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64화 (16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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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三皇五帝)

그저 뇌신류가 청룡무관에서 단체수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하루하루의 일정은 매우 빡빡했다. 나는 새벽에 무조건 제일 먼저 기상해서 머릿속에서 장삼봉의 심득을 쥐어짜서 필사적으로 먼저 수련하고 있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은 반 시진 후에 일어나서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를 중앙에 두고 원진(圓陣)처럼 둘러싼 채 약 이 장 거리를 두고 연무(練武)가 개시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왜 이런 방식인지 궁금했으나, 약 사흘째가 되어서 사공린과 재후가 형(形)에 익숙해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진을 둘러싼 사람들은 무공에 몰입해서 계속해서 검술의 초식과 의미를 생각하다가, 정오가 될 때 모여서 서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토론에 참여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나보다 분명히 경지가 낮을 사공린이나 재후도 굉장히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는 것이었다.

진소청, 극호, 이광, 사공린, 재후.

이들은 모두가 최소한 천에 하나 있을까말까한 무술의 기재들이었고 그들이 무공을 익히면서 느끼는 감각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나는 굴공참과 천축검의 한 초식과 변초를 펼칠 때마다 그들의 영감을 공유하면서 토론하는 과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 굉장하다...'

나같으면 그냥 초식만 주워섬기고 말 것을, 이야기가 한 순을 돌고 나자 어느 새 심의(深意)에 접근해 있었다. 그리고 초식에 숨겨져 있던 다음 초식과의 연계나 파생절초까지 이야기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팽팽 도는 것을 느꼈고 계속해서 그 토론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은 원래 혼자 익히는 것보다 여럿이 익히는 게 더욱 빨랐고, 하물며 타고난 기재들이 성과를 공유한다면 그 이상 효율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수련을 시작한지 7주야쯤 되자 내가 혼자서 하면 적어도 몇 년이나 걸릴 정도의 무술연구가 진척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헉... 헉..."

다만 그때쯤 내 체력은 엉망이 되다못해 걸레처럼 되어 있었다. 십만 번 베기도 버텨낸 체력과 정신력이지만 단순한 휘두르기와 연무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몸을 쓰면서 정신력도 함께 소모하므로 몇 배나 지쳐버리게 되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시 나무 밑에서 쉬고 있자 이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라!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윽... 죄송합니다."

"휴식시간 반 시진 주겠다. 그때까지 좌공으로 체력을 최대한 채워라."

"네."

"이 수련이 어렵다는 건 미리 말해 두었다. 네 근성을 믿는다."

이광이 저렇게 말하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체력을 회복하며 내공의 잠력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희미한 눈으로 저쪽에서 계속 수련을 하고 있는 사공린과 재후를 보았다.

' 엄청난 성장속도구나...'

그들은 무당파의 심득을 체득(體得)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겨우 7주야만에 무공이 상승할 리는 없겠지만, 그들은 벌써 껍질을 깨고 성장한 모양이었다. 자기 스스로 무공의 현기를 찾아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성(悟性)이라서 소름이 돋았다.

힘들다.

몸과 마음이 힘들지만, 특히 힘든 것은 마음이다. 나같은 흙반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기재들 사이에서 무공을 연마하려니 절로 위축되고 괴로웠다. 그나마 청룡무관에서는 그저 공개하고 연구하는 분위기였지만 여기서는 촌음을 아껴가며 격렬하게 토론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재능이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비참함이 내 마음을 차가운 빗방울처럼 쓸어나갔다. 지금까지 의지로 가리고 있었던 비천한 재능을 다시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로부터 다시 칠 주야가 지났을 때 말도 못할 정도로 피폐해져서 야밤중에 바위 사이에 틀어박혀 있었다.

"......"

분명히 성과는 좋다. 난 벌써 혼자서라면 5년 넘게 걸릴 연구가 기재들에 의해 단축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수십 배가 넘는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짜증나고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는 왜 이렇게 재능이 없는 걸까?

