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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망량의 선택은 '사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연금술사가 쓰러졌다지만 제갈부의 결계는 여전히 위협적이었기에 우선 제갈부의 의향을 떠보려는 의도였다. 망량이 사자를 보내자 약 한 시진 후 사자가 되돌아왔다.
사자는 말에서 내려서 망량의 막사에 비척거리며 걸어들어오더니, 갑자기 눈을 희게 까뒤집었다. 그리고 음울한 목소리가 사자의 성대에서 흘러나왔다.
[ 너희가 패권(覇權)을 잡았다고 확신하느냐?]
"확신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소?"
아마 제갈부는 사자의 몸을 빌려서 원거리에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인 듯 했다. 아마 술법의 일종일 것이다. 제갈부가 한동안 침묵하더니 말했다.
[ 초상기인을 어떻게 훔쳐갔는지는 몰라도 그건 실책이었다. 너희는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역린이라. 누가 용(龍)이란 말이오? 당신? 하긴 인중룡(人中龍)이라 불렸으니 맞긴 하군."
망량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제갈부가 대답했다.
[ 이 세상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진실이 존재하지. 너희가 한 짓은 그 진실의 주재자(主宰者)의 관심을 끌어버린 짓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나조차도 앞으로의 시국이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망량의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옛 지배자]가 직접 관여한다는 뜻이오?"
[ 그럴 리가. 하지만 곧 너희는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 혈육의 정(情)으로 미리 경고해 주었다, 현아. 나는 내가 살 길을 찾아갈 것이니 너도 살아갈 장소를 찾아가라.]
파아앗!
잠시 후 사자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안색이 되돌아왔다. 눈도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빙의나 강령술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망량은 사자를 내보내고는 곧장 뇌신류의 고수들을 데리고 황연 대장군에게 찾아갔다.
망량이 황연 대장군에게 부복하며 말했다.
"장군. 언사(偃?)까지 군을 물리셔야 합니다."
"언사까지? 그게 말이 되는가."
황연 대장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낙양을 코앞에 두고 대군으로 낙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인데, 언사는 여기에서 백여 리는 떨어진 요충지였다. 황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데도 백 리를 후퇴한다는 건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버리는 선택이었으므로 황연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망량이 진중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天)의 힘이 작용할 때가 되었으므로, 최대한 환란을 피해야만 합니다. 그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하지만 망량. 언사까지 군을 물리게 되면 황제가 힘을 정비하고 도망칠 시간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 그걸 용인하란 말인가?"
"이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신화(神話)적인 존재들이 움직인다면 인간의 군세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황연 대장군은 한참 고뇌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용납할 수 없네."
"장군!"
"자네를 신뢰하지만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네. 낙양성을 수비하는 병력은 고작해야 삼사천 밖에 되지 않으니, 한나절만 공성하면 손에 떨어질 것일세.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이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안 됩니다! 그건 최악의 선택..."
황연 대장군이 힐끔 옆에 있던 이광을 쳐다보았다.
"이광. 자네는 내게 하나의 빚을 지고 있었지."
그 순간, 이광의 얼굴이 납빛으로 굳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회복하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때의 빚을 지금 갚게. 망량을 포박해서 잠시 군사직을 물러나도록 하시게."
"... 알겠습니다."
촤앙!
나는 그 순간 뛰어들어서 망량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망량을 보호하듯 손을 펼치고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뇌신류 고수들을 노려보았다.
"이광 사부! 반천맹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끝까지 망량을 믿어 주십시오!"
"......"
이광은 창을 꼬나쥔 채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나는 황 장군께 목숨의 빚이 있다. 그리고 언제고 내 목숨으로 되돌려 드리기로 했다. 그 빚을 갚으라 하셨으니, 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
"미친...!! 사부도 어느 쪽이 옳은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망량의 선택이 틀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만."
이광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인은 군령(軍領)에 따르는 법이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베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슬며시 품 속의 비등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 순간 이광의 의형강기가 쏘아져 나오더니 내 움직임을 멈칫거리게 했다. 실질적인 강제력은 없었지만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비등에 손을 댄다면 그 즉시 폭풍같은 공세로 공격해 올 것이다.
