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289화 (289/1,615)

0289 ----------------------------------------------

천계(天界)

선두에 선 이광이 통행증을 관문 병사에게 보여주고, 이윽고 백여 명을 다스리는 군관이 나오고, 그 윗줄에 있는 관문담당자가 나오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칭 태산의 관문을 담당한다는 지휘사가 나왔다. 그는 장군은 아니었지만 이 곳에서는 그에 못지 않은 위세를 부리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나왔다.

"험! 본인은 배진봉이라 하오. 장경익 장군의 서찰과 통행증을 갖고 오셨다고요?"

"그렇소."

이광의 짧은 대답에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우리 일행을 살폈다.

"통행증은 진짜인데..."

그리고는 서찰을 뜯어서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읽던 배진봉이 갑자기 부르르 떨면서 외쳤다.

"처, 처, 청룡!!"

툭 하고 서찰이 땅에 떨어졌다. 배진봉은 손과 발을 덜덜 떨더니 입술에 핏기가 가셨다.

웅성

갑자기 배진봉이 당황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자 근처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대부분은 왜 저러느냐는 표정이었고, 개중 청룡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상급무관들의 얼굴은 배진봉과 마찬가지로 새하얘져 있었다. 이광은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서찰에 적혀있듯이, 우리는 단순히 이 관문을 지나는 게 아니라 태산 인근을 탐색하라는 밀명을 받았소. 그러니 며칠 묵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오."

"무, 물론입니다! 당연하죠!!"

배진봉이 황급히 주변의 군관들에게 명했다.

"이봐! 당장 귀빈실 청소하고 고급숙수 불러와."

"알겠습니다."

배진봉은 명령을 내리고 난 후 왠지 실실거리며 이광에게 말했다.

"이 곳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음...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테지만."

이광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새삼 이광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 대단하긴 하군.'

한때 10만 황궁어림군을 통솔하던 자이자 황궁권력에 가장 가까웠으며 일신의 무위도 황궁제일고수인 사신위에 도달했던 존재! 이광의 전성기에는 대장군급이 아니면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며 각지의 고관대작들도 이광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현재도 이광의 인맥과 영향력이 살아 있기에 겨우 일개 영의 지휘사 따위는 이광에게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현재 산동의 장군직을 지내고 있는 장경익도 이광에게 꼼짝도 못하지 않는가?

이광은 바로 배진봉에게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일행이 짐을 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하게 쉴 준비를 갖춘 후에야, 간소한 자리를 만들어서 배진봉에게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사실 강호의 기인이라는 태산노옹을 찾고 있네."

병사들의 눈이 미치지 않게 되자 이광의 말투는 반하대가 되었다. 그러나 배진봉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아, 태산노옹!"

"알고 있나?"

배진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 최대의 기인이니 모를수가 없습니다."

"애매한 대답이군. 이 요새에 태산노옹이 들른 적이 있나?"

"그것이..."

배진봉은 난처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광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장경익의 명 따위를 받고 조사하는 게 아닐세. 좀 더 높으신 분들이 우리를 지원하고 있지. 어떤 기밀인지 몰라도 함부로 숨겨서 좋을 건 없을 것일세."

"......"

이광이 협박하듯 얼르자 배진봉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태산노옹은 지금 이 관문에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답을 받고 싶습니다."

"말해 봐."

배진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비밀을 누설한 걸 알면 금의위(錦衣衛)가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좀 지켜주십시오."

이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언장담했다.

"물론이지. 금의위의 백호와는 오랜 지기(知己)이니, 이 일로 자네가 피해를 입을 일은 없을 것일세. 내가 아는 군 내의 인맥도 써 주지."

"감사합니다."

그는 속을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그는 지금 관문 내의 천제단에서 숙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지? 천제단이라니?"

