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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도서관은 지하에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둥글고 어두운 통로가 파여 있었고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지렁이굴같은 통로의 바닥은 강철같은 재질로 마감되어 있었고 흙냄새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인기척도 없어서 으스스했지만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위잉 -
둥근 문이 열렸다. 특이하게도 미닫이나 여닫이 방식이 아니라 다가가니까 바로 통로가 열리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접근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열리게끔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기술은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하면서 문 너머로 향했다.
나선형 계단을 좀 더 따라서 올라가자, 지상으로 향하는 듯한 둥그런 문이 보였다. 이 문은 방금 전과 달리 가까이 가도 자동으로 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동으로 열리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열리는지 잘 모르겠어서 나와 미호는 잠시 고민했다.
' 어떻게 여는 거지?'
잠시 후 미호가 문 옆에 있던 네모난 장치를 보더니 말했다.
"저기에 손을 대는 게 아니겠느냐?"
"함정이면 도리가 없는데."
"걱정 말거라. 본녀가 지켜보겠다."
"......"
아무리 초절정고수의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라고 해도 미리 준비된 함정에 한박자 늦는다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호가 장담했기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단 문 옆의 네모난 장치에 오른손을 갖다대 봤다.
삐이잉
그 순간 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개폐부가 바닥으로 사라지면서 열렸다.
위잉
"열렸구나."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열려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미호가 웃으며 말했다.
"함정같은 게 있으면 이상하지 않겠느냐.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면 몰라도 안에서 나가는데 함정장치가 기동되는 건 상식과 반대되는 일이다."
"혹시 모르지. 아무튼 나갈 수 있으면 됐어."
미호는 도서관 출구의 여기저기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도서관은 확실히 이족(異族)이 건축한 듯 싶구나. 내부 격벽이나 문의 개폐에 쓰인 기술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러게. 이건 누가 만든 걸까?"
선지자가 말하기를 이족은 뭉뚱그려서 하나의 종족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수백 수천의 종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도서관을 지은 이족도 따로 있으리라. 나는 신기함을 느끼면서 출구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나왔다. 나와 미호는 지하실의 여기저기에 주술적인 키릴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호는 그 문자 하나하나를 살피더니 말했다.
"봉인(封印)이구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되어 있다."
"무슨 소리야?"
"이 곳은 어딘가의 건물이고 현지의 술법사들이 이 장소를 금지(禁地)로 지정했다는 소리다. 아마 외부에서 들어갈 수가 없는데다 이족의 유적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해 두었겠지."
나는 지하실의 맞은편을 보았다. 겨우 삼 장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문이 있는데 그냥 열고나가면 안 되나?"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거니까 문제는 없지. 딱히 직접공격용 결계도 펼쳐지지 않았구나. 하지만 감지결계가 걸려있으니 그 순간 이 곳의 술법사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알려질 것이다."
"귀찮겠군."
망량의 말대로 외부에 행적이 밝혀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이 장소는 아마 아라사 제국의 수도인 모스크바일 가능성이 높았고, 이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경우 앞으로 북극으로 향하는데 중대한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나는 미호에게 물었다.
"안 들키고 나갈 순 없을까?"
"힘들 것 같구나. 본녀는 이렇게 복잡한 주술 술식을 교묘하게 풀만한 재간은 없느니라."
"씁, 어쩔 수 없군. 그냥 나가자."
"괜찮겠느냐?"
"안되면 도망치지 뭐..."
나는 대충 중얼거리면서 문으로 다가가서 열었다. 그 순간 전신을 수십 개의 시선이 훑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손끝에 약간 감전되는 느낌이 왔다. 문을 여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주술력이 잠재되어있는 내게는 그런 낌새가 확실히 느껴진 것이다.
' 이런 말이군.'
지금 이 순간 모스크바에 있는 술법사들이 달려올 게 분명했다. 나는 미호에게 외쳤다.
"미호! 무생물로 변해."
"뭐라고?! 너 혼자 뚫겠다는 거냐?"
"그게 나을 거야."
"흠... 무리하지 말아라."
