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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파앗
비등을 이용해서 태산에 도착하자 이전과 같은 풍경이 보였다. 이광이 절진(絶陣)이라고 단언했던 언덕구릉이 눈 앞에 보였다. 천우진은 찬찬히 그 언덕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함정이군. 그것도 매우 고명한 자의 솜씨야."
"파해할 수 있겠소?"
"파해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럴 경우 진법의 주재자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것이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가 문제요?"
어차피 태산노옹, 혹은 사신위 주작일 게 분명한 그 존재와는 한번 결판을 내봐야 한다. 그래야 그 자의 밑천을 알아내고 다음번 전생에서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싸울 장소도 명분도 실력도 갖춰져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자 천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 진법이 뭔줄 알고나 하는 말이오?"
"잘 모르겠소만..."
"흥. 당신도 초급 술법과 진법을 배웠다지만 모르는게 당연하지. 이건 전설의 팔진도(八陣圖)니까."
"......!!"
나는 천우진의 말에 놀랐다. 그리고 반문했다.
"이 언덕에 펼쳐져 있는게 팔진도라고? 확실하오?"
"확실하오. 이 정도로 강력한 팔괘(八卦)의 힘을 응용할 수 있는 건 팔진도 뿐이오."
"그건..."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휩싸였다.
내 경험이 불길함을 고하고 있었다.
' 팔진도는 예전에 마주친 적 있다. 그리고 그걸 펼친 놈은...'
내황각주 제갈부!
과거 내 전생에서 중원지보라고도 불리는 뛰어난 술법사, 제갈부가 황궁을 수호하는 진법으로 팔진도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비등의 효력을 이용해서 팔진도를 무력화시켰지만, 실상은 그저 사기적인 이족의 보물에 도움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펼쳐진 팔진도를 내가 뚫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내황각주 제갈부가 와 있는 것일까?
나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노옹은 황궁과 거래하는 관계였고, 그 관계는 제갈부와 이어져 있었다. 사신위 주작일지도 모르는 태산노옹과 제갈부가 서로 붙어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제갈부는 태산노옹을 돕기 위해서 태산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상념에 잠겼을 때 천우진이 말했다.
"이 진법은 술자의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소. 이 진을 펼친 자의 각오가 굉장하다는 증거요."
"무슨 소리지?"
천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보통 진법은 이런 식으로 펼치지 않소. 진법이 파해되더라도 설치한 자는 멀쩡하게끔 되어 있지. 그걸 굳이 각인으로 생명을 이음으로써 진법을 강화시키고, 진법이 깨지면 자신도 죽게끔 만들어버렸다는 거요."
"......"
"이 진이 깨지면 자신도 죽는 거니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겠지."
나는 천우진의 설명을 듣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팔진도를 정면으로 파해하지는 못했다. 그게 각인의식으로 한층 강화되었다면 부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태산의 천제단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건 굉장히 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우진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아무래도 진법을 부수는 건 천우진 당신이 해야하는 일 같군. 우리가 도울 일은 없소?"
그러자 천우진이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뭔가 안쪽의 낌새가 이상하오. 내가 진법의 생문을 열면 빠르게 들어가서 한 식경 이내에 볼일을 보고 나오시오."
"팔진도를 부술 수는 없는 거요?"
천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팔진도를 설치한 자는 대단한 술법사요. 그런 자가 목숨을 걸고 설치한 진법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리 쉽게 부술 수 없소. 적어도 하루동안 제(祭)를 치르며 고생해야만 거둘 수 있소."
"으음."
"안쪽의 동향을 살펴볼 시간이라면 한 식경까지 마련할 수 있소."
아무래도 환신 천우진조차도 쉽게 뚫을 수 없는 팔진도 같았다. 그렇다면 천우진이 길을 연 사이에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나와 진소청이 무기를 꺼내들고 준비하자 천우진이 수인(手印)을 맺으며 외쳤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후우우웅
기묘한 소리와 함께 마치 뒤틀린 공간이 눈 앞에서 일렁이는 듯 했다. 천우진은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
"옆으로 새지 말고 정면으로 쭉 가시오. 옆으로 새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알았소!"
타닷
나는 진소청과 함께 언덕으로 달려나갔다. 진소청이 나와 보조를 맞춰서 멸혼보를 쓰며 말했다.
