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2 ----------------------------------------------
천계(天界)
용왕곡에 진입한지 약 반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우우우우
협곡 사이로 거대한 운해(雲海)가 용처럼 굼실거리며 지나갔다. 원래 이런 현상을 육안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용왕곡의 지형이 워낙 험준하고 운무가 많았기에 장엄하기까지한 광경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절벽에 피어있던 나뭇가지에 차분히 선 채, 앞서나가는 검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검마는 나보다 약 삼십 장을 앞서서 절벽을 오르는 중이었다. 우리의 신법이면 절벽 정도를 오르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검마가 일부러 앞장서서 천천히 가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운무(雲霧)로 이루어진 절진(絶陣).
이것이 인위적인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는 몰라도, 용왕곡의 험준한 지형을 그저 신법만 이용해서 파고들려고 하다가는 평생 이 안에서 헤맬 거라는 게 검마의 말이었다. 그는 진법에도 나름대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앞서가면서 위험한 장소를 찾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봉우리의 정상으로 훌쩍 뛰어오른 검마가 내게 전음을 보냈다.
[ 여기로 오게.]
휘익!
나는 검마를 따라서 험준한 협곡 사이에 나 있는 봉우리로 올라갔다. 절벽은 수백 장이나 되는데도 고작해야 서있을 곳이 일 장 넓이밖에 되지 않아서, 뾰족산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다. 기다리고 있던 검마가 내게 말했다.
"가슴이 뛰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이 절진의 중앙에 거의 다 왔어. 아무래도 이 곳에는 원래부터 천연의 결계같은 지형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걸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가공해서 한층 두려운 장소로 만들었던 모양일세."
그렇게 중얼거린 검마는 서쪽의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안개가 자욱해서 시정이 일 장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검마는 마치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가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안쪽에는 뭔가 가공할만한 존재가 있네."
"가공할만한 존재라면... 인간일까요?"
"그렇겠지. 고수의 직감이 쉴새없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고, 은근한 무형지기도 공기에 섞여서 느껴지는군."
"저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자네가 포착하기에는 아주 미묘하게 스쳐지나가는 낌새일세. 나도 이 절진에 들어와서 감각이 강렬해져서 느낀 것이니."
"......"
나는 현재 검마와 나의 무예수준 차이를 느낌과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 이 무시무시한 대자연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시킬 수 있다고? 몇십 리 밖에서?그게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지금 내 의념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개 너머의 존재는 백리정운의 말대로 무시무시한 고수인 게 틀림없었다. 검마는 그 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슬슬 결정해야겠군. 그 자를 만나면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그정도 고수가 우리를 선제공격하는 건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가?"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나아가서 그의 위치를 먼저 알아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 후에 기습해야겠죠."
"......"
내 말을 들은 검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라서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왜 그러십니까?"
"지극히 실전적인 사고방식이라서 말이지. 보통 후기지수 놈들이면 신비의 고수에게 경외심을 표하기 바쁠텐데, 자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를 어떻게 죽일까부터 생각하고 있군."
뭐지?
뭐가 잘못된지 몰라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잘못된 것입니까?"
"으하하하."
검마는 내 반문에 껄껄 웃었다.
"아닐세. 그저 자네는 뇌신류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네. 죽인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자신보다 고수인 자에게도 전혀 쫄아들지 않는군. 또한 아주 냉정해. 아주 실전에 특화된 사고방식이야."
"......!!"
"뇌신류... 생각할수록 대단한 유파이긴 해. 가르침과 훈련은 극히 실전적인데 심득과 한계치도 매우 높지. 강호 최정상급의 무술 종가라고 불릴 만 해."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 뇌신류에서 훈련받았다? 내 사고방식이?'
그럴지도 모른다.
무술인생 백여 년 중에서 7할 이상을 뇌신류에서 수학하며 죽어라 훈련받았다. 이광의 훈련방식은 명룡자만큼이나 혹독해서 때로는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걸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뇌신류에서 가르치는 실전요령이나 교전수칙같은 게 내 본능 속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별로 달갑지 않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뭔가 내면에서 전투본능같은 게 끓어오른다. 내 앞을 가로막는 걸 모조리 부수고 박살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다. 그 때문인지 뇌신류의 훈련 중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꼭 포함되기도 했었다.