이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 이 자리는 너희가 양보해라. 내가 생각해도 언사로 후퇴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황연 대장군 일생일대의 도박을 성공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광 또한 망량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화적인 존재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큰 사변이 터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무인으로써 과거의 빚을 갚아야 했기에 억지로 자기자신을 설득하며 나선 셈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지?'
하지만 그걸 지금 따질 깜냥이 되지 못했다. 나는 별 수 없이 검을 든 기세를 북돋으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사부. 이러나 저러나 죽는 수밖에 없다면, 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쿠오오오
그 순간 내 몸에 있던 잠력(潛力)이 격발하며 막사 내를 진동시켰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진소청, 이광, 적월, 녹월의 몸이 한 순간 경동하며 굳을 정도였다. 내 내공을 최대한 해방했으니 인간의 경지가 아닌 것이다. 내 내공의 수위를 느낀 적월이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하면 저런 내공을 쌓는게 가능한 게냐?"
이광이 짤막하게 말했다.
"싸움은 내공으로만 하는 게 아니지. 네 실력으로 우리와 동귀어진이 가능하다 생각하면 착각이다."
"... 물론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가능하니까요."
나는 자신이 있다. 이대로 백웅결과 뇌명을 일으키며, 틈을 봐서 대라멸진(大羅滅盡)을 쓰면 전투력이 몇 배는 뛰게 될 것이다. 그 때의 힘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과도 동귀어진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목소리에서 확신을 느끼자 이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때 내 등 뒤에 있던 망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소. 내가 졌으니 나를 포박해 가시오."
"망량!"
망량은 내게 전음을 보냈다.
[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선 따르는 수밖에 없소.]
[ 하지만...]
[ 어차피 곧 나를 다시 찾게 될 거요. 걱정 마시오.]
나는 검을 늘어뜨리고 투기를 사그라뜨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군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와 망량을 오랏줄로 묶어 포박했다. 나와 망량은 잠시 후 어두컴컴한 임시 군량고 안으로 유폐되고 말았다.
쿠웅
임시 군량고의 문이 닫히자, 극호가 불을 켰다. 횃불이 일어나자 극호는 벽에 횃불을 꽂아넣고는 나와 망량 앞에 앉았다. 그는 우리를 감시하는 역할로 함께 따라들어온 것이다.
극호가 말했다.
"거, 해칠 맘은 없는 것 같으니까 안심해라. 그냥 의견이 안맞은 거구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망량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극호. 밖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를 풀어주시오. 부탁이오."
"미안하지만 지금 뇌신류 제자들은 모두 군령에 따르게 되어있어서 그렇게는 못 해. 사부나 황연 대장군이 직접 오기 전에는 절대 풀어줄 수 없다."
"당신의 판단을 믿겠소."
극호는 그저 피식 웃었다. 극호는 경박하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두뇌회전도 빠르고 냉철한데다 의지력도 강했다. 감시역을 하기에는 가장 제격인 인물이 배치된 것이다. 극호가 말했다.
"참고로 말해두는데 그 비등을 써서 탈출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왜요 사형?"
"니가 쓰려고 들면 내 깜냥으로 너를 막을 순 없겠지만, 너희는 두 번 다시 우리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맞군. 하지만 그 신뢰라는 게 이미 산산히 부숴진 상황에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신뢰가 부숴졌다고? 그랬다면 내가 아니라 진소청을 함께 배치했겠지."
"으음..."
"너희가 우리 편이라고 아직 믿고 있으니까 감금으로 끝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였을 거다."
"뭐 어쩌라고요?"
내가 짜증나서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극호가 눈을 부릅떴다.
"괜히 나를 도발하지 마라. 나는 귀가 얇지도 않고 인내심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아."
"......"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얌전히 있는 수밖에 없다. 극호도 뇌신류 제자답게 내면에 난폭한 성정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자칫하다가는 큰 사단이 날 것이다.
우리는 묶인 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는 망량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 망량. 아까 그 제갈부 놈 말이 무슨 뜻이오?]
[ 제갈부는 도망쳤소. 이미 황궁을 수호하는 결계 따위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오.]
[ 왜 도망친거지...?]
[ 그를 손쉽게 잡아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존재가 낙양에 나타났다는 뜻이오. 그리고 그 존재는 머지않아 우리 군을 공격할 것이고.]
[ 아무리 강력하다지만 이 대군의 병력이 십만 명이 훨씬 넘는데...]