"망량이 무사해야 할텐데."
그건 내가 더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생각이었다. 망량의 신변에 위해가 일어났다면 정말로 큰일인 것이다. 이 안쪽에 망량이 있든 없든간에 생각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이윽고 멸혼보의 엄청난 속도에 힘입어 순식간에 언덕의 안쪽에 도착했다.
크다!
언덕 밑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분지에는 천제단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태산의 천제단은 다른 곳의 천제단보다 열 배는 크고 넓어보였다. 그리고 천제단 근처에는 세 명의 인영(人影)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 제갈부!'
역시 저 놈이 와 있었다.
제갈부 저 놈이 팔진도를 설치한 걸까?
제갈부 외의 두 사람은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언덕 위에 나타나자 저쪽도 우리를 감지한 듯 시선이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진소청이 언덕 위에 선 채 말했다.
"백웅. 저들과 대화를 할 여유는 없소. 전부 죽여야만 하오."
"무슨 말이오?"
"저 자들에게 여유를 줘선 안되오."
진소청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무인의 육감이 극도의 위험을 알리는 듯 했다.
"그런 직감이 드오. 나는 제일 뒤쪽에 있는 자를 상대할테니 나머지 두 명을 맡아주시오."
"알았소."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문답무용으로 살육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꽈릉!
진소청은 말 그대로 소리를 뛰어넘은 듯한 속도로 날아들어서 순식간에 제일 뒤에 있던 자에게 강기를 머금은 창격(槍格)을 날렸다. 어찌나 빠른지 나도 진소청의 속도를 일순간 놓쳤을 정도였다. 뒤늦게 파공음과 함께 공기가 터져나갔다.
' 여력을 남기지 않는군!'
나도 멍때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소청이 달려드는 것과 비교해서 반박자 늦게 뛰어들어서 제갈부에게 덤벼들었다. 제갈부는 보통 술법사가 아니라 초절정급 무공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내 공격속도를 감지해서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제갈부의 손에는 시퍼런 강기가 맴돌고 있었다.
콰광
강기가 충돌하면서 공기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그러진 폭발음이 연속으로 터졌고, 내 검은 연속으로 날아들면서 제갈부의 수강을 뚫고 급소를 노렸다. 제갈부는 난데없는 기습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무공을 시전해서 내 공격을 막아내었다.
쉬익
제갈부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는 듯 하다가 그 반탄력을 이용해서 절초를 쏘아보냈다. 나는 그 공격이 어쩐지 취한 주정뱅이의 주정같다고 생각하면서 초식을 흘려보냈는데, 제갈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라천광대법을 머금은 손으로 연속해서 쌍장의 강기를 발출했다.
' 상당한 실력이군.'
나는 섣불리 받아냈다가는 내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무리해서 공격하지 않고 일단 굴공참으로 방어부터 시작했다. 잠시 후 제갈부의 반격이 내 검로에 막히면서 자연스럽게 빈틈이 생겨났고, 나는 그 빈틈으로 뇌신검무의 일 초식을 꽂아넣었다.
"하앗!"
촤앗
"으윽!"
제갈부가 고통어린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대며 물러났다. 방금 전의 괴이한 보법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진짜로 낭패를 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제대로 무공의 헛점을 찔렀기 때문이다. 현재의 제갈부의 무공실력보다 내 실력이 한 수 위라는 증거였다. 다만 놈의 방어가 너무 굳건했기에 뇌명을 쓰는 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에 즉사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틈을 노려야 한다.
빠른 초수의 공방 사이에 나는 제갈부를 연속으로 공격할 수 있었지만 우선 옆에 있던 괴인을 살펴보았다.
' 이 놈은 누구지?'
제갈부와 무공을 부딪히는데도 옆에서 합공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술을 시전해서 내게 공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일반인처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중반일까, 키가 적당히 큰 청년으로 보였다. 혹시나 망량이 아닐까 해서 잠시 얼굴을 주시했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뇌정이 은은하게 울리며 제갈부가 비틀거렸다.
"커헉!"
제갈부는 입에서 한 줄기 피를 토해내더니 말했다.
"네놈은 뇌신류 고수냐...!!"
초식만 보고 짐작했다고? 아니면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가?
