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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며칠 후 망량은 내게 말했다.
"슬슬 적월(赤月)과 접촉할 때가 된 듯 하오."
나는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는 그의 말 뜻을 깨닫고 말했다.
"설마, 전대 뇌신류의 호법(護法)이었던 적월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만난다면 지금이 제일 적기라고 할 수 있지."
나는 망량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지금 뇌신류의 호법이자 강력한 초절정고수인 적월을 만난다는 것인가? 내가 의문을 감추지 못하자 망량이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백련교에게 천하를 주기로 했소. 그건 우리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황궁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쳐서 없애기 위해서요. 그러면 만일 백련교가 황궁을 엎어버리는데 성공한다면, 그 이후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음... 별로 생각 안 해봤소."
나는 그 일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봤던 바로 백련교주는 너무 초월적이라서 선악(善惡)을 판단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런 자는 최소한의 자제력이나 판단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황궁처럼 막나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백련교의 하부세력이 되어서 한몫 잡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나는 그런 미래는 그다지 원하지 않소."
"어째서요? 백련교가 천하를 지배한다면, 가장 큰 공을 세운 망량 당신은 최고로 중요한 인물로 대우받을 것이고 억만금과 강대한 무림세력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장담할 수 있다. 백련교가 천하를 제패한다면 제일공신인 망량의 권세는 정천맹주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질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백련교 아래에서 천하를 쥐락펴락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망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황궁에서 나왔을 때부터 행동에 나섰을 것이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현실에 찌들어서 돼지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지."
그렇게 말한 망량이 섭선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절대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소. 황궁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지. 백련교주는 초인(超人)이니 그의 치세가 미치는 동안에는 세상이 평화로울테지만, 결국 견제할 자가 없는 힘은 극단으로 치닫는 법. 그렇게 되기 전에 대항할만한 세력을 마련해 두어야 천하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오."
"으음..."
"그리고 나는 뇌신류를 바로 그 대항세력으로 키워볼까 하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망량을 바라보자,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련교 역사에서, 뇌신류는 사실 사대무류 중에서 수신류와 동급(同級)이라 평가받고 있었소. 수신류가 최강이 된 것은 당대교주가 백련교주위에 오른 다음부터지. 즉,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절대적인 무공천재인 교주의 존재만 아니라면, 뇌신류의 무공은 수신류와 동등하다는 소리요."
"무슨 말이 하고 싶소?"
이어진 망량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나는... 진소청이라면 백련교주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가 뇌신류의 극한(極限)을 본다면 분명히 가능한 일이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 아... 아냐. 분명히...'
나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지난번 전생에서 나는 무당파 원원자 장삼봉의 심득을 뇌신류에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심지어 함께 수련하며 연구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이광과 진소청의 무공이 극단적으로 향상되어서, 진소청의 경우에는 백련교 원로원 고수에게 찬탄성을 들을 정도였던 것이다. 진소청의 재능은 천재 중의 천재 - 인세에서 여러번 나오기 힘든 기적 그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키워서 백련교주에 대적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망량이 말했다.
"당신의 첫번째 삶에서 진소청은 천하 십대고수의 한명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했었지. 그것은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그저 뇌신류의 무공만 수련한 결과요.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우물안의 개구리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하물며 그가 백련교에 복수하려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오.
그러나 진소청에게 일찍부터 뇌신류 호법인 벽력삼존(霹靂三尊)을 마주치게 하고, 나아가 당신의 심득을 전해주며, 백련교주를 꺾어야 한다는 목적을 심어준다면? 그걸 반천맹이 은밀하게 도와준다면!"
"......!!"
"십 년 후의 진소청이 얼마나 강해질지 짐작이 되오?"
나는 그의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수십 년의 세월동안 온몸으로 진소청과의 재능격차를 느꼈다. 세상에서 나만큼 진소청의 재능을 잘 실감하고 있는 사람은 이광 뿐일 것이다. 나는 망량의 말에서 떠오른 상상에 전율마저 일어났다.
' 가능해...!!'
아무리 교주가 사대무류를 통합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진소청은 내게서 무당파의 심득을 전해받은 것만으로도 겨우 몇 년 만에 호법사자를 단기전에서 꺾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 십 년 정도만 지나도 진소청의 경지가 어느 정도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망량은 훗하고 웃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벽력삼존의 세력과 본거지를 알게된 점에 착안했소. 얼마 전 흑요석의 기억을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지. 그래서 기억을 전해받은 그 날부터 바로 반천맹을 움직여서 작업을 해 두었소."
"작업이라니?"
"정보단체를 움직여서 적월과 녹월에게 은연중에 진소청이라는 천재의 재능에 대해서 알리고, 비밀리에 반천맹원이 그들과 접선했소. 그리고 적월과 녹월은 현재 진소청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요. 그 이전까지 그들은 이광의 존재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광에게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시큰둥한 상태였지."
"그렇군..."
나는 망량의 말을 이제야 이해하고 말했다.
"그래서 미리 적월의 적룡문(赤龍門)으로 가서 그와 담판을 지으려는 거요?"
뇌신류의 호법인 벽력삼존은 백련교에서 탈출한 후 비밀리에 강호에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다. 적월은 적룡문이라고 하는 문파를 창설했으며, 녹월은 묵월단(墨月團)이라는 청부단체를 창설한 것이다. 강호에 적룡문과 묵월단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문파원 모두가 벽력삼존이 직접 키운 정예고수들이라서 무서운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소. 백련교가 황궁을 쳐서 천하를 얻고 난 후에는 시간이 없소. 백련교의 이목이 황궁에 쏠려있을 때 미리 뇌신류의 세력을 결집시켜둬야 하는 것이오."