"보시다시피 이 관문은 일개 관문치고는 부지가 매우 넓습니다. 보통 관문의 스무 배가 넘지요. 태산을 둘러치듯 설치된 이 관문의 근처에는 고대적부터 존재한다는 천제단이 있고 거기서 태산노옹이 하루종일 기거합니다."

이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때문이지? 태산노옹은 강호의 야인일 뿐인데 왜 관병들이 그런 자를 가만히 두는 건가?"

배진봉이 소리를 낮춰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흐르고 있었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산의 정상관문을 담당하는 자는 대대로 태산노옹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태산노옹이 여기 있다는 사실도 철저히 비밀로 지키게 되어 있고요."

"이상하군."

배진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게."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배진봉은 아마도 철저하게 계산을 한 모양이었다. 이광쯤 되는 자 앞에서 괜히 비밀을 지킨다고 뻗대봤자 자기만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비밀을 다 털어놓고 이광의 보호를 믿는 쪽이 몇 배는 낫다고 여긴 듯 했다. 이광은 그 계산속을 알았는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우리는 곧장 태산 천제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고성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를 모아놓고 당부했다.

"상대는 술법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신력을 늘 돋우고 집중해라! 가능하면 의념절기를 운용해서 버텨라."

"알겠습니다."

타다닷

태산 천제단이 있다고 여겨지는 봉우리까지 왔을 때였다. 난데없이 흐릿한 안개가 끼면서 사방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독고성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환술(幻術)이다! 념(念)을 집중하라!"

그 순간 뇌신류의 고수들은 일제히 의기를 모아서 방출했다. 이 중에 의념을 쓸 줄 모르는 이가 없었으므로 금새 엄청난 기세의 의형강기가 뿜어져 나갔다. 그러자 본디 인간의 이목을 흐리고 감각을 조종하는 환무가 무형의 파장에 떨려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나는 놀라서 독고성에게 말했다.

"이런 대응법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술법의 환무를 거두기 위해서는 수요막야 같은 천고의 기물로 해제하던가 아니면 같은 술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독고성은 마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의념으로 대항한 것이다. 언뜻 당연해 보였지만 경험이 쌓여있지 않으면 저토록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가 없다.

그러자 독고성이 피식 웃었다.

"백련교에도 술법사나 술종은 많다. 이 정도에 놀라서는 뇌신류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지."

"......"

독고성은 술법전의 경험이 풍부하다. 어쩌면 술법사를 여럿 베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방심할 수가 없는 인물인 듯 했다. 그 때 이광이 자신의 창을 늘어뜨리며 독고성에게 말했다.

"어르신. 진법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

"깊게 들어오진 않았고 방금 환술을 튕겨내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상황을 살펴본 이광이 제안했다.

"지금이라면 빠져나갈 수는 있을 거 같은데 어쩌시렵니까?"

이광의 말투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이광은 풍부한 실전경험과 지식 덕에 이 앞에 함정이 있는 걸 알아챘기에, 더 이상 과도하게 전진하는 걸 원치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멈추자고 말해봤자 독고성이 들을 인간이 아니었기에 권유하듯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고성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진법을 파해할 수 있겠느냐?"

이광은 힐끔 안개 너머의 언덕을 보더니 말했다.

"힘듭니다. 풍월을 들은 정도는 있으나 전문적인 진법가나 술사가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진법입니다."

"고작해야 저 언덕까지의 거리가 백여 장에 불과한데도 말이냐?"

"아시다시피 술법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오감을 전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진법은 한 걸음만 잘못 옮겨도 지옥입니다."

"흐음... 어쩔 수 없군."

독고성이 꺼지듯 한숨을 쉬다가 내게 전음을 보냈다.

[ 저기에 태산노옹이 있는 건 틀림없다. 다음에 네 동료를 데리고 다시 와 보자.]

[ 알겠습니다.]