머릿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맴돌았지만, 생각과는 별개로 내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서 생긴 버릇이었다. 머릿속이 아무리 혼잡해도 전투를 계속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죽어랏!'
유성같은 빛줄기와 함께 내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뇌신류 검술의 쾌검(快劍)을 맞이하자 제갈부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백우선을 꺼내서 강기를 실었다. 그리고 내게 휘둘러 왔다.
까강!
다시 한 번 선렬하는 강기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내 내공이 훨씬 높았기에 이번에도 제갈부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세 발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 엥?'
나는 당연히 제갈부가 순간이동술을 써서 도망치거나 할 줄 알았다. 놈은 무공보다 술법이 더 강하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놈은 도망치지 않고 무기를 들어서 무공싸움을 받아준 것이다. 놈이 자신의 장점을 봉인해버린 셈이었으므로 내게는 호재였지만 의문이 들었다.
' 도망치지 않는다라...'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이건 기회다. 나는 이 기회에 제갈부의 목을 완전히 따 버릴 생각으로 살기를 끌어올렸다. 잠시 숨을 멈춘 사이에 기세가 돋우어졌고, 나는 이제까지 없었던 기세로 강한 찌르기를 감행했다.
푸슛!
"으윽!"
제갈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견정혈이 그대로 뚫리면서 핏줄기가 비산했고 놈은 말 그대로 치명상에 가까운 부상을 입은 것이다. 나는 이대로 한 초식만 더 그어버리면 그대로 제갈부를 시체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바로 그 때였다.
화르륵
뒤늦게 제갈부의 신형이 타오르는 듯한 빛줄기가 되어서 사라졌다. 급히 술수를 써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옆에서 보고 있던 의문의 괴인이 말했다.
"나이어린 녀석이 굉장한 무공이군."
제놈도 젊어빠진 주제에 남의 나이 운운이란 말이냐?
나는 신경질이 나서 그대로 달려들어서 놈의 목을 베어버리려 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자를 모두 죽여버리려 했기에 양심의 가책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잠재적인 적을 하나라도 줄일수록 좋은 것이다.
"잠깐..."
괴인은 문답무용으로 덤비는 내 기세에 당황한 듯 했다. 하지만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시점에서 죽여야 할 놈이다.
슈칵
내가 펼친 검강에 괴인의 목이 덜렁 베어져 나갔다. 차분하게 보고 있던 것 치고는 별다른 무공도 술법도 없는 놈이었던 것이다. 나는 괴인의 목이 땅에 떨어지자 급히 진소청을 도우러 갔다.
진소청은 아까 엄청난 기세로 덤벼들던 걸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진소청의 창술은 독특한 흐름을 이루며 마치 폭풍처럼 와류(渦流)를 일으키며 적을 공격했다. 가공할 힘이 꿈틀거리며 강기가 새어나오는 광경은 그 자체로 일세절초였다.
콰광!!
"하앗!!"
진소청의 공격을 막아내던 삿갓 괴인이 낭랑한 기합을 터뜨리며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연검에 시퍼런 빛이 새어나오더니 진소청의 강기를 차단했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이루었다. 그게 얼마나 현묘한 절초인지를 깨달았기에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
대단한 고수다!
진소청은 겨우 두 달 사이에 내 경지를 훨씬 뛰어넘어서 상승의 진경에 발을 내딛고 있어서, 지금 진소청이 죽일 기세로 몰아치는 와류는 나로서도 감당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도 괴인의 검법은 공수전환을 완벽하게 하면서 시퍼런 백광과 함께 진소청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저 자의 무공은 가히 강호에서 초고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윽고 삿갓 괴인이 힘이 부치는지 입에서 피를 주륵 흘렸다. 그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현재의 진소청에게는 많이 딸리는 듯 했다. 그 자가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핫하, 아비의 복수를 하러 왔나? 정말 의미없는 행동이다 진소청!"
뭐야 저놈?!
진소청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지켜보던 나는 난데없는 삿갓괴인의 말에 놀랐지만 진소청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살육기계처럼 무감정하게 천뢰무극창의 절초를 연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창극의 환영이 나타나면서 무려 열여덟 개의 방위에서 괴인을 공격했고, 괴인은 이를 악물면서 검강과 검막을 운용해서 막아냈다.
꽈과광!
