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3 ----------------------------------------------
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하는 수 없이 무사시의 유해라도 챙기기로 했다. 무사시의 유품은 한 자루 도(刀)와 왠 병법서 한 권 뿐이었다. 나는 그의 봇짐에 있던 병법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륜서(五倫書)?"
내용은 아마 그 나름대로 병법에 대해 정리해놓은 것으로 보였다. 나는 오륜서를 챙긴 후 무영문주 검마 서문대룡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의 유해는 그의 고향에 묻어주고자 합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흠, 어쩔 수 없군. 불상사였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무영문도들이 무사시의 시체의 혈흔을 닦아서 정갈하게 염해준 것을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비등을 타고 진랑곡으로 오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이렇게 초반부터 꼬이는 일도 있단 말인가?'
설마 미호가 말했던 동영 최강의 무사가 검마에게 죽을 줄이야.
단숨에 의욕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기운을 차렸다.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고 뭘 해보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나는 망량에게로 찾아가서 무사시의 시체와 오륜서를 보여주며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했다.
망량은 의외로 당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군. 이걸로 당신은 어떤 교훈을 얻었소?"
"응?"
"무사시의 성격과 실력을 알게 되지 않았소?"
"......!!"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미호에게는 알아서 잘 말해 주시오."
나는 망량의 말에 뼈가 있다는 걸 느꼈다.
' 그는 내가 전생자(傳生者)라는 걸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구나.'
현재 이 인생으로 볼 때 무사시를 잃은 것은 뼈아픈 타격이다. 하지만 내가 전생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도리어 이득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사시가 어떤 인간인지 알았기 때문에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안 할 뿐더러, 그를 적재적소에 운용하기가 더욱 쉬워지는 것이다.
"알았소."
"깊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잠깐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합시다. 당신의 혼란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소."
"들을 준비가 되었소."
"나는 예전처럼 반천맹을 설립할 거요. 하지만 이번에는 황연을 무작정 돕지 않고 그를 양지(陽地)에 내어놓을 생각이오."
이건 무슨 말인가?
내가 잠시 이해가 안 되어서 어리둥절해하자 망량이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황연과 그의 일족을 구한 후 현 황조에 대한 반감(反感)을 자극해서 역모를 일으키도록 조종했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국 대비할 시간이 줄어들고 황궁의 강대한 이족과 마주치는 때가 빨라질 뿐이오. 그러므로 역모를 멀리하고 정공법으로 동창과 금의위를 공략할 생각이오."
"그게 가능하오? 동창과 금의위는 현재 황제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잖소."
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동창과 금의위과 황제의 의지를 무시하고 폭주하면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염원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리사욕을 채우며 잔학한 행동을 하고있긴 하지만 그 주체는 분명히 황제인 것이다. 그런 황궁세력을 정치적으로 공략하고자 하면 험난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대답했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오. 왜냐하면 아무리 황제라도 모든 정치세력을 폭압으로 억누를 수는 없기 때문이오. 도리어 명분을 지닌 채 정면에서 황제를 공략하는게 더 쉬울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소리오?"
"이 대명제국의 정치판도에 대해서 좀 설명해야겠군."
망량은 잠시 목이 마른지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황제는 전제군주이며 절대적인 권력자요. 그리고 황제의 밑에는 금의위와 동창이 있어서, 눈과 귀가 되며 각종 권신(權臣)들을 감시하거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숙청하고 있소. 여기까진 알고 있을 거요."
"물론이오."
한 때 금의위의 위사로 일하기도 했었다. 기본적인 설명은 다 들은 상태였다. 망량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그럼 금의위와 동창이 왜 생겼는지도 알고 있소?"
"그거야 앞서 말한대로 권력유지를 위해서..."
"그건 가장 원론적인 이유고, 좀 더 파고들자면 황제가 신하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요."
"음..."
망량이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홍무제 주원장은 평민출신의 태조로써 권신들이나 특권계급에 대해서 강력한 증오심을 지니고 있었소. 그래서 그는 기존의 특권층에 대해 더없이 가혹하게 대했으며 자신의 황권에 대적할만한 자들을 모조리 숙청했소. 일례로 당신이 직접 보고 느꼈다는 능지형(凌遲刑)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면 익히 상상할 수 있을 거요. 이건 후세의 황권을 강화시켜줘야 하는 태조로써 당연한 행위이기도 했으나 부작용이 생겼소."
"부작용?"
