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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
우리는 곧장 하인을 기세로 억누르며 대답을 강요했다.
"장령곡주 벽지상을 봐야겠소. 안내해 주시오."
검마의 말은 정중했으나 은연중에 기세가 흘러나와서 상대방의 심력을 눌러버리는 힘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 검마의 기세를 일개 하인이 버텨낼 리가 없었고, 그는 삽시간에 안색이 새하얘져서 고개를 조아렸다.
"무, 물론입지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인을 따라서 더욱 안쪽으로 향했다. 약 백여 장을 걷자, 그 곳에는 고아한 분위기를 흘리는 저택이 있었다. 혼자서 살기에는 과하게 넓어보였으나 부호라면 그럭저럭 이해될 정도의 장원이 딸려 있었다. 하인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그마한 종을 울리며 말했다.
"주인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뫼시거라."
"네이."
우리는 하인을 따라서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고귀한 자의(紫衣)를 입은 한 여인이 미리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자 침음성을 흘렸다.
"음..."
도왕 벽지상이 확실하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었으며 표정이 극히 냉막했다. 그녀가 웃는다면 남자 서너명 홀리는 것쯤은 우스울 듯한 생각이 들었다.
검마도 그 사실을 확인했는지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장령곡주를 보아서 반갑소. 나는 검마 서문대룡이라 하오. 이쪽은 본문의 호법인 백웅이오."
현 장령곡주인 도왕 벽지상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대꾸했다.
"사파제일고수께서 이런 벽지에는 왠일이십니까?"
"나는 전 장령곡주의 지혜와 실력이 뛰어나다 하여 무영문에 영입하고자 찾아왔소. 헌데 몇 년 사이에 그가 죽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사람이란 천명(天命)이 있는 법이지요. 그 또한 그 명운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벽지상의 말투는 고저의 변화가 없고 음울하기까지 했다. 처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당혹감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벽지상의 말투를 들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저게 벽지상 특유의 화법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검마도 벽지상에게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헌데 내가 알기로 그대는 사천 일대에서 도왕이라 불리며 도박으로 명성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장령곡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오?"
검마는 직설적으로 바로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벽지상이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도왕이라 함은 제 과거의 부끄러운 칭호일 뿐입니다. 저는 생전의 장령곡주와 친분이 있었고, 그의 부탁에 따라 장령곡을 인계받아서 관리하는 중입니다."
검마가 슬며시 그녀의 의중을 찔러보았다.
"이제 도왕으로서 강호행을 하진 않겠다는 말이오?"
"그리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꽤나 마음에 들어서요."
벽지상의 차분한 대답에 검마는 침음성을 흘렸다. 벽지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말하는 것 같았지만 마치 식물처럼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검마로서도 그녀의 심리상태를 추리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지켜보다 못해서 벽지상에게 말했다.
"친분이라니 어떤 경위로 친해지게 된 거요? 제갈사는 극히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인물이라서 친한 자가 없다고 들었거늘."
그러자 벽지상은 나를 돌아보더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제갈사는 편협하고 저 잘난맛에 사는 자였죠. 하지만 그는 꽤나 재미있는 인물이었기에 저는 종종 그와 교류를 트고 있었습니다."
"재미있었다고?"
"친우로서 대답드렸습니다만, 이 이상은 고인(故人)에 대한 예가 아니니 그만두겠습니다."
난데없이 예의를 내세워서 이야기를 툭 끊어버리는 벽지상이었다.
"......"
이렇게 대답해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기에 나는 그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뭔가 시비를 걸고 싶어도 어긋나는 점이 없었기에 걸만한 부분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검마가 내게 전음을 보냈다.
[ 이 자는 심리전의 달인일세. 섣불리 질문하다가는 이쪽의 의도만 읽힐테니 가만히 있어 보게.]
[ 네.]
검마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흐음. 구체적으로 그의 사인(死因)이 무엇이었소?"
"자살이었습니다."
"어떻게 자살한 것이오?"