[ 나도 어떤 존재가 나타날지 짐작도 되지 않소. 그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그렇게 약 한나절이 지났다. 극호는 초절정고수답게 거의 동요없이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지키고 있었다. 극호 말마따나 내가 지금이라도 비등을 꺼내서 망량과 함께 탈출하는 건 가능하지만, 망량이 그걸 원하지 않는 듯 했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움직임을 봉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쿠구구구구....
바깥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극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우리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잠시 바깥에 급히 나간 극호는 반 각도 되지 않아서 군량고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창을 휘둘러서 우리를 묶은 포승을 잘라주었고, 나와 망량에게 검을 한 자루씩 던져주었다.
"얼른 와! 큰일났다. 황연 대장군께 가야 해!"
"무슨 일이오?"
극호가 이를 악물었다.
"네 말대로다. 이상한 괴물이 나타났어!!"
사아아...
사방이 마치 새파란 안개로 뒤덮인 것 같았다. 시야가 겨우 삼 장이 될까 말까였고 그나마도 마치 안개가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극호는 그 와중에도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우리를 이끌어서 황연 대장군의 막사에 갔다.
황연 대장군의 막사에는 황연을 비롯해서 뇌신류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황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망량. 낙양성에서 괴물이 나타나면서 우리 군이 마비되어버렸네."
망량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해상황은 어떻습니까?"
"벌써 사망자가 만 명 넘게 발생했네. 지금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이 기묘한 안개 때문에 군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네..."
"괴물은 어떤 놈입니까?"
"그것이... 토병(土兵)일세."
"네?"
"흙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불사신처럼 끊임없이 일어나서 공격해오고 있고, 그놈들을 조종하는 게 왠 새하얀 거품덩어리... 라고 보이네."
"새하얀 거품덩어리라."
망량이 읊조리다가 말했다.
"곧 안개에 갇혀서 십 수만 대군이 전멸하겠군요."
"대체 그건 뭔가?"
"신화적인 존재... 일 겁니다."
망량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생존확률은 잘해야 3할...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리고는 망량이 나를 포함한 뇌신류 고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괴물과 맞서싸우는 건 자살행위요. 지금 당장 만인대까지의 조직에 군령을 내리며 수습하는 걸 도와 주시오. 말해두지만 토병은 몰라도 술법의 근원인 하얀 거품덩어리와는 절대 싸우면 안되고 도망쳐야 하오."
뇌신류의 호법인 적월과 녹월이 퉁명스레 말했다.
"도망치라고?"
"괴물과 싸워보지도 않고 말이냐?"
망량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만일에 저 안개 너머에 백련교주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야 도망치겠지."
"그것과 같습니다."
"......!!"
"고대의 존재와 싸우는 건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하니 만용은 불가합니다."
"크응..."
적월과 녹월의 눈에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하긴 개개인이 이광에게 떨어지지 않는 초절고수인 그들로써는 정체불명의 괴물때문에 도망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잠시 후 뇌신류 고수들은 각지의 제장들을 보호하며 병사들을 통솔하러 흩어졌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안개 속을 돌아다니다가 혈무(血霧)가 자욱한 장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내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주르르륵
촤아아...
[ 크아아아...]
[ 으겍... 겍...]
토병이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시체를 검으로 찌르고 있었다. 놈들은 시체에서 피가 치솟아 오르면 거기에 입을 처박고 게걸스럽게 피를 빨았다. 또 어떤 놈들은 시체의 내장을 손으로 파서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푸욱
더러는 토병이 아닌 외눈박이 촉수괴물이 슬금슬금 기어다니면서 시체에 촉수를 박았다. 촉수가 박힌 시체에서 싯누런 진물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그 상처자국에서 실지렁이같은 촉수들이 슬그머니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갈수록 버섯같은 형상이 되더니 시체를 서서히 균사를 이용해서 들어올렸다.
"......!!"
이런 잔혹도를 보통 인간이 보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지켜보면서 이 광경이 인신공양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걸 알아챘다. 이계의 마물들이 인간을 즐겁게 잡아먹는 꼴이었다.
나는 달려들어서 토병과 촉수괴물들을 베었다.
촤악!
[ 끼이이익!]
[ 끼엑!]
