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280화 (28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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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신의 사도!

나는 이미 전생을 하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인지라 꽤 무덤덤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닌 듯 했다. 특히 독고성의 충격은 상당히 심한지 표정이 대놓고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독고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라니...? 그들의 힘이 술법같은 거란 말이오?"

"신의 힘을 빌리는 단말(端末)이 그들에게 존재할 것이다. 내가 연자에게 강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한 여동빈이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연자여. 그대와 나 사이에는 인연이라는 이름의 인과율이 존재한다. 어찌하여 성립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인과율이 설정되어 있는 이상 그대의 소환에 응하게 되는 것이다."

"......"

인과율.

그것은 [옛 지배자]조차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

여동빈을 부르는 단말의 주술은 인과율에 의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 회귀전생을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구체적인 무언가가 내 몸에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신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한 줄기의 인연이 전생 직후부터 나와 여동빈을 이어주는 것이리라.

' 인과율이란 건 굉장하군.'

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독고성이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교주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혼란에 빠진 독고성을 놔두고 여동빈에게 급한 볼일부터 보기로 했다.

"검선. 나는 검류의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익힌 무공이 너무 많아서 통합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으음. 그런 듯 하다."

검선 여동빈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좀 이른 것 같지만 천둔검법의 3단계로 들어가야겠구나."

"3단계요? 그게 마지막입니까?"

내 질문에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자의 경지와 의념이해도가 원숙해서 더 이상 신(信)과 해(解)의 요결을 습득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니, 마지막 둔(遁)을 전해주마."

"총 5단계가 아니었습니까?"

"입멸(入滅), 공(空), 천둔이 이어지게 되니 상관 없다. 그 정도는 되어야 혼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였다. 멍하니 뭔가 중얼거리던 독고성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크게 외쳤다.

"잠깐!"

"왜 그러는가."

"내게도 천둔검법을 가르쳐 주시오."

모두의 이목이 독고성에게 쏠렸다. 독고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여동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절세검법을 익혀서 무극(武極)을 보고자 하오."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하긴 독고성은 뇌신류에서도 제일가는 고수로서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자기 눈으로 대라신선의 무예를 견식한 지금은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배우려 하는게 당연했다.

그러나 여동빈은 고개를 선선히 저으며 말했다.

"그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현계에서 나의 천둔검법을 배울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연자 뿐이다."

"지금 나와 당신은 마주해서 한차례 겨뤘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소. 이게 무인의 인연이 아니란 말이오?"

여동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니다. 너와 내가 마주친 건 연자가 10년의 생명을 바쳤기 때문이지. 그 외의 어떠한 인연도 존재치 않는다."

"......!!"

"천둔검법은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 너 자신의 무예를 갈고닦는다면 언젠가는 신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 말에는 아무런 사심이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늘 열혈한으로 보이는 여동빈이 이토록 차갑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여동빈이 철저하게 천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신적인 존재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독고성이 입을 다물자 여동빈이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둔(遁)을 익히고자 한다면 연(燃)이 필요하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있는가?"

"무슨 말입니까?"

"그대는 무(武)의 혼연 속에서 녹아내릴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

그 순간, 여동빈과 정신이 감응하면서 천둔검법의 마지막 단계인 둔(遁)이 어떤 경지인지 어렴풋이 전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게 어떤 도박인지 알아챘다.

' 검선 여동빈에게 완전히 심령을 맡긴 채 그의 검술이 지닌 총화(總華)를 흡수하는 것...!!'

홀황(惚恍)에 이르는 최후의 강신술!

지금까지는 여동빈에게 강림을 시키면서도 한켠에서는 내 의식이 지속적으로 살아서 현실을 관조하는 식의 강신이었다. 그러나 둔의 단계에서는 여동빈이 완전히 내 의식을 잠식하게 되고, 검선 여동빈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검술능력이 내 무의식에 완전히 녹아들게 된다. 이건 보통 정신력으로 견딜 수 있는 과정이 아닌 것이다.

