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2 ----------------------------------------------
천계(天界)
투웅!!
나와 검마의 옆으로 풍신대 한 명의 시체가 튕겨져 나갔다. 시체라고 단정지은 이유는 그 자의 목이 이미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찰나에 베인 흔적으로 보아서 뇌공섬의 회류(回流)에 말려들었다는 걸 간파했다.
' 뇌공섬 한 방으로 적어도 열 놈은 죽였겠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대나무숲의 중심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장내는 혼전(混戰)의 양상이었다.
진소청을 가운데에 두고 풍신대의 절정고수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들은 더러 내공을 모아서 합벽진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방금 전 펼쳐진 뇌공섬 때문에 꽤 많은 숫자가 죽었는지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풍신대 고수들은 눈 하나 꿈쩍않고 악에 받쳐서 덤벼드는 듯 했다.
까앙!
카강
그리고 적어도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에게 공격받고 있는 진소청은 그 자리에서 창을 휘두르며 분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눈은 한치의 동요도 없었으며 전신에 흐르는 땀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진소청이 한 수를 쓸 때마다 풍신대의 고수들은 수십 번의 공격을 하는 셈이었지만, 진소청은 의념을 이용해서 그 모든 공격을 유연하게 받아넘기고 되려 반격을 하고 있었다.
나와 검마가 장내에 나타나는 순간 그들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왠 풍신류의 장한이었는데 그 자는 바로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쓔칵
도광(刀光)이 격렬하게 튀었다. 도속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절정고수인게 틀림없었지만, 상대가 검마라는 게 운이 나빴다. 검마는 그의 습격을 가볍게 흘려낸 후 되려 목을 잡아채서 대나무숲에 던져 버렸다.
"커어억!!"
비명을 지르며 그가 대나무숲으로 날아가자 장내에 소요가 찾아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검마의 실력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풍신류 고수들 중에서 지위가 높아보이는 중늙은이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너희는 누구냐?"
"나는 무영문의 검마요."
"검마!!"
중늙은이를 포함한 풍신류 고수들이 흠칫했다. 심지어는 이 소요 속에서 체력을 조용히 회복시키고 있던 진소청도 눈에 이채를 띄며 그를 바라보는 기색이었다. 검마는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게 그리 놀랍소?"
중늙은이가 으르렁거렸다.
"왔으면 저 진소청 놈을 죽여라."
"......"
검마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도 그러고싶은데, 잠시 진소청에게 할 말이 있소."
"뭐? 무슨 개소리냐."
"유예를 주시오. 그러면 가세하겠소."
중늙은이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빌어먹을. 네놈 따위가 감히 이래라 저래라할 정도로 풍신류가 만만해 보이느냐."
"누가 만만하게 본댔소? 피차 같은 배를 탔으니 사소한 요구 정도는 들어달란 말이지."
"... 멋대로 해라."
그는 한풀 꺾인 기색이었다. 원래 그의 자존심으로는 검마의 요구가 가당찮은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이 자리에서 검마의 조력은 절대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검마가 이 자리에서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풍신류는 더욱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풍신류 고수들이 길을 터 주자 나와 검마는 진소청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진소청의 현재상태를 살피자 침음성을 흘렸다.
' 내공을 상당히 소모했고 피로해 보이지만... 큰 상처는 하나도 없구나. 아직 전력의 7할을 남겨둔 상태다.'
초라해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진소청의 능력에 전율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풍신류의 시체만 해도 20구가 넘어가는데, 그들을 격살하는 동안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전력을 보존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 검마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풍신대와 양패구상 혹은 그 이상을 해냈을지도 모른다.
검마는 진소청과 일 장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그는 물끄러미 진소청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진소청은 꽤 숨을 골랐는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파제일인이 검마 서문대룡이라 하더니 과연 그렇군요. 명성은 되려 낮은 감이 있었군요."
"하하, 칭찬 고맙네. 그런 자네도 굉장한 실력이군. 설마 백련교 사대무류인 풍신류의 고수들을 이렇게까지 처발라버릴 줄이야."
검마의 말에 주변에 있던 풍신류 고수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특히 지위가 높아보이는 중늙은이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검마! 개소리 말고 싸워라! 여기 장난하러 왔느냐?"
그러자 검마는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개소리 개소리 하는데 당신은 얼마나 잘난 사람이길래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의 성명별호부터 밝히시오."
"나는 풍신류의 장로인 용무양이다."
검마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신이 장로였다고? 대단하군... 너무 약해보여서 몰라보았소."
"으으... 이 개같은 놈이."