독고성의 짐작대로였다. 이렇게 강력한 술법으로 방어되고 있다면 틀림없이 태산 정상의 천제단에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림인만 모여있는 상황에서 이 강력한 진법을 뚫을 방법이 없으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고성은 아마도 내 동료인 망량이나 천우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망량이라면 깰 수 있겠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러서려고 했다.

그 때였다.

[ 익숙한 얼굴이군. 이광,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나?]

환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정신공격인가 싶어서 흠칫했지만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문의 목소리가 이광을 아는 척 하자 이광에게 시선이 쏠렸고, 이광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성명별호를 밝혀라."

[ 후후...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직접 모습을 보여준다 한들 나라는 걸 믿지 못할 것이다. 비록 십 년을 넘게 함께 일했던 동료라고 해도 말이지...]

"무슨 개소리를..."

코웃음 치던 이광이 문득 뭔가를 깨달았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환무 너머를 노려보며 말했다.

"... 당신이 왜 여깄지?"

[ 알아챈 모양이군. 역시 자넨 우수해.]

이광은 긴장한 듯 했다. 그 답지 않게 창을 꽉 붙들어매는 모습에서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광이 짐작하는 목소리의 정체가 상당히 흉험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당신이 내가 아는 그 자라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당신이야말로 황제폐하의 최측근에서 보좌해야하는 게 아닌가?"

이광의 질문에 안개 속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 나는 충분히 내 할일을 하고 있다. 황궁의 누구보다도 충실히 하고 있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자네가 아닌가, 이광?]

"무슨 말이냐."

[ 자네가 청룡위를 관두고 낙향한 것은 내면의 모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오기에 휩싸여서 인생의 대도(大道)를 걸을 수는 없다. 자네의 모순을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제폐하 뿐이다.]

"......"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 사신위로 복귀해라, 이광. 자네가 돌아온다면 황궁은 언제든 자네에게 백련교를 토벌할 힘을 줄 수 있네.]

"......!!"

나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뇌신류 고수들이 깜짝 놀랐다. 안개 속의 목소리는 마치 뇌신류와 백련교, 그리고 이광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광의 지인이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볼 때 상대방은 왠지 황궁에 숨겨진 마(魔)의 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 대체 누구야?'

이광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받아들일 수 없겠군. 성의만 고맙게 받겠다."

[ 그런가... 그럼 이만 떠나라. 이 곳은 중요한 장소인지라 불청객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

"그러지."

스윽

이광이 등을 돌리자 다른 사람들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태산 정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환무진법을 뚫을 방법이 없을 뿐더러,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안개 너머의 존재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광때문에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관문까지 내려와서 숙소로 들어온 후에야 이광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큰일날 뻔 했습니다. 저 곳은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천하에 두려운 것 없고 패기넘치던 이광이 이런 말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뇌신류 고수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광의 말에 독고성은 턱을 괴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자는 누구냐? 너는 그 자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그 자가 맞다면 극히 위험합니다."

"누구인데 말이냐? 호법사자라도 되나?"

퉁명스러운 독고성의 말에 이광이 쓴웃음을 지었다.

"호법사자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만큼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속터지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라. 수수께끼는 취미가 없다."

이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저 자는 황궁 사신위(四神位)의 일원이자 황궁 최강의 술법사인 주작(朱雀)입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황위(守皇衛)라서 같은 사신위에게도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어둠 속의 강자란 말이냐?"

"네."

"너와 비교하면 누가 강할 것 같으냐?"

청월이 어이없는 듯 중얼거렸다.

"어르신 그런 유치한 질문을..."

"닥쳐라 아둔한 놈. 이걸 모르고서 어떻게 차후의 일을 진행할 수 있단 말이냐?"

청월에게 호통을 친 독고성이 고개를 돌리자 이광이 말했다.

"무공만으로는 제가 그와 싸워볼 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술법을 쓰기 시작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 정도라고?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최절정까지 익힌 존재가 있단 말이냐?"