"얼핏 보면 강력한 권신을 제거하는 것은 황권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어쨌든간에 그 신하들은 이 드넓은 중토(中土)를 다스리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오. 그들이 없으면 대명제국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므로 권신을 숙청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권신을 숙청한다는 건 동시에 유능하고 자립적이며 뛰어난 관료가 자라날 싹을 짓밟는다는 뜻이오."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뛰어난 신하... 명신(名臣)이 없는 조정에서 황제는 무엇을 믿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겠소? 자신의 머리만 믿고 팔황구주의 국정을 주먹구구로 운영할 수 있겠소? 그렇기에 주원장 이후의 황제들은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주며, 유사시에 자기 편이 되어줄 단체를 만들 수밖에 없었소. 원하든 원하지않든간에 명 황제와 동창 금의위는 한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셈이지."
"동창 금의위가 타락했다는 건 잘 알고 있소."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오. 주원장이 만든 정치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이후의 황제들은 동창 금의위와 신권(臣權)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소.
그 결과 선제(先帝)는 청류계를 비롯해서 자신을 견제할만한 야권(野權)의 인사들에게 상당한 힘을 실어주었고, 심지어 상당한 군권(軍權)의 운용도 지방의 성주들에게 일임하게 되었소. 그로 인해 수십 년 전의 금의위나 동창은 섣불리 나대지 못했고 되려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가 나타났소. 왜냐하면 그때까지 금의위 총령이나 동창제독들은 황제가 운명공동체라는 걸 이용해서 각종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기 때문이오."
나는 망량의 말을 듣자 꽤 놀랐다.
"잠깐. 군권을 일시적이라지만 성주에게 주다니... 그건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게 아니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지. 왜냐하면 반란이라는 건 군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오. 시와 때, 인재, 민심 등등 온갖 조건이 갖춰졌을 때야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거요. 선제폐하가 다스리던 중원은 그럭저럭 평화로우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반란을 꾀할 수 없었던 거요."
"흐음..."
"하지만 현 황제가 지배하는 중원은 굉장히 어수선하고 번잡하오. 그것은 강화된 황권을 이용해서 다시 황제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동창과 금의위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오. 청류계와 야권의 고관대작들은 이걸 경계하고 있으며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소. 그리고 황연 대장군은 이 폭탄같은 시국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지. 하물며 대뢰옥에 연금당했던 일이라 하면..."
망량은 거기까지 말한 후 확신어린 어조로 말했다.
"황연을 다시 정계의 전면에 복귀시키며 야권인사와 청류계를 규합시킨다면 황제와 친위세력이 섣불리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게 가능할 거요. 이건 꽤 승산이 있는 싸움이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흠, 나는 지금껏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백성들이 수없이 고통받는 걸 보아왔소. 설마 그것도 황제의 치세가 치우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던 거요?"
"반쯤은 그렇다 볼 수 있소."
"반쯤이라는건...?"
망량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감스럽지만 현 황제가 아니라 요순임금같은 성군(聖君)이 되돌아와도 천하의 불행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소. 아무리 뛰어난 임금과 청렴한 관리들이 포진하고 있어도 악인(惡人)이나 부패한 관리는 어디에나 있소. 정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천하의 불행을 최대한 줄이며 틀어막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어렵구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군(暗君)이나 폭군이 날뛰도록 하면 그 혼란과 불행은 몇십배로 커질 것이오. 단지 그런 문제요."
나는 망량의 말을 듣고서야 다른 관점으로 정치라는 걸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막연한 직감이나 지식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또한 금의위로써 교육받았던 내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관점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설명한 망량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황연 대장군의 일가를 구출하는 일에 당신의 도움을 빌리고 싶소. 반천맹의 고수를 키워서 하기에는 시간이 안 맞을 것 같소."
"금의위 3개조 이상이 지키고 있는 곳을 뚫어야 하는 것이오?"
"그렇소. 뇌신류 고수들의 도움 없이."
"흠..."
나는 고민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왠지 어려울 것 같았다. 역시 망량은 내 의견대로 뇌신류는 버리되 진소청을 등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건 그렇고 진소청을 어떻게 데려올 생각이오?"
"내 나름대로 계책이 있소. 그건 지금 걱정하지 마시오."
"흐음..."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합시다. 당장 움직여 주시오."
"알았소."
나는 망량의 말대로 미호에게로 다시 이동했다. 비등을 이용해서 교토의 천황궁에 나타나자, 미호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를 반겼다.
"돌아왔구나! 아직 쇼군가의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니라."