여기서 그냥 비등으로 망량이 있는 진랑곡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너무 아깝다. 모스크바에서 중원까지는 무려 몇천 리나 되는 거리였으므로, 이 곳의 주요한 장소만 확인해 둔다면 다음번에는 과정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호와 함께 싸우면 서로가 번거로울 가능성도 있었다.
미호가 목걸이의 형태로 변하자 나는 문을 나와서 뛰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장소는 중원과는 상이한 건축양식으로 되어있었다.
' 여긴 궁(宮)인가?'
거대하고 웅장한 특유의 느낌과 함께 대궐같은 풍광이었다. 나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며 빠르게 내부를 돌파했다. 멸혼보를 이용하자 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맞은편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파앗
계단을 통해 올라오자, 지상(地上)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 왜 인기척이 없지?'
내 기감은 주변에 있는 생물체의 기척을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궁전의 지하층은 물론 지상층으로 올라왔는데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궁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나는 궁의 바깥으로 나가는 궐문이 보이자 고민에 휩싸였다.
' ... 내부로 들어갈까 아니면 나갈까...'
다음번에는 내부에 들어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단 내부를 헤집는 게 나았지만, 괜한 부스럼을 만들 가능성을 생각하면 내버려두고 바깥으로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득과 위험부담이 공존했으므로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 때였다.
슈우우욱
연기같은 환영(幻影)이 내 앞에 나타났다. 술법으로 만들어진 실체없는 환영이라서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내 그것은 전신에 모포옷을 둘러싼 왠 수염긴 노인의 형상이 되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 [email protected]*한 자... @$*@@(*$인가...]
못 알아듣겠지만 어렴풋이 이게 아라사 제국의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북해빙궁주에게 석 달간 배운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걸 보면 노인이 상당히 고급진 어휘를 사용한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포권을 하며 내가 잘 아는 아라사 기초어휘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소웅입니다."
[ ......]
"식사하셨나요?"
발음이 구렸을까...
노인은 침묵하더니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골똘히 궁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 명나라에서 온 사람인가?]
중원 말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원 말로 대답했다.
"그렇소."
[ 그대는 도대체 어떻게 봉인에서 나온 것인가? 무슨 의도로 이 곳에 온 것이지?]
다행히도 노인은 중원 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외모부터가 글밥먹게 생긴 것이다.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여행을 하던 중 아스타나의 대사원에 있는 선지자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겼소. 그는 나를 고대의 도서관으로 옮겨주었고 나는 방금 나온 것 뿐이오."
[ 아스타나의 선지자... 그렇군... 하긴 그의 종족이 만든 도서관일테니... 그러면 자네는 명나라에서 온 여행자라는 말인가?]
"그렇소. 어떻게 된 일이오?"
[ 믿어보는 수밖에...]
중얼거리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 어서 이 곳에서 떠나게. 지금 크렘린 궁은 마도(魔都)로 변해있어서 굉장히 위험해.]
"이 곳이 크렘린 궁전이란 곳이오? 그럼 당신은 누구요?"
[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의 총주교좌(總主敎座)인 벨로프일세.]
동방정교회? 총주교좌?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중원말을 능숙하게 구사한 덕에 이름이 벨로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발음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은 아니라서 내가 그의 이름을 외우고 있자 벨로프가 말했다.
[ 더 얘기할 시간이 없네. 어서 궁에서 탈출하게. 늦으면 기회가 없어.]
나는 힐끔 어두껌껌한 궁전의 내부를 쳐다보았다.
"저 안에 뭐가 있다는 말이오?"
[ 이반 4세를 광기로 몰아넣은... 악몽의 존재가 있네.]
"......?"
[ 어서 탈출하게! 사방에 마의 족속들이 많이 있지만 성상(聖像)의 힘을 빌려주겠네.]
파앗
벨로프가 왠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게 내뻗자, 다음 순간 황금 이파리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해가 되는게 아닌지 깜짝 놀랐으나 그런 건 아닌 듯 했다.
' 대라신선의 축복같은 건가?'
