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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제갈사와 무영문으로 돌아온 나는 검마에게 그동안의 일을 말했다. 검마는 내 말을 차분히 듣다가 말했다.
"잘 했네. 저주를 풀어냈으면 된 걸세."
"잘 된 걸까요?"
나는 솔직한 심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검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하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만큼 유능한 사람을 중원에서 찾기 힘들 정도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의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가 무엇을 어떻게 이루는거를 관찰하는 것일세. 그건 백 호법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알겠습니다."
"백 호법..."
잠시 말꼬리를 늘이던 검마가 말을 이었다.
"우선 용왕곡에 가게. 그게 좋겠군."
"그걸로 충분하겠습니까?"
"물론이지."
그 순간 검마의 전음이 동시에 들려 왔다.
[ 충분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용왕곡에 갔다 와야 하네.]
대화와 전혀 반대의 내용이 전음으로 들려오다니!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긴장을 풀고는 태연자약하게 검마의 말에 맞춰 주었다.
"수련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는군요."
[ 어째서 용왕곡에 갔다와야 합니까?]
"허허. 무공의 깨달음에 하루이틀이 있는 게 아니지. 아주 큰 공부가 될걸세."
[ 자네가 사라지면 제갈사는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것일세. 나는 그걸 유도하고자 하네.]
"그러고보니 점심 때 닭죽을 좀 먹었는데 새로 고용된 숙수의 실력이 뛰어난 듯 합니다."
[ 제갈사의 진의(眞意)를 보시겠단 말씀이군요.]
"정씨 가문에서 특별히 추천해준 숙수이니 당연하지. 중원의 여타 숙수에 비교해도 대단한 실력이야."
[ 제갈사를 계속 받아들일지 쳐낼지는 빠르게 결정해야 해. 이번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아두게.]
"하하! 잡소리가 길었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존명!]
"살펴가게."
[ 임무와는 별개로 수련은 성실히 하도록 하게.]
나는 그 기묘한 대화를 끝내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난데없이 밀담을 나눈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는 동안에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제갈사가 행보를 시작한다고?'
그렇다면 지금 제갈사는 내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인가? 나를 신경쓰는 기색이 강하단 말인가? 나는 그 제갈사가 제멋대로 하고있다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으므로, 검마의 행동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검마는 제갈사를 관찰하고 있었다.
제갈사를 등용해서 활약하게 하면서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바로 나였다. 검마는 옆에서 그저 지켜보며 필요한 말만 했을 뿐이다. 제 3자가 보기에는 검마가 의욕이 없어보일지 몰랐지만, 실상은 제갈사가 어떤 인물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옆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결과 낸 결론이, 제갈사가 나 때문에 자신의 행보를 조절하고 있다는 결론이었으리라. 나는 문주가 보는 큰 그림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사는 내가 칠요의 주인이라서 신경쓰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지속적으로 내게 반말을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것인가?
앞으로 제갈사가 어떻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윽고 나는 수많은 의문을 뇌수 한켠에 묻어두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사람을 보는 경험이 부족한 거군.'
아무리 내가 백여 년을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온갖 인간군상을 다 만나봤다고는 해도, 사파의 제일인으로서 살아온 검마의 경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틀림없이 마도팔마를 비롯해서 각지의 군마(群魔)는 물론 악독한 마두나 인간말종도 수없이 봐왔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자들 사이에서 옥석을 골라냈던 검마의 안목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상념을 끝내고는 곧장 용왕곡으로 향했다. 마치 살아움직이는 듯한 운무(雲霧)가 협곡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기세가 소스라칠듯 맹렬했다. 나는 용왕곡의 이름없는 절벽 정상에 올라서 외쳤다.
"제가 왔습니다."
사자후는 쓸 필요 없다. 독고성의 감지범위는 이 용왕곡 전체이므로, 사소한 기척과 소리만 내도 독고성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안개 너머에서 허공답보를 써서 독고성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인영(人影)이 확실한 형체를 띄고 내게서 삼 장 밖에 나타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독고성은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잡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그딴 정신상태로 수련할 거면 당장 꺼져라."
"......"
대뜸 욕지거리를 듣자 나는 황당했다.
하지만 이내 독고성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금 전에 검마의 진의를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었고, 그게 초고수인 독고성의 눈에 읽힌 것이리라. 확실히 독고성같은 고수에게 수련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워해서는 무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서서 정신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
"또 뭔가 문제 있습니까?"
"애송이. 한 가지 물어보자."