나는 궁금해져서 여동빈에게 물었다.

"천둔검법은 왜 5단계로 나뉘어져 있습니까?"

"구세(求世)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동빈은 어딘지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연자에게 천둔검법을 전하여 선검(仙劍)의 경지에 도달하게 해야만 하는 경우는, 천하가 도탄에 빠져있는 경우겠지. 자기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도 힘이 필요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연자여."

여동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여동빈과 단말으로 연결된 자는 원래는 강한 인연으로 연결되어서 천하의 미래를 걱정하는 의협(義俠)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여동빈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전수하는데, 대라신선이 지닌 능력과 기억은 보통이 아니었다.

' 지선 망량의 기억만 해도 흡수하기 버거우니...'

보통 인간의 정신력이라면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여동빈 또한 그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일부러 둔의 단계를 내게 추천하지 않았던 거라고 짐작되었다.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거대한 힘이 필요한 인간이 그리 흔할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주십시오."

어차피 죽어도 전생하는 몸이다. 게다가 내 혼자의 힘으로는 언제 이 혼란을 극복할지 기약도 없다. 반복되는 전생의 삶에서 끊임없이 정신력이 마모되는 소모도를 견디느니, 차라리 이번에 도박을 거는 게 백 배 나은 것이다.

여동빈이 내 심장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경고하듯 말했다.

"그대가 겪는 혼란은 더욱 특별한 듯 하여, 나머지 팔선(八仙)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대의 정신이 불타버릴 확률은 더욱 높아지겠지. 동의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좋다."

스아앗...

여동빈의 몸이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망량의 시해술을 받아들일 때와 같은 엄청난 정보가 쏟아지는 걸 느꼈다. 망량의 고급화되고 전문화된 술법지식과는 다르게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정리된 정보가 나열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윽고 고급무예의 원리로 넘어가자, 현묘한 깨달음이 몸을 감쌌다.

"......!!"

주륵

머리에 큰 두통이 느껴지면서 쌍코피가 터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도 무인 나부랭이라서 어지간한 고통에는 내성이 있는데도 지금의 두통은 상당히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 머리속에서 수십 마리의 나방이 날아다니는 듯 했고 관자놀이를 가늘고 얇은 칼로 후비는 듯한 격통이었다.

옆에 있던 노부츠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은가?"

"아... 으으윽..."

나는 동시에 내 영혼의 무의식 기저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은 바로 여동빈의 진실된 영혼이었으며, 내 동의에 따라서 한바탕 덧씌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대로라면 일 각 내에 여동빈이 완전히 강림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의식을 잃기 전, 여동빈이 마지막에 한 말이 뇌리에 박혔다.

[ 마침 이 곳은 마물투성이군. 팔선(八仙)의 힘을 보여주겠다.]

의식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것은 얕은 수심에서 수면을 바라보는 정도의 깊이로서, 나는 아직도 의식을 잃지 않고 외부를 인식하고 있었다.

여동빈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몸을 차지한 상태로 검을 잡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파바밧!

여동빈과 내 무예경험이 공유되는지 그는 단숨에 멸혼보를 응용해서 날듯이 수해의 전방으로 돌진했다. 여동빈이 쉴새없이 검기를 날릴 때마다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엄청난 기세로 박살났고, 그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형상이었다.

이윽고 여동빈이 생해의 수문장인 거대 지렁이 앞에 도달했다. 여동빈은 차가운 눈으로 수십 장은 될법한 지렁이를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일내지천검(一乃至天劍)

쓔콱

[ 크아아악!!]

단 일 격이었다. 의념으로 만들어진 거검은 그대로 생해의 수문장을 분쇄해 버렸고, 여동빈은 마무리를 하려는지 의령수와 의령장을 몇 번 내뿜었다. 그러자 거대지렁이는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수문장을 해치운 여동빈은 어두운 동굴로 진입했다. 이 동굴은 일방통행이라서 결국 고대의 유적에 이르게끔 되어 있었다. 제단이 존재하는 큰 공동에 도달한 여동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는지, 잠시 후 환영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새하얀 음양사 복장을 하고 있는 그 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수해의 관리자 일족인 아베노 요시히라(安倍吉平)라고 합니다. 그대는 신선(神仙)이십니까?"