"과연...!!"
지금이 딱 적절한 시기라고 한 건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백련교는 평상시라면 화신류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서 중원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지만, 황궁이라는 거대한 적과의 일대격전을 앞둔 시점에서는 자잘한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이 가장 백련교의 경계가 느슨한 시점이리라.
"황궁이 무너진 후가 중요하지. 이광과 진소청을 벽력삼존에 합류시킨 이후에는 그들이 알아서 숨어지내면서 무공을 연마하게 될 것이오. 우리 역할은 백련교의 공세가 강력할 때마다 그들을 비등으로 피신시켜주면서 시간을 벌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나는 망량의 계획을 중얼거렸다.
"황궁을 백련교가 쓰러뜨리고, 그 백련교를 뇌신류가 견제한다..."
뇌신류를 버린다는 말은 맞았다. 황궁을 먼저 쳐서 자립적인 세력을 강화시키는 게 뇌신류 입장에서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백련교가 먼저 천하제패를 해버린 상황에서 뒤늦게 출발하는 것은 차악(次惡)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뇌신류의 입장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패도적인 뇌신류를 억제하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진소청이 백련교주를 없애지 못해도 상관없소. 백련교에 원한을 가진 호법사자급 고수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백련교는 강호의 일을 다룰때 더욱 조심스러워지게 될 것이오."
망량은 씨익 웃었다.
"덤으로 당신은 은근슬쩍 뇌신류에 섞여 들어가서 필요할 때마다 비등으로 그들을 구원해주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거요. 성형술을 썼으니 당신의 과거가 들통날 일도 없소. 아주 좋지 않소?"
"좋군!"
나는 기뻐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질문했다.
"그런데 만일 이번에 백련교가 황궁을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소."
"왜?"
망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백련교주도 황궁을 없애지 못한다면 천하에 그 누가 있어서 황궁을 상대할 수 있겠소? 그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소리가 되는 거요."
"......"
나는 새삼 이번 백련교의 황궁습격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만일에 황궁에 강대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어서 백련교주조차도 황궁을 엎어버릴 수가 없는 거라면, 인간의 무공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황궁을 이길 수 없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벽한 절망인 것인가?
' ... 아니 방법이 있긴 있지.'
나는 망량의 말대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봤자 지금의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다보면 현재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그동안 무수하게 느껴온 경험이 있었다.
미호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말했다.
"흠... 나는 뭔가 걸리는구나."
"미호 님. 무엇이 걸리십니까?"
"두 가지가 걸린다."
미호는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망량에게 말했다.
"첫째. 백웅의 10번째 전생에서 흑백련이 유출되어서 소교주의 괴질이 치료되지 않았느냐? 그 때의 백련교는 분명히 지금과 별다를 바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백련교는 강호를 천천히 점거했으며 십여 년이 지나도록 황궁과 직접충돌은 하지 않았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
망량은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흐음... 충돌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다'라는 뜻이십니까?"
"그렇다."
"그건 저도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미호님 말마따나 이상한 부분이죠."
"또 하나... 이게 더 중요하다."
미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백련교주는 언제든 뇌신류를 없앨 수 있었다. 마음먹고 백련교 산하의 3대무류 중에서 누구를 동원하더라도 약화된 현재의 뇌신류는 몰살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풍신류는 이광과 진소청의 소재까지 파악하고 있었지. 그런데도 백련교주는 끝끝내 그들을 내버려두었고, 심지어 14번째 전생에서 뇌신류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는 꽤 호의적이고 대범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
"너는 백련교주가 그렇게 마음씨좋은 자라고 생각하느냐? 애초에 뇌신류의 숙청을 명령한 게 그 자인데?"
망량은 미호의 질문에 표정이 무겁게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주가 뇌신류를 놔두는 목적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것이냐?"
"네. 그래서 더욱더 뇌신류를 키워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중 깨달아서 외쳤다.
"뇌신류 최종오의 무혼(武魂)!"
망량과 미호가 나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자 내 말이 옳다는 걸 즉시 알 수 있었다. 망량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련교주가 내세운 뇌신류의 독립조건은, 바로 최종오의를 모으라는 것이었소. 백련교주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그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뇌신류의 최종오의가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소."
"어째서? 그는 이미 천하무적(天下無敵)이 아닌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지. 하여간 그에게 그런 목적이 있다면, 되려 뇌신류를 키우는 게 가장 좋은 일이 될 수밖에 없소. 왜냐하면 백련교주는 뇌신류 최종오의가 모일 때 까지는 결코 뇌신류를 멸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
뭔가 답답해졌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미래를 만들고 있는데 어쩐지 백련교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표정이 우울해졌는지 미호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라.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것이다."
"내가 할 소린데."
"참나... 이런 데서 오기를 부리느냐?"
미호가 어이없는지 깔깔 웃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흥! 늘 마을처녀 꼬셔대는 바람둥이 주제에 무슨 말이냐?"
"그런건 바람둥이가 아니라 인기남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호 님."
"......"
잠시 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공유한 덕분인지, 우리는 왠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만난지 십 년도 넘은 친구처럼 자질구레한 농담따먹기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유대감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 이대로 평생 지내고 싶다.'
그래. 황궁만 쓰러뜨리고 나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망량과 벗삼아 느긋하게 지내다가 시일이 지나면 미호와 천계에 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어차피 천계에 가면 불로불사가 된다 들었으므로 더 이상 회귀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 힘내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길고 길었던 전생의 끝이 조금씩 보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