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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얼마 후 뇌신류 제자들은 청룡무관으로 귀환했다. 한바탕 정천맹과 날뛰었기 때문인지 관원들이 우리를 경계하는 듯 했으나, 지명수배까지는 당하지 않은 듯 얌전히 관문을 통과시켜주었다. 아마도 정천맹에서 관부를 끌어들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리라. 귀찮은 일이 있다면 엉망이 된 청룡무관을 재단장해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약속이라도 한듯 정천맹의 사자가 찾아와서 정전협정을 맺는 서신을 갖고 왔다. 이광은 의자에 앉아서 찬찬히 읽어보다가 말했다.
"따로 면담은 필요없겠지?"
"서신으로 끝내자고 말씀하셨소."
"정천맹주 위지혼이?"
"그렇소. 그리고 정천맹 전체의 의지요."
이광은 쓴웃음을 짓는 듯 했다.
사자가 서신을 전하고 되돌아가자 나는 이광에게 말했다.
"정천맹주는 이번 일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군요."
"그렇지도 않다. 위지혼이 거부했다면 구파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해도 정전협정이 묵살되었을 것이다."
"네? 정천맹주는 구파에게 휘둘리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광은 서신을 서재 한구석에 넣어둔 후 대답했다.
"평범한 놈이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위지혼은 특별하다. 그가 우리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음..."
그러고보니 이광은 위지혼을 높이 평가하는 듯 했다. 구파에 인재가 많다고 하지만 그가 인정할만한 자는 위지혼과 연정홍 정도였다. 그 외의 어떤 절정고수 이야기가 들려와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게 이광이었다. 그가 보는 무인의 척도에는 기준이 확실히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광이 슬며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슬슬 우리가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소, 벽력삼존."
스스스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새하얀 신형이 튀어나오는 듯 하더니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두 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나 있었다.
' 절세경공!'
그들 중 한 명은 적색(赤色) 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녹색(綠色)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외양은 이광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는데, 아마 그들이 벽력삼존이라면 그들의 성취는 평신(平身)에 이르러있을 게 분명했다.
적색 옷을 입은 괴인이 끌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이광. 갑자기 일을 벌여서 당황했다. 네놈도 뇌신류 아니랄까봐 아주 제멋대로구나."
"적월(赤月). 청월(靑月)은 어디 갔소?"
"우리가 네 아랫사람이냐? 말투가 왜 그리 건방져?"
적월이라 불린 적색 옷의 괴인이 짜증을 냈다. 그저 짜증을 냈을 뿐인데 순간 굉장한 기세의 폭풍이 장내에 몰아치는 듯 했다.
콰르릉
"......!!"
무형지기의 흐름! 의지만으로 이정도의 힘이 움직인다는 것은 적월의 경지가 초절정에서도 아주 지고한 경지에 올라있다는 뜻이었다. 초절정의 초입인 나와는 비교가 안되는 자였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이광이 훗하고 웃었다.
"적녹청(赤綠靑) 벽력삼존(霹靂三尊)이 뭉쳤을 때 그 누구도 앞에서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없었지. 그러나 지금은 둘밖에 없으니 묻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 옆에 있던 녹색 옷의 문사차림의 괴인이 껄껄 웃었다.
"으하하. 네가 어르신의 직계제자가 아니었다면 혀를 뽑아버렸을 것이다 이광."
"내 혀를 뽑으려면 당신 목이 뽑힐 거요."
"농담도 잘하는군. 하핫."
나는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내용에 기가 질렸다.
' 으으.'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듯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 같은데 내용이 너무나 험악한 것이다. 이걸 누가 같은 사문(師門) 끼리의 대화라고 하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적색 노인은 당장이라도 이광을 쳐죽이고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한 표정같았다.
적월이 잠시후 자기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청월(靑月)은 멀리 동영(東瀛)으로 갔다."
"그 양반은 거기까지 왜 간 거요?"
"원월천살법(圓月天殺法)을 찾으러 갔지. 그게 교주의 능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흠... 원월천살법이라... 그게 뭐요?"
이광은 다소 황당해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원월천살법을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는 듯 했다. 나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통하지 않았다면 그 존재를 알지 못했으리라.