"음독이었습니다. 손써볼 틈도 없었다는군요."
"독? 타살 가능성은 없었소?"
그러자 벽지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반 년에 걸쳐서 조사했으나 타살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가 자살한 건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으음, 그랬던 거구려."
"흉수가 따로 존재했다면 친구의 의를 걸고 끝까지 복수했겠으나 그렇지 못하니, 저는 그의 유서에 따라 장령곡을 관리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는 없지요."
벽지상은 은연중에 우리들이 가 주었으면 하는 눈빛을 비치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가 제갈사의 자살로 넘어갔던 시점에서는 완전히 싫어하는 눈빛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심리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을텐데 이토록 노골적이라는 건,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뜻밖의 침입자를 내보내고 싶어하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래서인지 검마가 말했다.
"오늘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제갈사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인지라 진실로 마음이 달아있었소이다."
"별말씀을... 식사를 한 끼 하고 가시겠습니까?"
"됐소. 그럼 다음에 또 뵙겠소."
"살펴가시길."
그리고 우리는 장령곡주 벽지상의 배웅을 받고는 장령곡을 나왔다. 나는 장령곡을 나오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아서 검마에게 물었다.
"이상합니다. 좀 더 캐내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
"문주님!"
그러자 검마는 근처에 있던 나무아래의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네?"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무인의 육감... 아니 칠감(七感)쯤 되는게 묘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네. 그 자리에서 끝까지 파고들었으면 아무래도 위험해졌을 게야."
"......?"
낌새라니?
나는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도왕 벽지상의 무위가 절정고수급이긴 하지만 현재의 검마에게 백초지적이나 될지 의문이었다. 설령 그 자리에 무림고수들의 매복이 있었다 하더라도 두려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마는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벽지상을 경계하고 있었다.
검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허허, 잘은 설명할 수 없군. 이게 바로 명룡자가 말했던 신통(神通)이 뜨이는 과정인가 보네. 내 감은 거기에 가만히 있는 게 패착이라고 말하고 있었어."
"으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나조차도 긴가민가한걸."
"아닙니다. 문주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고맙네."
그렇게 대답한 검마는 서늘한 나무그늘에서 하늘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도왕 벽지상이 의심스럽지만 바로 캐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네. 우선 내일 독고성을 만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 건 가장 나중이어도 되지 않은가."
"죽음의 다리? 그 정도입니까?"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벽지상의 무예수준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주변에 매복이나 진법도 없었고 독도 낌새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만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겠지. 나도 그 자리에서 의념절기로 그녀를 제압할 생각을 몇십 번이나 했다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검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제갈사가 망량에 버금가는 천재라면, 결코 어중이떠중이에게 자신의 장령곡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일세. 즉 벽지상에게는 제갈사도 인정할만한 가공할 능력이 있다는 소리일세. 천재가 자신 이외의 존재를 인정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야."
"......!!"
"나는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딱 한 번밖에 없어. 호법사자와 마주했을 때야."
그렇게 중얼거린 검마는 나를 쳐다보았다.
"명심해 두게. 지금의 벽지상은 자네가 섣불리 뒤를 캐기에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 있어. 조심, 또 조심해야만 할 걸세."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 그렇군. 난 지금 벽지상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어떤 수단을 쓸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소리다. 그리고 정보를 숨긴 적만큼 위험한건 없었다. 나는 검마의 가공할만한 신위를 옆에서 지켜봤던 탓에 경계심이 누그러졌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속으로 자책하며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리자 검마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뇌신류의 검술 최종절기라는 걸 전수받지 않았는가? 아까의 시연에서는 펼치지 않더군."
"네?"
"이광이 자네에게 만승검결을 뛰어넘는 절기라는 걸 가르쳐준다 했었을 텐데."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사실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새겨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굳이 입에 내지도 않고, 시연에서 보이지도 않은 이유가 있었다.
"네. 배우긴 했습니다."
"그럼 왜?"
