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4 ----------------------------------------------
삼황오제(三皇五帝)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은 나, 진소청, 이광, 극호 네 명 뿐이었다. 사공린은 아직까지 무공이 덜 여물어있는데다 사공세가의 안위가 달려있었다. 재후도 마찬가지였기에 정천맹의 천라지망을 고작해야 넷이서 뚫는다는 전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네 명 중에서 공포나 불안감을 느끼는 자는 누구 하나 없었다. 심지어 그동안 죽음의 위협에 늘 불안해했던 나 조차도 아주 편안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침 딱 4명이었기에 청룡무관에서 동, 서, 남, 북의 방향으로 개별돌파를 하기로 했다. 이광은 뇌신류 고수 4명 각각의 실력이 포위망 따위에 붙잡힐 수준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으므로 개별돌파를 지시한 것이다. 같이 움직이면 포위망을 뚫기가 더 귀찮기 때문이다.
"남(南)인가."
오늘의 내 운은 어떨까.
청룡무관에서 나서서 약 십여 장을 걸어갔을 때 서서히 내 주변에 살기(殺氣)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기감을 확장해서 그들의 실력과 숫자를 빠르게 재어볼 수 있었고, 그들의 위치마저도 알 수 있었다.
' 20여명. 그리고 이류급과 일류급이 대다수인가...'
쐐애액!!
갑자기 자모추혼표(子母追魂標)가 날아왔다. 세 개의 자모추혼표를 던진 자는 일류급 실력인지 속도와 위력이 일반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내가 움직이기 버거운 사각(死角)을 노리는 듯 했다.
까강
내가 일참(一斬)으로 자모추혼표를 쳐내자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십여 개의 암기가 날아들었다. 다시 움직여서 검으로 걷어내자 또다시 세 배는 되는 듯한 암기가 사방팔방에서 쇄도하는 것이었다.
카카카캉
' 검막(劍幕).'
나는 그 무차별적인 암기공세를 하나도 남김없이 쳐낸 후 근처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5명의 무인이 나타나서 내게 흉흉한 원월도, 검, 창, 도 따위를 날려왔다.
"죽어라!"
역시 아직 고수라고 할만한 놈들은 안 보인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볍게 그 자리를 박찼다. 동시에 허공이 강하게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투웅
허공에서 한번 더 박차고 떨쳐진 내 신형이 어느 순간 삼 장 밖에 나타나 있었다. 나를 합공해 오던 무인들은 일순간 내 모습을 놓친 듯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 내가 만승검결의 쾌결(快決)로 베어낸 모가지들이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솟구쳤다. 멸혼보와 검술을 이용하면 다섯 명의 목을 베는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재차 암기를 던져왔지만, 나는 더 이상 원거리 공격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강하게 지붕 위에서 진각을 밟자 내 눈앞에 기와가 튀어올랐다. 기와는 정확하게 암기의 진행로를 막아내었고 나는 곧장 기와를 잡아채서 내력을 실어서 내쏘듯이 던졌다.
푸콱
"어어억..."
꼴좋다. 함부로 남한테 암기같은 걸 던지는 게 아니지.
나는 십여장 밖의 적에게 가슴팍에 기와가 꽂혀있는 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동시에 과거에 진소청이 내게 암기를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놈들 하나하나의 무공은 별게 아니지만 원거리에서 헛점을 노리며 암기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너무 성가셨기 때문이다.
춤을 추듯이 나는 멸혼보를 밟으며 나머지 매복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허억!"
"뭐, 뭐야?!"
내 멸혼보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인지 그들은 내 움직임을 전혀 안력으로 쫓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찰나지간에 이십여 장을 지근거리로 좁혔으며 당황하는 적들의 요혈을 칼등으로 한 대씩 쳤다. 그 충격력만으로도 놈들은 고꾸라져서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뻐벅!
고작해야 숨 몇 번 쉴 동안에 스무 명의 매복자를 모두 정리하자 포위망이 일시적으로 해소된 듯 했다. 천라지망이라고는 하지만 소수를 다수가 잡아두는 틈에 포위망을 굳히는 식이므로 이런식으로 단시간에 전멸시켜버리면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관중거리의 지붕을 뛰어서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가며 중얼거렸다.
"별볼일 없군."
어제 이광이 뇌신류 고수들을 모아놓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 내일의 계획은 닥치는대로 박살내다가 호비산(虎飛山)에서 모이는 것이다.]
호비산은 관중에서 벗어나서 약 사십 리 밖에 있는 산이었다. 듣고 있던 극호가 말했다.
[ 그냥 다 쳐죽이면 됩니까?]
[ 그래도 무방하다.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 약자들에게는 가능하면 자비를 베풀어라.]
[ 무슨 뜻이신지...]
[ 정당방위로 보일만한 여지를 만들라는 말이다.]