지금까지 노력을 안 한 게 아니다. 노력을 안 해서 뒤쳐진 건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이번 전생에서도 나는 틈만 나면 무공을 수련하며 노력을 했다. 그런데 막상 타인의 재능을 빌려서 연구하는 단계가 되자 자괴감이 폭포처럼 밀려들어왔다. 옥석(玉石)이 명백히 가려졌기 때문이다.

미호가 보고싶었다.

미호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낄낄대고 싶었다.

물흐르듯이 망량의 말에만 따르면서 전생을 살아가고 싶다.

"... 아냐."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망량을 믿기 때문이다.

망량이 왜 다 알면서도 나를 지옥같은 환경에 몰아넣었겠는가?

그것은 내가 이 열등감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대의(大義)를 위해서 인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망량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면 나 또한 그에게 보답해야만 했다. 그리고 하루바삐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거센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찔끔 나오던 눈물을 훑어냈다. 목이 칼칼해서 개울물을 벌컥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과거 진소청이 내게 해 줬던 말을 중얼거렸다.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

남자는 마땅히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늘 내게 좋은 일만 있을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는 힘든 일도 있다. 큰 일을 하고자 하면 그건 당연하다.

이게 내게 부과된 시련이라면, 이것도 넘어서고 말겠다.

그리고 약 두 달이 지났을 때, 망량이 사원을 찾아왔다.

해가 중천에 떠서 오늘도 다같이 무공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망량은 이광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이광 님. 백련교의 사자가 왔다 갔습니다."

이광은 묵상하며 굴공참의 검초를 연구하던 중이었다. 그는 망량의 말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뭐라고 하던가?"

"나흘 후 신시(申時)에 황산파에서 보자고 하더군요."

"황산파? 어째서 놈들이 구파일방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거지?"

이광이 의문스러워하자 망량이 씁쓸하게 말했다.

"황산파는 풍신류의 중원지부입니다. 모르셨군요."

"......!!"

이광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거세게 외쳤다.

"그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격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망량도 그 동안 놀고있던 게 아니었는지 태연하게 절정의 내공기세로 흘려내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말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뇌신류의 개파를 앞두고 백련교와 협상하는 이 중요한 때에 풍신류의 중원거점을 부수러 가시려 하십니까?"

"그건..."

"중요한 건 호법사자이지 잔챙이들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아실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광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러나 은근한 눈빛으로 망량을 쏘아보는 걸 보면, 약간 불신의 기색이 생긴 듯 했다. 나는 그런 이광이 약간 걱정되었지만 당장 그보다는 백련교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잠시 후 이광이 말했다.

"좋네. 놈들은 누가 사절로 나온다고 하던가?"

"백련교주가 3인의 호법사자를 모두 대동하고 나올 것입니다."

"......!!"

"중원무림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 그 자리에 모두 나오는 것이죠."

망량이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좌중의 안색은 모두 굳어 있었다.

백련교주와 호법사자!

현재 그 4명이 중원에 나올 경우 그 어떤 존재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넷 중 한 명의 힘이 구파일방 전체를 뒤엎을 수 있을 정도다. 하물며 호법사자 셋이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있다는 백련교주의 역량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광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헛. 할망구가 너무 일을 잘해 주었군. 설마 원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백련교주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 아니. 나도 내 주제는 알고 있네. 아마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의외로 순순히 현실을 인정하는 이광이었다. 그는 냉철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백웅 덕에 절세검초를 연마하면서 그간 실력이 늘었네. 만일 일이 잘못되어도 백련교주에게 한 칼을 먹이고 죽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네."

"좋군요. 한결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가볍게 대꾸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날 무력을 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백련교주가 그렇게 일을 쪼잔하게 처리하지는 않겠지요. 그는 아마 정말로 뇌신류의 개파를 인정하러 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게 기뻐하는 반응이라도 보이라는 건가?"

이광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망량이 섭선을 접어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기뻐할 일이지요. 우리는 그 때 실리를 하나 더 챙길 수 있으니까요."

"실리라니?"

"그 날 우선 뇌신류의 개파약속을 잡아놓고, 빌미를 잡아서 비무를 벌일 것입니다. 물론 이광 님이나 진소청 님이 나가셔서 호법사자와 한 수를 겨루시게 될 겁니다."