토병들은 민첩하고 힘이 강해보였지만 내 검술에는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생각보다는 약했지만 역시 일반 병사로서는 이 놈들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주변에 더 적이 없는지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퍼엉!
미호가 갑자기 목걸이의 형태에서 변신해서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은 반인반요의 모습으로써, 미호가 반쯤 전투형태를 취할 때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미호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백웅! 그만하고 얼른 튀자."
"무슨 소리야?"
"이 무시무시한 요기(妖氣)가 느껴지지 않느냐? 더 늦으면 도망칠 시간도 없다!"
"무슨..."
미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길한 안개 저편을 힐끔힐끔 거리더니 말했다.
"말도 안되는 대요괴가... 저 너머에 있다! 빨리 도망쳐야 돼!"
"대요괴? 어떤 대요괴?"
"으으... 설명할 시간 없다! 어서 비등을 써라."
이렇게 두려워하는 미호의 모습은 월요의 수호자를 맞닥뜨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기에 저항력이 있으면서도 민감한 요괴였기에 인간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지도 몰랐다. 나는 별 수 없이 미호의 말대로 비등을 꺼내서 사용했다.
파앗
나와 미호는 곧장 망량의 막사에 나타났다. 망량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가 말했다.
"상황이 심각한가 보군."
"이미 늦었소. 도망칩시다."
"알았소."
우리는 우선 뇌신류의 고수들을 다시 찾기로 했다. 망량은 조금이라도 생존자를 늘리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모양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뇌신류의 목숨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뇌신류 고수들은 강한 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쉽사리 합류할 수 있었다.
적월과 녹월을 제외한 뇌신류 고수들과 모두 합류하고, 황연 대장군도 합류하자 이광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멸이군. 시체밖에 없었어."
"이렇게 빨리..."
"호법들은 어디 갔..."
그 때였다.
[ 크아아아아아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 비명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거대한 뇌전과 화염이 퍼져나오더니, 일순간 안개를 가르고 시정을 십여 장 가까이 늘렸다.
콰과광
파괴음이 끝나자, 그 자리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뇌신류의 호법이자 천하를 오시하던 절세고수이던 적월과 녹월! 그들은 심장이 왠 새하얀 것에 꿰뚫려서 허공에 붙들려 있었다. 입에서 선혈을 쿨룩쿨룩 흘리는 걸 보면 아직 목숨은 붙어있는 모양이었으나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심장을 관통당했기 때문이다.
적월이 마지막 힘을 다해서 이쪽으로 보며 외쳤다.
[ 도망쳐라...!! 이 놈은... 격이 다르다...!!]
푸왁
그것이 적월의 유언이었다. 새하얀 은빛의 꼬리가 홱하고 휘둘러지더니, 마치 장난처럼 적월과 녹월의 신형이 사지분해 되었다. 천공에 피안개가 흐르며 시체조각이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는 이를 갈며 자신의 창을 다잡았다.
"이 놈...!!"
이광의 옆에 진소청도 따라나섰다. 진소청도 적월과 녹월의 죽음에 적잖게 분노한 듯 투기가 만연했다. 망량이 급히 외쳤다.
"안돼! 진정하시오! 지금 싸우면 죽어!"
"웃기는 소리! 저 놈만 쓰러뜨리면 되는 거잖나!"
파아앗
다음 순간 이광과 진소청의 신형이 새하얀 거품덩어리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안개에 가려서 사라진 그들의 모습은 이내 천지간에 거대한 기파를 뿜어내며, 강대한 적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쿠르르릉
뇌정이 은은하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크으..."
온다.
그가 온다.
나는 마음 속으로 검선 여동빈이 강림하려는 예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동빈은 상당히 신중한 기색으로 내 영혼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나 또한 그의 정신과 파동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여동빈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연자여... 나 여동빈... 천여 번의 퇴마를 행했으나... 이번에는 나로써도 승산을 말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내게 몸을 맡기겠는가?]
[ 검선이여. 저 하얀 거품덩어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 거품덩어리가 아니다. 너무나 강력한 요력(妖力)을 지니고 있어서 격하(格下)의 존재는 그 모습을 관찰하는 것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 ......?]
[ 다시 묻겠다. 저 적은 내가 퇴마행을 하며 만났던 무수한 강자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초강적이다... 그래도 연자의 목숨을 내게 맡기겠는가!]
