯 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굴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말했다.
"... 이 비급(秘級)을 주겠다."
제갈사가 허공에서 이상한 책을 소환해서 내게 건넸다. 나는 책의 표지를 읽었다.
"이혼대법(移魂大法)?"
"내가 가진 비급 중에 최상의 물건이다. 그 정도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옆에서 보고 있던 천우진이 이죽거렸다.
"배교 교주에게만 전승되는 술법서를 내놓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나보군."
"닥쳐라 천우진! 네놈이 여기에 상응하는 보물을 갖고있긴 하느냐?"
"뭣..."
천우진은 자존심이 자극당한 듯 균열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를 꽉 깨물더니 자신의 품 속에서 족자를 꺼냈다. 아까 제갈부가 봉인되어 있었던 족자였다. 그리고 족자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받으시오."
"이건?"
"여와낭랑께서 인간세상에 하사하신 산하사직도(山河社稷?)라고 하는 보패요. 소유권을 완전히 당신에게 넘기겠소."
"......!!"
"아, 그리고 나는 흑백련과 금괴가 좀 필요하니 나중에 주시오."
"알겠소."
보패!
그러고보니 아무리 천우진의 술법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제갈부를 그림에 봉인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보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산하사직도를 쓰면 고차원의 존재를 그림에 봉인할 수 있기에 크게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 이 정도면 됐겠지.'
두 사람에게서 나름대로의 댓가를 받자 나는 손해를 덜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비등을 써서 곧장 황궁 지하로 가서 수정석비를 목갑에 넣어왔다. 다시 대사원에 도착해서 수정석비를 꺼내자 제갈사가 찬탄했다.
"오오...!!"
"선지자. 산하사직도를 당신에게 주겠소. 이 정도면 충분하겠소?"
[ 충분하다...]
그렇게 복잡한 거래가 끝났다. 나는 선지자에게 보패 산하사직도를 내놓았고 그 대신에 제갈사와 천우진과 추가거래를 한 것이다. 서로가 원하는 걸 챙긴 거래였으므로 나름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선지자가 말했다.
[ 우선... 언령에 대항할 방법을 알려주지... 오악 천제단에 가서 봉선의식을 실행해서 삼황오제를 소환한 후 그 자들에게서 언령을 막는 법을 얻어라. 그 자들이라면 창힐의 언령을 막을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
"뭐라고? 거긴 이미 황궁이 장악하고 있소."
[ 내가 알 바 아니지... 다만 네 녀석은 봉선의식의 권리가 있는데다가... 삼황오제를 소환하는 것 자체는 천제단 5군데 중 어디에서 해도 된다. 태산에서 하면 좀 더 이득이 클 뿐이다.]
"그렇군."
태산을 제외한 4악의 경계는 허술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그 중 아무 곳이나 골라서 삼황오제를 소환하면 되는 듯 했다.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그리고 막야를 해방했을 경우의 전승이 왜곡된 일... 이게 정말로 황당한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소?"
선지자는 촉수를 앞으로 뻗었다.
[ 태허천존이 내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대신에 알아낸 게 있다. 바로 칠요(七曜)를 정상적으로 해방하기 위해서는 해당 칠요를 인류에게 하사한 삼황오제 본인에게서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헉..."
[ 위대한 자와 거래를 통해 알아낸 정보니 믿어도 좋다. 막상 천계놈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선지자가 자신의 눈을 데구륵 굴렸다.
[ 칠요는 일정한 제물과 영혼이 쌓이면 저절로 해방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동해방일 경우에는 칠요와 계약을 맺은 [옛 지배자]가 강림해서 지상에 대재앙을 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수요는 좀 독특해서 2차해방이라는 구조로 되어있지만 나머지는 아니지.]
"으음."
[ 정상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자동해방되기 전에 삼황오제를 찾아서 그들에게서 칠요의 주인으로서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인정받고 나면 삼황오제가 대신해서 [옛 지배자]를 억제해주기에 폭주위험이 없어지고, 칠요의 진정한 권능을 쓸 수 있다고 한다.]
"......"
막야 해방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확실히 선지자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있었던 칠요 막야의 엉뚱한 해방이 설명되었다. 힘이 쌓이면 자동해방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삼황오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천계와 소통할 방법은 대부분 막혀있으며, 주술이 쇠퇴한 현 시점에서 삼황오제를 소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천계는 그래서 칠요의 해방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천계는 칠요를 해방하려는 자에게 극도로 적대적이었던 건가?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지만 뭔가 꼬이는 느낌에 질문을 했다.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는 왜 그렇게 복잡한 계약을 했던 것이오? 자동해방과 정상해방에 차이를 둘 이유가 뭐지?"
[ 그건... 아마도 역학관계(力學關係) 때문이겠지.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선지자는 그렇게 말한 후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 움직일 거라면 빨리 움직이는게 좋을거다... 이미 전국옥새가 세계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스르륵
선지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망량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우선 막야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악의 천제단 중 하나를 골라서 거기에서 삼황오제를 소환해야 하는 것이다. 삼황오제를 소환하면 창힐의 언령에 대처할 방법도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제갈사가 말했다.
"판이 커졌군. 너는 정말로 막야를 해방해서 황제를 죽일 생각이냐?"
나는 제갈사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놈은 망량을 세뇌하고 조종했소. 망량의 생사도 알 수 없소. 죽여버려야하오."
"흐응... 재밌겠군. 나도 한번 껴 볼까."
"도와준다면 고맙겠소."
나는 대꾸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 황제. 지금부터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내 동료들이 고통받은 이상, 놈들에게 열 배로 갚아주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