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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214화 (21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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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비무가 끝난 뒤 망량에게 말했다.

"이것저것 할 일은 많지만 미호에게 가 보겠소."

망량은 응당 그래야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지."

앞으로 할 일이 많다. 게다가 백련교의 황궁 습격이 개시된 후에는 눈코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나는 그 전에 미호를 만나서 흑요석의 일을 확인해 봐야 했다.

파앗

교토의 천황궁에 도착하자, 나는 미호가 아니라 눈이 텅 비어있는 천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호의 매혹이 가장 강력하게 걸려있는 인간인지라 이성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듯, 멍하니 앉아서 푸른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외부의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 인형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그를 내버려두고 미호를 찾으려 할 때였다.

"... 그녀는... 지금 없다..."

뜻밖에도 천황이 말을 했다.

"......!!"

내가 놀라서 그 쪽을 바라보자, 천황은 여전히 텅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천황의 눈에는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을 열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확연히 정상인의 안색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천황?"

"... 그리 불릴 자격이 없지... 후후..."

천황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속으로 정말 놀라고 있었다.

' 이 자가 의식이 있다고?'

동영의 천황은 미호가 지상에 지니고 있는 권력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천황을 홀리지 않으면 미호는 일개 대요괴에 지나지 않으므로 미호가 늘 매혹술을 강력하게 펼쳐두는 것이다. 진심을 다하는 미호의 매혹력은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서, 특별한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듯한 천황이 이성을 지니고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천황이 말했다. 이제는 온전히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온 듯 했다.

"그녀는 흑요석 광산을 직접 확인해보러 갔네. 그래서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물론.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랑하는 인간이지. 이름은 백웅이고."

"......"

어떻게 된 것일까?

매혹이 풀려있는 건 어떻게든 되었다 치더라도 그는 어떻게 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천황이 말했다.

"내가 제정신을 되찾은 것은 약 한 달 전의 일이네. 그 전까지 나는 이성을 빼앗겨서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였지만, 갑자기 이성이 돌아오며 몸의 통제권을 얻을 수 있었지. 물론 그 사실을 귀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천손일족에 전해지는 주술로 위장했지만, 귀비가 하는 이야기와 정보를 옆에서 들을 수 있었네."

한 달 전.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곰곰하게 생각하던 중, 나는 한 달 전이 어떤 순간이었는지를 새삼 기억해 냈다. 내가 흑요석으로 망량과 미호에게 기억을 전달하고 3달 후, 즉 미호가 내게 천계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의 일이었다.

' 그 때의 미호는 흑요석에서 기억을 전달받은 영향으로 많이 흔들려 있었어. 그게 매혹술에 영향을 미친 걸까?'

내가 나름대로 유추를 해내고 있는 동안에 천황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꼭두각시 행세를 하지 않고 자네에게 직접 말을 걸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소."

솔직히 말해서 천황이 계속 백치 행세를 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만남은 천황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해서 쳐다보고 있자 천황이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주박에서 풀려나온 게 자네 덕분이기 때문일세. 고마워서일세."

"......"

"백치인 척 주술로 위장하며 그녀의 곁에서 많은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지. 그 대부분은 백웅 자네에 대한 연정이며, 호의며, 호기심이며, 지금껏 겪었던 수많은 모험들에 대해서였네. 그러다보니 자네들 일행의 사정도 본의아니게 알 수 있었던 거네."

"당신은 내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

"물론. 자네가 전생자(轉生者)라는 걸 들어서 알고 있네."

다 알고 있구나.

아마 미호는 내 기억에서 보았던 사실을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하면서 심심한 시간을 때웠던 모양이다. 이성을 숨겨두었던 천황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내 정체를 유추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한발 앞서서, 미호의 매혹이 풀린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추측한 듯 하다.

' 미호의 정신이 크게 동요하면서 매혹술이 깨졌던 거구나. 천황은 그 사이에 정신을 찾은 것이다.'

미호에게서 듣기로 매혹술은 미호의 선천적인 술법이며 고급술법이었다. 술자의 정신력이 흐트러지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한 후 천황에게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나때문에 매혹술이 깨졌다고는 해도, 내가 당신에게 호의적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소?"

천황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자네는 전생자이기 때문이야."

"무슨 말이오?"