독고성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무공도 이광급인데다가 술법의 달인이라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극히 희귀한 존재이다. 보통 인간은 하나만 해도 경지에 도달하는 게 힘들어서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은 17회차동안 고생해서 겨우 이광과 겨룰 수 있게 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광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수황위는 주작밖에 없었습니다. 선제(先帝)께서 황권의 강화와 조직의 정비를 위해 사신위를 만드셨을 뿐, 그 자는 대대로 명 황실을 수호하는 어둠의 존재였습니다."

독고성은 침음성을 흘렸다.

"격이 다르다 이건가..."

"......"

이광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한참동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백웅. 잠깐 나와 이야기 좀 하자."

"이야기는 여기서도 할 수 있지 않소?"

"따라와라."

이광은 막무가내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따라가 보라는 눈치였다. 이광이 현재 항렬 때문에 모두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그가 여태껏 쌓아온 사회적 명성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독고성도 나름대로 이광을 존중해주는 눈치였다.

별 수 없이 내가 이광을 따라서 인적없는 곳으로 가자, 이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말했다.

"네 녀석은 주작이 태산노옹이라는 걸 알고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냐?"

역시 그는 태산노옹과 주작이 동일인이라고 짐작하는 듯 했다.

"태산노옹을 찾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청월 호법님과 독고성 사부님이오."

"하지만 네가 천제단을 찾아다니기도 했으며 모종의 꿍꿍이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여기에 온 게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광은 나를 크게 의심하는 모양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과거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얼마 전 사공린과 면담했을 때 그녀에게서 들었던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 사부님께서는 평소에도 천하를 돌아다니고 계시지만 유독 태산에 기거하실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천하 무림인들도 사부님을 태산노옹이라고 부르시죠. 하지만 실제로는 오악(五岳)을 순회하듯이 돌아다니시는 일이 많으세요.]

[ 사부님께서 저와 헤어지실 때 주신 은패예요.]

"......"

나는 말없이 사공린에게서 받은 은패를 꺼내들어서 보았다. 은패에는 주작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태산노옹이 황궁 사신위 주작인 건 확실하다.

나는 이광에게 주작은패를 던져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정보를 캐던 중 태산노옹의 제자인 사공린에게서 받은 은패요. 정보가 하나로 이어지는군."

이광은 은패를 받아들고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물었다. 네 녀석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몰랐소. 알았다면 아까 주작에게 그 주작은패를 보여줬을 거고, 지금 당신에게 주작은패를 넘겨주지도 않겠지."

"......"

"지금 우리끼리 의심하고 싸울 때가 아니오. 태산노옹... 주작의 정체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까강

이광은 주작은패를 발 아래에 내던져 버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뇌신류의 재흥과 발전이다. 태산노옹이 주작이라면 지금 그와 부딪힌다는 건 황궁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우리 뇌신류가 어째서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런 위험을 무릅써야할 이유가 전혀 없어."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아까 주작의 사신위 복귀권유를 거절했소?"

"지금 내게는 뇌신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 당신도 주작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되었고, 당황하게 되어 그를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오. 당신이란 사람은 누군가를 이용하는건 좋아하지만 이용당하는걸 매우 싫어하니까."

"......"

"자신의 의도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황궁에 복귀할걸."

"그렇지 않다."

이광이 내 말을 부정하자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냉정하게 생각하시오. 어째서 황궁에 있어야 할 주작이 여기 태산에 와 있는지, 그리고 그게 황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까 그걸 내가 왜 알아내야 하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있으니까."

"뭐?"

"진충보국(盡忠報國)이 바로 당신 삶의 기치가 아니었소?"

"......"

나는 이광의 얼굴에 존재하던 가면이 갑자기 부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표정조절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이광이 흐트러진 것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주작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아내지 못하고서 어찌 황제폐하에게 충성을 바친다 할 수 있겠소? 그를 비롯해서 황궁의 일이 황실의 안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하지 않소? 그게 바로 국가에 충성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게 아니냔 말이오."