풍신류의 장로 용무양은 결국 폭발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됐다! 당장 꺼져라. 진소청은 우리가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검마는 그의 말을 들은체 만체 하면서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는 진소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광은 이 근처에 있나?"
"......!!"
검마의 말을 들은 진소청은 미미하게 경동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검마의 질문이 그에게 있어서 핵심을 찔렀다는 뜻이었다. 진소청은 이내 안색을 회복하더니 말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숨길 필요 없네. 내가 이광이라면 틀림없이 그리하겠지."
"......"
"완벽한 작전이야. 자네가 풍신대의 절반을 처리하고, 이광이 절반... 절세고수 두 명이 날뛰면 천하의 풍신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대나무숲도 미리 자네들이 선점해 놓은 지형이겠지? 합공을 하기에 좋지 않으니 말이야."
진소청은 잠시 생각하다가 검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뭘 원하십니까?"
"별거 아닐세. 충고를 해 주러 온 거니."
"충고라고요?"
검마는 잠시 입을 달싹였다. 행동으로 보아서 진소청에게 전음을 보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전음을 들은 진소청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침착한 진소청이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검마의 전음에는 중대한 내용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잠시 후 말했다.
"알겠습니다."
"후후. 그럼 다음에 보세."
타앗
검마는 말이 끝나자마자 경공으로 진소청 앞을 벗어나 버렸다. 나 또한 얼떨결에 검마를 따라서 물러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자 중늙은이를 포함한 풍신류의 풍신대들이 우리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이 개자식... 무슨 흉계를 꾸민 거냐."
"흉계라니? 처음부터 진소청과 얘기하러 왔다고 했잖소."
"웃기지 마라. 당장 털어놓지 않으면 네놈도 뇌신류와 한 패로 취급해서 쓸어버리겠다."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풍신류의 고수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듯 했다.
퍼퍼펑
잠시 후 검마의 주변에 있던 풍신대 중 세 명이 검마에게 달려들다가 그대로 즉사했다. 그들은 검마가 암중에 끌어올린 이기어검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검마가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이건 정당방위요. 더 해보겠다면 말리지 않겠소."
"......!!"
풍신류 고수들은 흉맹한 살기를 솟구쳤다. 아직도 풍신대는 30여명 이상 남아있는데다 용무양은 초절정고수로 보였기에 저들은 우리를 상대로 충분한 우위를 자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용무양은 이내 현실을 깨닫고 손을 저었다.
"... 보내 줘라."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풍신류이지만, 그들에게는 딱 진소청과 양패구상할만한 힘밖에 없었다. 공연히 검마까지 적으로 돌릴 경우 이 자리에서 몰살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용무양은 백련교와 마도팔문의 예속관계를 들어서 검마를 압박했지만 그게 통하지 않자 제풀에 지친 모양이었다.
"그러셔야지."
검마는 씩 웃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파아앗
나는 검마를 뒤따르며 말했다.
"진소청에게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대나무의 마디를 딛고 높이 솟구쳐오르던 검마가 말했다.
"뇌신류와 불가침조약을 맺고싶다고 말했네."
"네?"
검마는 시선을 앞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앞에 중요한 게 있는 듯 했다.
"뭐, 지금부터가 진짜겠지. 긴장하고 있는 게 좋을걸세."
긴장이라니 무슨 말인가?
풍신류와 진소청의 전투현장을 벗어난 게 아닌가?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나는 갑자기 무시무시한 불길함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전방을 쳐다보았다.
"윽..."
경공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다.
이 앞에서 풍겨오는 가공할만한 살기는 틀림없이 의념으로 정제된 것이며, 상대방을 은연중에 압박하는 무형지기이기도 했다. 의념을 모르고 수준이 낮은 자라면 무형지기를 받는 것만으로도 기절하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강호에서 무형지기를 사용할만한 초절정고수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기운은 내게 매우 익숙했다. 수많은 살의를 마주해본 나였지만, 이 살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당장 알 수 있었다. 나는 의념으로 그의 살기를 흘려내면서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 생각보단 그리 압박이 강하지 않군.'
저벅...
대나무숲 저편에서 한 명의 인영이 걸어나왔다.
나와 검마 앞에 마주 선 그 자는 진소청처럼 한 자루의 창(槍)을 들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검(劍)을 패용하고 있었다. 청수한 이목에 무심한 눈빛은 그를 마치 백면서생처럼 느끼게 했으나, 실상 그는 수십 년동안 절세무공을 단련해 온 달인 중의 달인이었다.
검마는 그를 마주하자 포권했다.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군. 반갑소 이광."
"......"