"자네가 삶을 반복 거듭하며 무수한 정보와 경험을 축적하는 존재라면, 이렇게 특이한 경험을 쉽사리 보아넘기지 않겠지. 섣불리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느니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 할 것일세. 그렇지 않은가?"

"......"

나는 그만 입을 벌렸다.

'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확실히 나는 방금 전까지도 바로 천황을 제압하고 미호를 기다리려는 생각보다는, 그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를 얻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 했다. 천황은 미호의 혼잣말에서 내 성향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다. 비록 미호에게 홀려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원래부터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으리라.

천황이 씁쓸하게 웃었다.

"부탁이 있네.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해줄테니, 다음부터의 전생에서는 그녀에게 매혹술에 틈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주게. 최소한의 자유는 확보하고 싶군..."

거래제안이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큰 원한이 있지 않소? 당신이 준다는 정보를 어떻게 신뢰하지?"

내 질문에 천황이 손을 저었다.

"그렇지 않네. 나는 도리어 이 꼭두각시 생활도 크게 나쁘지 않다 생각했네."

"......?"

"이 동영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 그 거대한 동란의 시대에서는 강력한 유력 다이묘(大名)들도 처참하게 죽어갈 정도라서, 이름뿐인 천황은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비참한 처지였네. 도쿠가와는 나를 애완동물 정도로만 취급했지. 가만히 있었다면 굶어죽었을 것일세."

천황이 흐릿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구미호인 그녀가 나타나서 나를 매혹시켜서 교토의 천황궁을 장악하고, 정치적 수완으로 천황의 세력과 권리를 확보했네. 정확히는 그녀의 활동기반을 굳힌 것 뿐이겠지만, 나는 그 덕에 살아남은 것이야."

"미호에게 홀려있던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지 않소?"

"후... 배를 곯으며 현실의 괴로움에 하루하루 발버둥치느니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꼭두각시로 쓰이는 동안에 나는 꿈을 꾸는 듯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네. 뿐만 아니라 대요괴의 강력한 보호를 받고 있으니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가? 차라리 고마운 일이지."

"......"

생각의 전환이라고 해야할까, 낙천적이라 해야할까.

천황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의 것과 상당히 다른 점이 있었다. 어떤 점에서는 되려 그가 미호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천황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십여 년 후에 천계라고 하는 곳으로 자네와 함께 떠나려 생각하더군. 그러면 그 이후에 나는 도쿠가와 막부의 견제를 받으며 홀로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삶의 의욕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일세."

"흠... 원한이 없다 칩시다. 당신이 내게 줄 정보라는 게 무엇이오?"

"그 전에 약속해 주게. 내 일신의 안전과 비밀을 보장해 줄 것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소."

천황은 왠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린 후 말했다.

"그녀의 혼잣말을 듣기로 이 세상에는 이족(異族)이란 게 있나보더군. 그걸 듣고 생각해 본 결과, 이 땅에 존재하는 이족의 근거지가 어딘지 알 수 있었네. 그 곳에 간다면 자네가 찾는다는 칠요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족의 근거지!

아마 이건 그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정보였지만 미호가 캐내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미호의 이야기를 듣다가 최근에 유추해낸 정보인 듯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그게 어디요?"

"그 곳은 타카마가하라(高天原)라고 불리며 자네들이 생각하는 신계(神界)같은 곳일세. 그러나 내가 생각해보니, 바로 그 곳이야말로 이족의 근거지일 듯 하더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요?"

"천황에게만 비전(秘傳)되기를, 타카마가하라는 신(神)이 찾아온 대지가 아니라 불길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는 장소이며 통로일세. 그곳에서 도래한 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이 동영땅에서 신으로 군림한 곳이지. 나는 바로 그곳이 이족이라는 존재들이 거처하는 장소일 거라 생각하네."

타카마가하라.

나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되뇌다가 물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 있지?"

"고려(高麗)의 거창(居昌)이라는 지역에 타카마가하라의 통로가 있다고 알고 있네. 거기에 가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일세."

"고맙소."

"약속은 지켜주게..."

스스스스

잠시 후 그는 다시 백치 상태로 되돌아갔다. 정확히는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까지 끌고들어가서 매혹술에서 정신을 보호하는 술법으로 보였다. 이 상태에서도 오감은 멀쩡하므로 외부의 정보를 알 수 있으리라.

' 신기한 술법이군.'