요시히라는 단숨에 내 몸을 지배하는게 여동빈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자 여동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앞으로 나가야겠다."

"허용할 수 없습니다. 8인을 모아 와 주십시오."

"이유가 있는건가?"

"이 앞은 마신(魔神)의 영지입니다. 그대가 패배하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여동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걸로 족하다."

쉬쉬쉬쉭!!

다음 순간, 내 몸에는 팔선(八仙)의 영혼이 동시에 깃들었다. 그 사실을 아베노 요시히라도 깨달았는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종리권(鍾離權)...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이철괴(李鐵拐)... 여동빈(呂洞賓)...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 조국구(曹國舅)!! 중화팔선이 동시에 강림한다고?!"

그는 팔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팔선은 술법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 신선들이었다.

"영시(靈示)의 능력을 갖고 있을테니 보이겠지. 길을 열어라."

"알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패배하면 영혼이 마신의 소유가 된단 말입니다!"

요시히라는 한참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시길."

그는 수인(手印)을 맺었다. 팔괘의 힘을 이용해서 뭔가 여동빈에게 축복을 주는 모양이었다.

쿠구궁

잠시 후 허공에 거대한 문이 생겨났고 요시히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동빈은 대뜸 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사해(死海)는 엄청나게 드넓은 수림(樹林)이었다. 그리고 생해에서보다 몇 배는 농밀한 마기(魔氣)가 짙푸른 안개와 함께 들어차 있었다. 여동빈은 사해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검을 뽑았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풍결(風決)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나며 대뜸 사해의 수림으로 날아들었다. 인간의 것으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검풍이 전방을 쓸며 지나가자 마물들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장중한 소리와 함께 땅에서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쿠오오오

그것은 예전에 나를 몸통박치기로 죽였던 거대하고 흐물흐물한 부정형의 마물이었다. 나는 저 놈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눈 앞에서 땅을 뚫고 올라온 저 마물의 크기는 예전에 봤던 놈들보다 열 배는 크다는 것이었다.

과장 하나도 없이 산만한 놈이었다. 게다가 저 마물 뿐만이 아니라 다른 놈들도 하나하나가 생해에서 봤던 놈들보다 더욱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며 각지에서 솟아올랐다. 마치 천지가 멸하는 듯한 대재앙급이었다.

고오오오...

그래서인지 여동빈도 각오를 굳힌 듯 자신의 검에 심혼을 실으며 말했다.

"나의 동지들이여, 내게 힘을 빌려주게!"

그러자 어디에선자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 여동빈이여. 나 한상자(韓湘子)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마물의 독과 산성은 그대에게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연속해서 팔선들이 축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여동빈이여. 나 남채화(藍采和)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저주는 그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 여동빈이여. 나 종리권(鍾離權)이 축복을 내리겠나니. 그대는 신성(神聖)을 깨부술 파괴력을 얻을 것이다.]

[ 여동빈이여. 나 장과로(張果老)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그대의 분신능력은 무제한이 될 것이다.]

[ 여동빈이여. 나 이철괴(李鐵拐)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그대의 공격능력이 더 올라갈 것이다.]

[ 여동빈이여. 나 하선고(何仙姑)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하위 마신의 신력이라 해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여동빈이여. 나 조국구(曹國舅)가 축복을 내리겠나니. 그대는 월령지기(月靈之氣)를 사용할 수 있다.]

파아앗...

나머지 칠선(七仙)이 내린 축복이 한 몸에 쏟아졌다. 그 축복을 모두 받아들인 여동빈의 몸은 마치 태양을 연상시키게 하는 성광(聖光)을 뿜어내었고, 안그래도 강력한 기세가 몇 배는 강력해졌다.

