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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했지만, 이내 현실을 인식했다.
백련교주와 황제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백련교의 힘으로 황궁을 멸(滅)하는 게 우리의 주 계획이었는데 이래서는 전제부터 틀려먹게 된 것이다. 상황이 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많았다. 이 정도로 정신력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나는 이내 침착하게 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어찌 된 일인지 말해주시오."
망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백련교주에게 황궁을 치라고 종용해 왔소. 서신을 몇 통이나 보냈으며, 한 번은 직접 만나서 진언을 올리기까지 했지. 그러나 백련교주는 줄곧 무심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황궁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선언한 것이오."
"그걸 호법사자나 하급 신도들에게 전파한 것이오?"
"그렇소. 실질적으로는 한참 전에 황궁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고 봐야겠지."
"......"
우리가 끼어들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는 건가?
' 뭔가 석연치 않군...'
내가 곰곰히 생각하자 망량이 말했다.
"나는 두 가지 복안을 지니고 있는데 들어 보겠소?"
"말해 보시오."
"첫째는 황궁을 즉시 타도하는 일을 포기하고 반천맹의 힘을 기르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무영문에서 무공을 수련하면 되오. 그렇게 기회를 보고 있다가 황궁을 쓰러뜨릴 기회를 보는 전략이오. 적어도 10년을 내다보면 되겠지."
나는 첫 번째 전략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속전속결로 황궁을 쓰러뜨리는 걸 포기하고 오로지 내 역량을 키울 시간을 마련하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오?"
망량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속전속결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 당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오."
"극단적인 방법이라면..."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백련교주에게 찾아가서 그가 황궁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진의(眞意)를 물어보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북극에 가서 막야의 2차 봉인을 해제하는 것이오."
"......"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죽을 확률이 높군."
"그렇소."
"그러나 하나라도 성공하면 다음 전생에서 이득을 볼 확률이 높겠구려."
망량은 꺼지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죽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구려."
"아니오. 만일 둘 다 성공한다면 지금 이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겠소?"
"... 어떻게 하고 싶소."
망량의 목소리는 약간 낮고 음울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시종일관 내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망량이지만, 생사의 선택까지도 쉽게 내밀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망량이 말한 선택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 백련교주를 찾아가서 호소하면, 그가 황궁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까?'
나는 첫 번째 경우를 생각하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련교주는 음흉하다.
도저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뒤통수를 맞아서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 인물이 생면부지의 내가 찾아가서 호소한들 자신의 진짜 뜻을 가르쳐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면 북극에 가서 수요 막야의 2차 봉인을 해제하면 어떻게 될까.
일이 어떻게 풀릴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옛 지배자]가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고, 그가 내게 어떤 시련과 고난을 줄지 모른다. 어쩌면 그 존재에게 산 채로 씹어먹히거나 갈기갈기 찢길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고 싸워서 이길 존재도 아니니, 전적으로 그 존재가 내게 호의적이기만을 바랄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만일 내가 죽으면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오?"
내 질문에 망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까지처럼 백련교의 하부세력이자 화신류로써 반천맹을 이끌며 살게 되겠지. 황궁이 만행을 저지르는지 아닌지를 최대한 감시하며 살 것이오."
"그렇군."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입을 연 것은 망량이었다.
"백웅. 나는 가끔 당신이 멀게 느껴지오."
망량의 말에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망량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남일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두 가지요. 하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지."
"그런 경우가 많지 않소? 세상사람들 중에 죽음에 호들갑떨지 않는 사람도 많던데."
망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모두가 그저 죽음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며 막연히 자기자신을 투영한 거울에 비춰보고 있을 뿐이오. 아무리 당당한 사내대장부라도 죽음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숨길 뿐이오.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오."
"하지만 내 기억에서 당신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소."
"하하, 의연하다는 것은 공포를 감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거요. 자신의 정신력을 갈고닦은 자가 정신적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오."
망량이 오화칠금선으로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당신은 어느쪽도 아니오. 죽음을 이해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이 보통 인간과는 다른 차원에 접해 있소. 그건 납득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차라리..."
"차라리?"
"친숙하게 여기고 있는 듯 하오."
"......"
반박할 말이 없다.
"나는 죽음을 도저히 그렇게는 여길 수 없소..."
쪼르륵
한탄하듯 말한 망량이 왠 술병을 가져와서는 내게 술을 따랐다. 아마 죽엽청인 듯 했다. 맑은 수면이 일렁이자 망량이 말했다.
