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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반천맹의 밀사들에 의해 뇌신류의 개파대전 첩지가 돌려지는 것은 고작해야 사흘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관중은 물론 인근의 명문정파에 첩지가 돌려지고 정천맹에도 갔다. 물론 밀사들은 철저히 이중삼중으로 신분을 숨기며 표국등을 경유했기에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금력의 도움을 받아서 청룡무관은 간만에 새단장을 하고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며 곳곳에 인부(人夫)들이 작업을 했고 사람들이 앉을만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넓은 청룡무관이 더욱 넓게 확장하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뇌신류의 개파대전이 정식으로 열린 것은 첩지를 돌리고 정확히 열흘이 지나서였다.
나는 개파대전에서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새벽부터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윤광 지평 등과 함께 그들을 안내하며, 그들의 태양혈이 하나같이 불룩한 것을 확인했다.
' 확실히 무림의 고수들이군.'
사실 내가 자잘한 고수들 하나하나를 다 알고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저 초대목록에 적혀있는 명호와 그들의 방명록 친필을 보며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새벽부터 도착한 자들은 대개 속가(俗家)의 고수들이었고 조금 늦게 불가와 도가의 고수들이 도착했다. 제일 늦게 온 것은 다소 사파스러운 껄렁한 인물들이었다.
와글와글...
인원은 약 백 칠십여 명 정도가 모인 듯 했다. 이들 하나하나가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일반인을 모아도 이 정도를 모으기 힘들 텐데, 하물며 이들 중에는 정천맹의 명숙이나 무림에서 알아주는 절정고수들이 다수 섞여있는 것이다. 무림에서 이번 뇌신류의 개파대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잠시 후 정오가 되자 장내의 단상 위로 이광이 올라왔다. 그리고 은은한 내공을 넣어서 육합전성으로 장내에 말했다.
[ 이렇게 우리 뇌신류의 개파대전에 모여주신 강호 동도 여러분께 이 삼절 이광, 크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이광이 간단하게 개회사를 말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장내에서 크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감사할 것 까지야, 이 파렴치한 악적(惡敵)!"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에 이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뇌신류 제자들과 장내 고수들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백의를 입고 있는 20대의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등에 검을 빗겨찬 것으로 보아 검문(劍門) 소속인 듯 했다. 그녀는 등 뒤의 검을 뽑아들며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여러분! 더 기다릴 필요 있습니까? 사악한 백련교의 끄나풀, 뇌신류를 쳐서 강호정의를 실현합시다!"
"옳소!"
스으윽
그 말을 신호로 갑자기 장내에서 십여 명의 인물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대개 여인과 같은 문파, 혹은 상당한 일류고수들로 보였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나와서 단상 앞에 서서 이광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뇌신류! 무고한 자를 해치고 사악한 야욕을 드러내놓고도 개파대전을 열다니 뻔뻔하구나...!! 이 자리에서 없애 주마!"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 으으, 저 여자 미쳤나?'
당연히 나는 그 십여 명의 군웅들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금의위 수십 명을 혼자서 뇌공섬으로 척살하는 이광이, 저런 군웅 따위에게 겁먹을 리가 없는 것이다. 되려 웃으면서 쳐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광은 표정변화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 본인은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우리 뇌신류가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오?]
"몰라서 하는 말인가? 네놈들은 청류문(淸流門), 배장문(倍張門), 신음문(神音門)의 모든 인간을 살해하고 흔적을 은폐하려 했다! 그것도 모자라 갓난아이와 임산부까지 죽이다니 이 극악무도한 놈들!!"
그들이 언급하는 문파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문파였다. 아마 뇌신류의 세력권 밖에서 풍신류가 흉계를 꾸민 듯 싶었다.
"죽여라!!"
"죽여버려!!"
십여 명의 군웅들이 악을 쓰자, 장내에 모여있던 무림인들의 얼굴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 중 반수 이상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지만 [뇌신류의 악행]이 성토되자 뇌신류를 적으로써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의 이광이라면 폭발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 잘 모르겠군.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소?]
"증거라면 있소."
스윽
자리에서 서너 명의 고수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황산파의 문인들이었고 황산파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있던 황산파의 장로가 장내에 포권을 하고는 말했다.
"본인은 황산파의 냉천검(冷天劍) 공재라 하오. 이번 일에 장문인의 언질을 받고 찾아왔소."
"오오...!!"
"구파일방의 장로가...!!"
군웅들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광을 포함한 뇌신류 제자들은 별반 안색의 변화없이 냉천검 공재를 주시했다. 냉천검 공재는 품 속에서 왠 은패를 꺼내더니 나직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황산은령(黃山銀領)으로써 황산파와 장문의 권위를 담고있다 봐도 좋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드리오."