독고성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너는 이미 뇌신류의 달인급에 이르렀다. 강호 어디를 가도 꿇리지 않는 초절정고수라고 할 수 있지. 그런 까닭에 내가 너를 가르치게 된다면 일반적인 수련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난이도로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가르침을 받고 싶으냐?"
"뇌신류가 힘을 추구함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물러설 생각이 없나 보군. 하긴 그래야 뇌신류지."
쓴웃음을 지은 독고성이 말했다.
"좋다. 그럼 한번 네가 뭘 알고 있는지 다시 짚어보자."
나는 다시 한 번 독고성에게 내 검술을 보여주었다. 검술시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보는 독고성의 눈에는, 예전과 달리 놀라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대신에 신중하게 쳐다보며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한참 후 독고성이 말했다.
"너는 내게 뇌룡신검과 뇌신검무를 배우려고 온 거겠지."
"네. 그리고 뇌신류 검술의 정화를 전수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좀 귀찮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 상태로 뇌룡신검의 형(形)을 가르쳐주는 건 쉬운 일이지만, 네 검법은 이미 자기류(自己流)의 검예로 승화해 있다. 네 만승검결(萬乘劍決)에 뇌룡신검의 천뢰기(天雷氣)를 싣기 위해서는 검형 전체를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
나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말했다.
"검형 전체를 고친다는 건 여태 쌓아온 검술의 태세를 모두 고치라는 말입니까?"
"아마 6할 이상을 고쳐야겠지."
"그걸 감수해야 할 정도로 만승검결에 천뢰기를 싣는 게 중요하단 말입니까?"
"흐음..."
독고성은 한숨을 쉬더니 설명했다.
"너는 이미 절세검학인 굴공검과 천축검을 배워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니 사실 그 두 가지의 절예를 배웠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 지극히 뛰어난 묘용을 지닌 검학이 네 뇌신류 검술 자체를 한 단계 발전시켰으니까."
"음."
"하지만 확실히 말해두마. 뇌영검법으로 검세를 잡고 만승검결에 천뢰기를 싣는 것이 뇌신검무를 익히기 위한 최소조건이다. 네가 뇌신검무를 익히고 싶다면 지금까지 이루었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
나는 뜻밖의 고난이 닥쳐오자 고민했다.
검형의 6할 이상을 고친다!
그것은 동네무관에서 가르치는 형태를 다시 몸에 익히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검술에 바쳐왔던 기백년동안 쌓아왔던 버릇, 검세, 호흡, 보법 일체를 뜯어고친다는 뜻이다. 무공을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수준의 노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내가 고민하는 걸 보자 독고성이 말했다.
"신중하게 생각해라.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좀 더 쉬운 길은 없을까요?"
"그냥 뇌신검무를 포기하고 검마 밑에서 검술을 수련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어설프게 파고들었다가는 안하느니만 못할지도 모른다."
선택을 하라는 소리였다.
장삼봉의 절학이나 제대로 익혀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인가?
그게 아니면 뇌신검무를 기필코 익혀서 뇌신류의 정화를 얻을 것인가?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오. 배우겠습니다."
"좋다."
장삼봉의 절학 또한 뇌신검무의 완성형에 비견할만큼 뛰어난 것이다. 아니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왠지 뇌신검무를 배우는 게 어렵다고 해서 지나쳐 버렸다가는 두 번 다시 배우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느껴진 것이다. 설령 이번 선택 때문에 다시 백 년을 고통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걸 배워야만 했다.
독고성이 산정의 넓은 공간에 앉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뇌룡신검의 요지는 천뢰기를 끌어내는 것이다."
"천뢰기가 무엇입니까?"
"우리 뇌신류가 근본적으로 천지간에 존재하는 뇌령지기(雷靈之氣)를 다루는 문파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창이든 권이든 검이든 오의나 극의에는 필수적으로 뇌령지기를 응용하게 되어 있지. 그것은 뇌령지기가 순수한 자연의 힘을 가공한 것으로써 굉장히 뛰어난 효율과 위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독고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뇌룡신검은 그 뇌령지기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법이다. 천지간에 있는 뇌령지기를 검술의 흐름에 끌어당겨서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것이지."
"뇌검(雷劍)을 만든다는 것입니까?"
"뇌룡신검의 성취가 높아지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그건 실전성이 높다기엔..."
내가 망설이면서 이야기하자 독고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약하다. 외부에서 뇌령지기를 끌어와서 천뢰기를 발생시켜봤자 그건 검기나 검염과 크게 다를 게 없어."
"그럼 어째서."