' 그리고 백련교주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게 원월천살법의 존재를 알려줬지...'
환상의 살법(殺法)!
내가 원월천살법에 대해서 생각하자 적월이 말했다.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청월은 나름대로 확신을 얻어서 간 것 같더군."
"뭐 어련히 잘 하시겠지. 그래서 연락은 하고 지내시오?"
적월은 어이없어했다.
"미쳤냐? 어떻게 동영에 있는 놈과 연락을 해?"
"최근에 연락을 언제 했는지 묻는 거요."
그러자 적월이 발끈했다.
"이 애숭이가... 정말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쿠오오
적월이 그 순간 이광에게 달려들었다.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뇌신류의 무공일 뿐이었지만, 적월의 움직임은 마치 번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멸혼보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뇌영보법으로 달려든 적월의 일 수(一手)가 순식간에 개세적인 위력을 머금고 이광의 가슴을 공격했다.
타앙
이광은 그 찰나에 뇌신권(雷神拳)에 천뢰무극창의 절초를 섞어서 적월의 공세를 흘려내었다. 적월의 공격은 짧은 순간에 무려 열 개 이상의 변화를 만들어냈지만 이광은 그조차도 원의 형태로 흘려보내는 듯 했다. 적월과 일 초의 교환이 끝나자 적월은 재차 뒤로 물러섰다.
적월은 당혹한 표정이었다.
"이 놈... 정말 많이 늘었구나! 내 뇌령인(雷靈印)을 받아내?"
파지지직...
이광의 옷자락과 손 주변에는 약간 검게 그을린 자국이 생겨 있었다. 순식간에 적월의 일 초식을 받아내긴 했지만 무시무시한 뇌령지기를 미처 다 흘리지 못한 것이다. 다만 부상으로 볼 정도가 아니라서 명백히 이광의 실력이 적월에 상응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광이 대꾸했다.
"그 치욕의 날 이래로 강산이 몇 번 변했는 줄 아시오? 나도 스승님의 명예를 걸고 있으니 섣불리 개파하지 않소."
"으음..."
적월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녹색 문사차림의 사내가 손을 저었다.
"관두게 적월. 이광의 실력은 우리와 대등하다네. 뇌신류의 종사(宗師) 자격이 있다고 보네."
"끄응. 녹월. 저 건방진 놈을 인정하라니."
"인정 안하면 어쩔텐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빙빙 돌아갈 필요는 없어."
"하긴 그것도 그렇군."
적월은 마지못해서 이광의 '버릇고치기'를 그만둔 모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세 절세고수의 대결에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이 자들이 바로 현 뇌신류의 최고수들이구나.'
적월이 이광의 말에 대답했다.
"청월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이십 년 전이다. 녀석은 그 때 원월천살법의 확실한 단서를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단서를 찾았다고? 그럼 왜 중원으로 안 오는 거지?"
"그거야 뭐, 찾고나서 자기가 익히는 중이겠지. 뻔한 거 아니냐."
"그럼 그 마지막 단서가 뭔지 말해 주시오."
그러자 적월이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이봐 애송아. 네놈이 지금 종사 기분을 내는 건 알겠는데 그 말투 좀 집어치워라. 네놈이 애새끼일 때부터 우리는 뇌신류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지금 감히 우리를 심문하려 드는 것이냐?"
"사부께서 내게 유지를 물려주셨고 개파대전도 끝냈으니, 지금 뇌신류의 종사는 바로 나요. 당신들은 뇌신류의 호법(護法)으로써 종사의 명에 따를 의무가 있는 게 아니오?"
녹월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종사라? 네가 네 사부의 역량에 절반이라도 따라간다고 보느냐?"
"......"
뜻밖에도 지금까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이광은 그 질문에 머뭇거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지 못하오. 내 사부는 당신들의 합공과 동수를 이루셨으니."
"무공의 고하로 종사임을 가리고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기에 너는 아직 부족하다. 아직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평소의 이광이라면 이런 대답에 대해서 그럼 합공을 이겨보겠다고 호기롭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조차도 그 정도의 호기를 눈 앞의 적월, 녹월에게 부릴 수는 없는 듯 했다. 적월과 녹월은 말 그대로 전대의 초고수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광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어쩌고싶다는 말이오?"
