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3 ----------------------------------------------
천계(天界)
검마의 말에 독고성은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
휘오오오
이윽고 산정에 흐르던 거대한 운무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며, 희미한 안개 너머로 인영(人影)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안개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수준이었지만 이제야 실체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좀 더 우리 쪽으로 다가온 독고성이 육성을 내어서 말했다.
"검마. 네가 어떻게 뇌신류를 알고 있지?"
살기(殺氣)가 심상치 않았으나, 그 살기와 더불어서 당혹감이라는 감정이 강하게 섞여서 흘러들어왔다. 나도 명확히 느낄 정도였으니 눈치가 귀신같은 검마가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검마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백련교의 사대무류에 대해서는 왠만큼 알고 있소. 특히 당신네 호법사자들이 중원의 고수들 수준을 알아본답시고 날뛰었기에 모를 수가 없지."
"호법사자? 무슨 말이냐?"
"수신류 호법사자를 비롯해 세 명의 호법사자들이 중원의 고수들과 겨룬 일이 있었소. 당신네는 한번도 지지 않았고 백련교의 공포가 암중에 새겨졌지. 당신이 뇌신류 인물이라면 이걸 모를 리가 없을텐데."
검마의 말에 독고성은 더욱 당황한 듯 했다. 그래서인지 약간 초조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 수신류. 그런가..."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당신은 뇌신류의 고수가 맞소?"
독고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뇌신류의 독고성이다."
"과연 그랬군. 방금 시전한 검술은 뇌신류의 뇌영검법이오?"
"아니다."
"그럼 무엇이오?"
"......"
독고성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말했다.
"남의 무공연원을 캐묻기 전에 그쪽에서 해야할 말이 있을 텐데, 검마. 너희는 무엇하러 이 용왕곡에 찾아왔느냐?"
그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파르스름한 안광이 운무에 섞여서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지근거리라서 그런지 독고성의 기파가 더욱 압박으로 느껴졌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검마가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사천의 최절정고수들이 경외시한다는 용왕곡의 주인에 호기심이 생겨서 만나러 온 게 아니겠소?"
"나는 그저 이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림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다만 당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수라는 사실을 확인해서 흡족할 뿐이오."
그러자 독고성이 말했다.
"그럼 당장 나가라. 나는 너희에게 수련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
검마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독고성. 당신은 혹여 이광이라는 자를 알고 있소?"
"......!!"
파아앙!
그 순간이었다. 그 때까지도 사방에 자욱하게 흐르던 운무가 마치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터져나갔다. 독고성의 가공할만한 의념이 유형화되어서 자연에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삽시간에 운무가 가득하던 용왕곡은 맑은 하늘과 햇빛이 비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독고성의 실제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중년인으로 보였으며, 외견상으로 볼 때는 이광과 별로 나이차이가 나지 않을 듯 했다. 문사같은 기품을 지닌 이광과는 다르게 독고성은 평생동안 거칠게 살아온 야인의 외모였으나 기본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였다. 그리고 산속에서 수행을 하는 것치고는 깔끔한 흰색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독고성이 버럭 사자후를 내질렀다.
[ 네가 이광을 어떻게 알고 있나!]
쿠르르르
단순한 사자후가 아니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토해지는 순간 뇌파(雷派)가 터져나가서 용왕곡 일대를 감싸는 듯 했고, 여기저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독고성의 내력수위가 매우 심후한데다 사자후 자체를 의념절기로 삼을수도 있는 듯 했다. 자연조차 바꿔버리는 그의 위용은 대단했다.
검마는 독고성의 기세를 자연스럽게 받아흘리며 말했다.
"소리치지 마시오. 이런 험지에서 괜히 소리쳐봐야 득될 게 없소."
"으으... 대답해라. 네놈은 이광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알 만 하니까 아는 것이오. 이광은 강호무림에 명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으나, 그 실력은 단연 초절정고수에서도 수좌를 다투는 인물. 그런 요주의 인물을 내가 모를 수가 있겠소?"
"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독고성이 이를 으득 악물며 말했다.
"네놈이 이광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그 놈의 무공도 뇌신류라는 걸 확인했다는 소리겠지. 그렇지 않느냐!"
"물론이오. 이광 또한 뇌신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소."
여상하게 대답한 검마가 훗하고 웃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소. 당신이 군침을 흘릴만한 정보도 꽤 있지."