사해의 마물들은 여동빈의 힘을 느낀 듯 주춤하는 기세였다.

여동빈이 기합을 내질렀다.

"흐아아압!!"

천공에서 수백 장이나 되는 크기의 거검(巨劍)이 산맥을 자를 듯이 떨어져 내렸다. 여동빈은 동시에 수십 수백 개의 분신체를 만들어내 하나하나에서 가공할만한 투기(鬪氣)를 뿜어내었다. 나는 원래라면 이 정도 위용을 보인다면 금새 내가 지쳐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의 여동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격렬하게 대마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가 마치 별빛처럼 대지를 질주했다. 여동빈은 아까 생해의 마물들보다 몇 배는 강력한 놈들이 우글대는 곳을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그의 거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마물들이 토막나서 썰려나갔다. 마물들이 더러는 저주나 독, 산성, 마력 따위를 내뿜었으나 여동빈은 팔선의 축복으로 모조리 무시하는 듯 했다.

사해의 거대마물이 20개체도 넘게 토벌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정도 없애고 나자 갑자기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안개처럼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 제법... 이군... 팔선이여...]

여동빈은 그 존재가 지금까지의 마물과는 격이 다른 사해의 수문장인 걸 알아챈 듯 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신(邪神)이여! 나는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어찌 그리도 쓸데없는가...?]

안개로 일렁이는 그 존재의 말이 이어졌다. 검고 거대한 촉수가 지평선에서 아련하게 일렁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 이 세계의 종말은 예정된 것... 성좌가 제자리를 찾고... 잠들었던 옛 존재가 깨어나는 그날... 르 뤼에가 떠오르며 세계가 혼돈에 잠식된다... 너희는 아무런 의미없는 싸움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하는구나...]

여동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의 싸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여동빈과 팔선들의 강한 의지가 내게 느껴졌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서 용기를 끌어올려서 사신의 힘에 대항하고 있었다. 사신의 힘은 엄청나게 강해서 원래 팔선 하나하나의 힘으로는 대항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팔선이 전력을 다하게 되자 그럭저럭 싸워볼만한 경지까지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마신은 최소한 신의 사도인 달기에 버금가는 강력한 존재로 보였다. 그 존재는 왠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 간만에 재밌는 손님이군... 멸해(滅海)에서 기다리겠다...]

후웅

마신의 기척이 사라지며 지평선 너머에 차원문이 열렸다. 아무래도 마신이 팔선의 힘을 인정하고 사해의 문을 열어준 듯 했다. 여동빈은 망설임 없이 사해의 마물들을 격렬하게 토벌하면서 차원문까지 날아갔다.

콰과과광

폭음을 등진 채 여동빈은 다음 수해로 향했다. 그리고 차원문을 통해 입해에 들어서자 나직이 말했다.

"차원이 일그러졌군."

옛 지배자의 마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장소라서일까?

혼돈의 세계!

아닌 게 아니라 제 3해인 입해는 이미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으며 천지에 온통 혼돈만이 들어차 있었고 사물이 제멋대로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혼연이 넘실댄다.

기이한 어둠 속에서 마물이 포효하는 소리가 이따금씩 아련한 잔향을 남겼다. 생해나 사해와는 달리 특별한 마물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일그러진 차원을 돌파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시련으로 보였다.

여동빈은 무저갱의 혼연 속에서 나아갈 길을 찾은 듯, 이내 어검비행술로 혼연의 공간을 돌파했다. 그리고 왠 희미한 빛을 내뿜는 공간으로 들어와서는 안으로 진입했다. 내부는 동굴으로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여동빈이 발견한 것은 거대하고 원초적인 제단(祭壇)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하고 어두운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알아볼 수 없는 괴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과거 수많은 인신공양이 벌어진 듯 여기저기에 뼈와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 거대한 악의가 넘실거리는 그 제단을 물끄러미 보던 여동빈이 말했다.