"너를 아직 뇌신류의 종사로 인정할수는 없지만, 네가 종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건 사실이다. 우리도 너와 함께 뇌신류를 일으키는데 힘을 보태고 가능한 한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
"또한 네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적월과 녹월의 말은 중요한 국면이었다. 이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소. 하지만 당신들은 머지않아 나를 인정하게 될 거요."
"그건 두고봐야지."
잠시 후 세 사람은 이광의 내실로 들어갔다. 탁자에 둘러앉은 그들은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했다. 그 때 의자에 앉은 적월이 힐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광. 이 놈은 뭐냐? 희한한 놈이군."
"내 제자요."
"수제자냐?"
"아니오."
적월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공 하나는 호법사자급이군. 나보다도 훨씬 높아. 헌데 왜 이리 수준이 경박해보이느냐?"
그러자 이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사정이 있소. 그는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요."
"호오. 재밌군."
"또한 그 아이는 이 대화를 들을 자격이 있소. 가만 놔두시오."
"그러지."
이광은 망량에게서 내 위치를 지적받은 듯 했다. 그리고 아마 내게 뇌신류의 정보를 공유하라고 설득했으리라. 그렇기에 원래라면 쫓겨나갈 자리에서도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벽력삼존 적월이 말했다.
"전후사정이 어찌된 건지 듣고싶다."
"말씀드리지."
이광은 차분하게 한 식경동안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적월과 녹월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침묵하던 적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반천맹주라는 자, 걸물(傑物)이군."
"그렇소."
"좋아. 상황은 꽤 괜찮은 편이군. 우리가 너를 도와줘도 무방할 듯 싶다."
적월이 옆에 있던 녹월을 힐끔 바라보자, 녹월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견 없네."
벽력삼존 적월과 녹월은 이제 뇌신류의 호법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적월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런데 백련교주가 우리에게 10년 내에 최종오의 무혼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그렇소."
"아무런 사전통지도 없이?"
"그렇소."
이광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자, 적월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역시 이상해. 교주는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어."
"무슨 말이오?"
"이광 너도 알겠지만 뇌신류 최종오의 무혼은 완성된 게 아니며 완성형조차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혼을 가져오라고 하는 건, 역시 네 스승의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으로서는 모두 짐작일 뿐이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굳이 그 자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한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생각하오. 어쩌면 무혼이 완성된다면 교주에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흐음..."
적월이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녹월이 말했다.
"나는 반대다. 최종오의를 얻기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교주에게만 이득이 될지도 몰라."
"그럴수도 있소.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외에 교주를 처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소."
"뇌신류는 이대로 다인전승으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현 교주가 죽고 나서 재흥(再興)할수도 있다. 지금의 교주는 역대 교주중에서도 최강으로 불리는 절대무적(絶對無敵). 그 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광은 녹월의 말에서 뭔가를 느낀 듯 했다. 그리고는 예리한 눈으로 녹월을 노려보았다.
"당신들. 따로 세력을 만들었군. 그런 거였어."
"......"
적월과 녹월은 침묵했다. 그것은 이광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의미했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이광이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원수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어린애나 백면서생도 그딴소리는 하지 않을 거요! 원수의 힘이 두려우니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하... 정말 벽력삼존이란 자들도 갈데까지 갔군!"
적월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우린들 화가 나지 않는줄 아느냐? 교주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수신류(水神流)의 무공은 너무나 강력하며, 초인(超人)적이다. 하물며 역대 수신류 중 최강으로 불리는 백련교주를 공략하는 건 불가능해. 우리는 복수를 하기에 앞서서 뇌신류의 호법으로써 문파의 맥을 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닥치시오. 당신들은 그저 꼬리내린 개일 뿐이오."
"뭐라고?"
우우우우우
그 순간 적월과 녹월의 몸에서 강렬한 의형강기가 일어났다. 단순한 무형지기보다 한발 나아간 것으로써, 실체를 만들어서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든 자유자재로 사용가능한 경지였다. 두 사람이 이광의 말을 듣고 격분한 것이다.
이광도 싸움을 피할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아까부터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말이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자 힘으로 복종시키려는 듯 했다.