"어서 말해 주시오!"
"우리 황산파는 정천맹(正天盟)의 특별 조사위와 함께 참혹한 사변이 벌어진 세 문파를 조사했소. 그리고 그 결과, 수많은 시체에서 뇌흔(雷痕)이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었소."
"뇌흔이라니?"
냉천검 공재는 단상 위의 이광을 노려보며 말했다.
"바로 저주받을 뇌신류의 달인이 뇌령(雷靈)이라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경우 나타나는 현상이지. 강력한 뇌령지기로 상처를 태워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공의 흔적이오!"
물론 뇌령은 실재하는 경지이고, 뇌흔도 실제로 존재하는 기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뇌신류의 고수는 자신이 원할 때만 뇌흔을 남길 수 있다는 차이지만.
' 정말 필요한 만큼 사실을 섞어서 정보를 써먹는군.'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나오면 부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놀란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참화의 악역이라는 것에 놀라는 게 아니라, 무공으로 뇌령지기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왠만한 정종내공으로도 오행지기나 자연력을 다루는 건 굉장히 심후한 경지에서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광이 싸늘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 대단하군. 뇌신류의 달인들도 뇌령이라는 경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구파일방에서 일견에 그런 중대한 비밀까지 알아보실 수가 있나?]
이광의 비꼬는 말에 냉천검 공재가 대답했다.
"그리 말할 줄 알았소. 하지만 우리는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 백련교에 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는 분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 분이 공증해 주셨소. 그러므로 확실하다고 생각하오."
[ 그게 누구요?]
"밝힐 수 없소. 왜냐하면 그분의 신변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이지. 허나 정천맹주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그 공증이 확실하다는 걸 말해두겠소."
그러자 냉천검 공재 옆에 앉아 있던 깐깐해 보이는 중년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의 말을 이 남궁 모가 동의하겠소."
"오오...!!"
"정천맹의 군사(軍師) 남궁선생(南宮先生)이다...!!"
중인들이 남궁선생이 나서자 탄성을 터뜨렸다.
남궁선생!
그는 구파일방과 정파의 연맹체인 정천맹의 군사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출신은 남궁세가였으나 어렸을 적부터 화산파에 입문해서 화산파의 진산무공을 수련했으며 일신의 지략과 무위가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입장을 조율해주는 뛰어난 정치꾼이기도 했다. 본명은 알려져있지 않았다.
삽시간에 몰리는 상황이 되자 나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기분이 더럽군.'
지금 냉천검 공재가 주장하는 건 사실 확실한 근거가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확실한 증명을 증거하는 자'를 못 밝히는 시점에서 이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정천맹과 황산파라는 권위를 앞세워서 마치 그게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매도당하니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경험을 해본 일은 달리 없었다. 강호의 무림인들에게 단숨에 죽일 놈 취급을 당하고 말빨에서 밀리는 일, 그것도 강호공적으로 지명되는 일은 쉽게 겪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표정관리를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자 내 옆에 서 있던 진소청이 빙긋 웃으며 내게 전음을 보냈다.
[ 표정 풀어, 사제. 다 예상한 거 아닌가.]
[ 그렇지만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다 때려죽이고 싶군요.]
[ 물론 사제라면 혼자서도 가능하겠지만 계획대로 하기를 기다립세.]
[ 알겠습니다.]
나는 진소청에게 투정을 좀 부리고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사실 진소청에게도 얼마 전에 전생의 비밀이 본의아니게 누설되었으므로,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좀 나눈 바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지만 그에게 마음을 열기로 한 것이다.
잠시 후 이광이 말했다.
[ 그렇다면 그대들은 우리가 무엇때문에 중요한 개파대전을 앞두고 그런 무도한 행각을 벌인 거라고 생각하오?]
"그야 뻔한 거 아니겠소. 비밀리에 세력확장에 방해가 될 문파들을 제거하면서 자신들의 엽기적인 살인욕구를 충족시킨 거겠지!"
[ 청류문은 그렇다 치고 배장문과 신음문은 여기서 삼백 리도 넘게 떨어져 있는 문파인데 말이오?]
"확실한 건 희생자들의 시신에서 당신네 무공의 흔적이 나왔다는 거요. 이 사실이 있는 한 당신들은 희생자들의 목숨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여기서 '무엇으로?'라고 반문하는 순간 뇌신류의 목숨이라고 대꾸하며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이광은 당연스럽게도 그런 흐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계속해서 냉천검 공재가 전투분위기로 몰아가는 걸 유들유들하게 받아쳤다.
[ 직접 시체라도 보지 않는 한 믿을 수가 없소. 당신들은 군중을 섣불리 호도하지 마시오. 정천맹이라는 한 마디면 다 되는 줄 아시오?]