"......!!"

"물론 친선비무지요."

호법사자와의 비무라니!

뜻밖의 소리에 모여있던 뇌신류 제자들이 놀랐다. 그러나 이광만큼은 놀라지 않고 무덤덤하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생각하던 이광이 말했다.

"호법사자의 실력을 알아볼 기회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광 님도 구체적으로는 호법사자와 그들이 소유한 천령단의 위력을 잘 모르지 않으십니까? 고수의 경지로 갈수록 상대의 수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말이 맞네. 만일에 호법사자의 실력과 초수를 알아볼 수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걸세."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광이 말했다.

"하지만 수신류(水神流) 만큼은 피해주게. 가능하면 풍신류와 겨루고 싶군."

"알고 있습니다. 수신류의 호법사자는 극히 위험한 자니까요."

"좋아. 그럼 백웅..."

이광이 나를 돌아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산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비등으로 순식간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럼 하루 전까지는 계속해서 무예를 갈고닦도록 하지."

"예."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망량이 나를 따로 불렀다. 나는 망량과 오두막 앞에서 이야기했다.

"백웅. 수련은 좀 어땠소? 집중에 방해될 것 같아서 따로 찾지는 않았는데 성과가 있소?"

나는 망량의 물음에 쓰게 웃었다.

"상당히 괴로웠소."

"음... 미안하오. 예상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소."

"아니오.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면 감수해야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굴공참과 천축검을 그저 곧이곧대로 썼을 뿐이지만, 이제는 파생절초와 변초를 알아내서 하나의 검술(劍術)로 정립해가는 중이오. 진소청은 이미 어느정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고 뇌신류의 비기와 접목시킨 듯 하오."

"놀랍군... 고작 두 달이었는데 그렇게 발전했다는 건가."

"천재가 다섯 명이나 모였으니까."

동시에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과 짜증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모여있던 5인은 딱히 나를 타박하거나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배려해 줄 때마다 내가 불편했다. 그 재질의 부족을 억지로 이겨내면서 밤잠도 거의 자지 않고 버텨내 온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전에 없이 2달동안 엄청난 수련밀도를 거쳤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이제 진무칠절경(眞武七絶經)과 현천오신결(玄天五神決), 태극요지유검(太極曜志柳劍), 칠성둔영(七星遁影), 무쌍패(無雙覇)에 입문할 단계가 된 듯 하오."

"......"

무공 이름을 들은 망량이 질린 듯 말했다.

"대체 그게 뭐요? 하나하나가 절세무공이란 말이오?"

"그런 것 같소."

"장삼봉 도인은 정말 괴물같은 도인이었군... 그거만 제대로 다 익혀도 당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고수가 될 거요."

"하나도 제대로 익히기 힘들다는 게 문제지만."

하나하나를 제대로 익히려면 혼자서라면 백 년 동안 파고들어 수련만 해도 부족할 것이다. 정파 사상 최고의 기인이 남긴 심득이기 때문이다. 물론 검선 여동빈이야 숨쉬는 것처럼 바로 체득했지만, 그 또한 대라신선이자 투선이니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졸리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무튼 늦어도 일 년이면 굴공참과 천축검에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을 거요. 기대해도 좋소."

"... 백웅."

"왜 그러시오?"

"내가 늘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소?"

망량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지혜를 믿소. 그거면 됐지."

"고맙소."

그리고 약속의 때가 되어서 나흘 후, 우리는 진시(辰時)까지 편하게 수면을 취하고 휴식한 뒤, 정오가 되자 비등과 목갑을 이용해서 황산으로 날아갔다. 내가 자주 다니던 산봉우리이자 황산파에 가까운 곳에 도착하자 산 가득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뇌신류의 고수들과 망량, 미호는 그 안개를 걷어내며 황산파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인 신시까지는 꽤 많이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미리 도착해서 적의 본거지인 황산파를 살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황산파가 있는 봉우리에 도착하자 황산파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 문 앞에 서 있던 황산파의 제자들이 공손히 우리에게 포권을 했다.

