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9 ----------------------------------------------
삼황오제(三皇五帝)
"미호 그런게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이 계집애는 너한테 홀딱 반해있는데."
"......"
미호가 으르렁거렸다.
"네가 갑자기 덮쳐오더라도 받아들일만큼 콩깍지가 씌여있구나. 아주 밑천까지 털어먹었구나!"
내가 서문혜를 쳐다보자, 그녀는 이미 미호의 매혹술에 홀려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긴장해서 미호가 그녀에게 해꼬지를 하지 않았는지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어찌할 참이냐? 사공린도 너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던데 몇년 내로 처첩동금(妻妾同衾)을 이룩할 수 있겠구나."
"하아, 그만 좀 해... 나는 지금 연애를 할 틈이 없다구."
내가 힘이 빠져서 한숨을 쉬자 미호가 말했다.
"또 중요해 보이는 척 해서 이야기를 빠져나가려는 거냐?"
"미호. 정말 중요한 얘기라서 널 찾아왔어."
내 눈빛이 진지해지자 미호가 쏘아붙이던 걸 멈췄다. 그러더니 손을 저어서 서문혜를 다른 곳에 가도록 해 버린 후 말했다.
"어디 말해 봐라."
"미호... 동영에는 태산부군제(泰山府君祭)라는 연명(延命)의 술법이 있다고 했었지?"
"......"
"태산부군제를 이용해서 망량을 살리고 싶어."
미호의 눈빛이 약간 예리해졌다. 미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망량에게 태산부군제를 써주는 건 불가능하다."
"무슨 말이야? 분명히 망량선사의 사당에서 태산부군제가 있다고 했잖아."
"그래. 태산부군제는 분명히 실존하는 술법이며 연명효과가 있는 것도 맞다. 최고의 음양사(陰陽師)들은 그 술법을 사용해서 수백 년씩이나 살 수 있지."
"그런데 왜?"
"그건 남에게 걸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자신이 최고의 술수경지에 오른 후 49인의 술사를 모아서 100일동안 축원을 한 끝에 성립하는 주술이다. 망량의 술법경지는 현재 중상급에 불과하기에 태산부군제같은 대주술을 시전할 수 없다."
경지 부족!
나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최고의 술수경지란 어느 정도를 일컫는 말이냐?"
"글쎄, 전에 네가 이야기했던 대로라면 적어도 중원지보 제갈부쯤 되는 실력자이거나 모산파(茅山派)의 장문인쯤은 되야 가능하겠지. 동영에서도 태산부군제를 시전할 수 있는 존재는 한 세기에 한명 나올까말까 하느니라."
나는 미호에게 탄식하듯 말했다.
"미호...!! 그럼 어째서 그 때 망량의 질문에 그렇게 받아준 거야? 나는 정말로 가능한 줄 알았잖아!!"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망량은 태산부군제가 있냐 없냐만 질문하지 않았느냐? 본녀가 그 자리에서 오지랖넓게 태산부군제의 시전가능 여부를 따지며 너희를 설득해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
"......"
"잘 들어라 백웅. 본녀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너의 안위만이 중요하다. 그 이상을 요구하더라도 본녀는 응해줄 수 없다."
나는 새삼 미호의 위치가 어떤것인지 느꼈다. 그녀는 그저 10년동안 나를 외부의 위협에서 보호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 사실 망량이나 반천맹이나 뇌신류 따위에는 전혀 소속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모든 걸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나를 위한 것이었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다가 재차 물었다.
"그럼 태산부군제 말고 목숨을 연명시킬 수 있는 다른 술법은 없을까?"
"중원에는 굉장히 많은 술법문파가 있으니 뒤지다보면 나오겠지. 허나 본녀가 아는 것 중에는 태산부군제같은 연명술은 또 없다. 아베노 세이메이는 그 술법을 이용해서 500년을 살았으니."
"으음..."
"나한테 부탁만 하지 말고 직접 술법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 순간, 나는 술법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술법을 배울 시간도 있어야겠어.'
