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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그 후 대략 두 달 동안 화서명에게 성형술의 이론과 실전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내가 받은 성형술은 순수하게 외모의 변용과 향상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성형이란 화상 및 각종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한 신체의 훼손을 최대한 덜기 위해 마련된 의료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고급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했고, 나는 간만에 다시 의술에 정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화 의원 또한 내가 전수를 받으면서 자기 일을 도와주자 일손이 덜해서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가봐야 할 곳이 있다 했지? 이 정도면 되었으니 가 보게."
"감사합니다."
"알아야 할 건 다 알았고 임상훈련도 거쳤으니 왠만하면 자네 혼자서도 가능할 걸세."
나는 화서명에게 감사의 포권인사를 한 후 미호와 함께 정 가주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이 곳에 머무르는 것은 정 가주의 호의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필수적으로 인사를 하고 가야 하는 것이다.
"정 가주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떠나려 합니다."
"흐음... 음..."
그런데 뭔가 정 가주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약간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뭔가 고민하고 있었다.
"정 가주님?"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한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 아, 아닐세. 음... 그게, 혹시 말일세..."
"하실 말씀이라도..."
"아닐세. 그만 가 보게."
정 가주는 끝내 무언가 욕념(慾念)을 참아내는 듯 하며 우리를 보내 주었다. 나오고 나서 미호가 내게 말했다.
"정 가주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이 가는구나."
"무슨 말?"
"아마 정 가주의 혈족 중 여인네들이 너를 보고싶다 청했을 것이다, 우후후."
"......"
그러고보니 두 달 동안 머물면서 왠 귀한 신분의 여인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신경끄고 있었는데 그 여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눈을 꿈벅거리고 있자 미호가 까르르 웃었다.
"자, 이 거리를 보려무나. 네게 향하는 시선이 얼마나 많다 생각하느냐?"
이 곳은 개경의 대낮 저잣거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고 있었다. 나는 미호의 말대로 주변의 시선을 살펴봤는데, 절세미녀로 변해있는 미호에게 상당한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더러 여인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향하는 걸 느끼고 말았다. 지금까지 남 시선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 게 익숙했던지라 알아차리는 게 늦은 것이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할 짓 없는 놈들이군. 남의 얼굴은 왜 본단 말인가?"
미호가 키득거리며 내 뺨을 주욱 잡아늘였다.
"몰라서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귀여운 녀석."
"하지 마."
"시험삼아서 저기 계집아이에게 말을 걸어보는 게 어떠냐? 아주 유심히 보고 있던데."
미호가 말하는 것은 포목점 주변을 어물쩡거리며 몰래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양갓집 규수 같았다.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상당히 고운 얼굴이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미호의 말에 퉁명스레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흐흥... 특별히 화염술(火炎術)을 일러주려 했는데 그만둬야겠구나."
술법!
나는 그 말에 약간 놀라서 미호를 바라보았다. 미호의 술법소양은 환술과 화염술수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미호가 서왕모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술법을 알려주는 건 지금까지 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술법을 공개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이야?"
나는 망량에게서 들었던 방침 때문에 미호의 말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무공 뿐만이 아니라 술법도 수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호는 마치 내 속을 들었다놨다하는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흐응... 저 여아를 꼬셔서 포목점의 옷을 대신 사달라 해 보거라. 성공한다면 내 기꺼이 화염술을 알려 주마."
"......"
꼬시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생각한 적도 없었던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시도해 보기로 했다.
' 여자를 꼬신다고? 뭘 어떻게 꼬시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감에 의존하기로 마음먹으며 성큼성큼 포목점 앞에 서 있는 규수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동시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말을 걸었다.
"소저... 실례하오."
"네, 네..."
"나는 소웅(小熊)이라 하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포목점에서 옷을 사주실 수 있겠소?"
그와 동시에 미호가 벼락같이 심어를 날렸다.
[ 이 바보멍텅구리!! 누가 그딴 말에 낚인단 말이냐?]
어찌나 귀청을 세게 때리는지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내가 살짝 비척거리자 눈 앞에 있던 규수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몸뚱이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소협. 알았어요. 어떤 옷이 필요하신가요?"
"어... 저기 청색 옷..."
"네에."
규수는 대뜸 포목점 주인에게 옷을 주문했다. 그러자 포목점 주인도 어리둥절해하며 돈을 받아들더니 잠시 후 재단을 해서 내게 옷을 주었다. 얼떨결에 옷을 받아들자, 규수가 살며시 내 뺨을 만지며 말했다.