벨로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황금 이파리의 축복을 준 것으로 환영의 술법을 모두 소진한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크렘린 궁전을 나서기 시작했다. 의문의 조력자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궁전 내부의 상황은 최악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타닷
크렘린 궁전은 백색의 성벽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크기도 매우 커서 중원의 황궁에 뒤지지 않는 듯 했다. 내가 궁전의 내벽을 넘어서 외벽 근처로 오자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 뭐지?'
인기척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동물(動物)의 기척이며 살기(殺氣)였다. 나는 검을 뽑아들고 잠시 멈춰서서 사방을 경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성문을 둘러싸고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그것은 야수(野獸)였다. 전신의 피부가 벗겨진 채로 피칠갑이 되어 흔들거리는 인간의 형상과 함께, 미친 늑대의 두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철퇴를 들고 있어서 무기를 다루는 놈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지?'
나는 여하튼 야수들을 쓸어버릴 생각으로 검기를 일으켰다. 동시에 내공으로 큰 압박감을 날렸는데 야수들은 별로 영향을 받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 내공에 의한 압박감은 초절정고수라도 간과할 수 없는 걸 생각하면, 이 놈들은 애초에 감정이나 생존본능이 없는 놈들로 보였다.
순간 나는 야수들의 본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이 놈들은 이미 죽어 있다. 죽어 있기 때문에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기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촤아악!
나는 달려들어서 야수 두 마리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야수들이 나동그라지며 옆에 있던 다른 놈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멸혼보로 피하면서 뇌령인(雷靈印)을 날렸다.
꽈앙
뇌령인이 폭발을 일으키며 세 마리를 동시에 오체분시 시켜버렸다. 놈들이 달려드는 기색이 주춤하며 공백이 생기자 나는 야수들을 관찰할 기회가 생겼는데,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재생?"
츄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잘린 야수들의 목 단면부에서 촉수가 뻗어나와서 빠르게 몸통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이윽고 몸과 몸뚱이가 붙더니 그 야수는 다시 철퇴를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뇌령인으로 오체분시된 놈들도 몸뚱이 여기저기에서 촉수가 돋아나며 재생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이런 놈들과 오래 싸워봤자 내 기력만 낭비할 뿐이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놈들에게 다시 한 번 뇌령인을 날리고는 멸혼보로 전방으로 뛰었다.
쿠콰쾅
놈들은 뇌령인에 얻어터져서 망가지고 부숴지면서도 비명소리같은 것도 내지 않았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내 추측은 맞았던 것이다. 마치 말로만 듣던 강시같은 존재인 듯 했다.
"쳇. 찝찝해."
천지간에 눈이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민가의 지붕 아래로 뛰면서 기의 막으로 눈을 떨쳐냈다. 혹시나 눈을 맞는 것 자체가 주술에 걸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십여 리를 뛰었을까, 갑자기 음산한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 으하하하하하....!!]
나는 민가의 지붕 밑에 숨었다. 민가라고는 해도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인간의 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이 모스크바라는 도시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조리 증발해버린 곳이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갑자기 허공에 엄청나게 거대한 환영이 나타났다.
파아앗
그것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왠 청년(靑年)이었다. 색목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청년의 환영은 무려 수십 장이나 되는 크기로 떠올라 있었다. 청년이 음산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며 외쳤다.
[ 짐의 궁전에 불청객이 찾아왔는데 그냥 가려 하느냐? 당장 이리 오너라 야만인이여!]
심어같은 능력이라서 그런지 언어의 장벽을 격하고 어떤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 짐? 그럼 저 놈은...'
나는 놈의 말에서 대충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 곳이 모스크바이며, 내가 방금 나왔던 궁전이 모스크바의 중심인 크렘린 궁전이며, 수도를 지배하며 짐이라고 자칭할 인간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저 환영에 나타난 청년이야말로 아라사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인 이반 4세인 것이다.
하지만 북해빙궁주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반 4세는 지금 노망이 다 들어갈 정도로 나이를 먹은 노인네라고 했다. 강력한 정복정책을 폈지만 무엇때문인지 반쯤 정신이 나가서 광기에 전몰되어있다는 소문이었다.
' 아냐 지금 이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저 놈과 지금 싸우는 건 너무 불리하다. 이 곳은 놈의 본거지이며 어떤 능력과 강함을 가졌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비등을 활용하려면 최소한 이 모스크바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의 소굴에 나타나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타닷!
