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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나는 장령곡에 직접 찾아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뇌신류 3인방에다 망량까지 찾아간 거라면 뭔가 큰일이 생길것같지는 않았다. 천하에서 백련교주가 아닌 한 그들을 무력으로 해꼬지할만한 인간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망량도 굳이 자신을 찾아올 필요가 없다 말해둔 바가 있었기에 가만히 앉아서 쉬었다.
' 검강(劍罡)이란 무엇일까?'
나는 며칠동안 이따금씩 미호와 놀아주면서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했다.
검강!
검술에 있어서 이기어검과 함께 가장 지고한 경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단순히 기를 응집하고 발출하는 것을 넘어, 한차례 초월한 기세를 만들어내는 광경이 마치 별무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검강은 검기나 검염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그 어떤 달인이라고 해도 강기를 숨쉬듯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호법사자나 이광급의 고수들은 더러 강기를 절초 속에서 사용하는 일이 있었으나, 그나마도 초식속에서 극대로 승화된 기세를 뭉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처럼 내공을 때려박아서 강기를 억지로 사용하는 일 자체가 원래는 불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기를 시전하는 법이나 그 정체 또한 이광이 내게 섣불리 설명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게 깨달음을 억제해 온 이광이었으나 강기에 한해서는 느낌이 달랐다. 심지어 내가 만났던 검마나 진소청에게 물어보아도 그들 또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기라는 건 지금까지의 무학과 차원을 달리하는 공부인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호와 계곡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검강 얘기를 꺼내보았다.
"검강? 강기? 누가 무림인 아니랄까봐..."
미호가 키득거리는 기색이었다. 미호는 바윗돌에 앉아서 계곡물에 새하얀 발을 참방거리다가 말했다.
"장삼봉의 심득을 얻었다고 했는데 그 심득에는 언급이 없더냐?"
"그게 좀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구체적으로 강기를 발현하는 내공심법이나 초식은 전무(全無)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가득하니까."
심지어 내 머릿속에 있는 장삼봉의 심득에서도 강기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이러이러한 초식을 쓰면 강기가 나온다~ 라고 설명할 법도 한데 그런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뭔가 도가적인 향기가 짙은 형이상학적 설명이 가득했다. 기문둔갑 공부와 술법공부를 한 나로써도 잘 알아듣기 힘든 설명이었다. 아마 장삼봉 특유의 깨달음을 함축해놓았기에 암호처럼 될 수밖에 없으리라.
내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던 미호가 말했다.
"흐음... 그렇다면 한가지 방법이 있겠구나."
"뭔데?"
"강기를 사용가능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너와의 차이점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무엇이 필요한지 너 스스로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가."
나는 미호의 말을 듣자 뭔가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미호, 나 잠시 하루정도 어디 갔다 올게. 만일 망량이나 뇌신류 사람들이 돌아오면 수련하러 갔다고 말해 줘."
"어디 갈 생각이냐?"
"하남에 있는 무영문(無影門)."
"흐응... 알았다. 걱정말고 갔다오거라."
파앗!
나는 곧이어 비등을 이용해서 무영문으로 향했다. 나는 무영문 근처에서 비등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무영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무영문의 경비무사들이 나를 보자 예리한 눈으로 쏘아보더니 말했다.
"누구냐?"
"나는 백웅이라 하고, 무영문주를 뵈러 왔소."
"음... 백웅 님이신가."
경비무사 대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 저번에 내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후 안쪽에 들어가서 보고를 올린 후 말했다.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나는 그들을 따라서 무영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도 보았던 익숙한 내부전경이 이어졌고, 무영문주가 기다리는 응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영문주이자 마도팔마의 일인인 검마(劍魔) 서문대룡(西門大龍)은 차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왠일인가?"
"무림소졸 백웅이 무영문주를 뵙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서 그에게 인사했다. 지난번에는 서문혜의 은인으로써 왔지만 지금은 그런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검마가 손을 내저으며 훗하고 웃었다.
"소졸이라니 과한 겸양이군. 자네 문파의 일은 이미 온 강호에 퍼져 있네."
"네?"
"뇌신류(雷神流)가 황산파를 멸문시키면서 강호의 모든 세력은 초읽기에 들어갔지. 자네들 문파의 저력이 구파일방과 전면전을 벌여서 이길 정도인가, 아닌가... 강호의 온갖 호사가들이 입담을 내놓고 있어."
"......"