"뭐라..."
[ 확실히 말해서 나는 당신이 소설가(小說家)이거나 광증이 있는 불쌍한 자인지 걱정이 될 정도요. 그 뇌흔이라는 걸 군웅 앞에서 확실히 보여줄 수 없는 한 그런 어처구니없는 매도는 용납하지 않겠소.]
그러자 남궁선생이 나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이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은 정천맹의 권위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거라고 봐도 되겠지?"
[ 권위가 있으면, 사실을 증명하지 않고 그냥 막 우겨도 진실이 되는 건지부터 묻고 싶군.]
"......"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 이광 저 인간 말을 왜 저렇게 잘 해?'
미리 준비를 해 놨겠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받아치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가 권위로 찍어누르려 할 때마다 그럴듯하게 군중들을 다시 돌려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이광이 상대방 논리의 헛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고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언변이었다. 이광은 무력만 앞세우는 근육바보가 아니라 영악한 면모가 있는 간웅인 것이다.
그 때였다.
"시체라면 여기에 있소."
어디선가 황산파 무인들이 나타나서는 참혹한 시신을 가지고 장내에 나타났다. 시신은 특수한 수법으로 얼려졌는지 아직 부패하지 않고 서리가 껴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메고 온 무인들은 그 시신을 장내에 내려놓았고, 냉천검 공재는 이때다 싶어서 크게 소리지르며 말했다.
"이 시체들을 보시오! 뇌흔이 치명상을 정확히 가르고 있소! 이래도 발뺌할 셈이오?"
역시 이 정도의 준비는 해 온 듯 했다.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 아무리 그래도 남의 개파대전에 시체를 갖고 오는 건 어디의 양아치들이냐?'
생각할수록 풍신류 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정천맹주는 대체 뭘 하길래 이런 양아치들에게 설득당한건지 의문스러웠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이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발뺌이라.."
그 때였다. 이광이 은연중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은밀한 전음은 냉천검 공재에게 향한 듯, 침을 튀기며 군중을 선동하던 그는 갑자기 벼락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공재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비오듯이 흘리기 시작했다.
"......"
군중들이 난데없이 냉천검 공재가 굳어버리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웅성거렸다. 이광이 이제는 육합전성을 쓰지 않고 장내에 울리는 사자후를 담아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본 유파의 개파대전은 함부로 흉한 시체를 들이는 무뢰배들과 함께 진행할 수가 없소. 나는 뇌신류의 명예를 걸고 저 자들과 결판을 지어서 개파대전을 잘 마무리해야겠소. 저 미치광이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은 떠나주시고, 그렇지 않은 선한 분들은 남아 주시길 바라겠소."
웅성웅성
무림인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누며 수군거리는 기색이었다. 냉천검 공재가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꼼짝없이 이 자리에 있는 백수십 명의 고수들과 싸워야 할 판이었는데 애매하게 끝난 것이다. 냉천검 공재 옆에 서 있던 남궁선생이 질책하듯 그에게 외쳤다.
"이보시오! 이야기가 다르잖소! 왜 하다 마는거요?!"
"......"
냉천검 공재는 대답하지 않고 땀만 주륵주륵 흘린 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있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이 걱정스러워서 그를 부축하자 힘없이 딸려들어가서 의자에 앉혀졌다. 그 모습은 마치 봉제인형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 무슨 일이지?'
나는 의아스러워서 그를 살폈지만 특별한 외상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장내의 군웅들 중에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우르르...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황산파와 정천맹 소속으로 보이는 십여 명의 인물들과 원래부터 뇌신류에 적의를 갖고 있던 듯한 무림고수들 십여 명이 남았다. 그리고 아직도 사태를 관망하려는 열 서너명의 무림인들이 남았다. 말하자면 칠할 이상의 무림인들이 빠져나가버린 셈이었다.
남궁선생은 계산과는 많이 다르다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의 계산으로는 선동에 성공해서 무림인들 전원과 합공하는 게 전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되려 이광에게 몰살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이광이 차분하게 단상 앞에 있는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정말로 우리 뇌신류가 그 참혹한 비극을 만들어냈다 생각하시오?"
"두 말하면 잔소리! 이 자리를 언변으로 무마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악적아!"
"으음..."
이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 그렇다면 비극에 몇 줄 더해보도록 하지."
"뭣..."
퍼벙!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광의 손이 보이지도 않게 움직이고, 그의 손에 창이 잡히고, 단상 앞에 시위하듯 서 있던 무림인들의 목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그들 중에는 여자 무림인도 있었는데 전혀 봐주지 않고 순식간에 몰살시켜버린 것이다.
"......?"