"어... 흑요석의 기억으로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기억은 자네가 숨기고 싶은 듯 아주 짤막하게 스쳐 지나갔고, 심지어 명확하지도 않았네. 그래서 물어보는 것일세."
"아..."
나는 흑요석으로 기억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숨기고싶어하거나 싫어하는 기억이 있을 경우 누락이 되어버리거나 짤막하게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사용자 편의를 위해 자동으로 탑재된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검마의 말에 대답했다.
"뇌신류의 검사는 뇌영검법으로 입문해서 만승검결을 익히고, 그 이후에 뇌신류 검술의 각종 비기를 배웁니다. 그리고 만승검결이 승화하여 10성 진경에 이르게 되면 뇌룡신검(雷龍神劍)에 입문하게 됩니다."
"뇌룡신검이라! 그게 검술 최종절기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광의 말로는 뇌룡신검과 만승검결은 사실 동격이라 했습니다. 익히는 순서의 문제인 듯 했습니다. 뇌룡신검을 다시 10성까지 익혀서 두 개의 검술을 완벽하게 터득했을 때 진정한 뇌신류 검술 최종절기가 나온다 했습니다."
"오오...!! 그게 뭔가?!"
검마는 흥분한 듯 했다. 같은 검사로서 뛰어난 상승검법의 진경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인의 혼을 끓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 모릅니다."
"응? 모른다니?"
나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서 결론을 말했다.
"저는 뇌룡신검을 못 익혔습니다. 왜냐하면 만승검결이 10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으음."
"너무 진도가 느려서인지 결국 이광이 포기하고 만승검결이나 열심히 수련하라더군요. 그래서..."
"그랬군."
내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검마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했다.
그랬다.
과거 내가 무당파의 절학을 뇌신류에 전달했을 때, 이광은 크게 기꺼워하며 내게 뇌신류 검술의 최종절기를 알려준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한 듯이 내게 만승검결을 지도해주고, 머지않아서 뇌룡신검에 입문할거라고 믿은 듯 했다.
그러나 내 부족한 재능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광은 내가 만승검결을 숙련시키는 속도가 너무 지지부진하자 포기한 듯, 뇌룡신검은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해 두었다. 그리고는 무당파 절학의 연구에 들어간 것이다.
이건 이광을 욕하기도 애매한 문제였다. 이광의 말마따나 만승검결 또한 상승의 검술이기에 나는 아직도 만승검결의 10성에 도달했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검술의 완성을 기다리지 못한 게 꼭 이광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부족한 내 재능이 부끄럽게 느껴졌기에 무의식중에 그 기억을 대충 넘겨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수치심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검마가 말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네. 지금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라 자네가 만승검결의 10성에 이르렀는지겠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만승검결은 극한의 변(變)과 환(幻)을 머금고 있는 무공이라..."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검마가 피식 웃었다.
"자네와 함께 무공을 연마한지 어언 7년이 다 되어가네. 만승검결은 무수히 보았지. 그리고 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네는 만승검결을 이미 다 터득했어."
"정말입니까!"
"물론일세. 왜냐하면 자네는 지금 무영탈혼검법의 기초를 넘어서 5성 넘게 터득했기 때문이지."
검마가 말을 이었다.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속도일세. 더욱이 자네의 검재가 부족하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나 자네가 무영탈혼검법을 빠르게 습득한 이유는, 이미 만승검결의 오의를 얻어서 변화와 환영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일세."
"그렇군요."
"그 뇌룡신검이라는 무공도 지금이라면 즉시 입문이 가능할 것일세."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뇌신류 검술의 극의(極意)에 도달하는 건 생각보다 멀지 않은 일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내가 방금 전까지 우울하던 걸 잊고 만면에 미소를 짓자 검마가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검술 최종오의란 것의 위력 그 자체겠지."
"굉장한 위력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검마는 검술 최종오의의 위력을 의심하는 걸까?
"......"
검마는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내일 독고성을 만나봐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