아무래도 내가 기절해 있었던 동안에 뇌신류의 행보가 강호를 진동시킨 모양이었다. 검마 서문대룡이 탁자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백웅 자네가 큰 일을 할 인물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뇌신류의 제자였을 줄이야... 그래, 오늘 나를 찾아온 것은 뇌신류의 전언(傳言)이 있어서인가?"
그는 내가 뇌신류의 사자(師者)로써 방문했다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높았다. 물론 그게 아니었기에 나는 황급히 포권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일개 검사(劍士)로써 대선배께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호오... 흥미롭군. 적어도 우리 무영문과 연수하려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제게 그럴만한 주제가 없습니다."
"후후. 좋아. 말해보게."
검마가 껄껄 웃었다. 나는 그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검강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 대뜸 어려운 화두를 내놓는군."
검마는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의 문제를 뇌신류 내에서 상담해야겠으나, 검마께서는 검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신 분인지라 반드시 조언을 듣고 싶었습니다."
"자네의 검술경지는 낮지 않네. 검호(劍豪)라 자칭해도 좋지. 그런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한데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강(?)이 별무리이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설명조차 불가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고민해 왔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달인들도 이 이야기를 정면으로 설명해주기를 꺼려하기에..."
"으음..."
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아. 이리로 와 보게."
나는 검마를 따라서 무영문의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는 나와 마주서서 진검을 잡은 채 삼 장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자네는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시전할 수 있는가?"
"반경 일 장 이내라면 가능합니다."
"해 보게."
나는 철검을 던져서 땅바닥에 꽂았다. 그리고는 허공섭물의 기예를 사용해서 다시 손으로 잡아챘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검마가 재차 물었다.
"그러면 이기어검을 시전할 수 있는가?"
"못 합니다."
"왜 못하지? 자네는 이미 삼 장 이내의 사물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기(氣)를 움직여서 사물을 움직일 수 있어도, 검(劍)을 단순히 움직여서 날리는 거면 비검술(飛劍術)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그게 이기어검이 참 어려운 이유지."
검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검술은 검술의 최상승경지이며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의 육신에서 검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일세. 여기까진 알고 있는가?"
"네."
"수어검(手御劍), 목어검(目御劍), 심어검(心御劍)의 3단계로 나뉘며 이 단계차이는 결과적으로 육신의 한계를 얼마나 극복했느냐일세. 손을 움직이는 것으로 검을 자유롭게 하는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자유롭게 하는가. 어느 쪽이든간에 갈수록 활용도가 높아진다는 걸 알 수 있을걸세."
스으으
검마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 끝에서 천천히 검이 떨어지더니 허공의 한 점에 붙박히듯 멈추었다.
"이건 수어검(手御劍)일세."
"네..."
"세상사람들이 비검술(飛劍術)과 어검술을 착각하는 이유는, 첫 단계인 수어검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고수가 많기 때문이야.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어검술이 그저 초식을 사용하는것만 못하다는 것도 맞는 소리고."
검마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고 자신의 감각을 차단하는 듯 했다.
피잉!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검마의 검은 이미 엄청난 속도로 내 코앞에까지 날아와 있었다. 도저히 내 동체시력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
뭐가 이렇게 빠른가!
마치 빛(光)이 아닌가!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비록 지금 뇌명과 백웅결을 발동하지 않았다지만, 검마의 이기어검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이 일격으로 절명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굳어있자 검마가 눈을 뜨며 자신의 검을 회수했다.
"이것이 목어검(目御劍)일세. 현재 내가 도달해있는 최고의 경지이지."
"목어검이라고요? 방금 눈을 감으셨잖습니까."
"그 눈이 아니야. 자신에게 존재하는 의(意)와 념(念)을 시각으로 삼은 거지."
"......?"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목어검. 그리고 의념을 자신의 시각으로 삼는다는 것. 이게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내 무학이론과는 천지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검마가 말했다.
"자네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시 설명하지. 자네가 허공섭물을 발휘한 것은 기(氣)이지만 내가 어검술을 사용하는 것은 의념(意念)이야. 즉 기는 부(副)이며 의(意)가 주(主). 마찬가지로 강기라는 것 또한 본디 기(氣)로 발휘하는 게 아니란 말일세."
"그... 그건."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내가 끙끙거리자 검마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혹여 심기혈정(心氣血精)의 원리를 알고 있나?"
"자신의 의지력에 따라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달라지기도 하며 혈맥과 기혈의 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심기혈정을 기묘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 그 말대로라면 최고의 의지력을 가진 자는 전대미문의 속도로 내공을 쌓아야 할진대, 명확한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건 인간의 몸에 존재하는 혈도의 한계입니다."