[ 알아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그 때 이광의 말을 알아들었다.
정당방위로 보일 여지를 만들라는 것 -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실력의 과시'! 고작해야 4명이 정천맹의 천라지망을 돌파하면서도 여력을 남길 정도로 강함을 과시하라는 뜻이었다. 정천맹 정도는 봐주면서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중에 이 일을 수습할 때 몰살시키지 않았다는 식의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한 행위였다. 과잉방어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 뭐 그래도 죽이고 싶은만큼 죽여도 되는 거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이광의 말은 일종의 방침에 불과했다. 뇌신류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공격하는 놈들을 전혀 봐주지 않는 성미였으므로, 아마 나를 제외한 3명도 짜증나는 놈은 다 죽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심 싹수가 보이는 놈들은 살려두기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진행해 나갔다.
퓨퓨퓻!
약 일 각 정도를 뛰자 다시 암기를 던지는 놈들이 있었다. 나는 암기를 쳐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아, 제길."
생사여탈권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니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가 거슬리게 느껴졌다. 정당방위고 뭐고 싹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육에 맛을 들리게 되면 한도끝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심 생각했다.
' 그럼 불구 정도로만 해 두자.'
파밧
나는 다시 기와를 던져서 암기를 던진 놈들을 제압했다. 내가 내력을 실어서 던지면 어설픈 암기수법보다 열 배는 강력했기에, 놈들은 기왓장에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모양새였다.
"으아아악!"
"아악."
비명소리가 기분좋게 내 귀를 간지럽혔다. 연속으로 칼과 창을 든 놈들이 쉴새없이 덤벼왔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각각 일 초씩만 써서 모두 제압했다.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며 일 섬(一殲)을 가하자 그들은 마치 짚단처럼 풀썩 쓰러져 버렸다.
죽이진 않았다. 전부 제압만 했을 뿐이다. 실력차이가 너무 나니까 의도해서 죽이기도 꺼려지는 수준이었다. 그 중 아직까지 의식이 있던 검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괴... 괴물!!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쉽게..."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서 쪼그려 앉으며 씨익 웃었다.
"너희? 너희가 뭔데?"
"......"
"진짜 괴물도 못 본 주제에 이상한 자부심이 있구만."
따악
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그를 뇌진탕으로 기절시켜 버렸다. 보아하니 정천맹 소속의 하위 무력단체 놈들인 것 같았다. 물론 포위진의 기본은 약한 놈들로 힘을 빼고 강자들이 나서서 마무리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놈들을 정천맹의 실력자라고 보면 곤란했다.
지금까지 대충 40여명은 쓰러뜨린 듯 했다. 나는 주변이 꽤 한산해지고 살기가 줄어들자 내가 많이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관중 성에서 나갈 수 있었으므로 여유롭게 뛰었다.
"이 놈!"
그 때 호통소리와 함께 성문 앞에서 나를 막아서는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쭉정이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무공을 익힌 듯한 놈들이었다. 수는 약 십여 명으로 지금까지와 비슷했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천지차이였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놈들이 누군지 파악했다.
' 구파일방 소속인가.'
입고있는 게 하나같이 도복이거나 명문정파의 복색이었다. 아마 저들은 정천맹 휘하에서 일하는 구파일방의 고수들일 듯 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외부에 파견나올 만큼의 실력자인 듯 했다.
실력은 다들 일류급 이상. 절정고수가 있는지 훑어보자 그들 중 두 명 정도가 절정고수였다. 나는 성문을 가로막고 있는 그들 앞에 내려서면서 팔짱을 꼈다.
"정천맹 분들인가?"
"그렇다.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아라."
"그러면 목숨을 살려줄 것인가?"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미친 놈들이군. 지금 그걸 투항권고라고 하는 건가."
"아해가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구나. 그러나 우리를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슥
그들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진(陣)의 형태를 잡았다. 나를 포위하는 형태가 아니라 성문 앞에서 농성하듯이 방위를 잡았는데, 나는 그게 사상(四象)의 묘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무당파의 진법인가 보군.'
그렇다면 저 진법은 각자의 대응력을 높여주고 진 안에 뛰어든 고수를 제압하는 공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무식한 내공을 이용해서 거대한 천뢰인을 뿌려주기만 하면 저정도 진을 파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산책하듯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라면 내공을 앞세우지 않아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맨 앞에서 진법의 주축을 맡고 있던 무당파의 절정고수가 노해서 외쳤다.
"정녕 벌주를 마시려 드는가!"
피잉
그를 위시해서 전면에 있던 세 명의 고수들이 동시에 검격을 날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일 초만에 제압할 정도로 만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나는 참격이 날아드는 속도와 같이 신법으로 뒤로 피하면서 물흐르듯이 멸혼보로 파고들었다.
"헉!"