한 줄기 뇌광(雷光)이 스쳐 지나갔다. 진소청은 나조차도 간파하지 못한 순간에 파고들어서 삿갓괴인의 한쪽 팔을 베어버렸고, 괴인의 팔이 튕기듯이 허공을 날았다. 팔이 떨어지기도 전에 진소청은 다시 한 번 창두를 크게 휘두르며 살벌한 일격을 가했고 괴인은 나려타곤의 수법을 발휘하며 추하게 땅바닥을 굴렀다.
"크으윽. 공손검법으로도 버티지 못하다니..."
괴인이 땅바닥을 구르자 진소청의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마무리를 하려는 듯 창을 치켜들었다. 이제 진소청이 한 초식만 더 쓰면 괴인은 죽거나 사지 하나가 더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짐이 명하노니 멈추어라."
"......!!"
진소청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몸은 자기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듯, 그 나직한 한 마디에 더 움직이지 못한 듯 싶었다. 재차 진소청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 때는 삿갓괴인이 위기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상태를 정비하고 있었다.
이상한 언령(言靈)을 발동한 것은 삿갓괴인이 아니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뒤편에서 언령을 발동한 당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흐흐. 정말이지 재밌군. 호사다마라더니."
"헉!!"
나는 숨이 멎을듯이 놀랐다.
목이 잘린 놈이 자기 목을 들고 멀쩡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 놈은 방금 전에 내가 망설임없이 목을 쳐서 날려버린 놈이 틀림없었다. 목 잘린 몸뚱이가 목을 들고 있었고, 그 목이 입을 조잘대는 형상이었다.
"흐음... 역시 편한 육체야."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저 광경에 내가 경직되어 있자 그 청년괴인이 자신의 목을 들어서 절단면에 붙였다. 절단면은 순식간에 상처 하나 없이 아물고 말았다. 청년괴인은 싸늘한 눈으로 나와 진소청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주작(朱雀). 이 자들을 생포해라."
그러자 검을 쓰던 초고수 삿갓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역시 저 삿갓괴인은 사신위 주작이고, 태산노옹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를 가로막는 주적인 셈이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진소청은 경직에서 풀려났지만 왠지 멍한 표정으로 더 움직이기 힘들어보였다. 방금 전에 청년괴인의 언령에 당한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했다.
' 저 놈은 대체 뭐지?'
뭐하는 놈이길래 사신위 주작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목이 잘려도 멀쩡히 돌아다니고 괴이한 언령을 사용할 수 있다니 저게 인간인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 자리에서 계속 싸우는 건 불리하다. 나는 아까 진소청의 직감이 옳았다는 걸 느꼈지만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한 이상 여기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이대로 제갈부가 장내에 나타나면 그 때는 도망치지도 못하는 것이다.
"갑시다."
나는 진소청의 옆에 비등을 써서 이동했다. 그리고는 재차 진소청을 데리고 비등으로 빠져나왔다.
파앗
어떻게든 도망을 치는데는 성공했지만 나는 난데없이 패배를 맛보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와 진소청이 싸우면 설령 구대문파라 해도 두렵지 않은데 뜻밖의 괴인때문에 급격하게 패배한 것이다. 나는 진소청의 동공을 살펴보았는데 뭔가 홀린 듯한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고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 술법에 걸린 건가?'
언령 자체가 강력한 술법으로 보였다. 진소청이 자력으로 회복하는 건 무리로 보였다. 나는 의문의 청년괴인이 강력한 언령술사(言靈術師)라는 걸 깨달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된건지 몰라서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넋놓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우리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천우진이 기다리고 있다가 놀라서 말했다.
"어찌된 거지?"
"설명할 시간이 없소. 적이 곧 추격해 올지도 모르니 도망..."
그 때였다.
"낙혼별부!"
치리링!
주문이 들려오면서 우리가 서 있던 이십여 장 일대가 갑자기 수천 개의 부적으로 둘러싸였다. 난데없이 주술의 결계에 갇히자 천우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우리에게서 약간 떨어진 공간에 제갈부가 순간이동의 술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부는 천우진을 보더니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후후... 자칭 환신(幻神)이라는 자가 여기까지 왠일인가? 아무리 환신이라도 이미 낙혼별부에 갇힌 이상 죽음 뿐이다."