"소협. 저희 집에 오시겠습니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아..."
나는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미호가 살벌하게 노려보는 것을 보자 급히 대답했다.
"이, 이 은혜 고맙소. 다음에 봅시다."
"소협?"
파앗
나는 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붕을 날듯이 뛰어서 약 3리 정도를 뛰어오자, 미호가 나를 뒤따라와 있었다. 미호는 약간 심통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아주 잘 먹혔구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은 왜 나한테 대뜸 옷을 사준 거지?"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가갔다. 말주변도 그리 없는 편이라서 뭐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성공해버린 것이다.
"그야 네가 아주 이쁘장한 미소년이니까 그런 게 아니겠느냐? 아주 그년 속이 훤히 보이더구나."
"......"
미호 너도 알고 시킨 거 아니냐, 라는 항의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미호의 기분이 별로인 거 같아서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미호는 잠시 후 표정을 풀더니 묘한 눈을 하며 내 목덜미를 만졌다.
"흐흥, 사실은 하나의 이유가 더 있지만."
"뭐라고?"
"네가 성형술을 받을 때 본녀는 몰래 네게 환혹주(幻惑珠)의 힘을 부여했느니라. 환혹주가 네 전신에 스며들어서 매혹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으니 외모에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셈이지."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호. 무슨 짓이냐."
"갑자기 왜 그러느냐? 본녀 나름 호의를 베푼 것인데."
"내가 성형을 받은 것은 앞으로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야. 이렇게 남들 시선을 끄는 효과가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내가 거세게 항의하자 미호가 웃었다.
"우후후. 달리 생각해 보아라. 그 미모에 환혹주의 힘이 합쳐지면 앞으로 장성할수록 여인들은 네게 맥을 못 출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정보를 얻기가 한층 쉬워질 게 아니냐?"
"......"
"남들은 예뻐지거나 잘생겨지고 싶어서 안달인데 참 배가 불렀구나. 한이 많이 쌓여서 그런 것이냐?"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외모로 평가받는 게 그리 달갑진 않아."
미호가 키득대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네가 지금 화내고 있는게 도리어 외모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라. 네가 정말 외모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 아니겠느냐? 자기자신을 속이진 말거라."
미호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 흠... 맞는 말이긴 하지.'
나는 지금까지 못생긴 외모로만 오랫동안 살아와서 외모로 인한 혜택같은 걸 평생동안 누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외모로 타인의 호의를 살 수 있다는, 생경한 경험이 다가오자 당황하면서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호의 말은 그런 반응이 도리어 외모지상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계를 하는 셈이었다.
나는 더 따지지 않고 미호에게 말했다.
"그래서 환혹주라는 게 지금 내 술력의 일부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단 소린데, 그 효과가 어느 정도 되는 거야? 방금 본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어."
"환혹주는 내 꼬리의 일부를 떼어서 약 50여년 간 숙성시킨 보주(寶珠)이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도 환혹주를 얻는다면 대번에 미인과 같은 매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의 너라면 이 세상 어떤 여인에게든 강한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너는 별로 영향이 없어 보이네."
미호가 말했다.
"본녀는 잘생긴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느니라. 또한 환혹주는 내가 만든 것이니 내가 영향을 받을 리가 없지."
"그렇군."
나는 새삼 미호가 대요괴라는 걸 실감했다. 말로는 미남미녀가 좋다고 떠들고 있지만, 미호의 내면 미의식은 그저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동물을 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개경에는 더 볼 일이 없겠어. 바로 북해빙궁으로 가자."
"앞으로 가명은 소웅으로 할 것이냐?"
"응. 나쁘지 않잖아?"
"하긴 둘 다 워낙 평범한 이름이니."
"......"
파앗
나와 미호는 다음 순간 비등으로 북해빙궁에 이동했다. 북해빙궁이라고는 해도 완전히 얼음으로 만들어진 성이 아니라, 광활한 바다 근처의 대지에 세워진 커다란 건물이었다. 여러 개의 누각과 전대가 서 있었으며 성벽과 해자같은 것도 보였다.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마을이라는 느낌이었다.
' 문지기를 통해서 정식으로 들어가면 너무 행적이 많이 노출돼.'