"......"
"안색이 안 좋구나. 무슨 일이 있느냐?"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저... 그게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죽었어..."
"......"
미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무영문에 데려간 후 있었던 일 전반을 미호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호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황당을 금치 못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그렇게 쉽게 무사시를 잃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그정도 무사는 검성 노부츠나뿐인데 그는 동영 무가의 정점에 있는 대검호라서 쉽사리 동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라."
"미안..."
"으휴... 하긴 듣고보니 그 놈이 너무 나댄 모양이구나. 어쩔 수 없지."
미호도 현실을 인식하고 단념하는 눈치였다. 나는 미호에게 미야모토 무사시의 유품을 보여 주었다.
"그가 남긴 도(刀)와 오륜서라는 책이야. 이걸 묻어줘야겠어."
"... 오륜서?"
"응. 책 제목이 그렇게 되어있네."
"어디 읽어보자꾸나."
미호는 오륜서를 받아들고 팔락팔락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반 시진을 읽었을까, 의아한 듯 말했다.
"뭐냐? 병법서같긴 한데 이건 일종의 무공비급이 아니냐?"
"어?"
"자세히 안 읽은 모양이구나. 여기저기에 호흡법이나 검술이 은밀하게 암시되어 있느니라."
나는 미호의 말대로 오륜서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세히 읽어보자 이건 병법서라기보다는 무공비급 그 자체였다. 서두 부분을 대충 읽을때는 몰랐는데 가면 갈수록 기오막측한 검술을 강연하는 듯한 무술비급이었다. 심지어 호흡법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상당히 손때가 타 있었다.
미호가 말했다.
"뭐 무공비급을 하나 얻은 셈이구나. 네가 가지거라."
"응."
"하아, 그나저나 핫토리 한조 놈을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겠구나..."
미호의 걱정은 괜한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에 교토의 천황궁에 찾아온 핫토리 한조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신과 유품을 발견하자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무, 무, 무사시 공이 죽었다고오?!"
"......"
"이, 이게 어찌된 일이오?!"
감정을 죽여야 하는 닌자가 이렇게 놀랄 정도이니 커다란 변란인 건 틀림없었다. 미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중원의 고수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것도 엄청난 고수이니 어쩔 수가 없었느니라."
"세... 세상에... 무사시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핫토리 한조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경악에 휩싸인 한조에게 미호가 말했다.
"백련교의 고수였다고 하느니라..."
"백련교..."
미호는 꾸며낸 거짓말을 그에게 주입시켰다. 나와 함께 칠요를 찾으러 움직이던 무사시는 갑작스럽게 백련교의 방해에 직면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백련교 고수들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말한 것이다. 나도 미호의 거짓말에 동조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핫토리 한조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솔직히 믿지 못하겠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귀비의 중원행에는 함께 따라갈 수 없소이다."
"원래 그대는 어떤 대답을 하러 왔지?"
"귀비의 호위를 위해 임시동행을 하려 했소. 허나 이제는 의미없는 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소이다."
미호가 팔짱을 끼며 당당히 말했다.
"배웅하지 않겠노라. 그리고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중원에 갈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거기까진 관여하지 않겠다고 쇼군께서 말씀하셨소."
"그거 고맙군."
쉬리릭!
이윽고 핫토리 한조는 닌자의 잠영술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호는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다 무산될 줄이야. 허무하구나."
"괜찮아. 저런 녀석 없다고 큰 문제는 없으니까."
"핫토리 한조는 동영 최고의 닌자다. 저 자가 있으면 굉장히 앞으로의 일이 편했을텐데, 흠."
미호는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그럼 같이 중원으로 가자꾸나."
나와 미호는 비등을 이용해서 중원에 도착했다. 진랑곡에 도착하자 망량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호 님, 반갑습니다. 저는 망량이라 합니다."
"흐음... 네가 망량이구나."
미호는 내게서 망량에 대해 많이 들은 탓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망량을 부드럽게 대하는 기색이었다. 상호 인사가 끝나자 망량이 본론을 꺼냈다.
"지금부터 길어도 한 달 이내에 신속하게 황연 대장군의 가솔들을 구출할 필요가 있소."
"그렇게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소?"
내가 질문하자 망량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냐하면 당신은 이 일이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막야의 2차 봉인지로 가야하기 때문이오."
"2차 봉인지? 설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망량이 확정적으로 말했다.
"이 세상의 북쪽 끝으로 가는 것이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려요! 힘이 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