"뇌신류 고수들을 뵙니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풍신류와 뇌신류는 원수지간인데, 풍신류의 중원지부라 할 수 있는 황산파 제자들이 이렇게 공손하게 나올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뇌신류의 폭급한 성격을 알고 있는 풍신류이기에 초장부터 자극하지 않고 탐색하려 드는거라 볼 수도 있었다.

우리가 황산파 문인들을 따라가자 거대한 접객당이 나왔다. 도저히 산속의 문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한 대전(大殿)이었고, 그 대전의 맞은 편에는 한 장년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 장년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광에게 다가와서 포권을 했다.

"이렇게 뵈어서 반갑소. 나는 황산파의 장문인인 도룡신검(屠龍神劍) 용중일이라 하오."

도룡신검 용중일!

그는 혜성처럼 나타난 초절정고수로써 구파일방 황산파의 장문인이었다. 그의 검기가 춤추면 용조차도 썰어버린다고 하는 가공할 환검(幻劍)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산파 일대에 있던 사파나 마두들은 모조리 용중일의 손에 척결된 바가 있었다. 구파일방 내에서도 손꼽히는 검의 명인이기도 했다.

용중일의 인사를 받은 이광이 침음성을 흘렸다.

"음... 이광이라 하오. 나도 당신의 명성은 많이 들었소."

"우리 문파의 선대(先代)에 은원이 있으나, 오늘만큼은 접어두었으면 하오. 경사스러운 날인데다가 교주께서 친히 왕림하시니 말이오."

"유념하겠소."

이광은 의외로 도발같은 걸 하지 않고 순순히 용중일의 인사를 받아넘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심한 표정속에는 섬뜩한 살의가 깃들어 있어서, 나는 이광이 자신의 폭급한 성질을 잘 참아내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마주대하고 있는 용중일도 그런 이광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

그리고 가벼운 다과가 상에 차려지고 뇌신류의 고수들은 자리에 앉았다. 다과나 음식은 하나같이 일류요리사가 만든 듯 뛰어난 것이었지만, 우리 중 그것을 입에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지에서 음식을 먹는 바보짓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내 옆에 앉아있던 망량이 말했다.

"오늘이 정말 큰 고비가 될 것이오."

"그렇겠군."

나 또한 그의 말에 동감했다.

잠시 후 악사들이 나와서 가벼운 연주로 흥을 돋우는 듯 하다가, 음률이 갈수록 단조로워지고 엄숙해 졌다. 종래에는 아쟁소리조차 멈추고 느린 북소리만이 들렸다.

둥.

둥.

한참 후, 북조리가 잦아들자 황산파의 장로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백련교주 납시오."

사아앗...

그와 동시에 내 눈은 저 너머의 출입구를 향했다.

이제 바로 저기에서 천하제일고수인 백련교주가 나오는 것이다.

두둥

먼저 흑호가면, 은빛 여우가면, 그리고 금빛 용가면을 쓴 호법사자들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발 너머로 어떤 존재가 천천히 자리에 앉는 기색이 느껴졌다. 별로 고수같은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순간 장내에 있던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발 너머에 있는 누군가.

그가 바로 백련교주였다.

침묵에 빠진 장내에서 처음으로 백련교주의 목소리가 장내에 육합전성으로 울려퍼졌다.

[ 오랜만일세, 뇌신류.]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목소리였다. 확실한 것은 그가 육합전성을 쓸 정도로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이광은 조금이라도 더 백련교주를 파악하려는지 목소리를 분석하려 애쓰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교주."

[ 독립(獨立)을 원하는가?]

교주는 가타부타 돌려말하지 않고 직접 물어왔다. 이광은 뜻밖인 듯 했으나 그다지 표정변화 없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이오. 우리 뇌신류는 더 이상 백련교의 하위무류로 남지 않고 하나의 유파로 개파를 선언하는 바이오."

[ 그 댓가는 괴질의 치유단서, 맞는가?]

"달라진 건 없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반 각이 흐른 후 백련교주가 대답했다.

[ 뇌신류의 독립과 개파를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 대답에 이어진 조건에 모든 뇌신류 고수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 단, 뇌신류 최종오의를 너희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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