"애초에 제사장이 백련교의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익혔던 것이 뇌신류의 검술이다. 다소 실전성이 부족해도 어쩔 수 없지. 왜냐하면 말 그대로 천지간의 뇌령인 천뢰기를 발생시키는데만 집중한 검술이니까. 뇌신류의 검술에 입문했던 자들도 대개 뇌룡신검의 단계에서 실망해서 그만두는 일이 많았다."
거기까지 설명한 독고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뇌룡신검을 제대로 익히고 뇌신검무에 들어가서 심오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많은 게 달라진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뇌룡신검의 형태를 하루동안 가르쳐 주겠다. 총 18초식이니 외우는 게 어렵진 않을 거다."
파바바밧
나는 독고성의 뇌룡신검 시연을 보며 동작을 외웠다. 18초식을 외우는 일은 얼핏 가짓수가 많아서 어려워보일수도 있으나, 나는 고수가 되면서 인체의 근골이 움직이는 걸 아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동작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동작의 뜻도 알게 되고, 외우기 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뇌룡신검의 동작을 얼추 외우는 데에는 대략 다섯 시진 정도가 소모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수련이 이어진 것이다. 독고성은 내가 충분히 동작을 외웠다고 생각하자 응용을 말해 주었다.
"이제 검결로 천뢰기를 끌어내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요결(要決)이 따로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럼 백련교 사대무류가 기본적인 자연지기를 공유하고 있는데 개나 소나 천뢰기를 쓰고 다니게? 이건 문파의 비밀이니 네 직계사승이 아니라면 철저히 함구해야 한다."
파지지직!
"......!!"
잠시 후 독고성의 뇌룡신검을 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검술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충천한 뇌광(雷光)이 검에 실려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번갯불이 쉴새없이 강물처럼 흐르는 검신(劍身)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매혹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독고성은 검술시연을 끝내고 말했다.
"시작은 뇌룡신검의 요결을 통해서 천뢰기를 끌어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만승검결에 천뢰기를 싣는 과정에 들어가는 거지."
"꼭 만승검결이어야 합니까?"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고성은 내 질문에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나도 잘 모른다!"
"네?"
"물론 나는 뇌신검무를 극한까지 익혀서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하지만 그게 만승검결에 대한 해답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뇌신류의 초대 사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네가 나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내 대답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독고성은 거기까지 설명하고는 더 언급하고 싶지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못내 찝찝했지만, 이런 절정무학을 설명할 때는 괜히 필설로 형용하는 게 원래의 뜻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세한 설명을 듣는 게 힘들다는 걸 납득했다.
나는 그로부터 열흘 동안 독고성에게 요결에 따라서 뇌룡신검에서 천뢰기를 끌어내는 연습을 했다. 죽자사자 뇌룡신검만 쓰면서 하루를 다 보내는 듯 했다.
파지직!!
제대로 요결에 따라서 천뢰기가 이끌어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성이 말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연습하면 뇌룡신검에 천뢰기를 온전히 실을 수 있겠군."
"빨리 익혀지는군요."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내 무예의 재능은 별것 아닌데 이상하게도 뇌룡신검은 진도가 빠르게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독고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그거야 네가 뇌신류 검술의 달인이니 당연한 거 아니냐? 검형과 요결이 완전히 제공되는데 그 이상 시간이 걸리는 게 이상하지."
"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부터가 아마 힘들겠지."
나는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약 6주야에 걸쳐서 뇌룡신검에 천뢰기를 싣는 과정에 익숙해지고 다음 과정으로 들어갈 때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만승검결에 천뢰기를 실어넣기 시작하자 내 초식전개를 지켜보던 독고성이 호통을 쳤다.
"틀려먹었어!"
"네?"
"왜 만승검결 환(幻)의 형태에서 천뢰기를 고르게 분배하지 못했나?"
"그거야 환검을 뿌리는 동안에 뇌령지기를 동시에 유지시키는 게 힘들어서..."
"크으... 이럴 줄 알았어."
독고성은 머리를 짚더니 말했다.
"동시에 유지시키는 게 힘든 이유가 뭔지 아나? 바로 굴공검과 천축검의 요령이 골수까지 박혀있기 때문이다."
"......!!"
"그냥 뇌신류 검술만 익힌 자들은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는단 말이다."
투덜거리던 독고성이 앞으로 내게 지옥을 보여줄 한 마디를 했다.
"역시 근본부터 뜯어 고쳐야겠다!"
독고성의 눈이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그것은 마치 맹호(猛虎)를 연상시켰기에 나는 암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