나는 다시 천황을 깨웠다.

"일어나 보시오."

"... 무슨 일인가?"

"그 술법 나한테도 좀 가르쳐 주시오."

"음, 알겠네. 허나 이건 음양도(陰陽道)의 술법이라서 기본지식이 없으면 모를텐데..."

"상관없소."

일단 기억만 해두고 있으면 언제든 써먹을 수 있으리라.

천황은 망설이다가 술법의 요결과 주문, 그리고 수련방법을 내게 일러줬다. 술법 자체는 간단한지 전해듣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천황의 말대로 음양도를 배워야 익힐 수가 있는지, 뭔 소린지 못 알아듣는 부분이 많았다.

천황이 말했다.

"홍몽(鴻?)의 술(術)이라고 하는 것일세. 부디 잘 써주게."

천황은 이번에야말로 다시 무의식으로 자취를 감춘 듯 했다. 나는 그의 팔자가 참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난세에 천황이라는 걸로 태어나서 비참한 삶이 예약되어 있었는데 미호에게 휘둘리다가 결국 자신의 의식을 감추면서 생존을 도모하게 되다니. 하지만 달리 보자면 이렇게 휘둘리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 천황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 흑요석에서 빼줘야겠다.'

미호가 천황의 지금 상태에 대해서 알아봐야 별로 좋은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화를 내다가 천황에게 매혹술을 더 세게 거는 정도이리라. 타카마가하라의 정보와 홍몽술을 전해받은 의리가 있으므로 나는 앞으로 천황에 대한 기억을 흑요석에서 빼 주기로 했다.

그는 아마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 어설프게 뭘 해달라기 보다는 내게 호의를 사는 방법을 선택한 듯 했다. 천황은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읽는 재능이 있는 듯 했다.

천황의 말대로 천황궁에서 하루 정도 기다리자 미호가 되돌아왔다. 미호는 나를 보자 반가운지, 보자마자 꽉 껴안았다.

"어휴~ 왔구나!"

"으윽. 잠시만..."

나는 풍만한 미호의 가슴에 얼굴이 묻히자 몸을 바둥거렸다. 하필이면 미호가 성숙한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둔갑을 한 탓이었다.

잠시 후 미호와 한 달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 미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한달간 지옥훈련만 하고 얻은 게 없었던 게냐?"

"뭐 그렇지..."

"흐흥, 재능이란 게 참. 그래도 진소청과 비슷하게 싸워서 다행이구나."

"그러는 너는 한 달 동안 흑요석 광산을 찾아다닌 거야?"

미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렇다. 흑요석은 화산(火山) 근처에서 많이 산출되니 그 근방의 성(城)과 마을을 돌아다녔지. 그리고 재력을 이용해서 광산을 다섯 개 정도 사들였느니라."

"다섯 개나?"

"네가 흑요석에 어떻게 기운을 넣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흑요석일수록 기억을 많이 넣을 수 있지 않느냐? 큰 흑요석이 나올 가능성은 높을수록 좋을 것이니라."

"그렇군..."

"또한 흑요석 광산에서 사들인 흑요석들이 지금 교토로 오는 중이다. 길면 두 달 내에 흑요석이 쌓일 것이다."

"고마워 미호."

"우후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흑요석 광산에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다음부터는 수고를 줄여야지."

미호가 왠지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를 위해 노력하는 게 싫은 것이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아하하! 농담이니라. 그게 효율적이긴 하지."

미호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음'이라는 말은 되도록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알았어."

내게 있어서 죽은 다음에 전생(轉生)해서 새롭게 살아가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미호에게 있어서 현재는 현재일 뿐이다. 나는 내 말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혹시 읽어보았느냐?"

"오륜서? 시간이 없어서 못 읽어봤는데..."

"그래도 동영 최강의 무사가 썼던 비급이니 나름대로 얻을 게 있지 않겠느냐? 무공을 향상시키려 한다면 괜찮은 방법일 듯 한데."

"흠,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꼭 읽어볼게."

나는 미호와 함께 흑요석 광산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 오륜서를 검마에게 보여주자.'

어차피 검마 밑에서 다시 한 번 수련을 할 계획이 잡혀 있었다. 이왕 수련을 할 바에는 그에게 오륜서의 무공비급을 보여주고 그의 연구결과를 추가로 얻어내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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