나는 직감했다.
' 이대로 놔두면 싸운다!'
이 자리에서 이 셋이 싸우게 되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뇌신류는 순식간에 박살나게 될 것이고, 망량의 천명을 바꿀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끝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급히 끼어들어서 외쳤다.
"잠시 세 분은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자 장내에 감돌던 전의(戰意)가 잠시 가라앉았다. 녹월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넌 또 뭐냐?"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뇌신류의 제자인 백웅이라 합니다."
"백웅. 이 자리는 네가 끼어들 때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한 말씀만 들어 주십시오."
"뭐..."
녹월이 어이없어하자 나는 탁자를 향해 부복하며 말했다.
"세 분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세 분은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습니다."
"......?"
세 뇌신류 절세고수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들의 긴장이 풀린 틈을 타서 말의 쐐기를 박아넣었다.
"저라면 실종된 벽력삼존 청월 님을 찾아서 데려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제와는 상관없는 뜻밖의 말.
그러나 전혀 관련없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중요하다.
그 엉뚱함 때문에 살기를 풀고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월을 동영에서 데려온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스승님?"
내가 이광에게 동의를 구하자 이광도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눈치챈 듯 했다. 그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 너라면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청월 호법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
"이광. 무슨 뜻이냐? 이 백웅이란 아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이광이 적월과 녹월에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는 그런 신비한 능력이 있소. 만일 두 분께서 청월 호법의 단서를 내게 알려준다면, 다같이 합심해서 청월 호법을 동영에서 짧은 시간 내에 데려오는 게 가능하오. 그것도 수백배는 빠른 속도로."
"......!!"
"이건 내 스승의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소."
이 세상에서 이광보다 스승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없다. 이광이 스승의 명예까지 들먹이자 적월과 녹월은 이광의 말을 믿는 기색이었다. 덤으로 이광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심문하듯 캐물은 건 미안했소만 그건 모두 뇌신류를 위한 일이었소. 청월 호법을 빠르게 데려와서 우리 뇌신류의 중흥을 꾀한 것이오. 세 호법의 무공과 뇌신류 전승무예를 연구하다보면 반드시 최종오의를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니까."
"으음..."
"헌데 두 분께선 강호 어딘가에 자기 세력을 만들어놓고, 하는 소리라곤 교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니..."
이광이 탁자를 꽝하고 내리쳤다.
"비기를 찾아 동영으로 떠난 청월 호법이 그 소리를 들으면 두 분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소!"
"......"
적월과 녹월은 대번에 할 말이 없어진 기색이었다. 청월이 동영에 있어서 영영 안돌아올거라면 몰라도, 당장이라도 위치만 알면 데려올 수 있는 수단이 있는 이상 청월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격의 뇌신류 호법으로써 청월에게 비웃음당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을 게 분명했다.
적월이 헛기침을 했다.
"흐음. 흠. 좋다... 그러면 최종오의의 완성에 우리도 협력하겠다."
"적월?! 나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럼 어쩌게? 청월 놈한테 비웃음이나 당하고 싶은가?"
"음 그건..."
녹월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제기랄! 알았다. 최종오의 완성, 돕도록 하지."
"두 분의 도움에 감사하오."
"만일 멸문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발을 뺄거라는 사실을 알아 둬라."
"그건 맘대로 하시오."
그렇게 이광은 은근슬쩍 벽력삼존 중에서 두 사람을 전력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다.
적월이 잠시 후 말했다.
"청월이 이십 년 전 마지막으로 알린 원월천살법의 단서는 바로 동영 부사산(富士山)에 있다는 청목원의 수해(?木ヶ原樹海)였다. 동영 땅에서도 굉장한 험지이자 오지라고 하더군."
"생전 처음 듣는 곳이군. 그래서 동영 부사산에 가면 되는거요?"
"잘 모르겠다. 청월이 그 소식을 전하면서 같이 전했던 말이, 그 곳은 마경(魔境)이니 올거면 목숨걸고 찾아오라더군."
"흐음..."
청월의 행방을 들은 후 이광은 두 뇌신류 호법과 함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던 중 세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약간이지만 웃음기도 느껴지는 듯 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사람들은 동문(同門)이군.'