상황이 파악이 안 되었는지 황산파와 정천맹의 고수들은 잠시 눈을 껌벅이는 기색이었다. 제일 먼저 파악한 것은 남궁선생으로써, 그는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잔뜩 낭패한 표정을 짓더니 급히 이광에게 외쳤다.
"이... 이광! 잠시! 잠시 기다리시오! 이건 그대들에게 자살행위..."
이광이 남궁선생의 말을 끊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남궁선생. 하나 말해두자면 나는 당신이 원래 싫었소. 내 친우인 위지혼에게 알랑방귀 뀌면서도 뒤로는 정천맹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오대세가의 뜻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간신배."
"어... 그... 그게..."
이광은 맹수의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오늘같은 날이 와서 정말 속시원하구나, 쓰레기야."
푸콰콱
"끄아악!!"
이광은 말이 끝나는 순간 달려들어서 란(欄)과 찰(刹)의 수법을 섞어서 순식간에 남궁선생의 몸뚱이를 수십 조각으로 터뜨려버렸다. 남궁선생도 나름대로 절정지경인 것 같았지만 이광에게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일 초만에 살해당한 것이다. 남궁선생의 호위역 무사들이 급히 이광에게 덤볐지만 이광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창을 휘둘렀다.
슈콱!
"끄아아아악..."
"살려..."
콰과광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천맹의 무인 십여 명은 말 그대로 도살당해 버렸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관전자들은 어버버하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공포와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황산파 장로 냉천검 공재와 황산파 무인들, 그리고 이번 일을 구경하려고 남은 일반 무림인들 뿐이었다. 힐끔 장내를 훑어보던 이광은 냉천검 공재에게 걸어가서 그 앞에 섰다.
"순순히 닥쳐 줬으니, 네 직계제자 두 명은 살려주겠다. 지목해라."
"......"
냉천검 공재는 벌벌 떨며 자기 옆에 서 있던 제자 두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광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파앗
콰지직
퍼벅
"아아아아아악!!"
다시 살육극이 벌어지자 냉천검 공재는 물론 두 명의 황산파 제자를 제외한 모든 황산파 무인들이 전멸해 버렸다. 순식간에 서른 명 가까이 살육해버린 이광은 옷에 한 방울도 피가 안 묻어 있었다.
"아... 아아아..."
"스승님..."
황산파 제자 두 명은 울부짖으며 공재의 처참한 시신에 매달려 있었다. 이광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 스승은 아가리를 닥치는 대신에 너희의 목숨을 살렸다. 네놈들은 오늘 스승의 죽음을 잊지 말고 황산에 평생 처박혀 있도록 해라."
그랬다.
이광은 냉천검 공재나 남궁선생이 실컷 떠들어대게 놔두다가, 중요한 순간에 무형지기를 뻗쳐서 냉천검 공재의 심령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닥치고 있으면 제자만은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협박해버린 듯 했다.
"......"
제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서 자리를 떠났다. 이광은 조소를 흘리며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관전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어서 나가시오. 이 자리는 곧 전장이 될테니."
"히이익."
그들은 강호고수의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이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광이 무서워서 여태 발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피바다 한가운데에서 이광이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인가."
"그렇습니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이 시작됐겠지요."
단상 뒤에 있던 망량이 오화칠금선을 부치며 걸어나왔다. 그는 피바다 속의 이광을 보며 태연히 말했다.
"도중에 버거우시면 언제든 백웅에게 뭉치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하, 용비천이 나서기 전에는 그럴 일이 없을 걸세."
"좋군요."
이미 이 근처는 정천맹의 주요 무력단체와 각지의 고수들, 그리고 온갖 용병들이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냉천검 공재와 남궁선생은 장내의 고수들을 부추겨서 우리에게 덤비게 하고 그틈을 타서 빠져나갈 셈이었겠지만 이광이 대놓고 학살에 나서는 바람에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미호가 영언을 보내왔다.
[ 오늘 정말 재밌겠구나! 몇 명이나 죽일까?]
"음..."
나는 오늘 뇌신류의 목표가 개파대전인 척 하고 대살육을 벌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시체로 산을 쌓겠지..."
요란하면 요란할수록 좋다.
악명이라도 좋다.
그래야 뇌신류의 달인들이 합류할 테니까!
정신나간 계획 같았지만, 이건 망량이 백련교주에게 중단요청을 해놓은 데다가 뇌신류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한 것이었다. 동시에 천하의 명분을 거머쥐고 거들먹거리는 정천맹에 한방 먹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보였다.
정천맹과 대화로 풀 단계가 지났다면 남은 건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 뿐이다. 정천맹의 은원 따위를 두려워해서야 백련교와는 싸울 수가 없으니, 차라리 힘으로 인정하게 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뇌신류가 강호에서 살아가는 법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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