내가 침묵하자 검마가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마주할 상대는 투마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적일세. 돌아가려면 지금이 기회일 거라고 생각하네."
"... 그럼 돌아가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검마가 투덜거렸다.
"패기가 없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용왕곡에 숨어있는 자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래, 그렇다.
이 정도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내가 나중에 따로 목숨을 걸어도 되는 일에 - 검마까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 판단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검마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음... 큰일났군."
"네?"
"이야기하던 중에 저쪽에서 먼저 몸이 달아버린 모양이야. 곧 달려들 것 같네."
"네?!"
슈웅 -
검마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난데없는 파공음과 함께, 어디에선가 무식하게 거대한 검기(劍氣)가 천공을 격해서 날아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며 검강을 끌어올렸다.
콰과광!!
나는 빠르게 검격을 날려서 검기를 쳐 내었지만 손이 얼얼했다. 왜냐하면 검기의 너비만 해도 무려 십여 장을 훌쩍 넘겼기에, 내포하고 있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강지기로도 그 공격을 힘겹게 버텨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 의념을 자유자재로 시전하는 고수!'
검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힘을 몇 배나 우겨넣을 수 있는 수련진경을 보유한 초고수! 한 수의 교환이었음에도 나는 금새 상대방과 나의 실력차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수십 년 동안 의념에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쿠르릉
우리가 서 있던 절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검마의 신형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갔다. 그는 이미 임전태세를 갖춰놓았던 것이다.
나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고는 멸혼보를 이용해서 다른 봉우리 쪽으로 넘어갔다. 천상제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쓸데없는 내공소모를 피하고 싶었다. 내 몸이 다시 발을 디딜만한 장소에 도달하자마자 거대한 외침이 들려왔다.
[ 네놈들은 누구냐?]
꽈릉!
그와 동시에 뇌음(雷音)이 격렬하게 터졌다. 정확히는 검마가 뿜어낸 검강과 상대가 뿜어낸 검강이 격돌하면서 거대한 기파(氣派)를 발생시켰고, 거기에 섞인 의념과 살기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나는 그 음파의 잔향에서 격전지가 어디인지 즉시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발 아래를 살피면서 멸혼보의 도약력을 이용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용왕곡은 일반인이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험지였다.
파앗
멸혼보를 이용해서 약 백여 장을 이동했을까? 나는 서서히 운무 너머에서 강렬한 의념이 충돌하며 연속으로 파괴를 이루는 걸 느꼈다. 검마는 방금 전에 의문의 고수가 공격해오자마자 달려들어서 초수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 하앗!]
검마의 의지가 집중되며 허공에 이기어검이 떠올랐다. 투명한 이기어검은 마치 공간을 절단시키듯 매끈한 검로를 그리며 휘어들어갔다. 나선형의 공격로는 검마가 익힌 무영탈혼검법의 특징이기도 했다.
동시에 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이기어검을 떨쳐내 버렸다. 나는 운무 너머로 보이는 거대하고 푸른 막(膜)을 보자 침음성을 흘렸다.
"호신강기(護身?氣)!"
단순한 호신진기와는 달리, 극도로 높은 내공과 경지가 필요한 최상승 방어술! 당연히 호신강기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의념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으며 호신강기 자체가 공격과 방어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 경우도 있었다. 호신강기는 그 자체로 무림의 정상을 달리는 절세고수의 증거인 것이다.
호신강기로 이기어검을 떨쳐낸 의문의 고수는 재밌다는 듯 사자후를 터뜨렸다.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 하하핫!! 꽤 하는구나!]
지이잉
그 순간이었다. 허공의 운무를 찢으며 마치 빛이 새어나오는 듯 했다. 실상은 그 고수 또한 이기어검을 만들어서 검마에게 광탄(光彈)처럼 날리는 중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숫자는 굉장히 많아서 심상치 않은 의념절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으음!!"
검마는 그 공격을 받아넘기면서 재차 반격해 들어갔고, 곧이어 두 절세고수는 한 올의 진기조차 아끼면서 사소한 초수를 다투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이 곳이 완전히 인간이 서있을 곳이 못 되는 지형인데도 한 줌의 땅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초식에 싣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가강!
카강!