하긴 이 세상에 남은 최후의 뇌신류 동지이니 어쩌면 이런 모습이 당연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경청한 후 자리에서 나왔다.
이광이 호법들과 이야기를 끝낸 후 그들의 숙소를 배정해준 후 뇌신류 제자들에게 정식으로 적월과 녹월의 소개를 했다. 뇌신류 제자들은 그들의 배분에 놀라워하면서도 사문의 어른으로써 받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녹월은 극호를 보자 말했다.
"네가 멸혼보의 전승자라며?"
"그렇습니다."
"장환(張患) 그 친구... 결국 추적을 따돌리지 못했군."
"제 스승님을 아십니까?"
녹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다마다. 그 친구는 뇌신류 제일의 경공대가였으니..."
"아..."
"네가 장환의 맥을 이었으니 되었다. 그의 무공이 우리와 함께 하는 한 그는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녹월의 말은 담담해 보였지만 듣는 사람을 격동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극호는 뭔가 울컥하는 표정을 짓다가 가라앉히고는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사부의 유지를 이을 것입니다."
나는 이로써 뇌신류가 완전히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지금의 전력만으로도 이미 전례없이 강력한 소수정예 문파가 탄생해 버린 것이다. 동시에 망량의 말이 떠올랐다.
' 뇌신류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취할지라...'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당장 눈 앞의 적이 강력한 이상 더더욱 열심히 수련해서 물리칠 수밖에 없다. 지금 뇌신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망량과 미호를 같이 불렀다. 나는 그 동안 내 의술을 이용해서 망량에게 기공치료와 침술치료를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망량은 몸이 꽤 나아져 있었다. 미호는 그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뇌신류의 어린 소녀제자로 놀아대는 중이었다.
내가 뇌신류 호법을 만난 이야기를 하자 망량이 말했다.
"동영 부사산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적 없소."
"본녀는 있느니라."
나와 망량이 미호를 쳐다보았다. 미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후지산에 있는 아오키가하라 수해(?木ヶ原樹海)... 확실히 그 곳은 마경이다. 동영에서 가장 강력한 요괴와 마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니."
"뭐? 그렇게 위험한 곳이야?"
"되려 나는 그 청월이라는 인간이 이해가 안 간다. 본녀조차도 그 수해에 얼마나 강력한 요괴가 있을지 몰라서 들어가지 못했는데, 일개 인간이 무공을 찾아서 아오키가하라 수해라는 마경에서 수련을 하다니."
미호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오키가하라 수해는 정말 위험한 장소인 모양이었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 내 실력으로 가면 어떨 거 같아?"
"흥. 가당찮은 소리다. 아마 십 리도 못 가서 어떤 이름없는 대요괴 무리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아마 쇼우케라나 츠치구모같은 놈들 떼거리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리겠지."
"......"
너무 단호해서 약간 상처받았다.
"비유하자면 그 마경은 썩은 구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영에 넘쳐나던 마(魔)를 음양사 일족이 그 한 곳에 옮겨담았고, 그 결과 통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강대한 요괴들이 대거 탄생한 것이다. 중원이나 고려에서도 그렇게 위험한 장소는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음양사 놈들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천지가 똥밭인 것보다는 한 곳에 몰아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동영은 이상할 정도로 마(魔)의 기운이 강대한 대지니까."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미호가 말을 이었다.
"백웅.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가는 건 절대 반대다. 어떤 핑계를 대서든 피해라. 알아서 목숨을 버리는 건 피해야 한다."
"알았어."
망량이 말했다.
"이제 당신은 열심히 수행을 하는 일이 남았구려."
"물론 열심히 할 거요."
나는 의원으로써 현재 망량의 상태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기력이 크게 쇠하고 힘들어보였지만 이젠 아니다. 내 의술로 그동안 전력을 다해 돌본 결과, 망량의 과로가 상당히 고쳐진데다가 부담도 덜어진 것이다. 이대로 한 달 정도만 무탈하게 되면 망량은 완전히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천명이라는 존재였다. 이건 건강이 안좋아서 수명의 한계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불의의 사고로 명줄이 정해져있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망량을 치유했다면 예상치못한 사태로 망량의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난 후 미호에게 몰래 물었다.