"그 잔을 비우고 대답해 주시오."
맨정신으로 할 대답이 아니란 소리인가.
확실히, 앞으로 장기전으로 가면 황궁을 이길 가능성은 갈수록 사라지게 된다. 초상기인이 양산되고 황궁에 마인(魔人)이 들끓게 되면 이길 수가 없다. 백련교주가 분노해서 황궁을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전략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가능성이 극도로 높은 선택을, 지금 당장 택해야 한다. 그것도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도박이었다. 망량의 이런 배려는 당연한 것이다.
나는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목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감탄했다.
"술맛 좋군!"
망량이 싱긋 웃었다.
"흐흐, 비장의 죽엽청이오. 아주 꽁꽁 숨겨두던 거요."
"다음번에는 내놓으라고 떼를 쓸 거요."
"그럼 나는 더 깊숙히 감추겠지."
"뭐라고?"
나와 망량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껄껄 웃어댔다.
그렇게 반 각 정도를 그저 웃어대다가 어느 순간 웃음이 멈추었다. 나는 완전히 맑아진 눈빛으로 망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바로 막야의 봉인을 풀러 가겠소."
마음을 정했다.
[옛 지배자]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야의 힘에 걸어봐야겠다.
"부디 잘 되기를 바라겠소."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무엇이오?"
"내가 막야 덕분에 너무 강해져서 당신의 사부인 제망량이 나를 봉인하려고 들면 어떻게 하오?"
내 장난기어린 질문에 망량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 사부는 늘 농담처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존재요. 설혹 신이 되더라도 사부님과 싸우지 않는 걸 추천하오. 그냥 도망치는 게 낫겠지."
"뭐 그래야겠군."
나는 아직도 달기의 비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달기가 항우에게 얻어맞아서 소멸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항우의 힘 그자체라기 보다는 내게 걸려있던 파천(破天)의 가호가 모종의 역할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달기같은 마왕급 존재도 두려워하는 가호를 내릴 수 있다면, 역시 제망량은 엄청난 존재인 것이다.
"미호에게는 잘 말해 주시오."
"알았소."
미호를 보고 갈 수는 없다. 미호는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귀신같기 때문에, 내가 찾아가서 몇 마디 하기만 하면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내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다가 사망하는 것은 미호에게 있어서 최악의 경우이므로 목숨걸고 나를 막을 게 뻔하다.
파앗!
나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비등을 써서 북극으로 이동했다. 예전과 같이 하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빙설의 대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지 위에 서서 천천히 칠요 중 하나인 수요 막야를 꺼냈다.
막야는 수천 년 전 상고시대의 유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고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번 봉인이 풀렸기 때문에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망량은 술법재능이 크게 향상되었을 정도다.
' 만일 막야의 힘을 모두 사용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에는 농담삼아 신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정말로 대라신선급 존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칠요라고 하는 기보에는 그 정도의 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막야에 검기를 쏟아부어서 내 손목에 길게 그었다. 나는 인체에 능통했으므로 어떻게 자르면 힘줄과 골격에 큰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피가 많이 나오게 자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푸슛!!!
피가 울컥거리며 터져나왔으며 막야의 검신(劍身)은 선혈으로 물들었다. 나는 공력을 운용하며 빠르게 출혈을 멈췄다. 막야에 충분히 피를 먹였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들었던 대로 막야를 들어서 북극의 대지에 크게 꽂아넣었다.
' 이게 막야의 2차봉인 해제법!'
......
한참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정말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우우우우 -
"아니...!!"
나는 땅에 꽂은 막야에서 은은한 무지개빛이 일어나더니, 갑자기 하늘이 뒤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이 쨍쨍하던 하늘은 갑자기 무시무시한 어둠이 일어나더니 흑암(黑暗)으로 채워졌고, 구름조차도 황급히 저 멀리로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이렇게 급격한 기상현상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당혹했지만, 잠시 후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 밤이 오고 있다...!!'
극주(極晝)라고 불리는 현상은 북극권에서 하루종일 낮이 계속되는 현상이라 했다. 그리고 망량의 말에 따르면 극주는 아마도 앞으로도 몇 달은 계속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낮이 끝나버리고 밤이 찾아온 것이다.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밤하늘로 천공이 채색되자, 그 한가운데에서 신령스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비단처럼 별천지에 아로새겨진 그 빛은 차라리 칠채(七彩)로 빛나는 새벽과 같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진풍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기에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 빛의 사이에서 무언가가 흘러 나왔다.
