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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또 다른 의미의 지옥훈련이 시작된 것은 바로 다음 날 부터였다.
' 힘들다...'
나는 만장단애 위에서 마보(馬步) 자세를 한 채 침음성을 흘렸다. 물론 마보자세는 육체적으로 성가시고 힘든 자세이지만, 무수한 육체훈련과 수련을 거친 내게 있어서는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기로 체력을 보조한다고 가정하면 7주야 내내 마보자세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육체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것이었다. 마보자세를 잡은 나를 옆에서 엄한 눈으로 지켜보던 독고성이 말했다.
"극한의 육체수련으로 경계를 깨서 검강지기를 성취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네."
"그 명룡자라는 자의 수련법은 훌륭하지만, 지금 네게 필요한 건 그런 육체적인 수련이 아니다. 지극한 정(靜)의 태세를 유지하며 자신의 의지를 견명하게 만들어서 자기자신을 통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독고성의 말이 이어졌다.
"몸 쓰는 일이 뭐가 힘들겠나? 아무리 육체적으로 고된 훈련을 하더라도 30년 정도면 할만한 수련은 다 하게 되어 있다. 네 경지에서 필요한 것은 절제된 정신력과 통제력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
나는 힘겹게 항의했다.
"'버릇'을 고친다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다.
지금 나는 마보자세를 잡고 정신을 통일시킨 채, 내가 지금껏 보유하고 있던 버릇을 잊어버리는 과정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이게 육체적으로는 그리 힘들지 않은데도 쉴새없이 의념을 소모해야 했기에, 머릿속이 괴사해 버리는 느낌이 쉴새없이 찾아온 것이다.
독고성이 말했다.
"너는 버릇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익숙해져 있는 나쁜 습관...이 아닐까요."
"잘 들어라. 무예에서 버릇이라는 건 그 자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최호(最好)의 형태다. 설령 스승이라고 해도 그 놈에게 어떤 버릇이 생길지는 알 수가 없다. 유파에서 일부러 훈련시키는 게 아닌 이상에는 절대적으로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게 버릇이란 말이다."
격렬하게 말한 독고성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육체수련은 도리어 독(毒)이 된다. 너는 또 다시 그 형태를 취하게 되어있지. 그렇다고 무의식을 통제할 수도 없으니 육체수련을 해서는 안 된다."
"......"
"마보자세는 네가 너무 나태해지지 않도록 마련해놓은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너는 너 자신을 관조하는데만 집중해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
그건 무슨 말인 걸까?
"무예 수련을 금(禁)한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독고성이 말했다.
"육체수련도 하지 말고, 정신적으로도 무(武)를 떠올리지 마라. 자신의 무(無)를 무(武)로 삼는 것이다. 그게 네게 맞는 수련법이다."
무예수련을 금지한다는 것은 언뜻 쉬워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마보자세를 잡은지 겨우 한 시진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꾸만 무술 생각이 났다. 머릿속을 비우려고 해봐도 어느 순간 무의식에서 검법초식이나 무공요결 따위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애를 쓰기를 약 세 시진이었다.
독고성이 난데없이 내게 검기를 날렸다.
쉬칵
독고성이 날린 검기는 아슬아슬하게 내 목줄기 옆을 비껴나갔다. 조금만 안쪽이었다면 내 목이 반쯤 잘려버렸을 것이다. 내가 가늘게 눈을 뜨자 독고성이 호통을 쳤다.
"방금 반응했구나!"
"공격을 하시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반응 자체를 죽이고 잊어버려! 무예를 사용해서 대항한다는 사실 자체를 억눌러라."
"......!!"
"긴장해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도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깨닫자 목이 간질간질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몇 번이고 수련에 실패한다면 실제로 내게 상처를 내거나 부상을 입히고 말겠다는 소리였다.
' 위험해!'
보통의 무술스승에게 수련받는다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 앞의 상대는 뇌신류에서도 장로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전대고수이며, 당연히 뇌신류의 성정을 극도로 강하게 물려받은 인물이다. 그가 진심이 된다면 정말로 수련을 받다가 출혈과다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입술 옆으로 피가 철철 흘러나왔고 정신에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걸 생각하기 시작했다.
