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3 ----------------------------------------------
천계(天界)
나는 그의 말이 생뚱맞다고 생각했지만 있을수도 있는 선택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 선택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럴만한 제반사항이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백련교주의 대외적 정체성이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주적이 황궁이었고, 그를 죽인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백련교주를 죽여봤자 황궁 세력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고성이 뇌신류라는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교주를 죽이는데 그 능력을 사용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황궁을 꺾을 힘을 보유하게 된다면 나머지 큰 장애물은 백련교주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작전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백련교주의 제자가 되어서 그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습니다."
우선 백련교주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내 말에 독고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아무튼 앞으로 큰 일을 도모하고자 하면 언제든 백련교주를 없앨 준비를 해야 한다. 무공과 지략으로 볼때 최대의 장애물이 될 테니까."
"백련교주가 죽게 되면 백련교는 어떻게 됩니까? 호법사자 중 하나가 교를 이어받습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다. 교주의 자격이 있는 자들이 경선을 하게 되겠지."
중얼거린 독고성이 말했다.
"내가 전수해 준 뇌신검무는 그 때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네."
교주를 꼭 지금 당장 죽여야 하는 건 아니다. 교주의 비밀을 충분히 알아낸 후 제거하게 되면 그 때는 백련교주의 자격이 있는 자들끼리 경합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백련교의 교주 경합에 나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계획이었다. 내심 독고성의 계획이 괜찮다고 생각할 때 독고성이 말했다.
"그리고 이광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 녀석은 원래부터 그렇게 모난 놈은 아니었다."
흠칫!
내 마음의 역린을 스쳐지나가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나와 이광 사이의 일입니다 스승님."
독고성이 한숨을 쉬었다.
"이광이 백련교 시절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십대 소년 시절에 뇌신류에서 촉망받던 절세기재였다. 종사의 제자로서 모두에게 기대받는 자였으며 성격도 활달했지. 단지 세월의 풍파가 그를 모질고 사납게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
독고성의 말에는 한탄 비슷한 게 섞여 있었다. 역시 그는 뇌신류가 숙청당할 때 백련교에 부재중이었다는 게 죄책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뇌신류에 남아있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와 일대일로 결판을 지을 생각입니다."
흑요석으로 기억을 보여준 후 일대일로 싸워서 패죽일 생각이 있었다. 백 년의 한을 반드시 갚아줘야한다 생각했다.
"내가 보기엔 너도 지금까지 이광에게 그리 솔직하지 않았던 듯 싶구나."
"곧이 곧대로 나가봤자인 상대였으니까요."
"당한 게 많은 모양이군."
가시돋친 내 말투를 들은 독고성은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하거라. 그러나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꼭 줬으면 한다."
독고성이 이광을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그 말에 나도 뭔가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광에게 언제고 처절한 복수를 해줄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독고성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정도는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이광이 괜히 비비꼬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화가 정리되자 독고성이 말했다.
"그럼 한 달 후까지 열심히 수련하자."
"네."
더 이상의 잡설은 필요없었다. 나는 그 날부터 뇌신검무를 죽어라 수련했고 독고성이나 청월도 무당파의 절학을 익히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양이었다. 특히 청월은 그 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죽어라 익혔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은 금방 흘렀고 우리는 태산노옹을 찾는 행보를 시작했다. 큰 삿갓을 우리에게 나눠 준 독고성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찾아다닐 곳이 있다. 너는 화신류에서 태산노옹의 정보를 알아낸 후 태산으로 찾아와라."
"언제 만나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한 달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하지요."
독고성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말해두지만 한백령은 결코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여인의 몸으로 화신류의 정점에 오른 여걸이니 네게 호의적으로 대한다고 마음을 풀지 마라. 이청운조차도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파아앗
나는 독고성과 청월을 놔두고 비등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생각이 있는 듯 하니 어설프게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나도 혼자서 한 달 동안 태산노옹의 정보를 알아낸 후 그들과 합류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비등으로 향한 곳은 화신류가 아니라 검마가 있는 무영문이었다. 나는 검마와 만나서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검마는 흥미로운 듯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군. 독고성은 확실히 강력한 아군이 될 걸세."
"제 마음대로 결정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어차피 전생자는 자네이고 일의 주도권은 자네에게 있지. 자네가 옳다 판단한 걸 밀고 나가게."
훗하고 웃은 검마가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건 그렇고 태산노옹이라... 그 자는 확실히 예전부터 수상쩍었지. 걸선이든 신승 명호대사든 강호에 어느 정도는 노출되어 있는데 너무 신비스러운 자였어. 그 어떤 정보단체도 태산노옹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
"그 자는 황궁의 끄나풀일까요?"
"글쎄, 아무리 황궁이 거대한 세력이라도 태산노옹쯤 되는 자를 졸개처럼 부려먹지는 못할 걸세."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는 협력관계로 보는게 온당할 듯 싶군. 태산노옹도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황궁과 어울려준다는 느낌이 아닐까?"
"으음..."
"여하튼 태산노옹의 정체를 캐는 거라면 나도 거들어 주겠네. 마침 마도팔문의 패권을 잡으려던 참이었으니 겸사겸사 알아보지."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검마에게 말했다.
"혹시 수신류의 독고준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수신류의 호법사자 독고준이 찾아와서 마도팔문의 맹주인 검마를 굴복시킨 일이 있었다. 이번 전생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 검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럴줄 알고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오지 않더군."
"오지 않았다구요?"
"자네가 전생 후에 했던 행동이 독고준에게 뭔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마도팔문의 회합에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역시 그가 찾아오는 기색이 없었네."
"......"