순식간에 내게 사각을 허용한 고수 하나가 급히 왼발을 축으로 돌면서 내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나는 이미 뇌운강권으로 그의 옆구리를 치고 있었다.
꽈앙
"으아악."
내 내공을 실은 뇌운강권은 이미 일반 권장법이 아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훨훨 날아가서 나가떨어졌고, 남은 고수들이 급히 그의 위치를 메꾸며 합공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포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되려 진법의 안쪽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일 후위에 있던 청성파의 절정고수에게 만승검결로 공격했다.
까앙
"으음!"
청성파의 사일검결(射一劍決)이 내 공세를 약 십여 초간 막아 내었다. 역시 그 또한 강호에서 이름을 날릴만한 검도고수였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내공을 앞세우지 않아도 그의 헛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다음 순간 그의 견정혈을 제압하고 바닥에 꿇려앉힐 수가 있었다.
풀썩
"......!!"
청성파의 절정고수는 물론 나를 합공해 오던 자들이 동시에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삽시간에 진이 농락당하면서 절정고수가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성파 고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더 해볼 생각인가."
"으윽..."
본의아니게 인질을 잡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인질을 포기하고 달려들어도 내게 승산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멸혼보로 진법의 포위를 무시하고 개별적으로 쳐서 제압할 수 있으니 합공을 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러자 무당파의 절정고수가 침중하게 말했다.
"어찌 그 나이에 그리 엄청난 무공을...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뇌신류의 백웅이다."
"더 이상 후회할 짓을 하지 말게. 아무리 강한 무공이 있어도 정천맹의 주력이 나서면 그대들은 이길 수 없네."
그의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들은 정천맹의 무력단체 일개 조이지만, 아직까지 정천맹의 주력고수라고 할만한 구파일방의 초절정고수는 등장하지 않았다. 만일 그 자들이 이 포위망에 합세한다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되려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쥐가 고양이 걱정 해주고 있군. 지금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당신 목숨이야."
"......"
"삼 초 주겠다. 더 싸울건지 말건지 정해라."
내가 삼, 이를 차례대로 세었을 때 그가 급히 말했다.
"알았다 우리가 졌다. 그를 놔 주어라."
"네놈들은 여기서 하루동안 움직이지 마라. 알겠냐?"
"... 알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놈들을 놔두고 관중 성내를 빠져나왔다. 사실 계속 싸우면 다 죽일 수는 있었겠지만 체력과 기력을 꽤 소모했을 게 뻔했으므로 그냥 빠져나오는데 만족한 것이다. 물론 저 놈들이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였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들에게 우세를 점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걸로써 확실해졌다. 초절정고수가 나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하하핫!"
나는 기분이 좋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곡옥의 형태로 변신해있던 미호가 투덜거리듯 영언을 보내왔다.
[ 뭐가 그리 좋으냐? 하나도 재미없는데.]
"미호. 심심해?"
[ 흥! 나도 같이 싸우고싶었는데...]
"이건 뇌신류의 싸움이니까 곤란해. 이해 좀 해줘."
미호가 말했다.
[ 호비산에나 얼른 가거라.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고.]
"......"
결국 미호한테 맛있는 걸 사줘야 한다는 결론이 되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면서 나는 내심 히죽거렸다.
' 아마 내가 제일 빠르겠지?'
내가 생각해도 포위망에 전혀 거치적거리지 않고 쉽게 빠져나온 듯 했다. 이 정도면 내가 호비산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일등을 자랑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나는 호비산에 도착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늦었구나, 백웅."
호비산의 입구에서 이광, 진소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이 괴물딱지들은 나보다 빨리 적을 해치우고 적의 포위망을 한차례 교란하고 온 것이다. 진소청이 말했다.
"오면서 극호 사형 못 봤어?"
"못 봤습니다."
그 때였다. 빠르게 수풀을 헤치며 먼 곳에서 극호가 날듯이 착지했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우! 내가 꼴지인가..."
"극호 사형 늦었다구요."
내가 핀잔을 주자 극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에라잇. 안 죽이는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대충 봐준다고 죽는 줄 알았어."
그러자 이광이 극호에게 말했다.
"극호. 수련이 부족하다."
"아 넵..."
"그래도 이걸로 일차 포위망은 돌파했군."
그렇게 중얼거린 이광이 호비산의 정상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녹림십팔채의 우두머리라는 호왕채(虎王寨)라는 게 있다고 한다. 놈들을 제압하도록 한다."
"호왕채..."
녹림십팔채!
도적떼의 단체 중에서 가장 강대한 열여덟 개의 산채를 일컫는 말이었다. 나도 녹림십팔채의 우두머리인 호왕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광에게 말했다.