"그렇지. 정신력과 의지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심기혈정으로 얻는 효과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파앗
그 순간, 검마의 몸이 내 뒤편에 나타났다.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어느새 다시 원래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내 멸혼보를 최대로 이끌어내도 저런 속력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검마가 말을 이었다.
"극상의 무술세계에서는 다르다네. 차원이 달라지지."
"어떻게 하신 겁니까?"
검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방금 움직이지 않았네. 자네가 나의 의념을 감지하고 거기에 있다고 착각한 것 뿐이지."
"......"
"의념이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신력, 의지력과 완전히 개념이 달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팔식(八識)에 가깝지."
검마가 한숨을 쉬었다.
"으음... 자네가 잘 모르는 듯 하니 여기까지 하지."
"불민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원래 이건 수십년은 수양해야 답을 낼 수 있지."
씁쓸하게 말한 검마가 마지막으로 요점을 정리해 줬다.
"강기도 어검술도 결국 마음의 밭에서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는 것일세. 명인급 고수들이 자네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 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지. 자네는 스스로 깨달아서 도달할 수밖에 없어."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 강기와 의념에 관해서 가장 구체적인 설명인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 설마 이광과 진소청의 강함의 비밀은 여기에 있는 건가?'
그 동안 수십 수백년을 수련하면서 결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모순에 끊임없이 고뇌해 왔다. 하지만 검마의 말대로라면 그냥 내공과 초식을 수련하는 것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무술의 경계가 있는 듯 했다. 나는 검마의 조언을 금과옥조처럼 느꼈기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밥이나 먹고가지 그러나?"
"네."
나는 검마의 호의를 받아들여서 밥을 먹고 한숨 자고 가기로 했다. 호의를 거절하기도 좋지 않을 뿐더러 내일 한번쯤 대련을 하고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식사가 대령하자 의외로 조촐한 채식 위주의 식단이 나타났다.
' 지난번에 대접받은 것과 다르군.'
지난번에는 상다리가 부러져라 나왔던 것 같지만 오늘은 철저하게 수련자를 위한 식단이 마련된 것 같았다. 하지만 채식이라 해도 잘 다듬어진 요리라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서문혜가 바로 내 옆에 앉아서 방긋 웃고 있었다.
"잘 드시네요! 은공(恩公)."
"......"
"이것도 드셔 보세요."
"음..."
서문혜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먹여주자 어쩔 수 없이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검마 서문대룡이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이 앉아서 먹고 있는데 저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먹을 수가 없다.
"화려한 식사가 아니라 실망했는가?"
"아닙니다."
"평소에는 늘 이렇게 먹네. 과한 육식은 몸을 둔하게 하고 화기(火氣)를 쌓이게 하기 때문이지."
마도팔문의 우두머리격 문파라지만 마치 도가문파처럼 자신의 몸을 관리하며 수양하고 있었다. 무영문은 그저 입장상 사파에 서 있을 뿐 실제로는 정사중간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밥을 먹던 중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세력확장에는 그리 욕심이 없으신 듯 한데 어째서입니까?"
"무림에서 떵떵거리는 건 그리 자랑할 일이 아닐세. 은원관계가 쌓일수록 감당하기도 힘들어지지. 또한 나는 권력으로 함부로 상대를 겁박하는 걸 싫어하네."
달그락
채소절임을 우물우물 먹은 검마 서문대룡이 말을 이었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자네 뇌신류가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것도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네. 무림공적이라고 하지만 구파일방에서 움직여서 여론을 만들면 공과에 상관없이 금새 지정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나는 마도팔문을 움직이지 않았네."
"음..."
"내가 무영문의 지존으로써 마도팔문에 군림하고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냐. 정파 구파일방의 이름아래 무수한 무림의 약자들이 고통받을지도 모르니, 그 약자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하기 위해서일세."
"그게 사파(邪派)의 길로 분류될 터인데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어쩔 수 없지. 흑백양도로 분류하는 그 논리로 가장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까."
"이득을 본다구요?"
"모르고 있었나."
검마 서문대룡이 자신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도팔문이라는 적(敵)이 없으면 구파일방과 정천맹이 어찌될 거라 생각하는가?"
"그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겠죠."
"아니, 그들은 결코 그걸 원하지 않아. 마도팔문이라는 악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정의의] 정천맹이 존재할 수 있고, 잠재적인 무림인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으니. 그리고 구파일방에서는 암묵적으로 우리 마도팔문의 수장들과 거래를 할 때도 많지."