"......"
독고성은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원래는 그냥 용왕곡주의 무력만 측정하고 가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소. 당신이 뇌신류라고 한다면, 내 제자와 심도있는 이야기를 해볼 기회가 되겠지."
"뭐? 제자? 저 놈 말이냐?"
"그렇소."
독고성과 검마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나는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그들의 기세를 버텨냈다. 그러자 독고성이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설마... 저 녀석도 뇌신류의 무공을 익혔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제 보니 거대한 뇌령지기를 갈무리하고 있군. 뇌령을 성취한 건가."
중얼거리던 독고성이 말했다.
"설마 전승자..."
검마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 이 청년의 이름은 백웅이라 하며, 뇌신류의 무공을 이어받았소. 그리고 현재는 내 제자가 되어 수양하는 중이오."
"빌어먹을..."
독고성은 나를 노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로 뭐라 말하지는 않는 듯 했다. 뇌신류의 전승자가 타 문파에 들어간 것은 그 자체로 죄이긴 했으나, 지금 뇌신류는 그런 걸 일일이 따질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마의 무위가 그를 납득시킬 정도로 충분히 높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검마가 말했다.
"내 제자는 높은 무공을 갈구하던 중 내 제자가 되었소. 허나 나로서는 아무리 가르쳐도 그의 원류인 뇌신류의 무공을 일정수준 이상 지도할 수가 없지. 나는 이 기회에 독고성 당신이 내 제자에게 뇌신류의 무공을 전수해줬으면 하오."
"흥!"
독고성이 코웃음을 쳤다.
"뇌신류의 면허를 얻을만한 자격이 있는 놈인 건 인정한다. 의념도 다룰 줄 아는 듯 하군. 그러나 내가 이 놈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이유가 뭐지?"
독고성이 반발하자 검마가 힐끔 나를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 이제부턴 자네가 말하게.]
[ 네?]
[ 자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독고성에게 알려주는 게 최선일세.]
나는 검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검마가 좀 더 내 입장을 대변해서 끝내 독고성을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은 결코 독고성에게 좋게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직접 나서서 주체적으로 나서는 게 훨씬 좋으리라.
나는 앞으로 포권하며 나섰다.
"저는 뇌신류의 전승자인 백웅이라 합니다. 현재 무영문의 호법으로 있습니다. 뇌신류의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괜찮으시다면 제가 알고 있는 뇌신류의 무공을 좀 보여드려도 좋겠습니까?"
"어디 해 봐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무공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 무공은 검마의 지도 아래 무영탈혼검법을 수련하며 천축검과 굴공검에 기반한 심득을 터득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뇌신류의 원형을 보유한 기본기를 시전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파바밧
나는 빠르게 뇌영검법과 만승검결을 펼쳤고, 그 직후에는 근처에 있던 큰 나뭇가지를 들어서 뇌령팔식과 천뢰무극창도 시전했다. 그리고 뇌영보를 비롯해서 뇌영보 천주살도 사용했으며, 뇌령인(雷靈印)과 자전귀도(磁電鬼刀), 구유강기(九幽?氣), 명왕수(冥王手)의 투로도 선보였다. 후반부의 무공은 뇌신류의 호법인 벽력삼존에게서 배웠던 무공으로써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독문무공에 가까웠다.
좁은 산 정상에서 무공을 펼쳐내자, 독고성은 넋을 잃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뭐, 뭐냐? 네 녀석은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지? 어찌 그리 많은 무공을... 어떻게 귀혼일파(鬼魂一派)의 절학까지 알고 있느냐!"
"자전귀도와 구유강기를 알아보셨습니까?"
"질문에 대답해라. 그건 뇌신류에서도 극소수만이 익힐 수 있다. 네 스승이 귀혼일파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무공들을 벽력삼존이라는 분들께 배웠습니다. 다만 지나가듯 배운 것이라 투로 이상은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벽력삼존... 아... 그놈들 말인가..."
독고성은 내 말을 듣자 희미한 기억을 더듬거리며 납득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황당했다.
' 이 자는 뇌신류의 고수가 틀림없는데 대체 항렬이 어떻게 되는 거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 독고성은 이광을 알고 있는가?
이광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고민할 때 검마가 끼어들었다.