"스승님. 죄송한데 산적떼를 지금 제압하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만이 아닌지 진소청과 극호의 눈에도 궁금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관중을 둘러싼 정천맹의 포위망을 뚫은 건 좋은데 아무리 십팔채의 우두머리라지만 도적떼 따위를 제압하는 게 지금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이광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
"호왕채의 대장이라는 녹림왕은 풍신류(風神流)일 테니까."
"......!!"
"가 보면 알겠지. 가자."
그리고 우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광을 따라서 호왕채에 올랐다. 호왕채의 거점은 굉장히 커서 산 아래에서도 건물이 눈에 띌 정도였다. 우리는 호왕채로 올라가면서 곳곳에서 호왕채 산적들이 습격해오는 걸 손쉽게 격퇴하며 호왕채에 도달했다.
꾸쾅
이광의 일 권이 호왕채의 정문을 때려부쉈다. 약 오십여 명이나 되는 산적패거리들이 이광을 발견하자 겁먹고 흠칫흠칫 놀랐다. 나는 그들이 기가 죽은 이유를 깨달았다.
' 이놈들 전부 무공을 익혔구나.'
무공도 뭣도 없는 산적들은 상대의 힘을 판단하는 안목이 없어서 되려 까불락거리며 덤빌 것이다. 그러나 호왕채의 산적들은 하나같이 정식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 듯 했으며 이류에서 일류급이 많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초절하기 그지없는 뇌신류의 힘을 일견에 알아보고 공포를 느낀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가막힌 일이었다. 일개 도적떼가 정식문파처럼 정식무공을 수련하고 있다니! 호왕채가 녹림십팔채의 우두머리인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광이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쓸데없는 살육은 하고싶지 않다. 호왕채의 우두머리는 나와라."
"나는 여기 있소."
저벅...
호랑이가죽을 입고 한 자루의 환도를 패용한 중년사내가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험상궂은 인상의 그 사내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이광. 내 목숨을 거두러 왔소?"
"네 태도에 달렸지."
그러자 그가 그 자리에 풀썩 꿇어앉으며 이광에게 외쳤다.
"이 녹림왕 구철(九撤), 간절히 빌겠소! 내 목숨으로 끝내 주시오. 이 놈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
이광은 말없이 그를 한동안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네놈이 풍신류의 명을 받고 그동안 근처의 도적들을 규합하며 관중 근처에서 나와 청룡무관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 뇌신류와 풍신류가 자웅을 결하는 날이 되었으니 너같은 끄나풀을 놔둘 이유는 없다."
"......!!"
나는 이광의 말을 듣고서야 뭔가 전모를 알 수 있었다.
그랬다.
관중에 유독 도적이나 산적이 들끓는 이유는, 풍신류가 이 근처에 뇌신류가 있다고 판단하고 감시역으로 녹림왕 구철을 파견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녹림왕 구철은 풍신류의 제자로써 그동안 청룡무관은 물론 관중 일대의 무림세력 동향을 암중에서 살피는 역할이었으리라.
녹림왕 구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발... 부탁이오. 나는 물론 풍신류의 제자로써 임무대로 한 것 뿐이지만, 여기 호왕채에 모인 놈들은 다들 사연이 있소. 우리는 함부로 아녀자와 약자를 약탈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살아갈 길을 찾아서 모였소. 제발 이 놈들의 목숨은 살려주시오!"
"......"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 풍신류에 이런 인간이 있다니?'
나는 그 동안 풍신류 호법사자를 포함해서 풍신류에는 인성이 개쓰레기같은 놈들만 가득한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부하를 살리려는 인간이 풍신류 소속이라니! 뭔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광은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구철. 그렇다면 풍신류를 버려라."
"......!!"
"그리고 뇌신류의 막내제자가 되어서 앞으로 우리를 따라라. 이를 약속할 수 있다면 살려 주겠다."
"그... 그건."
"네 실력은 예전에 본 적 있었다. 네가 우리 편이 된다면 호왕채 정도는 살려줄 수 있지."
그러자 녹림왕 구철은 침음성을 흘리며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던지, 그는 그 자리에 부복하며 이광에게 말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잠시 후 녹림왕 구철은 구배지례를 행하고 뇌신류 입문식을 치렀으며, 사공린과 재후에 이어서 뇌신류의 막내제자가 되었다. 나는 이 촌극같은 광경에 황당해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저 자가 막내라고?'
녹림왕 구철의 무공은 척 봐도 절정지경을 넘어서 초절정에 가까워보였다. 그의 내공으로 보아서 아마 풍신류의 달인일텐데, 단숨에 이광이 자기 부하로 끌어들인 것이다.
호왕채를 접수한 이광이 말했다.
"호왕채의 다른 놈들은 모두 하산시켜라. 전력에 도움이 안 될테니."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진소청의 질문에 이광이 살기섞인 미소를 지었다.
"뻔하잖나. 황산파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