"......!!"
"적당히 '처리'할 만한 마두(魔頭)를 내어달라는 둥, 더러운 오물같은 거래지."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구파일방이나 정천맹이 마도팔문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줄 알았는데, 설마 암중에서 거래를 하며 공존(共存)하는 관계였다니? 내가 입을 벌리자 옆에 앉아있던 서문혜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버님. 너무 깊은 이야기가 아닌지..."
"아니다, 혜야. 너도 잘 들어라. 이건 강호무림의 상리(常理)니까."
"네."
"내가 알기로 무림공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멸문당한 군소문파만 해도 십여 개는 되지. 그들은 딱히 악행을 한적도 없으나, 구파일방과 이득다툼을 하다가 밉보인 일이 대다수였네. 당금무림의 대악종(大惡腫)이라 하면 구파일방이라고밖에 할 수 없네."
"음..."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하지만 마도팔문도 그리 옳고 떳떳한 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일은 변명할 수가 없군. 대개 악인(惡人)이 많으니."
검마 서문대룡이 피식 웃었다.
"허나 이건 알아두게. 마도팔문이 천하에 산재해 있는 악(惡)을 대표하는 건 아니야. 설령 마도팔문이 멸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사파가 어디선가 출현하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흑백양도의 가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자들부터 구제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정말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마도팔문과 정천맹의 밀월관계! 그리고 검마 서문대룡의 생각. 굉장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에 나는 식사를 멈추고 곰곰히 생각했다.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검마 서문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이 검마께서 우리 뇌신류에 원하는 관점이라 보아도 좋겠습니까?"
"틀리지 않네."
검마가 우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뇌신류와 동맹(同盟)을 맺을 의사가 있네. 원한다면 마도팔문도 움직여줄 수 있지."
"동맹...!!"
나는 침음성을 흘리다 말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겠지. 그냥 식사자리의 여흥으로 들어만 뒀으면 좋겠네."
"......"
정말 노회한 인물이다. 하고싶은 말을 다 해놓고 은근슬쩍 흘려버리다니. 이렇게 무거운 얘기를 한번에 다 들어버리니 식사맛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아무튼 망량과 논의해 봐야겠군.'
나는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 침실에까지 서문혜가 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당신 방이 아닐텐데..."
"혼자서는 잠이 잘 안 온답니다."
서문혜가 슬며시 다가와서 침상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은공의 그간 일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위험하다.
그녀와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끝나지 않을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뭔가 작정한 기색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나는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자야겠소."
"네에."
그리고 내가 침상에 눕자 서문혜가 내 옆에 같이 누웠다.
"......"
"......"
너무 당연한 듯이 누워서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서문혜가 옆에 누워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 아니, 왜 같이 자는거요?"
"제 방이 공사중이랍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른 방에 가면..."
서문혜가 방긋 웃었다.
"다른 방도 모두 공사중이랍니다."
"......"
이렇게 되면 축객령을 하기도 애매했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서문혜를 앉혀놓고 말했다.
"소저가 내게 큰 호감이 있는 건 알겠소.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으니 혼자 있게 해 주시오."
"제가 싫으신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서문혜가 내 옷자락을 꼭 잡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은공께 다른 여인이 있더라도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저는 은공을 잡고 싶으니까요."
"내게 그렇게 집착할 이유는 없소. 당신이라면 더 좋은 남자를 찾을 수 있을 거요."
"어찌하여 그리도 거부하시는지요?"
"왜냐하면..."
머릿속에 미호와 망량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죽음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나는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보통이라면 이럴 때 자신의 성욕과 싸울텐데, 나는 내가 죽어나갔던 기억부터 떠오르는 것이다.
"...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그렇다.
더 이상 쓸모없이 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엇나가면 안되는 일이다.
내가 확고하게 대답하자 서문혜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은공. 정 그러시다면 저를 은공의 뇌신류에 같이 데려가 주세요."
"뭐라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은공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순간, 서문혜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손에서 단도를 뺏았다. 방금 전은 절정고수인 서문혜가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기에 도저히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 이런..."
서문혜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 그러면 내일 검마께 여쭙겠소."
그리고 서문혜를 다른 방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 나는 검마와 아침대련을 한 후 그에게 전후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검마 서문대룡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네. 그 아이를 뇌신류에 입문시키든 어떻게 하든 좋으니 데려가게."
"소저께서 원하지 않으셔도, 저희 문파에서 원하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맘대로 하게.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서문혜를 데리고 뇌신류에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