' 절대적인 무념(無念)은 없어. 의식적으로 최대한의 긴장상태에 도달한 후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명상의 달인이라면 의식적으로 무념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랜 명상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몸의 본능을 억누를 정도로 자기자신을 죽이기 힘들다. 그러므로 편법을 써서라도 무념상태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촤악
촤아악
바람을 가르며 검풍이 내 살갗을 스쳐지났다. 나는 그 때마다 미미하게 움찔거렸는데 독고성의 이마에 힘줄이 강하게 뻗어나왔다. 독고성은 상당히 음산한 목소리로 내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 그래. 손가락 하나 정도라면..."
위험하다.
진심이 되었다.
나는 급히 눈을 뜨고 말했다.
"잠시만요! 이건 너무 무모한 수련법입니다."
"닥쳐라. 내 수련법에 토를 달 생각이냐?"
나는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제게 잠든 오성(悟性)이 높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전 재능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어? 무슨 소리야?"
독고성은 희한한 소리를 들은 듯 눈을 꿈벅거렸다. 대번에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면 그 또한 당황스러운 듯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그에게 말했다.
"저는 특별한 술수를 써서 단기간에 무술의 경지를 높였지만 실제로는 범재 이하입니다. 무의 깨달음을 재촉하셔도 응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수련법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럴 리가."
독고성이 믿기지 않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네 나이에 그정도 수준에 이른 자를 천하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네가 무술천재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천재라는 말이냐?"
"그러니까 그게 아닙니다. 저는 천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개자식이... 나를 놀리는 거냐?"
키기기깅
독고성의 눈이 파르스름하게 빛나더니 갑자기 검에서 뇌광이 일어났다. 나는 그 뇌광이 단순히 뇌령지기를 일으킨 게 아니라 검뢰(劍雷)라고 불리는 특수한 경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검마는 검뢰를 절대 정면에서 상대하지 말라고 했어.'
검마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장삼봉의 심득을 승화시킨 검마에게 있어서도 검뢰는 감당하기 힘든 공격력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만일 내가 검뢰를 상대한다면 백발백중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 말 것이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절대 놀리는 게 아닙니다. 설명드릴 수 있으니 잠시만 화를 가라앉혀 주십시오."
"좋다.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독고성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를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어버릴 게 뻔했다. 이광보다는 성질이 순해 보였지만 독고성 또한 뇌신류인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저는 근 십여 년 가까이 검마 문주님의 도움을 전폭적으로 받았습니다. 제 주제에는 과분할 정도로요. 그 분께서 자신의 수행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를 가르치는데 집중했으니 본래 정체되어있어야 할 경지가 지속적으로 넓혀진 겁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너는 그 외에도 무수한 무공을 알고 있다."
"그것도 검마 문주께서 녹이고 해석해서 일일이 알려주신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받아먹기만 했을 뿐입니다."
"......"
그러자 독고성이 입을 벌렸다. 그는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고 도리어 불신이 가득한 말투로 내뱉었다.
"그 정도로 열성적으로 너를 키웠단 말인가? 장삼봉의 절세무공을 얻었다면 하루종일 폐관수련을 해도 모자랄 터인데 그만큼이나 시간을 쏟았다고? 그건 무림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나는 독고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변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 분이 개인적인 수련시간을 포기하고 저를 도와주셨기에 분수에 맞지 않은 경지에 오른 겁니다."
"허... 그렇다면... 나는 그런 검마와 동수를 이뤘단 말인가?"
내가 침묵하자 독고성은 한참동안 제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 말은 별로 신용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도로 깨달음 수련이 꺼려진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감사합니다."
"너는 오늘의 말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읊조린 독고성이 말했다.
"오늘은 그만하고 가서 쉬어라. 내일 다시 계획을 짜야겠다."