"거기 있는 자는 이리 나오라."

그러자 제단 뒤편에 숨어있던 자가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여동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는 누구지? 자력으로 입해까지 도달했단 말인가?"

여동빈이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내 그 자는 여동빈의 기세를 읽고는 그가 인외의 존재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팔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상태라서 엄청난 신기가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는 그 자리에 꿇어앉듯 포권을 하며 말했다.

"신적인 존재시군요. 부디 저를 도와 주십시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뇌신류의 호법인 청월이라 합니다."

여동빈은 고요히 대꾸했다.

"멸해에 가는 길을 말하라."

"저도 모릅니다. 그저 이 곳에 숨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뿐... 저 혼연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공간을 비틀어 열던가 숨겨진 문을 알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놈을 없앨 수밖에 없겠군."

여동빈이 난데없이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혼연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가 마치 바다의 고래처럼 떠 다니는 걸 보더니 어검비행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무언가는 정말로 엄청나게 거대해서 무저갱의 한계까지 신형이 뻗어있는 듯 했다.

초거대 마물!

촉수를 넘실거리는 형체불명의 괴어(怪漁)였다.

"네가 입해의 수문장이구나!"

쿠오오오

여동빈의 공격을 받은 마물은 비명같은 걸 질렀지만, 이내 부숴진 부분이 순식간에 복구되어 버렸다. 여동빈은 자신의 검을 더 강하게 모아쥐며 외쳤다.

"마를 토벌하리라!!"

한계까지 여동빈이 싸우기를 며칠이 지났을까?

여동빈은 결국 그 초거대 마물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물이 무저갱으로 떨어져내리자 멸해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하지만 여동빈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신기를 극한까지 소모한 탓인지 신선인데도 지쳐 보였다.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연자의 내공이 강하지 않았다면 도중에 쇠약사했겠군. 더 이상은 무리겠구나..."

무진장의 내공을 신선의 축복으로 억지로 회복하며 버티는 듯 했다.

여동빈은 확인할 겸 멸해로 한 걸음을 내딛어서 둘러보다가 뇌신류 호법인 청월을 구출해서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청월은 구출되어서 기쁜듯 연신 눈물을 흘렸다.

"으으으... 감사합니다."

여동빈은 비등을 쓸 줄 모르는듯 차분하게 역주행을 하며 다시 마물들과 격렬한 전투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번도 넘게 검기와 검강을 난사하는 건 장관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가만히 관조하듯 지켜보고 있다가 여동빈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

그 때였다. 역주행을 거의 끝마치고 생해 근방까지 온 여동빈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말했다.

"연자여... 설마 둔(遁)의 단계에서 모든 심령을 내게 맡겼는데도 의식이 존재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만.

"이... 이럴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건만."

여동빈이 당혹을 멈추고 생해의 초입까지 되돌아와서 내게 말했다. 왠지 껄끄러운 듯한 말투였다.

"연자여. 어쨌든 마지막 둔의 단계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여동빈이 팔선들의 영령과 함께 떠나갔다.

의식이 서서히 되돌아온다.

"끄아아악!!"

그리고 나는 전신에 무시무시한 근육통과 아픔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여동빈이 몸에 축적시켰던 상처와 피로가 이제야 내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내가 바닥에 누워서 발버둥치고 있을 때 희미한 의식 속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청월, 살아있었군!"

"아니 독고성님..."

"원월천살법은 찾았느냐?"

"그런건 없었습...."

얼떨결에 수해의 난관을 꽤 돌파해 버린 셈이라고 생각하며 의식이 끊겼다.

절반의 성공!

' 제길...'

생해 사해 입해까지 뚫고 멸해의 입구까지 뚫었으며 청월 호법을 구출한 것은 다행이지만, 문제는 내게 의식이 존재했던 탓에 천둔검법 둔의 단계에서 얻은 흡수효과가 절반 이하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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