"제갈부!"
"오랜만이군."
제갈부는 천우진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천우진도 마찬가지인지 묵묵히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의외인 것은 제갈부의 몸뚱이에 내가 냈던 검상이 이미 아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천우진은 힐끔 진소청을 쳐다본 후 사나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벌써 의식을 끝낸 건가? 권리를 뺏아서?"
제갈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눈치 빠르군. 그래, 이미 봉선의식은 끝났다."
"......!!"
"천년제국의 초석이 세워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머뭇거리자 머릿속에 천우진의 말이 들려왔다.
[ 최악의 상황이오.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최악까진 아니겠지만.]
[ 어떻게 된 거요?]
천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 아마 망량 사형이 놈들에게 붙잡혀서 봉선의식의 권리를 뺏긴 모양이군. 불로불사의 괴물은 이미 탄생해 버렸소.]
[ 크윽...]
[ 제갈부 저놈도 그 떡고물을 얻어먹어서 주술의 역량이 매우 높아졌군. 예전의 저놈이라면 여유롭겠지만 지금은 모르겠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전개가 나타난 것이다.
천우진은 더 이상 설명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제갈부에게 나직이 말했다.
"망량 사형은 어딨지? 우리는 망량 사형을 찾으러 온 것이니, 그를 돌려주면 얌전히 물러나겠다."
그러자 제갈부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현이는 원래부터 본가(本家)의 인물이다.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웃기는군. 보나마나 세뇌시켜서 인형으로 만들었겠지. 그러고도 가족인가?"
"흥... 네놈들도 따라가게 될 것이다."
키기기깅
사방을 둘러싼 수천 수만장의 부적이 백광을 발했다. 제갈부가 본격적으로 낙혼별부를 발동해서 우리를 죽여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환신 천우진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서 환무를 소환했지만 사방에서 덮쳐오는 부적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나는 이토록 절망스러운 상황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망량은 이미 적의 인질이 되어버리고 진소청은 언령에 당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제갈부에게 죽을 위기라니!
' ... 아냐. 아직 진짜 최악은 아냐!'
나는 절망 속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죽는 건 쉽다.
지금도 그저 손만 놓고 있으면 아마 죽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다!
파앗
나는 비등으로 천우진 곁으로 이동했고 찰나의 순간에 천우진과 진소청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했다. 새하얀 빛이 연속으로 점멸하는 기분이 들었고, 정신이 들자 우리는 어두껌껌한 큰 건물 한가운데에 있었다.
천우진은 나와 함께 비등으로 이동하자 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긴 어디요?"
"... 수천 수만리는 떨어진 곳이오. 여기까지 놈이 쫓아올 수 있겠소?"
이 곳은 아스타나의 선지자가 있는 곳이다.
직감적으로 도망친다면 진랑곡이 아니라 여기가 제일 좋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신 천우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반 각 내로 쫓아오겠군. 놈의 추적술법은 천하제일이니."
"나도 그럴거라 생각했소."
생각대로다. 제갈부의 끈질긴 추적은 이미 나도 몇 번이나 겪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우선 반쯤 혼절해 있는 진소청의 상태를 살폈다.
"진소청은 어떻게 된 거요?"
내 질문에 천우진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언령에 당했소. 언령술사가 죽기 전에는 회복되지 않을 거요."
"언령인 건 알겠는데 원래 언령이 이렇게 강력한 거요?"
내가 알기로 언령이란 것은 그렇게 강력한 술법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주변사물과 암시를 섞어서 세뇌용도로 쓰는 정도인 것이다. 전문적인 언령술사가 있다고 해도 그 위력이 대단치는 않다고 들었기에 지금 진소청의 상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소청쯤 되는 초절정고수를 한번에 무력화 시킬 정도의 언령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마 봉선의식에서 [옛 지배자]와 거래해서 받은 태초의 언령이겠지. 그 자가 사용한 건 사황 창힐의 권능일테고."
그 자라고 하는 건 아마도 언령을 걸었던 청년괴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설마 그 청년괴인은..."
"당신 예상이 아마 맞을 거요."
"그렇다면..."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예상을 천천히 입 밖으로 꺼냈다. 제반사항을 종합하고 유추해보면 결론은 하나 뿐이다.
"그 놈이... 황제(皇帝)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