"미호... 정말 무슨 방법 없겠어? 태산부군제가 아니라도 망량의 명을 늘여줄 방법이..."
"... 말했잖느냐. 그렇게 편리한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여 진시황이 불로불사를 찾았겠느냐?"
나는 미호에게 무릎꿇고 부탁했다.
"정말 미안. 하지만 망량은 꼭 살려야 해. 이대로 그를 죽게 할 순 없어."
"......"
미호는 크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한동안 솔방울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생각하던 미호가 말했다.
"정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오! 뭐 방법이 있어?"
"천명이라는 건 하늘이 정한 운명이다. 즉 망량선사가 천기를 고했다고 할 수 있는 거지. 달리 말하자면 망량선사에게는 천기라고 하는 천명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권한이 있는 게야."
"흠... 하지만 망량선사는 나를 만나주지 않을텐데."
"공양물을 찾아라."
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망량선사 또한 천신의 반열에 있는 자.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겠다는 자를 이유도 없이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망량의 생명을 늘여줄 만한 공양물을 바치게 된다면, 천기를 거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망량선사가 아니라 다른 대라신선이라도 상관 없겠지."
"공양물이라면 막야의 수기나 전에 바쳤던 초상기인과 수정석비같은 거군."
공양물을 찾아서 부탁하면 살릴 수 있다!
미호는 들떠있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바보야.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데 뭘 그리 좋아하느냐."
"뭐가 안 좋은데?"
"그렇게 편리한 방법이 있다면 왜 망량이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파천의 가호를 내려주기를 부탁했겠느냐? 말해두지만 막야의 수기든 초상기인이든 수정석비든간에 주술사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엄청난 보물들이다.
거의 선인의 보패를 바친거나 다름없지. 너는 망량선사가 그런 댓가를 받고도 성이 안차서 부족했다고 말했다는 걸 떠올려라."
"......!!"
"천기라는 건 그리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확정되어 있는 망량의 단명(短命)은 아마 항우의 축복 때문일 것이고, 그걸 뒤집어엎기 위해서는 원래 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되는 댓가를 바쳐야 할 게 틀림없다."
"어느 정도의 댓가일까."
내가 멍하니 질문하자 미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사법(邪法)으로 전환한다 가정하고, 인간의 생명으로 치면 최소한 칠십만 명..."
"......"
"술법도구로 쳐도 보패 서너 개는 필요할 거다. 물론 보패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말 안해도 알겠지."
풀썩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망량의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거란 말인가? 이대로 그가 죽는 걸 지켜봐야 하나? 내가 절망하고 있자 미호가 이해가 안되는 듯 말했다.
"백웅. 어차피 나나 망량이 죽어도 네가 죽을 경우 없던 일이 되지 않느냐? 왜 그리 집착하지?"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어떻게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망량은 이미 자신의 죽음에 초연한데, 정작 네가 그런 태도니 우습구나."
미호는 싸늘하게 말한 후 고개를 휙 돌렸다.
"오늘은 더 얘기하기 싫다. 너는 너 알아서 고민하려무나."
그리고는 둔갑술로 사라져 버렸다.
미호가 완전히 화난 건 아니고 그저 내가 지지부진하게 매달리는 꼴이 싫은 듯 했다.
나는 미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내 전생담을 들은 망량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대비해서 내 미래를 걱정해 준 것이다. 나는 그냥 그 계획을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일이긴 하다.
그러나 아는 것과 느끼는 건 다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최대의 동료가 죽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굴렸다. 머리가 터지도록 머리를 굴렸다. 그 날 내 방에 처박혀서 계속 서성이면서 어떻게 하는게 최선일지 생각했다.
' 내가 망량선사에게 바칠 수 있는 대가는 대체 뭐가 있지?'
천년설삼을 생각해 봤지만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이건 그저 강대한 힘을 머금은 기물에 불과할 뿐, 주술적인 가치가 강력하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흑백련 또한 영력을 지니고 있으나 칠십만 명의 생명에 필적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러던 중 뭔가가 떠올랐다.
"......!!"
이 방법이 있구나.
"... 괜찮겠지."
나는 힘없이 웃었다.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이 수밖에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