쿠우우우...
거대한 '무언가'가 현실을 뚫고 강제로 튀어나오려는 광경! 나는 저것이 대단히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고, 이윽고 그 실체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칠채로 빛나는 빛의 장막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거대한 곤충의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무려 수십 개나 되는 눈을 전신에 지니고 있는 끔찍한 형태의 마수(魔獸)였다. 촉수는 보이지 않았으나 도무지 인간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신체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몸의 크기가 삼 장은 되는 듯 했다.
' 저게 고대의 마수인가...'
쿠웅.
고대의 마수는 내 앞에 내려앉은 후 괴어(怪語)로 무언가를 말했다.
[ #*&(@(@저주*&$*... @&!시간@&!*#&* 왜 너는 @&*#^*!인가, 이상@&%^&*#.]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주 일부분은 알 것 같지만 역시 해석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래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잠자코 마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마수는 갑자기 흉측한 입을 열어서 점막같은 걸 꿈틀거렸다.
쿠퀘에엑
퍼엉!
폭음이 울린 후, 마수의 입에서 튀어나간 기묘한 광선이 허공에 왠 통로를 만들어냈다.
사사삿
그리고는 나에게 들어가라는 듯 앞다리를 휘두르며 보채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 통로가 공간과 공간을 잇는 신비한 마도(魔道)의 능력인 듯 했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제길.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
통로 안에 한 걸음을 내딛자, 갑작스럽게 주변 광경이 바뀌었다. 신비스러운 밤의 풍경은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광경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딛고 있는 지면조차도 공허하여 사방이 흰색으로 비치고 있을 뿐이다.
여긴 어디지?
내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말이 들려왔다. 인간의 말로 해석이 되긴 하지만 그 말의 근본이 괴어라는 걸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 네가 계약을 이행하러 온 건가.]
스아아앗
나는 공허 속에서 나타난 존재를 보자 순간 몸서리를 쳤다.
' 끔찍하군...!!'
뒤틀리며 질서를 부정하는 듯한, 역하고 불길한 해골 거인!
형태를 도저히 형언할 수가 없다. 달기와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존재가 해골 거인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아마 달기와 마찬가지로 격하(格下)의 존재는 관측조차 불가능하다는 이족 특유의 능력 때문일 것이리라.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이 [옛 지배자]이자 [바람을 타고 걷는 자]...!!
암천향에서 보았던 이래로 두 번째로 맞이하는 [옛 지배자]였다. 정확히는 황궁에서 느꼈던 괴이한 존재가 있었으나 그것은 간접적인 접촉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옛 지배자]답게 무시무시한 마력(魔力)을 보유하고 있는지, 내 몸이 쉴새없이 위험신호를 울리고 있었다.
아예 격이 다른 존재다.
이런 존재에게 인간은 절대 맞설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예감할 정도로 [바람을 타고 걷는 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자 [바람을 타고 걷는 자]가 말했다.
[ 이상하군. 왜 아무 능력도 없는 건가?]
"네?"
생뚱맞게 무슨 소리인 걸까?
하지만 내 반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람을 타고 걷는 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나의 이름은 이타콰. 계약에 따라 칠요를 해방한다.]
파아앗!!
빛이 갑자기 퍼져 나오더니 이타콰의 몸뚱이가 칠요 막야의 검신에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해골거인의 영혼 그 자체가 막야에 옮겨지는 듯한 일이었다. 나는 경악해서 그 광경을 쳐다보았지만 이타콰의 영혼은 엄청난 크기인 듯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서 북극의 대지에 널부러져 있었다. 한쪽 손에는 칠요 막야를 손에 들고 있는 상태였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칠요를 휘둘러보았지만 뭔가 굉장한 위력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2차 봉인이 풀린 거 맞...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밋밋하다. 막야의 2차봉인이 풀린 것 같긴 한데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 무슨 능력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 에이 살았으면 됐지 뭐.'
내가 좋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투쾅!!
갑자기 천공에서 왠 거대한 것이 내 몸뚱이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토해냈다.
너무 아프다!
실제로 내 몸을 물리적으로 관통한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영체(靈體)가 날아들어서 내 상반신을 작살내 버린 것이다. 커다란 기둥에 몸뚱이가 물고기처럼 꿰여버린 기분이었다. 엄청난 고통과 파괴력에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였다.