지금까지는 전투에 별로 도움이 안 되고 효율이 낮았기에 술법을 등한시했다. 그러나 막상 주술적인 영역의 위협이 다가오자 내가 가진 무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최소한 남에게 보탬이 될 정도의 주술력을 가지고 있어야 앞으로의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미호가 안쓰러운 듯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에게 한바탕 화를 내려 했지만 화낼 기분도 사그라들었구나. 천하의 미녀에 둘러싸였는데도 동료를 걱정하다니."
"......"
"백웅... 너는 어찌하여 망량이라는 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느냐?"
"나는 망량과 너에게 목숨의 빚이 있어. 그래서 너희와 함께 끝까지 가고싶어."
내가 솔직한 심정을 토해내자, 미호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말해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하지만 너는 정말로..."
미호가 손가락을 내 입에 갖다대고 훗하고 웃었다.
"그만. 멋이 없다."
"......"
"백웅... 이걸 알아두어라. 우리는 네 전생담을 진실이라고 믿고 따르고 있지만, 네 전생에서 겪었던 [망량]과 [미호]는 분명히 우리와 다른 사람이다. 그 과거의 환영만을 투영해서 우리를 대하는 것은 되려 부담감이니라."
"미안해."
"본녀가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망량은 더 하겠지."
중얼거리던 미호가 말했다.
"백웅. 신뢰할만한 동료를 더 만들어라. 그렇지 않고서는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미호의 충고는 왠지 핵심을 관통하는 듯 했다.
' 신뢰할 수 있는 동료...?'
그런게 누가 있을까.
문득 진소청이 생각났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스승에게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보아왔던 기간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지만 제대로 터놓고 이야기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미호를 껴안고 말했다.
"미호 고마워!!"
"으이구... 이거 놔라! 아웅."
미호가 바둥바둥거렸다. 나는 미호의 뺨에 뽀뽀를 해 주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나는 진소청에게 찾아갔다. 진소청은 인근의 야산에서 개인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천뢰무극창을 한창 연습하는 중이었다.
쏴아아아!
진소청이 가볍게 창을 휘두르자 대기가 진동하며 그의 흐름에 동조하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초식의 시연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장중한 기세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천지자연이 그의 무(武)에 호응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 역시 저 사람은 격이 달라.'
진소청의 재능은 전대미문(前代未問)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광 또한 무술천재일진대 그런 이광조차도 뛰어넘는 재능이라니. 심지어 나는 백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술을 수양하고 있으나 아직 진소청의 바닥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결과적인 경지로써는 조만간 전생할 경우 초기의 진소청을 뛰어넘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비교는 의미가 없다. 천재가 두려운 것은 발전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진소청은 내 기색을 알아챈 듯 창을 거두며 말했다.
"사제, 무슨 일인가?"
"사형.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의 일을 여쭤보려 찾아왔습니다."
"황산파 결전 말이군."
"네."
"사제가 궁금한 건 아마 기절한 후에 어찌 되었는가... 냐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다.
지금까지 물어볼 경황이 없었지만, 내가 기절한 후 황산파 결전은 어찌된 것인가? 남아있던 제자들은 그저 승리했다더라는 결과만 전해들었기에 현장감이 전혀 없었다. 최소한 그 당시에 참전했던 이광, 진소청, 극호만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녹림왕 구철은 결전에 참여하지 않고 되돌아온 모양이라 몰랐다.
진소청이 바위에 걸터앉아서 말했다.
"나는 진기요상법을 실시하며 스승님께서 겨루는 장소로 향했었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스승님이 웬 괴물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발견했지."
"네?"
괴물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진소청이 씁쓸하게 말했다.
"용중일은 멀쩡히 서 있었지만, 그의 옆에 서 있던 황산파 좌우호법이란 자들이 목숨이 위험해지자 변신한 듯 하더군. 그들은 마치 용(龍)과 인간을 합친 듯한 형태의 괴물으로 변신해서 스승님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네."
"......!!"
"놈들은 굉장한 힘과 속도를 지니고 있었어. 무술경지야 말할것도 없이 딸렸지만 그때문에 스승님도 손쉽게 그놈들을 처리하지 못했지."
"용인(龍人)이라는 겁니까."
"그래."
나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용인!