나는 더욱 거세게 경공을 펼치며 멸혼보로 날듯이 뛰었다. 화살보다 몇십 배는 빠른 속도였다. 허공에 떠 있던 이반 4세의 환영은 그런 나를 감지한 듯 허공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손바닥을 이 쪽으로 내뻗어왔다. 손바닥은 다가올수록 커지더니, 이내 멸혼보로도 피하기 힘들만큼 거대해지는 듯 했다.
"......!!"
나는 이를 악물고 한층 더 경공을 강화시켜서 순간적으로 내공을 폭발시켰다. 아무 준비 없이도 팔문둔갑 중에서 삼문(三門)까지를 단숨에 열었기 때문인지 코에서 코피가 터져나왔지만, 그 댓가로 나는 일시적으로 멸혼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뻐엉
공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는 손바닥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반 4세의 환영은 이번 공격으로 나를 잡지 못한 것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껄껄 웃었다.
[ 호오... 재미있구나 으하하...]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손바닥이 내려앉은 곳의 민가는 모조리 압력 때문에 파괴당해 있었다. 저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실재하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걸로 보였다. 그러나 내 공격이 저 환영에 먹힐지도 미지수였다. 도망치기로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비등을 써서 탈출하고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마(魔)의 도시를 탈출한 곳에서 쓰지 않으면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타앙
"뭐야?!"
도시의 성벽을 넘을려다가 갑자기 시꺼먼 어둠의 벽이 나를 가로막아서 튕겨져 나갔다. 여기만 넘으면 될 텐데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내가 어둠의 벽에 내공을 실은 검염(劍炎)을 날려봤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천천히 쫓아오던 이반 4세가 광소를 터뜨렸다.
[ 으하하... 짐의 권능은 광대하다... 야만인이여 운명을 받아들여라.]
나는 신경질이 나서 그를 돌아보며 외쳤다.
"내 운명이 뭔지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병신새끼!"
[ ......]
중원말로 외쳤는데도 이반 4세는 왠지 알아들은 듯 꿀먹은 벙어리 기색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라도 비등을 쓸까말까 고민했지만, 그 순간 내 가슴 부근에서 황금색 이파리가 튀어나왔다. 벨로프가 말한 성상의 기운이었다.
파아아앗
벨로프가 부여해 준 황금 이파리의 기운은 어둠의 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나는 이게 유일한 탈출구라는 걸 깨닫고 곧장 뛰쳐 나갔다. 내 등 뒤로 이반 4세가 광기에 젖은 폭소를 터뜨렸다.
[ 끄흐흐흐..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쉬익
내가 땅에 착지하자, 마도(魔都) 모스크바를 둘러싼 어둠의 벽이 다시 복구되는 게 눈으로 보였다. 이반 4세는 성벽 바깥까지는 추격할 생각이 없는 듯 정적이 남았다. 살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자 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린 나이인데도 굉장한 무술가군. 거길 벗어나다니..."
중원 말이다. 나는 설원의 나무 뒤에서 걸어나오는 그 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 내게 나타났던 환영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벨로프. 고맙소."
자기자신을 동방정교회의 대주교좌라고 밝힌 벨로프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시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명나라의 소년이여. 나를 따라오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게 많을 것 같군."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
"무엇이 궁금한가?"
"방금 내가 마주쳤던 야수들과 이반 4세의 환영은 마(魔)가 아니었소. 그런데 엄청난 힘을 발휘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랬다. 이반 4세의 환영은 지금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여동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야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반 4세가 지닌 힘의 근원이 마(魔)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대는 마의 일족이 무엇인지 알고 있군."
침음성을 흘리던 벨로프가 말했다.
"그의 힘은 확실히 마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네. 신화(Theosis)의 힘이지."
"신화(神化)?"
"아무튼 결정하게. 나를 따라올 텐가 말 텐가?"
나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따라가겠소."
막야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왠지 이 일에 대해서도 알아둬야 할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 일에 이족이 관련되어 있다면 이 사건의 끝에 중요한 정보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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