나는 고민했다.
' 전력을 다해서 싸우다보면 죽겠지?'
전례가 있다. 내가 죽을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여동비까지도 내게 허락을 구할 정도라면 그 위험성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에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광과 진소청까지 처참하게 죽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이광은 몰라도 진소청이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 좋다... 저 상고시대의... 절대적인 마왕(魔王)을 토벌할지니, 현천상제시여 내게 힘을 주소서!!]
쿠르릉!
쿠릉!
[ 이것이 천둔검법의 제 2단계... 신(信)을 넘어서 염(念)을 감응하는 것이다.]
갑자기 천지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내가 들고 있던 검에 내려쳤다. 그러나 나는 감전되거나 기절하기는 커녕 전신에서 힘이 솟구침을 느꼈다. 아마도 여동빈이 주술을 써서 하늘에서 힘을 더 강하게 빌려오는 능력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동빈이 강림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여동빈은 내 옆에 있던 망량과 미호를 한 번씩 훑어보더니 미호에게 말했다.
[ 서왕모께서는 네게 청구국에 돌아가있으라 하셨다.]
미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가?"
[ 이 일에 더 이상 관여치 마라. 그러면 백년 내로 너는 천계에 되돌아올 것이다.]
휘익!
그 말을 남긴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슈우웅...
어검비행술을 써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자 전황이 한눈에 보였다. 사방 곳곳에는 처참하게 토병과 촉수괴물때문에 죽어있는 병사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그 위에서 격렬하게 진소청과 이광이 새하얀 거품덩어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아앗!!"
콰광
진소청이 기합을 내지르며 뇌창을 격중시키자, 거품덩어리가 떨리더니 한꺼풀 떨어져 나갔다. 이번 공격은 진소청 필생의 공격이었는지 거품덩어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감탄한 듯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 고작 인간인 주제에 내 아홉 개의 꼬리 중 하나를 거두게 만들었느냐...?]
"닥쳐라 요괴!"
[ 아하하하...]
다음 순간이었다.
푸콱!
무언가 희끄무레한 게 스쳐지나가더니, 갑작스럽게 진소청과 이광의 팔이 한 쪽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진소청은 간발의 차이로 추가공격을 피했으나 이광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장난을 하는 것처럼 - 이광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뇌신류의 후계자이자 종사위를 얻은 삼절 이광의 최후였다. 진소청은 잠시 그 광경을 믿지 못하는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때 재빨리 여동빈이 날아들어서 그의 몸을 데리고 지상으로 착지했다.
타닷
"으아아아...!!"
진소청이 막 발작하듯 일어서서 공격하려 했으나 여동빈은 가볍게 진소청의 수혈을 제압해 버렸다. 진소청의 고개가 꺾이자 그는 진소청을 멀리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아마도 다른 뇌신류 고수들이 받아낼 수 있게끔 하려는 모양이었다.
여동빈이 장내에 뛰어들자 하얀 거품덩어리가 말을 걸어왔다.
[ 팔선(八仙)인가? 너희는 여전히 쓸데없는 싸움을 하려 드는구나.]
[ 그대가 상고시대의 마왕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인계를 어지럽히게 둘 수는 없다.]
[ 후후후... 팔선 모두가 덤벼도 모자랄 텐데 너 혼자서?]
하얀 거품덩어리가 비웃자 검선 여동빈은 뇌검(雷劍)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 막아내고야 말겠다...]
이어진 말에 나는 뭔가가 크게 잘못됨을 느꼈다.
그리고 뇌검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하얀 거품덩어리가 걷히고, 이내 거품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게 새하얀 은빛의 '꼬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꼬리 너머에 있는 실체는 마치 산악(山岳)처럼 거대한 사악한 여우의 모습이었다.
오오오오 -
[ 아하하하하!!]
'그것'은 마치 천지를 뒤흔들어 잡아먹으려는 듯 했다. 동시에 나는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한 힘을 상대방에게서 느낄 수가 있었다. 미호와 비슷해보이지만, 미호와는 너무나 엄청난 격차를 지니고 있는 절대적으로 사악하고 악독한 존재가 눈 앞에서 만물의 기를 왜곡시키고 있었다.
태극이 일그러진다.
투선이자 팔선인 검선 여동빈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게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 달기(?己)!]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