신화나 전설에서나 전해지는 환상의 괴물. 그 존재는 용(龍)의 피가 섞인 혼혈이 각성해서 인간을 초월한 힘을 보인다고 전해졌다. 더러는 중원을 지배하는 천자(天子)가 용인임을 자처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정치적인 상징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용인은 커녕 용의 존재조차도 부정되는 게 현실인 것이다.
진소청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괴물들이 사제가 말하고다니던 이족(異族)인지 뭔지는 모르겠어. 하여간 나는 끼어들어서 괴물들을 함께 척살했는데, 그 때는 이미 용중일이 도망치고 없더군."
"그랬군요."
황산파는 멸문시켰으나 장문인 용중일은 놓쳤다.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 그럴 수 있나 생각했지만 진소청의 말을 듣고보니 납득이 갔다. 난데없이 용인이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뇌신류를 막는 대신에 수장인 용중일은 꼬리를 빼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일 그 싸움에 용중일이 가세해서 끝장을 보려 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흐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기긴 했겠지만 결코 멀쩡하지 못했을 걸세. 아마 팔 한쪽 정도는 각오해야 했겠지."
"......"
"용중일은 정말 무서운 자일세. 황산파를 버리면서도 되려 승리했다는 듯 말을 했거든. 아마 그의 배후에 있는 풍신류의 세력은 그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그랬구나.
나는 어쩌면 용중일을 포함한 풍신류가 황궁과 연구해서 얻어낸 게 용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일에 용인의 형태가 인간을 초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게 장래에 무서운 위협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진소청이 물었다.
"이야기할 건 그게 전부인가?"
"물론 아닙니다."
"그럼?"
"사형. 사형은 제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모두 믿어주시는 겁니까?"
진소청은 망량선사의 사당에서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바가 있다. 그리고 궁금해하길래 그에게는 내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대부분 해 주었다. 스승에 거역하면서까지 따라왔던 진소청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소청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많아서 다는 이해하지 못했네. 허나 사제가 일반인을 초월한 특별한 존재라는 건 납득했지."
"제가 밉거나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글쎄...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닐세. 어쨌든 사제 덕분에 우리 뇌신류가 흥성하고 있는 건 사실이고, 사제가 뇌신류에 큰 애착을 가진 것도 눈에 보이니 말일세."
"......"
"그래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네?"
진소청이 바위에 앉아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제는 자신의 재능이 둔재라 한탄하지만 나는 되려 사제가 더욱 거대한 무(武)의 길에 진입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어렸을 적에 아주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 찾아온 적이 있었네. 스승님이 안 계실 때였는데, 그 이방인은 내게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해 주더군. 그 사나이 또한 사제처럼 재능이 없는 자였으나 무한의 수명을 지니고 끊임없이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신(神)조차 초월했다는 이야기였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군요. 무(武)로써 신을 초월하다니..."
"그렇지? 나도 그냥 동화처럼 들었어. 하지만 어떻게 신을 초월할 수 있었냐고 물어보자, 이렇게 대답하더군."
"어떻게요?"
"[ 천 년의 봄을 보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라고..."
"......"
그 순간 나는 기가 질렸다.
어찌 인간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무한의 수명을 지니고 있어도 둔재라면 자신의 한계를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부딪히며 괴로워질 게 뻔한데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자의 근성의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자 놀라워졌다.
진소청이 빙긋 웃었다.
"사제가 장래에 뇌신류에 위협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 사제는 사제일세. 우리 모두가 함께 흥하는 길이 있다면 최선을 다할 뿐이지. 사제 또한 포기하고싶지 않은 게 있었기에 지금껏 노력하며 버텨온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나도 그 이방인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늘 즐겁게 수련을 하고 있어."
진소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도 언젠가 그 무신(武神)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게 느껴졌다.
아 - 이런 차이였나.
그래서 나는 줄곧 진소청과의 간극이 한없이 넓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사나이는 처음부터 무(武)의 신(神)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노력하는 천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진소청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그 신을 보고나서 말씀드리죠. 뭐하는 놈팽이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우하하하! 그거 참 재밌겠군."
나는 진소청을 앞으로의 전생에서 진정한 동료로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뇌신류의 입장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존재라는 걸 바로 이 순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