그랬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건 삼절 이광!
뇌신류의 전승자이자 청룡무관의 주인, 그리고 황궁 사대고수인 사신위 청룡이자 창 한 자루로 천하를 오시하는 절세고수! 나와 백여 년에 걸친 악연을 지니고 있는 이광이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광은 천천히 우리 둘을 쓸어보는 듯 했다. 그 무심한 눈빛은 마치 침착함을 잃지 않는 맹호를 떠올리게 했다. 고요해 보이는 눈빛이지만 실상은 저 눈빛이야말로 이광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이광이 입을 열었다.
"무영문에 대한 판단을 수정해야겠군. 이 정도의 고수였을줄은..."
이광은 한 눈에 검마의 무위를 알아본 듯 했다. 아마 검마가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대화나 하고있지는 않을 것이다.
검마가 껄껄 웃었다.
"하하... 불민하군. 나야말로 삼절 이광의 실력이 일대종사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에 감탄했소."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지."
여상하게 대꾸한 이광이 검마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검마 서문대룡. 나는 당신이 백련교에 복속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앞으로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갈 생각이오?"
이광의 말은 전에 없이 정중했다. 그것은 이광이 검마를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고수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원래 이광의 성격이라면 자신보다 약한 적이라면 불문곡직하고 달려들어서 목을 치는 게 보통인 것이다. 이광의 말을 들은 검마가 대답했다.
"내게는 내 문파를 살리기 위한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소. 허나 내가 백련교와 진심으로 한 배를 탈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제자를 가만 놔두고 오진 않았을 거요.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소?"
"......"
이광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원하는 게 뭐요?"
검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추상적인 질문이군.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하오."
"우리 뇌신류와 백련교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뭘 얻으려는 건지 묻고있는 거요."
검마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반대요. 나는 당신들의 싸움에 전혀 관계하고 싶지 않소.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오."
"무슨 뜻이지?"
검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신의 제자가 백련교의 하부세력인 마도팔문을 치겠답시고 전면에 뛰쳐나온 덕에 나도 움직여야 했단 말이오. 이게 무슨 민폐요?"
이광은 두뇌가 뛰어난 자 답게 순식간에 검마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했다. 그래서 바로 머리를 까닥하고 숙이며 말했다.
"미안하군. 무영문은 앞으로 건드리지 않겠소."
검마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백련교의 하부세력인 이상 외부의 공격이나 도발에는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소청이 마도팔마를 노리는 이상 검마와 싸우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광은 지금까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듯 했으나, 이광 이상의 절세고수인 검마와 섣불리 겨루는 건 손해일 뿐이라고 여긴 듯 했다. 그래서 즉시 자신의 자존심을 접고 검마에게 화해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검마는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론 부족하군."
이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 지금 시간이 없소. 남은 얘기는 다음에 했으면 하오."
그는 당장이라도 진소청을 도와서 풍신대를 멸살하러 가야하는 상태였다. 진소청 혼자서도 풍신대와 양패구상할 수 있겠지만, 이광은 반드시 진소청을 살려야만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너무 지체하면 큰일나는 것이다.
"제멋대로군! 말해두지만 내 요구를 듣지 않으면 나는 내 맘대로 할 생각이오."
검마가 강하게 나오자 이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뭐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에서 들어주겠소."
"별로 큰 일은 아니오."
검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 우리 무영문의 백 호법과 대련을 해 줬으면 하오. 고수와의 대련이 좋은 자극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
이광은 뜻밖이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기세를 가늠하던 이광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흠... 그 청년이 호법이라고? 소문주가 아니라?"
"그렇소."
"... 알았소. 다만 오늘은 안 되오."
"물론이오. 내가 다음에 날을 잡아서 백 호법과 함께 청룡무관을 찾아가겠소."
"기다리리다."
파앗!
말이 끝나자마자 이광은 빛살처럼 뇌영보 천주살을 사용해서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뛰쳐가 버렸다. 당장이라도 가세해서 풍신류 고수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광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후 검마에게 말했다.
"제가 이광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나는 검마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짐짓 이광에게 빚을 지워서 나와의 대련기회를 만들어주고, 내가 그의 실력을 알아볼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로서는 이광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이길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가 관여하지 않았을 때 7년 후의 이광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아보는 거지."
"......"
"자신감을 가지게. 이광과 겨루는 건 분명히 큰 재산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검마는 대나무숲 뒤편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비명소리와 칼날 부딪히는 소리, 강기의 파열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는 이광이 한바탕 날뛰는 모양이었다.
"저 자가 자멸하기 전에 얻을 건 얻어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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