원래대로라면 생면부지의 무림문파에 잠입같은 걸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해빙궁에 정식으로 방문하게 되면 흔적이 너무 많이 남는다. 나는 별 수 없이 과거 비무 때 들렀던 북해빙궁주의 처소 근처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북해빙궁주는 처소에서 창문을 통해서 푸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털옷을 약간 껴 입은 북해빙궁주는 전형적인 요동 사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북해빙궁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북해빙궁주.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북해빙궁주는 아마 우리가 처소 근처에 나타났을 때부터 우리를 감지했던 모양인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 오십 대의 장년인이었는데 은발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색목인(色目人)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소년이군. 가공할 무공과 천상의 미색을 지니고 있다니..."
"......"
나에 대한 평가가 묘하게 달라진 기분이 들어서 어색했지만, 나는 그에게 포권을 하며 내 정체를 밝혔다.
"이렇게 몰래 숨어들어온 것을 사죄드립니다. 허나 나쁜 뜻은 없으며, 궁주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중원무림에서 온 소웅이라고 하며 이 옆은 저의 안사람입니다."
"미호라 하옵니다."
미호도 죽이 척척 맞아서 부부인 척 연기를 했다. 북해빙궁주는 우리가 살기가 없다는 걸 파악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본좌를 찾아온 것이지?"
"저희는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북쪽 끝에 있다는 대지를 찾아가려 합니다. 북해빙궁주께서는 거기에 대해 아시는 게 있을까 하여, 가장 뛰어난 견해를 듣고자 합니다."
내 나름대로 정치적인 언사로 금칠을 한 말이었다. 북해빙궁주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북쪽 끝? 구체적으로 어떤 곳을 말하는 거지?"
"이곳에서 대초원을 넘어서 더욱 북쪽의 동토... 거기서 더욱 나아가면 이 세상의 북쪽 끝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흐음... 그런 곳을 뭐하러 가려는 겐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곳에 인세 최대의 보물(寶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그 보물을 찾기 위해 평생이 걸려서라도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칠요 막야가 인세 최대의 보물이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해빙궁주는 고민을 하는 듯 탁자에 앉았다가, 얼큰한 화주(火酒)를 꺼내서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나와 미호에게 말했다.
"거기 앉아 보게."
나와 미호가 맞은 편에 앉자 북해빙궁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본좌가 그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면 그대들은 내게 무엇을 줄 생각이지?"
"이걸 드리겠습니다."
나는 금괴를 꺼냈다. 금괴덩이를 보자 북해빙궁주는 약간 놀란 듯 했고, 이내 감정을 해 보더니 진짜 금이 맞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충분한 정보료군."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시작했다.
"자네들은 중원인이라 하는데 대초원과 막북(漠北)이라는 대지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알기는 하는 건가?"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중원인들은 북적(北敵),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이니 해서 중화(中華)의 바깥쪽 세상을 무작정 오랑캐로 밀어붙이지. 그러나 실상은 대초원이나 사막은 거대한 세계로 향하는 통과점에 지나지 않으며, 중화란 건 우물 안의 개구리에 지나지 않아."
그렇게 서두를 꺼낸 북해빙궁주가 말을 이었다.
"지금 현재 대초원 이북의 상황은 중원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전개가 되어가고 있네. 왜냐하면 뇌제(雷帝) 이반 4세가 본격적으로 짜르(Царь)임을 천명했으며 강대한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일세."
전혀 처음 듣는 이국(異國)의 말이다. 방금 뭐라고 한 것일까?
못 알아들은 건 미호도 마찬가지인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북해빙궁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초원을 넘은 동토에는 아라사(俄羅斯)라는 국가가 있네. 색목인들의 나라이며, 아주 멀리 서쪽의 대륙에서 비롯된 나라이지. 나와 북해빙궁의 직계들도 아라사 사람들의 피를 잇고 있네."
"그렇군요..."
"그렇군요는 무슨.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표정이군."
북해빙궁주가 핀잔을 줬지만 할 말이 없었다.
아라사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태어나서 여태 공부했던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으며, 그저 북쪽이나 서쪽에는 색목인이란 게 있다는 것밖에 몰랐던 탓이었다.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자네들이 말하는 세상의 북쪽 끝이라는 건 그 아라사 제국을 통과해서 만년빙(萬年氷)이 존재하는 빙하(氷河)의 대륙(大陸)을 말하는 듯 싶군."
"빙하로 이루어진 대륙이라고요?"
"그렇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 곳을 편의상 북극(北極)의 대륙(大陸)이라고 부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