격렬한 검음이 울리면서 휘황한 검강이 흩날리는 광경은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대략 이십여 장 근방까지 접근했으나 섣불리 다가가기가 망설여졌다. 운무가 짙은데도 잘 보이지 않아서 끼어들기도 힘들고, 끼어들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런 초고수들의 결전에서는 사소한 움직임이 승패를 가리기 때문이다.
' 젠장. 어떻게 하지?'
나는 망설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잠시 후 이를 악물고 더욱 접근했다. 이십여 장은 내가 생각할 때 그들의 파생절초를 안정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거리였으나, 더 접근해서 그들의 대결의 실체를 명확히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대략 십여 장 정도를 더욱 접근했을 때였다.
오싹
난데없이 신경을 갉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무형지기의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내 목숨을 절단낼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 날아온다는 증거였다. 나는 찰나지간에 그 공격의 방향을 알아냈고, 이윽고 집중력을 동원해서 검강을 휘둘렀다.
콰앙!
폭음과 함께 뇌전이 떨쳐졌다. 알고보니 뇌전을 머금은 기운이 은밀하게 내 후두부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급히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는데, 검마가 호통을 쳤다.
"여유가 넘치는군!"
스아앗
검마의 검에서 굴공검의 변화가 떨쳐졌다. 그와 동시에 공간이 통째로 왜곡되며 검마의 초식은 형태를 잃고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현란한 검로가 상대의 요혈을 꿰뚫어버리는 필살초식이었다.
' 걸렸어!'
의문의 고수는 귀찮아보이는 나를 제거하려고 한 호흡을 써서 기습을 가했는데, 그게 검마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빈틈을 노출시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굴공검의 난데없는 변화에 당황했는지 거기에 대항하지 않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검마는 상대방의 회피를 용납하지 않고 마치 뱀처럼 추가로 찔러들어갔다.
그대로 승부를 결정지으려던 검마였지만, 운무를 물처럼 헤치고 나아가던 검마의 쾌검은 난데없이 멈췄다. 자신의 검로를 거둔 검마는 훌쩍 공중제비를 돌아서 근처에 있던 봉우리로 올라가 버렸다.
왜 초수를 거둔 걸까?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이어진 검마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
"검뢰(劍雷)라니... 당신은 정말 내 생전에 본 적이 없는 검의 달인이구려."
나는 그 말에 용왕곡 고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검을 쳐다보았다. 꽤 가까운 거리라서인지 전광(電光)이 살아있는 것처럼 날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전광은 고요한 빛을 이루며 안개 속을 떠돌고 있었는데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 검뢰가 뭐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검마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어서, 그가 검뢰라는 경지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검마와 죽어라 싸우고 있던 용왕곡의 고수가 검뢰를 거두고는 육합전성을 날렸다.
[ 나도 마찬가지다. 너는 백련교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한데, 중원에 이런 검도고수가 있었던가?]
"물론 나는 백련교인이 아니오. 나는 무영문을 이끄는 검마 서문대룡이라 하며, 나를 따라온 건 내 제자요."
[ 검마... 사파제일고수 말이냐?]
"그게 바로 나요."
[ 중원 놈들은 허명만 가득하다 생각했는데 오늘 내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구나.]
용왕곡의 고수는 찬탄하는 듯 했다. 검마의 무위(武威)가 같은 무인으로써 존경할만한 수준이기 때문인 듯 했다. 나는 그들의 무공수준이 거의 대등한 지경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내가 닿기에는 한참 먼 지경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용왕곡의 고수가 자기자신을 소개했다.
[ 나는 독고성(獨孤星)이다.]
독고성?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검마도 의혹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이며 사문이 어디요?"
[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대략 짐작은 가오만 직접 듣고싶군."
[ 짐작이라... 그래, 네 짐작을 어디 말해보아라.]
독고성이 검마를 비웃는 듯 말했다. 마치 자신의 사문을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검법과 비슷한 걸 많이 보고 느낀 적이 있소. 다만 당신의 것처럼 강력하고 두렵기 짝이 없는 절세검법은 아니었소. 그런지라 지금도 약간 긴가민가 하고 있는 것이오."
[ 뭐라고?]
"그 검법의 이름은 뇌영검법(雷影劍法)이었지."
[ ......!!]
검마의 말에 독고성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가 당황하는 게 운무 너머에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독고성."
이어진 검마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뇌신류(雷神流)의 고수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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