내가 이번 전생에서 백련교에 영향을 미칠만한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다. 한백령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며 그녀의 말대로 쌍문사가의 주인들을 뒤엎은 것이다. 하지만 쌍문사가의 주인을 뒤엎은 게 독고준에게 어떤 심기의 변화를 주었단 말인가?
"안되면 역순으로 알아보는 방법도 있겠지. 아무쪼록 건승을 빌겠네."
"무운을."
파앗!
나는 검마에게 인사를 한 후 비등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진랑곡이었다. 혹시나 망량이 수련을 끝내고 찾아왔을까봐 온 것이다. 하지만 석 달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퉁명스러운 천우진을 마주해야만 했다.
"사형은 없소."
"아직 안 왔단 말인가."
"나한테 묻지 마시오."
역시 다시 생각해도 볼때마다 띠꺼운 놈이다. 나는 속으로 약간 신경질이 났지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말했다.
"망량에게는 태산노옹이 황궁과 관련되어서 찾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알았소."
그 때였다.
"빌어먹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못살게 군단 말이냐?"
소나무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살펴보자, 제갈사가 소나무 사이의 오두막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우진의 술법으로 그를 억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우진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말했다.
"이차원에 가두지 않은것만으로도 많이 봐줬다 생각하시오."
"크크... 빌어먹을."
나는 투덜거리는 제갈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태산노옹에 대해 알고있는 게 있소?"
"어? 넌 또 뭐하는 놈이냐?"
"나는 백웅이라 하고, 망량의 친구요."
제갈사는 좁은 오두막에 턱을 괴고 누워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이내 말했다.
"너 바보지? 현이 놈 때문에 내가 이 꼬라지가 되어있는데 너한테 뭘 말해주겠냐?"
"......"
"하여간 현이 녀석, 친구를 사귈려면 좀 똑똑한 놈을 사귈 것이지."
못마땅해 하던 제갈사가 말했다.
"이봐 너. 태산노옹에 대해서 알려줄 테니까 여기서 좀 꺼내다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자 뒤쪽에서 보고 있던 천우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헛수고 마시오. 그는 당신을 도우고 싶어도 도울 수 없으니."
천우진의 말에 제갈사가 소곤소곤 말했다.
"왠지 천우진 새끼, 주는 것 없이 미운 놈 같지 않냐?"
"전적으로 동감하오."
우리는 잠시 소곤대며 천우진의 뒷담을 깠다.
"하이고 됐다... 난 낮잠이나 잘테니 가 봐라."
제갈사는 이윽고 벌렁 드러누워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천우진의 결계에서 빠져나가는 게 무리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제갈사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신선했지만, 달리 말하자면 제갈사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우진의 봉인술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 꺼내주려면 꺼내줄 수도 있겠지만.'
수요를 꺼내서 휘두르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요가 해방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게 될지가 미지수였으며, 설령 천우진의 결계를 깬다고 하더라도 예측불가능한 변수인 제갈사를 풀어주는 게 도움이 될지가 의문이다.
천우진 쪽으로 돌아오자 그가 곱지 못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런 놈과 어울리지 마시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주 사악한 술법사요."
"알고 있소."
"그리고 남의 뒷담 까는것도 작작 하시지."
왠지 성이 난 듯한 천우진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은 해 보지."
파앗!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사공표국이었다. 예전에 천년설삼을 얻기 위해서 황산 근처의 정보를 캐던 중에 사공표국의 표사가 되어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공표국의 현관으로 들어가서 표위를 찾았다.
이윽고 나는 백의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표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맑은 눈동자가 그녀가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같은 고아한 아름다움은 결코 범상한 게 아니었고, 살면서 무수한 미녀를 보아온 나도 그녀가 단연 최상급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눈을 껌벅거리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응? 꼬마야, 무슨 일이니?"
그녀는 티없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내가 천인봉혈법과 의념으로 내공과 기세를 억제해서 그녀는 나를 평범한 어린아이로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태산노옹 어르신에 대해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사공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본 후 말했다.
"너는 누구지?"
"저는 백웅이라고 합니다. 용건은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돌아가. 내가 말할 건 아무것도 없어."
사공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긴 대뜸 의문의 소년이 찾아와서 자기 사부의 거처를 묻는데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까진 예상대로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또다시 전음을 보냈다.
[ 황산파의 압박이 거셀 테지요. 저는 그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공환(司公煥) 표국주를 지금부터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 이후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그녀는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하는게 뭔지는 몰라도 사공세가는 남에게 쉽사리 놀아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냐."
"당신들을 농락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서로 이득이 될 방향으로 진행하고싶을 뿐."
그 때였다.
"린아!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우르르 안쪽에서 몰려나왔다. 그들은 사공패를 포함해서 사공세가의 고수들이었으며, 그 중 사공패는 사공린의 친오빠였다. 사공패가 나를 보더니 격분해서 외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내 여동생에게 수작을 걸어?"
이상한 오해를 한 듯한 사공패가 쾌검을 내질러서 나를 공격해 왔다. 나는 웃기지도 않아서 사공패를 힐끔 쳐다본 후, 어기지력(御氣之力)을 이용해서 손도 대지 않고 그의 공격을 빗나가게 했다.
"야아압!!"
사공패는 자기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는지 헛칼질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사공패만 마른하늘에 칼춤을 추고 있는게 약 오십 초동안 계속되자, 그때서야 사공패는 이상한 걸 깨달았는지 멈추었다.
그 광경을 보던 사공린이 한숨을 쉬었다.
"엄청난 기술이네요. 백웅 님은 반로환동한 고수이신가요?"
"괜히 피를 보고싶지 않습니다. 서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좋을텐데요."
"......"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를 따라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