[ 이토록 사악한 기운이라니! 전력을 다해서 물리쳐 주마!]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익히 들은 적이 있는 신어(神語)의 기색에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외쳤다.
"예(?)님?!"
신화시대의 영웅이자 내게 적궁백시 아홉 살을 내린 대라신선! 그 예가 난데없이 내 몸뚱이에 강림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내 몸을 꿰뚫고있는 공격이 바로 백시(白矢)였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투명하지만, 모든 영체를 일격에 격살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신살(神殺) 공격이 나를 격중시킨 것이다.
예가 말했다.
[ 걱정 말아라! 그대의 영혼을 구원해 주리라!]
"자... 자... 잠깐! 사악한 기운이 대체 뭡니까?!"
[ 그대가 지니고 있는 막야에는 옛 지배자의 혼이 깃들어 있구나! 내 전력을 다해도 그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허나 최선을 다 하겠노라!]
옛 지배자의 혼?
나는 그 순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 막야의 2차봉인을 푼다는 건, [옛 지배자] 이타콰의 혼이 칠요 막야에 들어간다는 뜻이었구나! 그리고 예는 이타콰의 사악한 힘을 느끼고 내게 강림한 것이다.'
쿠오오오
"......"
나는 천공에 고고히 떠 있는 붉은 환염(幻炎)의 활을 보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저 환염의 활이 바로 예의 무력을 상징하는 적궁(赤弓)인 것이다. 그리고 예는 적궁에서 발사한 백시로 무려 태양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나는 예에게 항의했다.
"그럼 아까 이타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왜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 나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하지만 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옛 지배자가 막야에 흡수된 지금이 절호의 기회! 나중에 막야가 진정한 힘을 되찾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네가 죽으면 소유자의 죽음때문에 칠요가 재봉인될 것이다. 걱정말고 순응하라 필멸자여.]
나는 열받아서 외쳤다.
"누구 맘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나는 이런 데서 죽을 수 없어!"
[ 그대의 혼은 천계에서 보살필 것이다.]
"크윽..."
나는 큰일났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예는 축복을 빌미로 내 몸에 강신해서 적궁과 백시를 소환한 후 나 자신에게 쏘고 있다. 그래서 비등을 써서 도망치지도 못한다.
이대로라면 적궁백시 9발을 다 맞았을 때 내가 살아남을 확률은 아예 없었다. 나는 막야에 힘을 줘서 어떻게든 해 보려 했지만, 막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2차봉인을 해제한 막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최후의 발악으로 여동빈을 불렀다.
"여동빈! 도와주시오!"
그러자 여동빈은 아무런 반응이 없고 예의 말이 다시금 들려 왔다.
[ 천계의 항렬은 내가 그보다 앞서는 것! 또한 마(魔)를 퇴치하는 것이니 그가 거부할 리가 있겠느냐?]
"으으...!!"
[ 괜찮다. 이번 공격으로 끝내 주마!]
투콰아아아앙
백시의 2격째가 내 머리를 관통했다. 마찬가지로 물리적 공격은 아니었고 영체공격이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망치에 빻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백시의 위력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 나... 왜 안 죽는...'
즉사하지 않는 게 더 원망스럽다. 마치 종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꽝꽝 울리는 진동을 수백배 증폭시킨 듯한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신에서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나중에 고문을 겪는다 해도 이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예가 미안한 듯 말했다.
[ 그대의 정신력이 너무 강력하여 신살영격으로도 잘 안되는구나! 한 발로 대요괴를 없애버리는 공격이거늘!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윽..."
투콰아앙!!
3격째를 먹자 이제 대답할 기력이 거의 남지 않았고, 4격과 5격을 지나자 주마등이 몇십 번이나 회오리처럼 대뇌 안에서 몰아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력을 쥐어짜이는 듯한 무시무시한 괴로움 때문에 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투콰아아앙!!
[ 으음! 6발로도 안되다니!]
딴죽걸 힘도 없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 죽... 여줘..."
[ 최선을 다해보마!]
투콰아앙
투콰아앙
투콰아아아앙
9격이 끝났을 때, 나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손이 서서히 땅에 떨어지는 게 느껴지며 몸이 가벼워진다.
[ 그대는 영웅이다...]
대라신선 예의 마지막 한 마디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것이 나의 15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