나는 마보자세를 끝내고 절벽 인근의 공터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대충 지붕을 만들고는 이슬을 피할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불을 피워서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놓은 후 모닥불 옆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수련할 장소로 찾아오자 독고성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산정에 앉은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는 수련을 진행할 수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네게 섞여있는 무수한 무류(武流)를 통제해서 뇌신류의 상승검학을 익히게 하려면 내가 수박 겉핥기로 파고드는 걸로는 무리가 있다는 소리다. 너를 지금까지 옆에서 줄곧 지켜봤던 자의 조언이 필요하다."
그렇게 말한 독고성이 말했다.
"검마를 만나봐야겠다."
뜻밖의 말이었다.
뇌신류의 검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반세기 이상 틀어박혀서 무예를 수양하던 독고성이 세상으로 나오겠다니? 그것은 그 자체로 천하의 무력수준이 조정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독고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뇌신류의 검술을 완성시키기 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셨고 수신류 호법사자와도 약속하셨는데..."
"뇌신류의 검술은 이미 완성단계이며 그걸 진정한 의미에서 승화시키는 건 단순수련으로 되는 게 아니다. 또한 그 녀석과 약속한 것도 그저 본단에 복귀하지 않고 뇌신류 부흥운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으음."
"그리고 나도 검마쯤 되는 고수와는 무론(武論)을 이야기해 보고 싶구나."
나는 독고성의 심리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독고성은 뇌신류의 검술을 자기 나름대로 정립해서 더 쌓을 게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검마와 토론하면서 나를 가르치는 것 자체를 자신의 수련으로 삼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부지런한 열정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독고성은 자신의 혈족을 뒤로 하고 뇌신류에 입문해서 평생 무예 하나만 보고 살아왔구나. 그러고도 모자라서 모든 인생의 재미를 포기하고 무예에만 몰두할 수 있다니...'
내심 마음속에서 독고성에 대한 호감도가 오른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검마 문주께서도 크게 기꺼워하실 겁니다."
"좋다."
그 때 내 머릿속에 검마의 밀명이 스쳐 지나갔다.
[ 한 달 후에 오게.]
검마는 현재 제갈사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해서 일부러 나를 외부로 내보내서 헛점을 노출시킨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비등을 이용해서 급격하게 빨리 복귀하는 건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수련한지 아직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적어도 열흘 내지는 보름동안 다른 곳에서 시간을 때워야만 했다.
' 흠... 어디서 시간을 보내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독고성은 무영문이 고려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저 우리가 중원 어딘가에서 왔다는 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 아무리 사천이라고 해도 마음먹고 독고성이 경공술을 쓰면 고려까지 열흘이면 충분하겠지.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
나는 잠시 후 좋은 생각이 나서 독고성에게 말했다.
"저기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저는 검마 문주께 밀명을 받은 일이 있어서 동영에 들러야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그 일을 조금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동영?"
"네."
독고성은 뭔가 마뜩찮은 듯 말했다.
"그 왜족들이 사는 곳에는 뭐하러 간단 말이냐? 용건을 확실히 말해라."
"다름이 아니라 벽력삼존 중에서 청월(靑月)이라 불리시던 분께서 동영의 어느 숲에 은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저는 그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여야만 합니다."
독고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청월! 그 녀석이 동영에 있다고? 왜?"
"원월천살법(圓月天殺法)이라고 하는 특수한 무공을 얻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뭣이...?"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
"현재 무영문이 십삼율에 의탁하고 있기에 가까운 동영의 소식을 전해듣다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확실하다면... 동영에 꼭 가봐야겠군. 장소는 확실히 알고 있느냐?"
"아오키가하라 수해라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가 보자."
독고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청월은 뇌신류에서 가장 성실하고 부지런한 놈이었다. 그 놈이 저주받은 살법을 얻으려 오랑캐의 땅에 갔다면 찾지 않을 수가 없다."
============================ 작품 후기 ============================
밸런스 문제가 논의되어서 254화를 통째로 수정했습니다. 뇌명살 부분을 삭제하고 다른 내용전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생검신의 프리미엄 구매 가치를 리플에서 논의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ㅠㅠ 작가의 멘탈을 지켜주세요... 또한 글의 안정성을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작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재밌는 글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마음 뿐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