"보다시피 내 제자는 뇌신류의 전승자로서 한줌 흠잡을 데 없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소. 당신이 이 아이를 도와준다면 틀림없이 뇌신류의 재흥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독고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재흥?"
"당신네 뇌신류는 백련교주에게 풍비박산났지 않소? 나는 틀림없이 당신이 뇌신류를 다시 일으키려고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
"아... 그건..."
독고성은 뭔가 어색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만났던 뇌신류 고수들이 [뇌신류의 재흥]이라는 목표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독고성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 그건 그렇고 검마 네놈은 속도 좋군. 저 놈이 뇌신류의 제자인 걸 알면서도 이리 후하게 대접하는가? 뇌신류가 누군가의 밑에서 영영 비위나 맞출 정도로 좋은 성격이 아니란 걸 알 텐데."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나는 백 호법에게라면 무영문을 물려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뭣이..."
"아무튼 내 제안에 대답해주셨으면 하오. 당신은 백 호법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오?"
"그건 아니다."
독고성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 지금 갑작스러워서 판단을 하기 힘들다."
"그러시다면야...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시오?"
"내일 다시 와라. 그 때 내 대답을 말해 주겠다."
"그러지."
파앗
나는 검마와 함께 용왕곡에서 물러났다. 나는 떠나오면서 독고성이 우리를 기습하지 않을지 의심되어서 뒤를 흘끔 보았지만, 독고성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본인의 말마따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서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옆에서 뛰고 있던 검마가 말했다.
"저 자는 좀 특이하군. 자네의 기억에서 보았던 뇌신류 고수들과 많이 다른 느낌일세."
"네, 그렇습니다."
"그런만큼 자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나는 결코 저 독고성이란 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으니, 자네가 어떻게든 그의 사연을 파헤쳐야 하는 것일세. 그렇지 않는다면 기연(奇然)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셈이겠지."
검마의 말대로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독고성은 현재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중이었다. 그 또한 뇌신류라서인지 폭급한 성정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다른 뇌신류 제자들과는 뭔가 달랐다. 그것은 뇌신류라는 유파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마치 한발짝 물러서서 보는 듯한 그 시선은 순수한 구도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검마가 말했다.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기도 그렇군. 슬슬 비등을 써서 장령곡으로 가 보세."
"윽... 역시 가는 겁니까?"
"가야지."
파앗!
나와 검마는 다음 순간 비등을 써서 장령곡주 제갈사의 거처로 이동해 있었다. 예전에 망량과 함께 찾아왔던 고즈넉한 건물 내부였다. 나는 혹여 함정이나 진법이 설치되어 있지 않나 싶어서 경계했으나 그런 건 없는 듯 했다.
검마가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말했다.
"이보게. 장령곡주 제갈사는 어디 있는가?"
"히이익."
하인은 난데없이 실내에 나타난 우리를 보자 깜짝 놀랐다. 그는 이내 검마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는 걸 확인했는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제갈사 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이제 안 계십니다."
"죽었다고?"
"그 분의 묘지가 저쪽에 있지요. 일 리만 가면 나옵니다."
하인의 손가락이 대나무숲 저편을 가리켰다.
역시 제갈사는 죽은 듯 하다.
"그런가? 그런데 이상하군."
검마는 건물을 흘깃 살펴보며 말했다.
"이 건물은 물론이고 주변 조경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자네같은 이가 따로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니. 본디 제갈사라는 수장이 죽었다면 장령곡이 와해되는 게 보통이 아닌가?"
"아... 모르고 계셨군요."
"무엇을 말인가."
"현재 장령곡은 다른 분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저 또한 새로운 장령곡주님의 명을 받아서 늘 이 건물과 묘역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생전처럼 깔끔한 것입니다."
하인의 말에서는 묘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검마는 서서 턱을 괸 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새로운 장령곡주의 이름이 뭐지?"
이어진 하인의 말에,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벽지상(碧池祥)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심지어 검마도 깜짝 놀랐다. 하인이 어리둥절해 했다.
"왜 놀라시는지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강호무림에 별반 명성이 없으실텐데..."
"......"
나와 검마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큰 일이라는 사실에 심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도왕(賭王) 벽지상!
사천 제일의 도박왕인데다가 얼음처럼 차갑고 아리따운 절세미녀이자 절정고수인 그녀가 신임 장령곡주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