"주작은 황제폐하를 수호하는 수황위다. 내가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그 순간 나는 어떤 약점을 찔러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십 년간 이광을 관찰해 온 결과 느끼게 된 촉이었다.

"진천휘 장군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잊었단 말이오?"

"......!!"

"지금의 당신이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하오? 그러고도 충성스러운 신하요?"

우드득

그 순간 이광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급격스러운 감정변화를 참아누르고자 주먹을 꽉 쥐었는데 너무 악력이 강해서 핏줄기가 땅에 뚝뚝 떨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광의 심리적인 약점과 단어를 지속적으로 찌르니 그로서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당신 말대로 이 일이 뇌신류와 관련없다 생각하면 모두를 데리고 빠져도 좋소. 나는 앞으로 뇌신류에 일절 상관하지 않을 셈이오. 나 혼자서라도 태산노옹을 뚫을 테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란 인간에게 실망하겠군. 신념도 가지지 못한 껍데기였을 줄이야."

이광은 침묵했다. 나는 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려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이광이 외쳤다.

"멈춰!"

내가 두 걸음을 걷다 말고 멈춰서자 이광이 마치 흉신악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기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말했다.

"네 말대로 하겠다. 하지만 만일에 우리를 이용하려는 게 느껴지면 언제든 네놈을 베어버리겠다."

"마음대로 하시지."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광은 나를 죽일듯이 미워할 지언정 끝까지 황궁에 대항하는 싸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광에게도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광은 황실에 대한 극렬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친우인 진천휘 장군이 황권다툼에서 황제에게 살해당하는 걸 보자 자기모순에 시달린 것이다. 국가가 먼저인지 황제가 먼저인지 혼돈스러워졌으리라.

그리고 백련교와의 숙명으로 고개를 돌리며 강호로 도피해버린 결과가 바로 청룡무관주 이광이었다. 시작부터 모순되어 있던 인간의 약점을 찌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나와 이광이 장내로 돌아오자 독고성이 말했다.

"이야기는 다 됐나?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자."

"네."

"나와 청월은 적월과 녹월의 세력을 찾아서 움직일 예정이다. 얼추 짐작가는 곳은 있으니 일 년 내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놈들의 세력을 규합한 후에는 백련교의 눈을 피해서 뇌신류의 전승자를 모은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독고성이 훗하고 웃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내가 아는 숙부의 성격상 과실이 익기 전에 따려고 할 성격이 아니지. 그가 먼저 손을 뻗을 때까지는 안심하고 세력을 키워도 될 것이다."

"풍신류는 어떻게 합니까?"

"그 자들은 네가 알아서 견제해 줘야지."

"네?"

이윽고 나는 독고성의 그윽한 눈빛을 마주치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백련교주의 제자로서 풍신류를 견제하라는 말이군!'

그리고 기회를 봐서 뇌신류가 충분히 크고 난 후에는 칠살마을의 암살권을 사용해서 백련교주를 암살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혼란중의 백련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뇌신류가 충분히 성장하고 나면, 독고성의 의도대로 뇌신류가 떳떳이 독립해지는 게 가능할 것이리라.

상당한 지략인지라 나는 독고성에게 다시금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자가 호법사자가 되지 못했을까?

마지막으로 독고성이 진소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진소청 너는 오늘부터 백웅의 가르침을 받아라."

"네?"

"네?!"

나와 진소청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독고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백웅은 이미 뇌신류 무예의 명인(名人)이다. 백웅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진소청 너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음... 알겠습니다."

진소청은 그러냐는 듯 납득했지만 나는 위장에 돌덩이가 들어찬 느낌이 들었다.

' 이런...'

진소청을 내가 가르치게 되면 큰일날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장삼봉의 무학이나 깨달음을 진소청이 배울 경우, 그가 얼마나 거대한 존재가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진소청을 가르치는 걸 거절하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므로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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